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틀비] 불가사의2

트리비아 사이드. 이어지는 동인설정

1873년 : 아이트호벤 서커스, 박쥐 날개가 달린 어린아이를 등장시켜 큰 성공을 거둠

***

최초의 기억은 조롱과 폭력이었다. 서커스단의 천막은 어둡고 비좁아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였던가, 숨는 것이 쉬워졌다. 발치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열고 그 안에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살을 짓이기고 목을 누르고 낮은 목소리로 겁박하고 학대하고 낄낄거리는 사람들로부터 숨는 것도 쉬웠고, 곧 다시 나타나 그들의 머리를 낚아채 바닥에 끌어박고 구두굽으로 밟아버리는 것도 쉬움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이 소녀의 등에 달린 박쥐 날개를 툭툭 건드리며 낄낄거릴 때, 그리고 옷 너머 살을 쓰다듬을 때마다 소녀는 그것을 반복했고 곧 몇 명 남지 않았다. 시간도 세상도 멈춘 그림자의 공간에서 트리비아라고 불렸던 서커스의 소녀는 아주 오래도록 홀로 숨었다. 그녀가 다시 그림자 밖으로 완전히 나온 것은 모두가 자신을 잊었으리라고 확신했을 때였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달력의 앞글자가 바뀌었다. 사람들은 이제 파이프 대신 종이로 말아 만든 담배를 피고 전화를 통해 서로 소식을 전했다. 그 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세상 곳곳에 전구가 보급된 참이었다. 거리마다 색색의 불빛이 빛나고 사람들은 행복해보였다. 반짝거리는 거리에 홀로 선 까만 그림자의 소녀는 문득, 자신이 왜 숨어야 하는지 억울해졌다. 모두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어졌다.

트리비아는 무대에 서서 워킹을 했다. 사람을 만나고 화보를 찍었다. 사람들과 만남을 갖고 섹스를 했다. 연합의 건설에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세상 온갖 것을 마음대로 누리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 날은, 앳되고 눈에 신념이 굳으면서도 순수하게 웃는 안쓰러운 청년이 가지고 싶어졌다.

그에게 밀어를 속삭이고 키스를 하고 눈시울을 적시고 얼굴을 붉히고 목소리를 높이던 동안 아, 시간은 왜 그렇게도 빠르게 흘러가는지. 시간이 흘러도 그림자에 속한 여자는 늙지 않고 트리비아 카리나는 슬슬 다시 숨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정담을 나누고 몸을 맞대며 그녀는 몇 번씩 나이들어 주름진 루이스의 옆에서 영원토록 젊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생각은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된다. 숨는 것은 쉬울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세상은 그녀를 속박할 수 없다. 그림자 속에 모습을 숨겼다가 먼 시간이 흘러, 파란 머리의 루이스가 머리가 하얗게 새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때 즈음 먼 나라에서 새로운 이름 새로운 직업으로 지내면 그만이다.

생각의 끝에 그림자로 도망친 서커스의 소녀는 어둠을 세다가 결국 허황된 단꿈을 꾸고 만다. 나의 피난처에 그대가 있기를. 두 사람이 두 사람만의 공간에서 영원토록 행복하기를. 그래서 트리비아 카리나는 루이스에게 나타나 꿈결 같은 제안을 들려주고 밀어를 속삭이고 키스를 하고 눈시울을 적시고 얼굴을 붉히고 목소리를 높이고, 끝없이 연속하는 이 생에서 그녀는 이제 숨을 수가 없다. 왜 당신은 세상의 영웅이어서 나를 세상에 속박하는지.

[루이틀비] 불가사의1

왜 그녀가 다가왔는지 또각또각 소리가 나는 높은 힐을 신고 얼굴과 얼굴이 바로 마주치는 높이에서 눈꼬리를 살풋 접으며 웃음을 지었는지 이야기를 하다가 입술을 살짝 깨물어 핥았는지 숨이 닿을 듯 가까이서 이야기했는지 나는 아직 모른다. 그녀가 그 입을 열어 직접 말하기로는 사랑에 채인 내가 가여웠다고, 내가 이미 한 번 사랑의 허망함을 겪어 본 사람이기에 더 큰 부담 없이 다가올 수 있었다고. 나는 그렇다면 당신은 대체 몇 번의 허망함을 거친 것인지 묻지 못한다.

저녁 나직한 전등 아래서 당신은 피다 만 담배 불똥을 크리스탈 재떨이에 몇번 팅기며 눈끝을 내리깔다가 그대로 비벼 끄고는 한다.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부드러운 비단 스카프로 이물질을 닦아내 주고는 한다. 내가 가진 적도 바란 적도 없었던 삶의 파편들. 나는 그녀가 어떤 과거에서 비롯했는지 아직 모른다.

모델이었다는 것은 알지만 그 전에 무엇을 했는지 그 누구도 모른다. 그녀는 가족도 없고 친구도 적다. 당당히 사람을 대할 수 있는데도 사람을 피한다. 보통의 수줍은 처녀들이 낯을 가리는 것과는 다르다. 가끔 그녀는 나른한 오후의 창가에서 19세기의 이야기를 어제 일처럼 읊는다. 의아한 눈을 하면 당신은 눈꼬리를 내려 진득히 웃고 나는 차마 무엇을, 왜, 어째서, 같은 접두어를 입에 올리지 못한다. 당신은 대체 언제 무엇을, 그러면 당신은 왜 나를, 당신은 나를 정말로… 따위로 이어지는 질문들은 머릿속에서만 검게 맴돌고 당신은 불안해 보이는 나를 위로하듯 끌어안는다.

정사 후에도 그녀는 공허하다. 무엇 하나 걸쳐 가리지 않은 몸인데도 당신이 저 검은 창 너머를 바라보면서 무엇을 생각하는지 나는 모른다. 박쥐 같은 그림자가 당신의 곁에서 피어오르고 매끄러운 등허리가, 얇은 팔이, 당신의 실루엣이 사라지며 검은 그림자로 점점이 화한다. 나는 저 그림자가 두렵다. 두려워 몸이 싸늘히 식고 결정이 파르르 맺히는 소리가 난다. 그녀가 뒤를 돌아본다. 그녀는 밤처럼 까맣게 웃고 이내 그림자가 내 위로 드리워진다. 나는 눈을 감는다. 나는 이 그림자가 그녀를 삼켜버릴까봐, 아니, 나는 이 그림자를 사랑해서.

수위백합

#멘션_주신_단어_넣어서_트윗_단문_연성 스타킹 / 의미 / 평화주의자 / 라면 / 레드그레이브님의 팬티 / 질척질척 / 노랑
적당히 필터링해서 썼습니다. 여러가지 의미로 수위주의.

 

동화속 삽화에 나올 것 같은 여자였다. 나는 처음 봤을 땐 그녀가 어느 돈 많은 집의 고명한 따님이 틀림없다 믿었다. 하지만 이렇게 나와 같은 방에 더부살이하게 된 것을 보면 결코 그런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겠지. 그런데도 그녀에게서는 빛이 났다. 입매 가장자리는 늘 조금치 뺨 쪽으로 들려 있었고 꼬박꼬박 닦은 치아는 노랑 기도 없이 하얗게 고르다. 나는 그 멍청하게 예쁜 얼굴이 치 떨리게 싫었다.

“나쁜 아이들은 아닌 것 같은데. 네가 좀 더 마음을 열고 다가가 보는 게 어때?”

“내가 왜? 나는 언니 같은 평화주의자는 못 돼서.”

“에이, 그렇게 말해도 말야. 너는 착하잖아. 그렇지?”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나랑 같이 살아주지도 않을 거구 말이야. 우리 착한 동생. 나는 살갑게 웃으며 내게 뺨을 부비는 그 여자의 멍청함이 치 떨리게 싫었다. 내가 그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면, 착하다고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살이 닿는 그 감촉에 온갖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면.

그 날 그 여자는 내가 라면을 먹는 동안 스타킹을 허물처럼 벗고 있었다. 나는 구멍난 스타킹을 버리는 대신 매니큐어를 발라 때우는 그녀에게 건성건성 물었다. 새 스타킹 살 돈도 없으면서 답잖게 치마는 왜 입느냐고. 그리고 그녀는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아무 것도 몰라야 할 멍청한 여자가 감히 얼굴을 붉히고 주제에 꿈과 사랑을 논했다. 그래서였다.

죽던 순간에, 그 생각 없는 여자는 비로소 내 질척거리는 감정을 이해했을까? 드디어 나를 마음 깊이 증오하고 원망했을까? 내가 얼마나 그녀를 증오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얼마나,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그 감정의 깊이를.

갈 데 없는 눈물 몇 방울이 떨어졌다. 흐느끼다 보니 허기가 졌다. 아까 먹던 라면에 젓가락을 꽂고 몇 가닥을 입에 물었다. 차갑게 식어서 맛대가리가 없었다. 나는 젓가락을 내던지고 걸신들린 듯 그녀의 팬티를 벗겼지만 그녀 역시 차갑게 식어서 맛대가리가 없다. 이제는 모두 의미 없게 된 일들이다. 미소가 따뜻했던 방은 구석까지 싸늘하게 식었다.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홀든자넷(꼬마검들)

그때 크리스티네 프리츠가 만으로 열 살, 이글 홀든이 열두 살, 벨져는 열네 살 다이무스는 열일곱 살이었다. 만날 때마다 무슨 까닭인지 심기를 긁어놓고 기세 좋게 날뛰는 (다이무스를 제외한) 두 형제를 크리스티네는 도저히 혼자 힘으로 버텨낼 수가 없었다. 형제 둘이 겉보기보다 훨씬 죽이 잘 맞기 때문이기도 했고, 남자애들이 크리스티네보다 나이도 많고 키가 크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자아이는 사내아이보다 좀 더 이른 성장기를 맞는 법이라. 이글이 프리츠 가문의 검술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자신들 같은 어린 후계자가 없지 않냐고 놀렸을 때 크리스티네는 이글의 목 바로 앞까지 서슬 퍼런 레이피어를 들이밀었다.

“나와 겨뤄 보면 그런 말은 쉽게 할 수 없을걸?”

흥미를 느낀 벨져가 심판을 보았다. 이글은 내심 요 맹랑한 여자애 성격이나 자세가 좋은 것에 구미가 당겨 실력이 얼마나 되나 간이라도 볼 심산이었다. 기본적인 포즈나 흔들림 없이 전방을 멀리 보는 눈빛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봤자 여자애라, 태도를 들고 쓰는 홀든 가문의 검술에 비해서는 터무니없이 부드러웠다. 자기 키보다 큰 태도를 들고 막으면 저런 공격 못 막을 리가 없지. 이글은 빙글빙글 웃으며 공격을 여유 있게 흘려버렸다. 그것만으로도 팔랑거리는 드레스를 여자아이는 멀리 나가떨어져 좀 심했나 싶던 찰나, 소녀는 바닥을 딛고 빠른 스텝을 밟으며 이글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칼끝이 거의 눈앞에서 이글의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그대로 제압당할 위험이 있었고, 무엇보다 갑자기 품으로 파고드는 계집아이의 얼굴에 당황해버려. 이글의 빠른 시력과 본능은 반사적으로 가장 효율적으로 대처할 방법을 찾아냈다. 한 쪽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기세 좋게 마지막 승리의 쐐기를 박으려던 크리스티네는 그대로 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아얏!”

“뭐야, 크리스티네. 너무 진지하면 재미 없잖아.”

그리고 이글은 그대로 칼을 들어 용케 놓지 않은 크리스티네의 손에서 레이피어를 쳐내버렸다. 소년의 발밑에 크리스티네의 드레스 자락이 밟혀 있었다.

“이글이 이겼다.”

그리고 이어지는 차가운 벨져의 목소리에 크리스티네는 바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번쩍 들었다.

“받아들일 수 없어. 이글은 비겁한 방법을 썼다고. 이건 정정당당하지 못해!”

벨져는 잠시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았다. 직접 눈으로 본 크리스티네의 실력은 확실히 기대 이상이었다. 홀든 가의 아이와 대등하게 겨룬다는 것 자체가 그들 형제 외의 타인, 그것도 여자아이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고 신속함과 날카로운 시야 역시 그가 보아 온 여느 검사들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기본기가 달랐다. 크리스티네의 검술을 유심히 살펴 보면 아직 기술이 모자라다. 공격이 실패했을 때 소모되는 힘을 줄이고 빠지는 법, 가벼운 동작으로 상대를 교란시키는 법. 적어도 검을 배운지 몇 년 이상 되지는 않은 것 같아, 계속 싸우다가는 분명 사소한 부분에서 격차가 벌어져 힘만 잔뜩 뺄 것이 뻔했다. 더 험한 꼴 보기 전에 일부러 결정지어 준 것인데. 벨져는 한숨을 쉬었다.

“크리스티네. 네가 보통의 짐덩어리보다 조금 나은 것은 인정하지. 하지만 네가 여자인 이상, 갈수록 우리와 격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벨져 홀든이 이런 말을 입에 담았다는 점에서는 엄청난 칭찬이었으나, 명문 프리츠 가문의 검사들에게 칭찬을 자자하게 들어온 크리스티네가 그런 것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소녀는 그대로 다시 쥔 검끝을 돌려 벨져에게 향했다.

“나는 그냥 여자가 아니야. 프리츠 가문의 여자지!”

“쯧. 기껏 생각해서 말해줬더니.”

팔을 괸 채로 벨져가 혀를 쯧 찼다.

“네가 검술에 대해서 얼마나 알지. 지금 네가 얼마나 편한 환경에 있는지 알고 있나? 우리가 최고의 검술을 잇기 위해 어떤 훈련을 하는지는 알아? 방금도 드레스 자락을 밟혀서 졌지. 그런 드레스. 그런 거추장스러운 머리카락을 하고 다니면서 제대로 싸울 수나 있을 것 같아?”

뭐라는 거야, 저 새끼는. 순간 긴 머리를 높이 묶은 이글이 어깨까지 머리를 기른 벨져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크리스티네는 자신답지 않게 분에 잔뜩 겨워 이상한 점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드레스는 벗으면 돼. 머리카락은 자르면 되고!”

“자기가 얼마나 보호받는지도 모르는 여자애가. 그럼 해 봐.”

경멸하는 어조에 어린 크리스티네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벨져 쪽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검을 잡았다. 왼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채를 쥐었다.

망설임 없는 행동에 벨져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나. 그러나 이미 한번 뱉은 말을 취소하기엔 벨져 홀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를 않았다. 크리스티네가 팔을 확 당기고, 벨져가 뒤늦게 후회하려는 바로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크리스티네의 손을 잡았다.

“내가 부탁하지, 크리스티네. 지금 행동은 거두어 주었으면 해.”

그러나 이미 뿔이 잔뜩 난 작은 아가씨의 고집을 파하기에는 과묵한 다이무스의 부탁도 충분하지가 못했다.

“상대에게 행동을 거두라는 말을 할 때는 그 이유를 설명해 주세요, 다이무스 홀든 경.”

다이무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고 크리스티네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머리카락이 이렇게 예쁜데 자르는 건 너무 아깝지 않나. 나는 크리스티네의 지금 모습이 마음이 든다. …이걸로는, 불충분하니?”

크리스티네는 순간 파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뇨.”

“그러면 됐구나. 가자. 한나 유모가 맛있는 파이를 해 놓고 기다리고 있어.”

크리스티네는 다이무스의 손을 잡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동안 나머지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다이무스의 동생들은 뭔가 일 돌아가는 게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툴툴거리느라 크리스티네에게서 멀리 떨어져 걸었고 따라서 다이무스와 크리스티네가 나누는 대화를 듣지는 못했다.

“있죠, 오빠.”

소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또렷한 결의에 차 있었기에 다이무스는 절로 발을 멈추게 되었다.

“내가 나중에 언젠가, 정말로 벨져 말처럼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다면… 그러면 그때는 내가 싫어요?”

다이무스 홀든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잠시 머리를 짧게 자른 크리스티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좀 더 자라난 소녀의 모습도 상상해 보았다.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가 크리스티네를 돌아보니, 실제의 소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목이 빠져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귀여운 소녀. 다이무스는 크리스티네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소녀를 안아 올리고 귓가에 작게 대답을 속삭였다.

크리스티네는 그제야 마음이 풀려 행복하게 웃었다.

“그럼 괜찮아요.”

 

나에게 그녀는 언제나 소녀. 처음 느낌 그대로.

[루이틀비] 담배피는 트리비아 보고싶다

연합 능력자들의 틈바구니를 겨우 빠져나와, 지치고 상처입은 그들처럼 허름한 방이었다. 루이스는 거듭된 전투로 만신창이었고 트리비아는 필사적인 비행으로 완전히 녹초가 된 것 같았다. 떨어져나간 가구는 널빤지로 대었고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새었다. 조명 불빛은 밝질 않고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깜박였다. 다행히도 침대는 두 개 있었는데, 한 쪽에서 트리비아 카리나가 벽에 등을 대고 짐짓 무심하게 걸터앉아 있었다. 루이스는 꽤 지쳤을 텐데도 긴장을 하는 티도 그렇다고 놓은 기색도 없이 자신 쪽으로 얼굴을 똑바로 향한 그녀가 완전한 화보 속의 모델 같다고 생각했다.

“정말 고마워요, 트리비아.”

“뭘. 감사 인사를 들으려고 당신을 구한 건 아냐. 아, 그렇다고 연합을 위해서 몸 바쳐 봉사한 것도 아니지만.”

“그럼 왜…”

“글쎄, 왜일까?”

그녀가 키득거리며 고개를 내리자 까만 곱슬머리가 어깨 위로 기울어져 내렸다. 그녀는 그대로 다리를 옆으로 돌리고 망사로 된 밴드 스타킹을 벗어내렸다. 일련의 동작 하나하나가 화보 속의 한 장면 같아 작품을 감상하듯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루이스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번쩍 일어났다.

“먼저 씻을게요.”

그녀는 대답 없이 박쥐 같은 눈동자로 그를 빤히 바라보더니 홱 고개를 돌린다.

“저기, 트리비아?”

그녀는 고양이처럼 꼿꼿이 등을 세우고 방 구석의 탁자 위로 걸어갔다. 언제 챙겼는지 커다란 파이프 한 대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창문을 반쯤 열고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그래도 코끝에 매캐한 냄새가 돌았다. 마약에 취한 것 같았다. 루이스는 그대로 멍하니 물었다.

“담배를 피나요, 트리비아?”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어쩐지 부끄러워서 루이스는 등 뒤의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예전에는. 모델은 때로는 사진 속에 담기기 위해서 별별 일을 다 해야 하거든. 하지만 건강에는 확실히 좋지 않아서. 사실 그렇게 취향도 아니고. 날개를 공개하고 런웨이에서 내려온 이후로 그만 뒀어.”

“사진을 찍기 위해서… 담배도 핀다고요?”

“응. 당신은 모르겠지… 하지만 아마 당신도 곧 알게 될 거야. 사람이 시선을 끌고, 정상의 자리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요해. 나 같은 모델에게는 나만의 특징적인 그림이, 패션을 완성시켜주는 아이템이 필요했지. 그 도구 중 하나가 바로 이 담배였어. 당신이 보기에는 어때, 루이스?”

“이제는 필요가 없겠네요.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멋진 날개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녀는 잠시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에서 파이프를 떼었다. 그러나 곧 다시 눈을 내리깔고 파이프를 입에 물고는 루이스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녀의 뒷모습 위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먼저 씻을게.”

그녀는 다시 런웨이의 모델처럼 빙그르 뒤를 돌고는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그런데 트리비아.”

어떤 것이 후회할 일일까? 어떻게 해야 지금의 상황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앤지 헌트를 호위하면서, 홀든 가의 귀검사들을 만났을 때, 그리고 벨져를 단신으로 상대할 때 그는 수도 없이 자신에게 되물었지만 지금만큼 치열하게 고민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한 번 잃었기에. 그만큼 더 조심스럽고 귀중했기에.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후회할 것은 확실하게 알았다.

“런웨이도 아닌 지금, 취향도 아닌 담배를 지금 왜 다시 핀 거죠?”

이 순간 루이스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거나, 아니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녀는 다시 파이프를 질끈 물었다. 지금 그녀는 확실히 시선이 끌릴 만큼 아름다웠다. 그는 이제야 파이프를 문 그녀의 내리깐 속눈썹이 떨어지는 모양과 그 위로 흩어지는 불빛 몽환처럼 흐린 연기 뒤로 모델의 근육이 긴장하는 모양을 볼 수 있었다. 낙후되어 깜박거리는 불빛 속에 연기가 한숨처럼 올랐다.

“있지, 루이스. 나는 나를 사랑해. 나는 자존심이 강한 여자예요. 그래서 남들이 끌어내리기 전에 정상의 자리에서 스스로 멈췄지. 애정을 구걸하고 싶지는 않아. 그렇지만 지금 나에게 당신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일은 더 자존심이 상해. 그러니까 나는.”

 

작전에서 돌아온 후로 두 사람은 몇날 며칠을 같이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그 짧은 며칠 동안 모든 것이 끝났다. 성도 없는 C급 능력자 루이스는 여왕의 수완에 의해 연합의 영웅이 되었다. 영웅은 빠르게도 여자를 얻는다는 소문 역시 같이 퍼졌다. 영웅과 정상의 모델. 미인을 얻은 영웅도, 한참 연하의 영웅을 낚아챈 미녀도 명예롭고 불명예로운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다. 염문이 섞인 영웅담은 더할 수도 없이 화려해 부러움과 동시에 경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아는 사람들은 두 사람 다 참 무던히도 수줍다고 했다.

기도같은 고백과 기울어 떨리는 눈시울. 사랑하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루이스는 이미 한 번 사랑을 잃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 마음이 얼마나 중한지를 안다. 트리비아 카리나는 결코 누가 뭐라고 쑥덕거릴지 모르는 순진한 처녀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상관도 안하고, 신경도 아니 쓰고. 그 방 안에서는 내내 소곤소곤거리는 소리만.

낡고 허름하고 서로가 있어 아늑했던 방. 기도같은 고백과 기울어 떨리는 눈시울. 매콤한 연기에 그의 눈시울도 젖어들었다.

이 작은 세상 아래, 누군가를 진심 다해 사랑하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