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가챠5성 리퀘받은 에이케이인데 케이토>에이치나 에이치+케이토같은 느낌이 되었네요. 싸움제에서 얘기하는 어린시절이 너무 귀여웠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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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행사가 열린 지 사흘째, 호된 매질을 당했다.
불공을 드리는 행렬을 지켜보며 향로가 가득 찰 때마다 새것으로 갈고, 향이 떨어질 때마다 채워 넣는 것이 어린 케이토의 일이었다. 가장 쉬운 일이니까 할 수 있지? 고개를 끄덕인 케이토는 바닥까지 길게 떨어지는 승복을 입고 오도카니 한쪽에 앉았다. 햇볕 속에서 즐거운 얼굴로 시끌벅적 떠들어대는 방문객들을 쳐다보아서는 안 된다. 고즈넉이 그늘진 한구석의 어둠 속에, 사찰의 일부처럼 무릎을 꿇고 가만 앉아, 연이어 들어오는 사람들이 이쪽을 신경쓰지 않도록. 그렇게 서로 신경쓰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사흘째 되는 날 불청객이 있었다. 야산에서 떠돌아다니며 가끔 절밥을 얻어먹는 고양이 녀석이 케이토를 알아보고 슬금슬금 케이토가 앉은 그늘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야옹거리며 꼬리를 흔드는 녀석과 앉아 있던 케이토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귀엽다며 깔깔 웃는 여자들의 웃음소리와 수군거리는 남자들의 목소리에 경건하던 사찰의 분위기가 엉망이 되어서, 케이토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고양이를 안고 뛰듯이 절간을 나섰다. 안아 든 채로 갑작스레 뛰어가자 고양이는 애옹애옹 울면서 발버둥을 쳤고 케이토의 콧등이며 팔에 발갛게 할퀸 자국이 생겼다. 부끄러움이 앞서 상처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한참을 뛰다 보니 문득 콧잔등이 시큰거려 케이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고양이가 할퀸 상처에 서늘한 것이 내려앉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개울에, 돌다리 위에 나풀나풀 눈발이 내려앉아 이미 반쯤 하얀 세상이 점점 더 새하얗게 물들어 갔다. 케이토는 넋을 잃은 듯 새하얗게 빛나는 설국을 걸었다. 삼베로 만든 승복 자락이 눈 위에 질질 끌렸다. 사흘 만에 보는 세상에 눈이 부셔 케이토는 야산 꼭대기까지라도 올라가고 싶었다. 아니면 이 산을 나가고 싶었다. 이렇게나 눈이 내리면 산도 바다도, 개울도 도시도 세상 끝까지라도 새하얄 텐데.
눈에 젖어 무거워진 승복 자락을 끌고 돌아온 이미 절간은 난리였다. 향로가 넘쳐서 바닥에 그을린 자국이 생겼고 향이 동나서 불공을 드리려던 사람들이 길게 줄 선 채로 웅성거리다가 돌아갔다. 부모님께 불려간 후 종아리에 고양이가 할퀸 자국보다 훨씬 굵고 새빨간 자국이 여러 줄 생겼다. 매를 맞으며 이를 악물었지만 아픔보다도 아쉬움이 더 컸다. 아직 그 눈부신 설국을 끝까지 보지 못했는데.
2. 병원의 약물 냄새는 향 냄새와 비슷한 점이 있다. 코를 자르르 찌르고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힌다. 병 냄새가 나는 침묵 속에 사람들은 애써 화사한 꽃을 들고 오고 부자연스럽게 소란을 떨지만 기본적으로는 가라앉아 있는 공간이었다. 보통 아이들이라면, 이런 곳에서 오래 견디지 못하겠지. 그래서 에이치 녀석도 나가버린 걸까.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 케이토를 알아본 사용인이 반갑게 부산을 떨었다.
“왔구나, 케이토. 어서 에이치 도련님 좀 찾아주련. 네가 오니 어쩐지 안심이구나. 얘기를 듣고 바로 널 보내주다니 그쪽 어르신도 친절하시지.”
행사에서 사고를 쳐서 반쯤 쫓겨난 거지만요, 라는 말은 속으로 삼키고 케이토는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호화로울 정도로 넓은 병실은 주인 없이 빈 채, 뽑아 놓은 링거 선 몇 개만 허공에 늘어져 있었다. 너는 이렇게 많은 사용인의 눈을 어떻게 피하고 사라진 걸까. 밖에 나갈 만한 곳이라도 있나 보려고 창가에 기대 선 케이토는 곧 선득한 느낌에 놀라 뒷걸음질쳤다. 대리석 창틀이 창 틈새로 조금씩 날아온 눈에 식어 서느렜다.
아직까지도 눈발이 풀풀 날리고 있었다. 병원은 온갖 방 구석구석을 뒤지는 텐쇼인 가의 사용인들로 소란스러웠다. 설마 병약한 에이치가 이런 날씨에 밖에 나가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 녀석은 꿈이 크니까.’
정확히 말하면, 꿈만 크지. 매일같이 골골대느라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그렇게 생각하며 꼭대기 30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린 케이토는 옥상 계단으로 향했다. 조그맣게 난 철문의 손잡이를 돌리자 열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힘주어 어깨로 문을 밀어보았다. 드르륵, 돌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더 볼 것도 없었다.
“에이치이이이이!”
그리고 갑자기 열린 문 쪽으로 바람이 불어 하얀 눈발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 가운데, 이쪽을 돌아보는 에이치가 있었다. 안 그래도 무서울 정도로 창백한 녀석이 눈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것이 사람이라기보다는 눈으로 만든 조각상 같았다.
“케이토.”
난간에 기대선 채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릴 듯 말듯 조그맣다. 어서 달려가 외투를 걸쳐 주고 뺨에 손을 대어 보았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곧바로 떼었다. 시체라도 이렇게 차갑지는 않을 것 같았다.
“대체 뭐 하는 거냐, 네 녀석은! 이런 날씨에 바깥이라니 내일 제단에서 만나고 싶은 거지!”
“어떻게 찾아왔어?”
곧 끊길 듯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에이치는 작게 웃었다.
“아. 너도 설경이 보고 싶었구나. 어때, 케이토?”
에이치가 가리키는 손가락 너머 난간 아래로, 까마득하게 설국이었다.
세상은 온통 새하얬다. 한쪽 멀리 눈 덮인 산에서부터, 저 멀리 얼어붙은 강물이 보이고, 길마다 건물마다 하얗게 쌓인 눈이 색색의 불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점점이 희게 빛나는 세상이 아득해 숨이 멎을 듯했다.
“정말 하얗다. 그렇지?”
그리고 눈을 맞아 반짝거리는 에이치의 얼굴은 설탕을 입힌 과자 같았다.
“도시 밖은 더 근사하겠지. 방에 가서 그려 줘, 케이토.”
“멋대로 나와 놓고 뭘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가려고 하는 거야, 네 녀석은.”
“그야, 이렇게 눈이 내리는데 병실 안에만 있기 싫었으니까……, 그렇지만 네가 왔으니까 괜찮아. 여기서 보는 것보다 네가 그려주는 게 더 근사해.”
이렇게 웃는 모습만 보면 말썽이라고는 부릴 줄 모르는 천사 같지. 금방 하늘로 올라갈 것 같은 천사. 고운 설탕 과자는 곧 깨질 것처럼 보인다. 케이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3. 그날 밤은 에이치의 병실에서 함께 잠이 들었다. 결국 감기에 걸려 열이 펄펄 끓는 에이치가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케이토. 여기 그려준 것들 직접 본 거야? 아니. 사실 나도 못 봤어. 그냥 상상이지. 그러면, 나중에 같이 보러 가자. 병원 옥상 꼭대기보다 훨씬 높은 곳으로. 누구라도 올려다볼 그런 곳으로……. 그때는 훨씬 근사한 경치를 보여 줄게……. 에이치는 계속 열에 들떠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아니, 이미 잠이 든 채였다. 이렇게 머리를 맞댄 채 잠이 들면 우리는 같은 꿈을 꾸게 될까. 얼굴에 닿는 숨이 기침처럼 잘았다. 퐁, 퐁, 퐁, 가는 날숨을 느끼며 케이토는 눈을 감았다. 꿈결에 퐁, 퐁, 퐁, 숨이 닿을 때마다 에이치가 하늘을 날다가, 설탕 과자처럼 웃다가, 창백한 시체로 바닥에 쓰러져 있다가, 다시 하늘을 날다가 했다. 우리는 언젠가는 저 높은 곳으로 갈 거야. 아무도 닿지 못할 곳으로, 누구라도 올려다볼 그런 곳으로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