[말세아리] 새

황제는 금발의 소녀가 앵무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빛깔이 곱고 예쁜 소리를 내며 사람을 따라하는 것. 백 년이었다. 황제가 나라를 통치해온 백 년 동안 소녀보다 외모가 화려하거나 기이한 재주를 가진 자는 많았고, 황제는 이번 만찬회에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진상된 소녀가 썩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신에 소녀를 몇 번 골렸다. 놀란 새가 더 예쁜 소리를 내기를 기대하면서 새장에 나뭇가지를 쑤셔 넣는 아이처럼 짓궂게 소녀를 놀렸다. 그 정도 대답인가? 그대는 마치 새장 안의 예쁜 새 같군. 소녀는 울지도 않았고 얼굴을 붉히며 도망치지도 않았다. 얼굴을 들어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이 잔잔한 바다 같았다. 정말 사람을 기쁘게 할 줄 모르는 소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대는 무엇을 위해 이 만찬회에 있지? 조부의 지시인가?”

“그것은 계기이지만 목적은 아닙니다, 폐하.”

“그렇다면, 목적은 무엇이라고 말할 참인가?”

“폐하께서 성립하신 이 나라의 질서입니다. 먼 옛날 로데 공화국의 변호단에서 시작하여 이 제국까지 이어져 온, 제가 경탄해 마지않는 역사의 주인을 뵙고 싶었습니다.”

그 말을 하고서야 아리스텔리아는 새처럼 고운 소리로 웃었다.

“외람된 말일지 모르나 저는 초면임에도 폐하가 낯설지 않습니다. 그간 제가 역사를 알아 가며 느낀 대로의 분이시니, 제 열정이 헛되지는 않았던 듯합니다. 폐하의 말씀대로 제가 정말로 새였다면 좋았을 거예요. 아주 높이 날아서 폐하께서 이룩하신 제국을 전부 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는 모두가 두려워하는 불사황제의 앞에서 감히 침착한 이 소녀가 마음에 꺼림칙했고, 몇 번의 만찬회와 대화 후에는 마음에 크게 데었다. 처음이었다. 여자의 입을 맞추는 것이 심장이 뛰는 일임을 알았다. 손과 손을 나란히 잡고 걷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워질 수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날아갈 것처럼 가냘프고 날개를 단 것처럼 고와서, 마르세우스는 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아리스텔리아를 위한 새장을 지었다. 영원을 약속하는 축복의 날에, 모두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불사황제는 영화로운 신이었고 아리스텔리아는 그에게 그러한 신격을 부여한 여신이었다. 마르세우스는 가장 높은 자리를 여신에게 진상했다. 여신은 고운 눈동자로 제국의 만물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던 마르세우스를 알지 못하고도 이해했고 제국민의 마음도 이해했다. 그녀는 지고의 황제와 민심 사이의 통로가 되었다. 그것이 마르세우스에게 축복이었고 또한 끝나지 않는 불안이었다. 마르세우스는 아리스텔리아가 날아갈까 두려워 가장 높은 자리에 여신을 안치해 두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첨탑 안의 아리스텔리아가 마르세우스에게 말했다.

“마르세우스, 새가 기르고 싶어요.”

첨탑 안의 새장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외로움을 잘 타는 모란앵무, 깃털이 화려한 왕관앵무, 사람의 말을 따라하는 금강앵무. 아리스텔리아는 새를 밤마다 한 마리씩 첨탑 밖으로 날려보냈다. 그녀가 새를 날려보낸 후에 마르세우스는 창문의 휘장을 내렸다. 휘장의 주름이 여자의 이마에 간 주름을 닮았다. 침대 위에 걸터앉은 아리스텔리아는 침실 구석에 쌓이고 쌓인 빈 새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르세우스는 늙어서 늘어진 여자의 허벅다리 위에 흰 얼굴을 묻었다.

“미안해, 아리스텔리아.”

“괜찮아요, 마르세우스.”

아리스텔리아는 울지도 않았고 얼굴을 붉히며 화내지도 않았고 그저 바다처럼 잔잔한 눈으로 마르세우스를 바라보며 웃었다.

“나는 당신을 이해해요.”

주름진 손이 유리처럼 투명한 마르세우스의 뺨을 쓰다듬었다.

“두렵지요? 다시 혼자가 되는 것이. 가엾은 사람. 고독한 사람. 내 상태를 계속 숨기세요. 새장 안의 새들은 가두어 둔 덕분에 이렇게 오래도록 곱지 않은가요. 나는 당신의 옆에서 불멸의 황비로 남을 거예요. 괜찮아요.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하고 있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니까.”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아리스텔리아는 마르세우스의 품에서 작은 새처럼 가냘픈 숨을 쉬다가 그 숨을 멈췄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아리스텔리아가 말했다. 폐하, 제발 이런 짓은 그만둬 주세요. 더욱 젊어진 아리스텔리아가 덧붙였다.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요. 변함없이 푸른 아리스텔리아의 눈이 말했다. 나는 당신을 경멸합니다, 당신을 저주해요.

그녀를 떠나보냈던 첨탑의 창문에서, 마르세우스는 수백 마리의 아리스텔리아를 밖으로 날려보냈다. 제국이 영속하고 전쟁이 계속되던 중의 어느 날 또 한 마리의 아리스텔리아가 창밖으로 떨어졌다. 그제야 마르세우스는 생각한다. 처음의 아리스텔리아가 날려보냈던 그 새들은 어떻게 됐을까. 새장 속에서 길들여진 새들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모두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새를 날려보냈다.

아리스텔리아, 실은 당신은 알고 있던 게 아닐까. 다시 태어날 아리스텔리아는 결코 당신일 수 없다는 것. 나는 영원하고 당신은 죽는다는 것. 그래서 당신은 나를 이렇게 새장 안에 영원히 가두었던 게 아닐까.

[여캐빌 합작] 벨린다x빌헬름

군인이지만 그렇게 대범한 성품은 되지 못했다. 빌헬름 쿠르트의 출신지는 브론하이드 성으로부터는 한참 떨어진 왕국 서쪽 구석의 바닷가였다. 소금 짠내가 나는 해풍, 곳곳에 말린 비린내 나는 물풀들. 어려서는 빨래처럼 늘어진 물풀을 일일이 걷고 좀 더 커서는 자맥질해서 바다로 떠내려간 물건들 혹은 바다 아래 묻힌 귀중품들을 주워오는 것이 키가 크고 체력이 좋은 빌헬름 쿠르트의 몫이었다.

빌헬름 쿠르트는, 그 해안가 마을에서 지내기엔 조금 지나치게 키가 크고 체력이 좋았다. 해로를 통해 타국으로 다녀오던 특사가 떨어뜨린 진주 세공품을 바다 밑에서 주워왔을 때, 체격 좋은 빌헬름 쿠르트는 그의 눈에 띄었다. 마을의 모두가 기뻐했다. 젊고 가능성 넘치는 네가 언제까지고 여기 매여 있을 필요 있나. 어른들은 큰 고래를 잡았다. 불이 피어오르고 수평선 위로 탁 트인 하늘에서 별빛이 축복하듯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러나 기쁘지만은 않았다. 청년에게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말린 물풀 같은 고수머리를 가진 처녀. 처녀의 머리에서는 해초처럼 물비린내가 났다. 소금기가 말라붙어 머리카락 위에 하얀 보석처럼, 별이 내려앉은 것처럼 빛을 냈고 처녀의 눈동자도 물기 먹어 반짝였고 빌헬름 쿠르트는 오래 내려오는 이야기책 속 해묵은 병사들의 맹세를 입에 담는다. 꼭 살아 돌아올게, 성공해 돌아와서 너와 함께할게. 입에서 입으로 맹세를 전한 청년은 물기라고는 없이 가칠하게 메마른 브론하이드 성에서 승승장구했다.

살아남는 것이 그의 몫이었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죽여야만 했다. 내정은 혼란스럽지만 외적에 맞서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았고 고향이 그리워 간혹 울었던 신참내기 어린 청년은 소령이 되었다. 꺼질 듯 희미한 별을 바라보며 가냘픈 삶을 그리는 꿈은 용케도 전장을 이어져갔다.

언젠가는 소녀를 구했다. 언젠가는 장갑병들과 합세했다. 훈장이 점점 더 화려해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을 때, 그에게는 아직도 별이 빛났던가? 그에게 하늘을 보는 시간이 남아 있었던가? 뼈를 가르고 내장을 자르는 일에 익숙해질수록 서쪽 해안가 출신의 빌헬름 쿠르트는 쿠르트 소령으로 출세했다. 약속을 지키러 가는 일은 약속을 잊는 일. 남자를 죽이고 여자를 취할 때 더는 바다 물풀의 내음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일에 지쳤던 것 같기도 하고, 익숙해졌던 것 같기도 했던 어느 날.

그녀는 선고처럼 내려왔다. 고향에서 보던 것 같은 거대한 배가, 하늘에서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쏟아졌다. 쿠르트 소령은 앞을 바라본다. 전혀 기죽지 않아 보이는 흑태자의 뒷모습을, 기적을 가져오는 남자의 실루엣을 보며 그는 불길한 기분을 누르고, 전장에 나서기 전 늘 그렇듯이 소리를 지르며 기분을 고양시키고, 그리고 어느 때였던가. 물풀 같은 머리칼을 휘날리는 여장군이 보였다. 흰 군복을 입고 선 자태가 아름답고 풍만하고 우아했다. 휘장과 망토가 별처럼 빛났다. 답지 않게 망설이던 찰나에 그녀는 신이 난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지팡이를 휘두르고.

폭음이 진동했다. 순식간에 하반신이 뜨거워졌다. 뜨거운 기운이 울컥 목을 타고 입으로 튀어나오고 의식은 찰나에 흐려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하늘을 본다. 하늘에는 별이 없다. 안 되는데, 나는 살아남아야 하는데. 약속했는데. 뒤늦게 떠오른 뜨거운 약속들 속에 잠기고, 잠기고, 잠기고.

다시 눈을 뜨니 그녀가 보였다. 노란 눈이 빌헬름 쿠르트를 향한다.

“어째서 당신은 내 하인이 되지 않았나요?”

“죽을 수 없어.”

“그 상처라면, 분명히 죽었을 텐데. 내 하인이 되기 위하여 일어난 것일 텐데.”

“나 혼자만 여기서 죽을 수 없어.”

“아아.”

여자는 소녀처럼 황홀하게 웃는다.

“당신은 살아있는 죽음이로구나. 내 곁에 있어요.”

사랑스러워, 사랑스러워. 여자는 꺄르륵 웃으며 연신 무언가를 잡아 뜯는다. 죽을 수 없어. 죽을 수 없어. 하지만 어째서 죽지 않는 걸까. 빌헬름 쿠르트는 조각난 자신의 잔해를 바라보며 생각하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녀의 곁에서 하얀 보석처럼 빛나는 얼음 조각들. 얼음이 녹으며 나는 물비린내, 말린 물풀처럼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나는 아마 예전에, 꿈이 있었는데. 내 고향 말린 물풀이 널린 바닷가 마을에서 그녀와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키가 큰 빌헬름 쿠르트는 널린 자신의 내장을 걷어 담으려 하지만 여장군이 먼저 그를 지팡이로 찍어 누르며 입을 맞춘다. 강제로 몸이 뒤집히고 보니 어두워져 가는 하늘에 별이 반짝였다. 나는, 예전에 약속이 있었는데.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겠다고.

[빌헬름] 바람

왕국 구석 마을에 조금 외로운 남자가 살았다. 이름은 빌헬름 쿠르트라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 아이였을 때부터 이마도 반듯하고 콧대도 쭉 뻗은 게 아주 잘생겼다. 그런데 아이가 조금 이상하다. 부모가 일이 바빠 굶겨도 밥달라고 울지를 않는다. 또래 애들이 보여도 놀자고 달려들지를 않는다. 그집 애는 왜 그래요? 아니 우리 애가 왜요. 우리 애는 아무 문제 없어요.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부모는 아이를 마을 진료사에게 데려갔다. 물론 진료사라고는 하나 이런 구석 마을까지 진짜 의사를 둘만한 나라는 되지 못해, 그저 경험 많은 노인이다. 주름진 손이 아이의 흰 이마를 쓰다듬는다. 번듯하게 생기면 뭘 하나, 이 애는 죽을 애요. 그 애의 눈이 어딜 보던가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보고 있지 않지요. 하늘이에요. 원래 신께서는 금방 데려갈 아이는 꼭 그렇게도 예쁘게 빚으신답니다. 이런 아이는 흔하진 않지만 아주 드문 것도 아니지요.

말은 빠르게 퍼지고 아이는 그 말이 옳다구나 확인받을 만큼 눈빛이 비었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사람도 아이를 제대로 보지 않고 아이도 사람을 보지 않았다. 남들이 밭을 갈 때 아이는 책을 읽고. 그러다보니 날 때부터 그랬던 건지 책을 읽어 그런 건지 좀 똑똑해지고. 심장 어딘가가 빈 채로 똑똑하게 자란 아이는 소년이 되어 도시로 유학을 갔다. 부모는 소년에게 모든 것을 해주고 싶다. 그런데, 도시에 와 보니 눈 어딘가 공허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 배우는 자들은 그것을 사상이라고도 부르고 시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사람을 제대로 보지 않고 자란 아이만큼 공허한 사람은 역시 없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아이에게 장교가 속삭였다. 너는 꽤나 똑똑한데다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며. 너 같은 사람이 딱 필요한 곳이 있지.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한 곳, 소년은 그런 말은 처음 들었다.

적응하기는 힘들었다. 연병장을 돌며 운동을 하고, 토악질을 하고, 청년은 울었다. 그러나 아이에겐 두 번째 언령이 남았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네가 필요해. 청년은 죽음과 맞닿아서 비로소 삶을 산다. 적이 죽고 동료들이 죽을 때마다 청년은 웃고 울었다. 죽고 싶지 않아 울었다.

그리고 긴 긴 세월이 지나서, 죽을 수 없게 되었음을 실감했을 때, 청년은 울었다. 가슴의 빈 곳이 청년이 울 때마다 그리고 여름 남풍 겨울 북풍 불 때마다 허물어지더니 마침내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언제야 죽을 수 있을까.

어머니, 어머니가 맞았어요. 그네 말이 맞아요. 나는 이제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아요.

왜냐면, 하지만 사는 것은요. 지금이 달랐을까요. 만약에 제가 어려서 사는 법을 배웠다면요.

절친호모2

좋아했지.

잘 아는 만큼이나 좋아하는 녀석이었다. 아직도 눈에 선했다. 누가 방랑자라고 믿을까 깨끗하고 하얀 얼굴에 그 얼굴색만큼이나 사심 없는 미소가 호쾌했다. 새하얀 녀석. 스스로 말하기는 어째 부끄럽지만 아벨 자신과는, 썩 잘 어울렸다. 방랑하고 유린하고 끝없이 싸웠던 삶에서 네 옆에 있던 순간만은 나 얼마나 빛나는 인간이 되는 기분이었던지. 레온, 하면 아직도 선하게 떠오르는 미소와, 씩씩한 걸음걸이, 장난스럽고 허물 한 점 없는 눈빛.

좋아했던 그 눈빛이 기억 하나를 찾을때마다 점점 그늘져갔다. 그러니까, 아주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부활한 레온이 웃음을 잃었다, 더는 사람들에게 아는 체를 하지 않고 거리를 둔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신경 써 줄 여유가 없다고. 라고 했다니 도무지 레온 그 녀석이 했다곤 믿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러니까, 확인해야만 했다.

“시험해볼까, 레온.”

기대는 무심하게도 소문은 틀린 점이 하나 없었다. 웃음기 없는 눈, 꾹 닫은 입매, 꽁꽁 싸맨 복장. 그래도, 레온이다. 분명 레온이야. 그는 언제나처럼 말을 걸고

“어쩔 수 없군, 어울려주지.”

좋아하는 웃음이 일순간 되돌아왔다.

싸움은 길고 짧게 지속되었다. 순식간에 근접전으로 달려드는 일격을 받은 레온이 공격을 역이용하여 아벨의 그림자를 봉인하고 총구를 겨눈다. 숨을 헐떡이는 아벨이, 레온의 발 아래에서 씩 웃었다.

“오랜만이야.”

“오랜만인가? 그 망할 세계의 시간의 흐름은 모르겠지만. 여기서도 시간이 꽤 지났나 보지.”

“너랑은 어째 항상 오랜만인 기분이라.”

“…어디서든 인형이 따라붙는 그 망할 세계, 정말 불편했었는데, 이젠 없으니까.”

레온이 아벨의 옷자락을 들어 올렸다. 둘 모두 눈을 감았다. 혀와 혀가 얽히고 한참을 그대로 버르적거리다가 숨이 차올라 두 전사는 잠시 떨어졌다.

“좋아해. 좋아해. 좋아…”

그리고 머지 않아 다시 붙었다.

절친호모

누군가와 함께 방을 쓰는 것은 좋지만은 않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하늘은 낮고 젖은 어스름이 끈적거리는 날이면 더욱 그렇다. 아벨의 옆에 누운 여자가 달콤한 옹알이를 하며 몸을 뒤척였다. 지방 많은 살이 철벅거리며 팔근육에 닿았다. 불쾌했다. 날은 아직 덜 밝았다. 지금 묵고 있는 집의 밥줄이 그녀니만큼 깨우지는 않았다. 아벨은 다시 여자를 팔안에 단단히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습한 공기 속에서 꿈을 헤맸다. 숲은 어둡고 축축했다. 그러나 함께 사냥을 하는 두 청년은 몸에 열이 많아 땀이 금방 말랐다. 사슴 두 마리, 토끼 세 마리를 이고 청년들은 모닥불을 피웠다. 타닥타닥 타오르던 모닥불이 빗방울에 꺼져 갔다. 점점 빗줄기가 거세진다. 빗줄기와 뒤늦게 몰려오는 피로로 흐릿한 시야 속에서 레온이 속삭였다. 저기 봐, 아벨. 저기 멀리 오두막이 있어. 낡아서 무너져가긴 한데 우리 둘 몸 정도는 피할 수 있을 거야. 인마, 조냐. 니가 여기 늘어진 토끼냐? 너 사슴을 쫓다가 너무 힘을 뺐어. 성질 급한 녀석같으니. 여기서 자지 마, 아벨. 저기까지만 도착하자. 교관님한테 혼날 건 나중에 생각하자고.

익숙한 룸메이트의 눈은 숲처럼 말갰다. 겨우 도착한 서늘한 오두막 바닥에 누워 아벨은 중얼거렸다. 레온. 응? 춥다. 응. 레온이 옆에 붙었다. 그제야 더웠다. 그날 밤은 둘 다 아무 말도 않았다.

그렇게 꽤 오래도 잠을 잔 것 같다. 공기가 습했다. 비를 피하러 들어왔었지. 지금 일어나면, 레온이 우산을 구해놓았을 텐데.

아벨은 일어나 상체를 낮게 일으켜 세웠다. 여자의 지방 많은 살이 철벅거리며 팔에 닿았다. 꿈의 잔상이 남아 달콤했다. 공기가 습하고 눈가가 습해서 고개를 들었다. 빗방울이 똑, 또옥, 방울져 떨어지고 생각도 바닥에 질퍽거려.

우리는 알았던가, 몰랐던가, 유보했던가. 언젠가 바칠 목숨임을 알고 혼자 살아남은 가슴에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유보했던가. 이렇게 흩어지게 될 줄 알았다면 그래도 유보했을까. 레온, 레지멘트의 그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말 섞을 여유가 조금만 있었다면 좋았을 거야. 그랬으면, 어쩌면, 우리는, 우리는.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기회가 닿는다면,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