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노래

세르웬님이 신청해주신 자캐커플 커미션 단챠형입니다. 2학년 즈음 츠유하 시점으로 슬프거나 잔잔한 느낌 부탁하셨는데 츠유하가 슬픈 게! 싫었습니다! 토우츠유 행복하세요…!!!!

 

***

 

오랜만에 스케줄이 빈 토요일 저녁, 가방을 정리하다가 주머니 쪽에서 네모난 종이상자를 발견했다. 한 번에 정리하려고 책상 위에 와르르 쏟아놓은 타로 카드, 화장품 파우치, 목캔디, 별 모양 머리끈, 학원 근처 초콜릿 카페의 쿠폰…….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작은 반창고 상자. 유키시로 츠유하는 몸을 웅크리고 앉아 반창고를 손끝으로 한번 톡 쳤다.

요즘은 쓰지 않는 물건인데, 가방에서 뺄까.

그리고 다시 한번 톡 쳤다.

역시 다시 넣을까.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상자를 노려보던 츠유하는 결국 파우치 안에 반창고를 넣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엷게 웃으며 제 무릎을 끌어안았다.

“이런 걸 넣으면, 쓰기를 기다리게 되어버리잖아요. 행복의 마법사 실격일까요~?”

이제는 지난 일이었다. 이자요이 아카렌이 휴학한 것도, 디에스이레에 남은 히라노 토우야와 타츠노죠가 신경전을 벌이고 싸우던 것도, 그래서 츠유하가 토우야를 발견해서 반창고를 붙여주곤 했던 것도, 이제는 모두모두 지나간 일. 아카렌은 돌아왔고, 디에스이레의 멤버들은 안 그런 척 하지만 전에 없이 의욕적이다.

“지휘자는 갖춰졌어.”

며칠 전 학원에서 마주친 토우야는 그렇게 말했다. 전에 없이 든든해 보이는 모습에 기쁘고 뿌듯하면서도, 가슴 한편이 아린 것은 어째서였을까. 디에스이레의 연습실을 향해 멀어지는 토우야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츠유하는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았다.

“오늘 저녁도 토우야는 노래를 연습하고 있겠죠. 조금은 예전이 그립다고 말하면 안 되겠죠? 마법사는, 이런 마음을 가지면 안 되는데…….”

한숨처럼 웃으며 츠유하는 창가로 걸어갔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 어둑한 밤하늘에 색색의 별들이 반짝거렸다. 별들에게 소원이라도 빌어 볼까? 당신이 나를 돌아보게 해 달라고……. 츠유하는 손끝으로 창을 밀어 열었다. 살짝 열린 창틈으로 서늘한 밤바람이 훅 밀려오고, 밤바람 같은 긴 머리가 흩날려 뺨을 간지럽혔다. 츠유하는 눈을 내리깔았다. 금빛의 눈동자가 언뜻 흐렸다가, 곧 다시 별처럼 빛나기 시작한다.

“들려요. 별들의 노래가.”

토우야도 지금 노래를 부르고 있죠? 느낄 수 있어요. 별을 통해 들릴 것만 같아요, 토우야의 노랫소리가……. 별이 밝게 빛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간을 거쳐서 팽창해야 한다고 하죠. 토우야는 지금 그런 시간을 거치고 있는 거겠죠. 언젠가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빛나는 별이 되겠죠. 그러면, 나는 그 별에게 소원을 빌어야지.

눈부시게 빛나는 별은, 마법사의 소원도 이루어줄까요? 알 수 없지만, 느낄 수 있어요. 밝게 빛나는 당신의 미래를 느껴요. 그러니 지금은 괜찮아요. 우리가 수없이 많은 일을 거치고, 더 높이 빛나는 별이 된, 저 먼 미래의 하늘 아래에서 우리 다시 만나도록 해요. 언젠가의 그 날을 나는 계속해서 기다릴 거예요.

수없이 많은 별들이 점멸하는 하늘 아래, 츠유하는 어느 별보다도 환하게 웃었다.

“자, 보고 있나요? 눈부시게 아름다운 밤이에요, 토우야.”

봄꽃 향기 나는 당신의 미소에

“나는 오래는 못 살아. 잘해야 스무 살?”

그렇게 말하자 늘 그림같이 웃고 있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반짝이는 금발에 그늘이 지고 상냥한 눈웃음도 멎었다. 늘 휘장처럼 드리우고 있던 해사한 웃음을 잃은 로네의 얼굴은 석고상처럼 파르라니 생기가 없어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회복할 시간을 줄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 로네 펠트너. 네가 차기 리더감인 것도, 그래서 학교의 모든 아이들과 잘 지내려는 것도 알겠어. 하지만 나는 거름회수팀이 될 생각도 없고, 설령 되더라도 열심히 일할 생각도 없어. 이래서야 금방 잘리고 끝이겠지. 그러니까 계속 이렇게 찾으러 다닐 필요 없다고.”

쏘아붙이고 뒤돌아 떠나는 찰나, 무언가가 옷자락을 잡아당겨 딜마는 그만 발을 헛디뎌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찔, 균형을 완전히 잃었다가 곧 묘하게 폭신한 것 위로 떨어지는 감각. 딜마를 품에 받아 안은 로네가 얼굴을 닿을 듯 내려다보며 천진하게 웃었다.

“역시, 딜마. 내 파트너가 되어 줄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나는 회수팀이 되지 않을 거라고 말했어. 뭣보다, 머지않아 죽을 거라고. 그런데 파트너라니. 동정인가? 오만인가? 어느 쪽이든 받아들일 수 없으니 화가 솟구치는 것이 먼저였다. 딜마는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해 못 했어? 나는 시한부야. 스물도 못 돼서 죽을 거야. 지위든 권력이든 가지려 애를 써도 아무 의미 없다고!”

“하지만 알잖아, 딜마? 여기 있는 누구도 네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거. 늘 그런 눈으로 아이들을 보고 있잖아.”

차마 부인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자 로네는 샐쭉 웃었다.

“그러니까 함께 일하자. 어차피 누구라도 언젠가는 죽을 거, 함께 최고의 마지막을 맞으면 되잖아? 있지, 딜마……. 나도 남한테 쉽게 말 못할 비밀이 하나 있거든. 네가 비밀을 알려줬으니까 나도 하나를 알려줄게. 어때, 괜찮지?”

아는 누군가가 시한부라는 사실은 그저 알기 부담스러울 뿐이다. 결코 ‘비밀을 알려주었다’고 표현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로네는 그 단어를 또릿하게 발음하며 새색시처럼 수줍게 웃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귓가에 속닥거렸다. 귀에 소곤소곤 닿는 숨이 간지러워 딜마는 손끝이며 발끝을 움찔 움츠렸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나지막했다.

있잖아, 딜마. 나는, 우리 집은 말이야, 사실은…….

[사이퍼즈] 탄야까뮤히카

틀비 액토출전기념 받은 리퀘입니다 222222 알페님 리퀘! 너무 개인취향이 많이 들어가서 괜찮으실지…ㅠㅠ 수위묘사 있습니다.

***

까미유 데샹의 삶은 기실 완벽하다. 뿐만 아니라 화려하다. 재능, 수려함, 젊음, 권력. 온갖 빛나는 수식어가 까미유의 삶을 따라다녔다. 국제의료봉사단체의 젊은 회장은 시끄러운 파티의 가운데에서 빳빳하게 다린 양복을 입고 포도주가 든 잔을 높이 치들었다. 선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여자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국회의원과 사업가들이 낮게 박수를 친다.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까미유는 혼자 어둔 방에 들어와, 흰 양복 재킷을 침대 위에 대충 던져놓았다. 그리고 책상 위 나지막하게 놓인 전등을 틀고 책상에 앉았다. 어깨를 숙이고 한숨을 내쉰 후, 까미유는 종이 위에 몇 자를 적어나갔다.

히카르도 바레타에게.

여기까지 적고 까미유는 고개를 저었다. 몇 글자를 더 붙이고 싶었다.

친애하는, 히카르도 바레타에게.

오늘 네가 왔던 것을 알아. 행사를 지키던 경호원들에게 들었으니까. 유능한 친구들이지. 싸웠으니 알 거야. 다친 얼굴은 무사한가? 좀 더 몸조심하도록 해. 너는 남한테 쉽게 속고 머리도 나빠서 가진 거라곤 몸하고 좀 볼만한 얼굴밖에 없으니까. 그러니까 다시 여기 오지 않았으면 해. 찾아와도 나를 볼 수 없을 거다.

더 뭐라고 써야 할까? 뭐라고 하면 좋을까? 생각에 빠져 까미유는 주변에 검은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도 알지 못했다. 안개가 여자의 모습이 되고 그제야 까미유는 혼자가 아닌 것을 눈치챘다. 까만 여자가 어깨에 기대어 독 품은 숨을 속닥거렸다.

“친구에게 쓰는 편지인가?”

“뭐, 그렇지.”

“네 손으로 팔아넘긴 친구에게, 할 말이 남았어?”

“그냥 써본 것 뿐이야. 생각을 정리할 겸 해서.”

“그럼 이건 필요없겠군.”

여자는 까미유의 어깨 너머에서 입을 오므리고 검은 숨을 뱉었다. 하얀 종이가 숨이 닿은 부분부터 검게 오그라들어, 곧 책상 위에는 지독하게 새까만 웅덩이밖에 남지 않았다. 여자가 까미유의 목을 뒤에서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미아도, 미쉘도 이미 처치는 끝났어. 그 나이 여자애들은 깜찍하게도 감정이 풍부해서 너무 쉽게 물들지. 아무리 웃으려 해도 불안정하고 속이 검게 들끓을 거야. 능력자가 독에 오염되었다는 건 그런 거니까.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겠지. 모두 우리 손 안에 있어.”

탄야는 킥킥 웃으며 무표정한 까미유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네가 바라던 대로야, 데샹. 기쁘지 않아?”

“기뻐, 탄야.”

“너는 더 이상 길거리의 고아가 아니야. 모두가 너를 떠받들어. 힘도, 권력도, 능력도 발치에 널렸지. 원하던 걸 모두 이루었잖아? 그러니 웃어, 데샹.”

상대가 잠자코 말이 없었기에 탄야는 더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고개를 돌려 입을 맞추었다. 까미유는 가만히 눈을 감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까만 여자는 하얀 남자에게 더욱 질척하게 달라붙었다. 까미유는 불편한 것을 좋아하는 성미가 아니어서 머지 않아 자리를 옮겼고 곧 침대 위에 던져놓은 흰 재킷이 구겨졌다. 재킷 구겨지고 엉망진창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질 때쯤 품 안에서 탄야가 만족스럽게 속삭였다.

“친애하는 까미유 데샹.”

속삭이는 숨은 언제나처럼 서늘한 독을 담았다.

“주변의 능력자들을 오염시키면서, 정말 자기 자신도 오염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까미유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대답할 말은 없었다. 다만 할 수 없는 말이 있고, 보낼 수 없는 편지가 있고, 만나서는 안 될 상대가 있었다.

너는, 여기 오지 않았으면 해.

[사이퍼즈] 레바님 리퀘 다톰

사퍼 최애 틀비가 액토 활약한게 넘 기뻐서 리퀘받았습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 레바님이 리퀘주신 다톰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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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무스 홀든은 동생을 돌보는 데 이골이 났다. 첫째 동생이 세 살 터울, 다섯 살 터울. 지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로 아는 놈과 장난이라면 뭐든 좋아하는 놈. 범상치 않은 녀석들을 돌보느라 어릴때부터 골머리를 썩다가 다이무스가 터득한 요령은 그저 과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부러 맞춰주거나 힘으로 눌러도 어디로 튈지 전혀 모르겠던 녀석들은, 오히려 가만 무게를 잡고 서있으면 언젠가는 형에게 의지하겠다고 돌아온다. 벨져가 검을 연습한다며 장미 화단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때 그랬고, 이글이 크리스티네의 치마를 들추다가 기어이 울렸을 때도 그랬다. 삼형제 중 장남이라는 게 어쩔 수 없어서 자기보다 어린 애들은 죄다 돌봐야 할 말썽쟁이로만 보였다.

가끔은 동생들을 찾아가기도 했다. 벨져 녀석이야 워낙 몸을 꽁꽁 숨기고 있으니 도리가 없지만, 이글 녀석이 사고 없이 잘 지내고 있을지 걱정이 되어 연합에 찾아가면 다들 어색하게 웃으며 흘끔거렸다. 회사의 에이스가 적대하는 연합에 찾아왔다, 는 것만으로도 화젯거리라 이글은 싫다고 난리를 치는 게 예사였다. 신기한 동물 보듯이 약간 거리를 둔 시선에 익숙해졌다. 단 한 명만 빼고, 그랬다.

“안녕하세요! 다이무스 홀든 씨죠?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사상 최강의 쾌검사라면서요?”

“일부가 부르는 호칭일 뿐이다.”

“와, 듣던 대로 이글 형이랑은 딴판으로 멋있으시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여기서 커피라도 드세요!”

청년의 손 안에서 얼음 조각이 둥실거리다 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 무덥던 여름날에 다이무스 홀든은 얼음이 떠다니는 커피를 마시며 뼈저리게 시리다고 생각했다. 그 날부터 계속, 가슴 한 구석이 시렸다.

지하연합을 찾아갈 때마다 토마스는 재잘거리며 말을 붙였고, 다이무스는 몇 마디 짧은 대답으로 일관하다가 돌아가고는 했다. 이제는 왠지 모르게 습관이 된 길을 돌아가면서 다이무스는 손가락을 꼽아 본다. 세 살 터울, 다섯 살 터울, 일곱 살 터울. 동생이 새로 생겼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다만 다른 동생들과 다른 점은, 이 동생의 앞에서는 제자리에 가만히 있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이무스 홀든은 과묵하게 자리를 지키는 것이 처음으로 좀이 쑤셔 견디기 힘들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청년, 그래서 남을 쉽게 동경하는 청년의 눈빛과 웃음이 꼭 가슴을 엘 것 같았다.

[벨져자넷] 호접의

원고를.. 안쓸것같아서… 부분부분 이은 거라 좀 두서없어요

 

* * *

 

벨져 홀든이 열여섯 살 늦은 여름에 머물렀던 그 집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장미가 만발한 화단이다.

여자아이는 온갖 달콤한 것에 둘러싸여 있었다. 열한 살짜리 소녀는 잘 가꾼 장미 화단 속 샛길을 통해 나타나서 훈련을 받던 세 형제에게 식사 시간을 알렸다. 손발이 조막만하고 뺨이 발그레한 인형 같은 아이였다. 정원에 온통 흐드러진 백장미와 허리까지 구불구불 말린 은발의 곱슬머리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하얀 목에 감긴 섬세한 레이스 리본이나 층층이 댄 치맛단 끝이 어떻게 한 번도 장미 가시에 걸려 찢어지지 않는지 소녀를 볼 때마다 벨져는 궁금해 했다.

열여섯 살의 벨져는 예민한 소년이었기에 어린 크리스티네가 나타날 때마다 멀지 않은 어딘가에 프리츠 가문의 무사가 소녀를 지키고 서있음을 어렵잖게 눈치챘다. 그 양을 볼 때마다 마음 구석에서부터 치미는 불편함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벨져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던 형 다이무스와 동생 이글은 크리스티네가 장미 화단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면 화색이 되어 그 모습을 반겼다. 워낙 인형처럼 어여쁜 아이이기도 했지만, 그 애를 가장 특별하게 만드는 건 엄격한 제레온 프리츠 경이 그 애만 나타나면 영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작은 딸아이를 끼고 도는 모습이었다. 남이 아끼는 보석이면 내 눈에도 귀해 보이는 법이라 다이무스는 짐작으로, 이글은 본능으로 이 소녀야말로 이 집에서 가장 꼭꼭 귀하게 감추어 둔 보물임을 알고 그리도 반색해 대접했을 것이다.

그리고 벨져는, 바로 그 이유로 크리스티네가 나타날 때마다 위화감을 견디기 힘들었다. 이 장미 화단 한가운데에 프리츠 가문 전체가 열과 성을 다해 향을 뿌리고 치장을 다한 거대한 조화 한 송이가 있는 것이다.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었다.

 

***

 

그 집에 가장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었던 날을 기억한다. 정문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이상하게도 무거웠다. 사람 소리가 많았던 정원은 이미 황폐했고, 담벼락을 손끝으로 쓸자 벽돌 조각이 바스러져 거미줄 위로 떨어졌다. 말하자면 이 집은 반역자의 집이며 미치광이의 집이었다. 가문의 위세는 땅에 떨어졌고 사용인들은 저택을 빠져나갔다. 하나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집에서, 앙상하게 가지와 가시만 남은 장미 덤불 사이로 전혀 변하지 않은 그 소녀가 나타났다. 열일곱의 크리스티네는 허리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긴 머리며 바닥에 끌리는 드레스 자락을 용케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고스란히 나타나 벨져에게 진실을 요구했다. 언쟁과 도발과 흐느낌과 가벼운 모욕이 있었다. 벨져는 손끝으로 늘 거슬려했던 드레스 자락이며 머리카락을 툭툭 쳤다. 명확한 상황은 기억나지 않는다. 늘 기억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건 바로 그 장면 자체이다.

“알려주지 않는 거야? 역시, 내가 여자라서? 그럼 이러면 되겠네.”

크리스티네가 허리춤에서 레이피어를 뽑았다. 왼손으로는 긴 머리채를 잡았다.

앙상한 덤불 위로 하얀 장미가 만발했다. 하얗게 빛나며 흩날렸다. 흐드러진 꽃잎 같기도 했고 나풀거리는 나비 떼 같기도 했다. 한층 가벼워진 목을 그녀가 똑바로 든다.

“이래도 안 돼?”

그는 처음으로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

 

벨져 홀든은 단 한순간도 완벽을 기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때도 모든 것이 벨져를 위하여 안배되어 있었다. 메트로폴리스에서 릭 톰슨을 만난 것도 수도원에서 때맞추어 이글과 사이퍼들이 나타난 것도 무엇 하나 요행은 없었다. 그가 기한 모든 신중도 그리하여 잘 짜 맞춘 완벽함도 그저 벨져라는 인물에게 당연할 뿐.

그러나 그라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기에 차질이 생겨버린다. 깎아지른 듯이 가파른 언덕 위, 석벽으로 된 수도원 앞에서 기어코 제 아가리를 벌리고 빠르게 돌아가는 커다란 문. 선도 악도 아름다움도 추함도 진실도 거짓도 뒤엉켜 돌아가는 문. 문이 그를 부르고 벨져는 꼭 지금처럼 문을 보았던 발람 수도원에서의 열아홉 살을 떠올린다. 어지러워 구토감이 일고 그는 그만 자리에 주저앉는다. 멀게 울리는 동료들의 부름 속에 문은 계속해 인식과 사고를 뒤흔들고 그는 문득 의문을 느낀다.

내가 찾는 진실은 무엇이었지? 나는 어째서 진실을 찾고 있었지?

온갖 생각이 소용돌이치다 벨져의 머릿속에 남은 것 하나는 열여섯 늦은 여름에 보았던 장미 화단이다. 하얀 장미가 만발한 화단. 나비 하나를 베기도 망설여졌던 그 어린 날의 늦은 여름.

환각의 꽃잎은 바람에 흩날려 화원 바닥에 내려앉더니만 하얀 머리카락으로 녹아난다. 문 안에서 현재도 과거도 진실도 거짓도 뒤엉켜 돌아간다. 동경과 질투와 연민과 애정이 동치가 된다. 아직 앳된 기가 남아있던 소녀의 목소리가 귀에 선하게 들린다.

‘알아. 당신은 나비 하나도 못 베는 그런 사람인걸.’

아니야. 그게 아니야. 고개를 젓자 다음 목소리가 귓가에 미끄러졌다.

‘역시, 내가 여자라서?’

 

***

 

완벽하지 않은 채로 돌아올 수는 없었으니 다시 만났을 때는 이미 두 해가 지난 후였다. 얼마나 긴 시간이라고 아껴 놓은 은구슬 같던 크리스티네 아가씨는 이미 흐려져 벨져를 맞이한 것은 회사의 능력자 자네트였다. 둥근 얼굴에 젖살이 쪽 빠지고 부드러운 살집이 잡히던 사지는 근육으로 단단해졌다. 곱슬거리는 잔머리는 깨끗하게 정리했으며 서글서글하던 파란 눈동자가 이제는 날카로웠다.

“오랜만이네, 벨져.”

“이거 몰라보겠군.”

머리를 짧게 자른 크리스티네, 아니 자네트는 그저 씩 웃어보였다.

“원래 내가 치렁치렁하게 치장한 걸 싫어했잖아? 지금 모습을 보면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별 소리를 다 하는군. 머리를 자를 때 내가 꽤 놀랐었는데 기억 안 나나?”

“그래, 그때… 지금이라면 말할 수도 있겠네.”

모든 몸짓이 단호하던 여자가 처음으로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 사실은… 뭐라고 할까. 싫었어.”

언뜻 장미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아버지도, 그리고 벨져도. 내가 여자라서… 편의를 봐 주는 게 아닐까 싶었으니까.”

벨져는 문득 눈앞의 여자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물론… 이제는 알아. 벨져는 수련 중이라도 나비 하나도 못 베는 그런 사람인걸. 굳이 내가 누구라거나, 어떻다든가, 그런 문제가 아닌 거야.”

“…….”

“벨져가 무얼 하고 있는지, 그동안 나도 회사에서 알아봤어. 이제는 이해해. 기사단의 일을 바깥에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것도… 나는 너무 어렸고, 벨져에게는 벨져의 길이, 나에게는 나의 길이 있는 거야. 설령 그게 같은 방향이더라도 말이지……. 몸 건강하고,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는 거지?”

“그래.”

“그럼 됐네.”

등 뒤에서 회의 시간이 되었다며 누군가 그녀의 코드명을 부른다. 누가 보기에도 썩 잘 어울리는 호칭이었다. 여자는 치장을 않았다고는 하나 화사한 얼굴과 몸에 밴 기품에 금욕적인 몸가짐이 도리어 도드라지게 화려했다. 장미라고 불린 여자는 응답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고 아직 채 말로 옮기지 못한 생각들은 벨져의 머릿속에만 맴돌았다.

네가 좋든 싫든 너는 결국 우리 모두의 장미였고, 우리는 네가 품은 가시까지 사랑했지.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야.

간단히 작별 인사를 나누고 회사의 문을 나서는 순간, 머리 위로 햇빛이 강렬하게 쏟아졌다. 눈이 부시고 부연 시야에 무언가가 아른거렸다.

벨져가 크리스티네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또 있었다. 루사노 수도원에서 다시 ‘문’을 접한 이후로 그는 환각을 보기 시작했다. 그는 아마 이 증세가 아홉 살배기 크리스티네 프리츠가 안타리우스에 납치된 이후 겪었었다는 환각과 비슷한 것이리라고 이해했다, 혹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우리는 너무도 닮았고 가는 방향마저 같으니 평행선처럼 교차하지 못하고 계속 각자의 길을 걸어갈 터이다. 그러나 그 끝에는 무한히 가까워질 것을 믿어.

쏟아지는 햇빛 사이로 하얀 나비가 나풀거렸다. 벨져는 허리춤에 맨 두 검으로 이 나비를 베어버리는 상상을 한다. 그러면 환각이 사라지지 않을까. 그는 하얗게 나풀거리며 쏟아지는 나비 떼를 바라본다. 입을 굳게 닫고 검을 뽑아들지만 번쩍이는 섬광의 궤적은 나비 사이만 스쳐지나간다. 나비는 꽃잎처럼 나풀거리며 바닥으로 쏟아지고, 다시 이어지는 환청에 벨져 홀든은 그만 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