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파편

여름이었다. 햇빛이 바닥까지 내리쬐어 달구고 매미가 병처럼 숨 막히게 울었다. 그리고 지금은 야외 수업이다. 아무리 유메노사키가 해안이라고 해도, 본격적으로 여름에 접어드는 날씨에는 별 수가 없는지 건장한 고등학생들도 뜨거운 볕에 하나 둘씩 녹아내려갔다. 하물며 원체 약골인 녀석은 어떠랴.

“차라리 비가 내렸으면 좋겠어……. 케이토, 기상조절센터에 연락해볼까? 몇 억엔 정도 부르면 되려나?”

“정신 차려.”

한마디로 일축했지만 에이치의 상태는 확실히 좋지 않아 보였다. 제대로 더위를 먹었는지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진심인데. 나는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건 싫어.”

“알고 있어. 그러니까 야외수업 같은 건 교사에게 부탁해서 빼도 되지 않아? 이제 2학년인데 적당히 타협해줄걸.”

“그래도 수업을 그렇게 쉽게 빠지면 안 돼. 입원했을 때는 수업을 듣고 싶어도 못 듣는단 말이지……. 그러면 케이토. 잠깐 교실에서 내 체온조절 팩 좀 가져다줄래? 지금 갑자기 냉방을 쐬면 감기에 걸릴 것 같아서…….”

“묘하게 성실하게 구네. 그럼 일단 가져올 테니까 혹시라도 무리겠다 싶으면 얼른 들어가라. 아무튼, 네 녀석은 내가 없으면 어떻게 하려고.”

혹시라도 에이치의 상태가 정말 안 좋아지면 꼭 조퇴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발을 옮기려는 찰나, 운동장 한쪽에서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오늘 수업은 조퇴하겠다.”

특유의 거만한 말투와 목소리. 제왕이라는 별명에 딱 어울려서,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이츠키 슈임을 알 수 있었다.

“날씨 때문에 상태가 좋지 않아. 이런 상태에서 연습해봤자 비효율적일 뿐이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힌다. 에이치 쪽을 돌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기분 나쁘게 웃으며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여전히 제멋대로시네.”

영락없이 비웃는 목소리였다.

“제왕님은 날씨가 나쁘면 예정된 공연도 안 나가신다더라고. 케이토. 날씨도 더운데, 학교 옆 바다에 사람 한 명쯤 밀어버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릴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에이치의 상태가 유독 안 좋아 보이는 건 어쩌면 날씨보다도 합동수업 탓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치는 이츠키 슈를 싫어한다. 이유도 가지가지였다. 말투가 기분 나빠. 재능도 있으면서 공연에 날씨를 가리는 게 싫어. 나는 건강 때문에 필사적으로 먹는데, 멀쩡한 몸으로 음식을 가리는 게 싫어.

이츠키에게 삼류 글쟁이라고 핀잔을 듣는 나도 그 정도로 싫어하지는 않는다. 이렇게까지 이유가 많다면, 오히려 ‘그냥 싫어’에 가까운 게 아닌가. 어쩐지 녀석은 이렇게 이츠키가 보이기만 해도 기분 나쁜 표정으로 비꼬곤 했다.

하지만 정작 이츠키 쪽에서는 텐쇼인 에이치라는 사람을 인식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그는 소위 제왕이라는 별칭만큼이나 방약무인했으므로, 아무리 같은 학원의 학생회라도, 그리고 대재벌인 텐쇼인 가문의 자제라도 신경이나 쓰고 있을는지 의문이었다.

“너는 대체 왜 그렇게 이츠키를 싫어하는 거야? 동기잖아. 별로 서로 말해본 적도 없지 않아?”

“날 기분 나쁜 눈으로 쳐다봐.”

“그게 뭐야. 네가 야쿠자야? 지나가는 사람한테 너 눈이 마음에 안 든다고 돈이라도 뜯게?”

“내가 말해놓고도 웃기지만, 정말이야. 케이토는 왜 내 말을 안 믿어?”

“그게 무슨 대사야. 네가 내 여자친구냐?”

말해놓고 어쩐지 무안해지고 말았다.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크흠. 아무튼 솔직히 네 녀석의 피해망상처럼 들릴 뿐이다. 정 그렇게 느껴지면 이츠키한테 대놓고 말하든가.”

“아직은 안 돼. 알잖아, 케이토. 앗, 지금 봐! 또 나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잖아.”

“어디? 이츠키는 이쪽을 보고 있지도 않잖아……?”

“그새 눈을 돌렸잖아! 칫, 분해.”

“역시 네 착각인 것 같…….”

“그런 소리 할 거면 내 팩이나 가져다 줘. 만약에 이대로 일사병으로 사망하면 염은 케이토가 해줄 거지?”

또, 이런 식이다. 사사건건 병을 무기처럼 휘두르는 녀석 때문에 절로 한숨이 났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받아주지 않으면 이 병약한 녀석이 혼자 뭘 할 수 있을까. 얼른 입을 닫고 교실로 가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이 녀석의 성격이 이렇게 엉망인 것에 대해서는 소꿉친구인 내가 책임지고 설명할 의무가 있다.

얼음 자국

“몸은 어떤가?”

A군이 후원자에게서 처음으로 들은 말이었다. 단도직입적이네, 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들어 남자를 마주보았다. 처음으로 대면하는 후원자는 꾹 다문 입가의 주름부터 네모진 안경까지 구석구석 완고한 인상이었다. 한참을 그대로 바라보고 있으니 직선으로 굳어 있던 남자의 입매가 슬그머니 무너지며 웃음기가 돌았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미안하네. 아직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았군. 자네는 내 오랜 친구를 무척 닮았어. 그래서 나도 모르게 격의 없이 대하고 말았네.”

“아닙니다. 제가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실례했네요. 상태는 상당히 괜찮습니다. 모두 후원해주신 덕분이지요.”

“아직 조금 불편한 것 같은데?”

남자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A군의 다리를 응시했다. 면밀히 확인하는 듯한 눈빛에 짐짓 가볍게 대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A군은 실없이 웃으며 앉아 있는 전동 휠체어의 손잡이를 톡톡 두드렸다.

“아하하, 아무래도요. 그렇지만 한동안은 무균실에서 나오지도 못했는걸요. 이 정도로 개선된 것만 해도 기적이죠.”

“그렇지. 자네의 몸은 엉망이었어. 조직과 세포를 완전히 재건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걷지도 못하고, 다른 곳에 가지도 못하고, 식사 대신 수액만 맞아야 했고…….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차도 마실 수 있으니까요. 으음…….”

“차가 입에 맞을까 모르겠네.”

여전히 탐색하는 것 같은 눈매에 A군은 가벼운 긴장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온도 적당하고, 꽃향기가 아주 향긋하네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나는 원래는 녹차를 즐겼다네. 그런데 홍차를 좋아하는 친구를 떠올리며 마시다 보니 취향도 변하더군. 그 친구가 곁에 있을 때 진즉 이 맛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싶어.”

“생각보다 다감하시네요.” 무심코 중얼거린 A군이 급히 덧붙였다. “아. 초면에 무례했네요. 죄송합니다, 하스미 케이토 씨.”

마이즈너 테크닉

2. 부실에서 혼자 다섯 배역을 하던 남자를 목격한 지도 벌써 일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히비키 와타루는 연극부의 부장이 되었고, 이츠키 슈는 그의 친구가 되었다. 친우라고 하는 게 좋을까? 적어도 동아리의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할 만큼 친해진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여전히, 연극부의 연기는 슈의 성에 차지 않는다.

“호쿠토 군, 집중하세요. 여기가 가장 중요한 장면입니다! 카이가 수줍은 소년에서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순간이에요!”

“하지만 집중이 될 턱이 없잖은가. 눈의 여왕도 부장, 게르다도 부장……. 결국 부원은 우리 둘만 남았는데, 이대로 괜찮은 건가?”

“아아, 보통 사람 둘이서 연극을 하는 건 어렵겠죠. 하지만 보통 사람이 아니라 이 히비키 와타루가 부장인걸요? 일인극을 해도 관객의 눈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합니다!”

“……가끔 생각했지만, 당신 혼자 충분하다면 나까지 연극부에 필요한지 모르겠군. 차라리 나도 퇴부하는 게 나은 게 아닌가?”

“그건 안 되죠, 안 돼요. 호쿠토 군이 이 연극부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데!”

“부장……. 매일 햇병아리 취급하더니 그래도 나를 배우로 인정해주는 건가?”

“그럴 리가 있나요! 호쿠토 군은 분명 뛰어나지만 저에 비하면 배우라고 할 수도 없죠. 그래도 제 연습을 봐줄 유일한 관객이니까요!”

“당장 퇴부하러 갈 거다. 말리지 마.”

방을 나가려는 호쿠토와 말리려는 와타루로 연극부실은 한참 난리가 났다. 물론 히비키 와타루는 본인의 말마따나 보통 사람 이상의 재주가 있었으므로 어렵잖게 호쿠토를 잡아 세울 수 있었다.

“아아, 호쿠토 군. 우리의 애정이 농담 한마디에 의심받을 정도였다니 슬픕니다! ― 우리라고 표현하지 마. 라고 호쿠토가 차갑게 덧붙였다. ― 당신을 위한 진심을 알아주세요. 호쿠토 군이 외로울까 봐 이렇게 고문 선생님을 모셔왔답니다~?”

“누가 고문이라는 거냐, 누가.”

“하지만, 슈. 당신이 의상도 만들고, 대본도 만들고, 이렇게 와서 연기지도까지 해주다니……. 그렇네요. 이건 고문이라기보다는 연극부 부장에 가깝네요! Amazing, 당신이 히비키 와타루입니다!”

이 텐션의 와타루에게 일일이 반응할수록 더 말려들 뿐이다. 슈는 대답 대신 호쿠토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고생이 많겠군.”

호쿠토는 갑자기 설움이 북받쳐 올랐는지 감격한 표정이었다.

“변태가며……, 아니, 히비키 부장의 친구라는 분이 맞는 말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두 배로 비난받는 게 아닌가 걱정했네요.”

“흥,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지. 안일하게 좋은 말만 해주려고 온 건 아니다.”

“그럼요, 그럼요. 슈는 첫 만남에서 무려 제 연기도 혹평했답니다? 긴장 바~짝 하는 게 좋을 거예요, 호쿠토 군?”

“예술에 이유 없는 비평은 하지 않는다. 그때 비평했던 건 와타루 네 연기가 내 평가선 아래였기 때문이야.”

한 치 흔들림 없이 대꾸하는 슈를 보며 호쿠토가 몸을 조금 움츠렸다.

“너무 걱정 마, 히비키 부장. 나도 연극부원인 이상 비평에서 도망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 정도라니, 조금 겁이 나는군…….”

“긴장했나요, 호쿠토 군! 어깨를 움츠리고 시선이 내려갔네요, 가엾은 새끼오리처럼! 안 되죠, 모처럼 당신에게 꼭 맞는 배역을 준비했는데요. 제 애정을 매정하게 거부하는 당신처럼, 심장에 얼음 조각이 박힌 카이인데요! 그런데 그렇게 위축되어 있어서야 슬프죠. 그러면 비평보다 먼저, 일단 이쪽에서 시범을 보여드리죠.”

일인극의 주인공마냥 속사포처럼 말을 퍼부은 와타루가 슈를 돌아보며 윙크했다. 무슨 의도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로 멀거니 마주보자 와타루가 슈의 손을 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호쿠토 군은 발음도 대사도 정확하지만, 연기의 틀을 깨지 못하고 있어요. 제가 슈와 함께 시범을 보여주죠. 자, 보세요. 눈의 여왕의 첫 번째 키스는.”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하얀 얼굴이 눈앞에 다가왔다.

“추위를 잊게 합니다.”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남았다. 화를 내야 할까? 슈는 앞을 흘끗 쳐다보았다. 호쿠토는 여전히 진지하게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 입술이 보이지 않는 각도니 그저 흉내인 척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보세요, 이게 현실과 유리된 카이의 놀란 얼굴이랍니다. 그리고 두 번째 키스는.”

슈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입가를 간지럽히는 감촉에 가볍게 응하여 입을 벌리다, 와타루의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찌릿 노려보자 와타루가 장난스럽게 웃는다. 변함없이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친지와 가족을 잊게 하는 키스입니다. 그렇게 카이는 두 번의 키스를 받고 눈의 여왕에게 홀려서 그녀를 따라가는 거죠.”

-칫. 작게 혀를 차고 슈는 다시 호쿠토의 안색을 살폈다. 이상한 낌새를 맡지 못했는지 후배는 그저 순수하게 감탄하는 기색이었다.

“확실히 진실한 감정이 느껴지네요. 시범 감사합니다.”

차마 뭐라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슈는 그저 고개를 가볍게 까닥인 후 와타루의 땋은 머리를 잡아당겼다.

“아앗, 그렇게 만지면 기분이 이상해지니까 섬세하게 다뤄주세요?”

“머리카락이잖아, 머리카락. 촉감을 느끼는 것처럼 말하지 마라. 저 녀석이 눈치가 없어서 다행이지, 카게히라 앞에서는 하지 마.”

“어라. 아직도 게르다를 잊지 못한 건가요, 카이 군?”

와타루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세 번째 키스를 해버릴 거예요. 긴 꿈에 빠지는 키스예요.”

“마음대로 해.”

무심코, 그렇게 대답했다. 입술에 아까의 감촉이 남아있었다.

 

하류 악당

01

02_imperioad

미하엘은 사자전역에 관련된 사료를 읽던 중, 당시대에 나타났다는 마수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스케치라고 표현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단출한 실루엣의 그림이 어쩐지 눈을 사로잡았다. 독을 품은 숨을 한 번 내쉬면 생물을 시체로 만들고, 반나절 만에 제도를 죽음으로 물들였다는 검은 용은 그 자신도 시체마냥 뼈대만 있었다.

왜 하필 이런 형태를 하게 되었을까? 원래는 이 생물도 따뜻한 살과 피를 갖고 있던 게 아닐까? 제 숨에서 독기로 인해 자신마저 곯아 없어진 게 아닐까, 그러고도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움직였던 걸까.

“헛소리네.”

열변을 펼치는 미하엘에게 동료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사료도 찾기 힘든 그런 전설 같은 걸 연구하겠다고? 도력혁명의 시대에 소설이라도 쓸 셈이야? 이봐, 차라리 경제학 같은 걸 연구하지 그래. 우리 새 후원자는 실용성 있는 분야를 좋아한다고.”

그래도 어딘가에는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전설 속에 남은 생물의 희소한 모습에 호기심을 가져주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어느 정도 말이 트였다 싶은 사람이면 매번 용의 그림을 보여주었지만, 모두 마지못해 웃거나 실없는 소리를 한다고 미하엘을 핀잔할 뿐이었다.

그래서 미하엘은 용의 그림 따위는 그만두고 얌전히 시키는 대로 경제학을 전공으로 삼아 연구에 매진했다. 앞서 자신을 몽상가라고 무시하던 사람을 연구 성과로 압도하는 것은 제법 재미있었다.

비록 가장 관심 있던 분야에 매진하지 못했더라도, 결국 서른의 나이에 제국학술원의 조교수라는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꽤나 어깨 펴고 다닐만한 인생이었다.

작년까지는, 그랬다.

 

 

하류 악당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