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뮤님이 신청해주신 단챠형 커미션입니다! 학교 근처의 먼발치에서 안즈를 발견하고 바라보며 완벽하게 빛나는 안즈를 손에 넣기를 바라는 에이치, 독백 위주, 애정어린 집착 냄새..라고 하셔서 좋아하실 것 같은 느낌으로 써봤습니다 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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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50분. 시침과 점점 가까워져 가는 분침을 확인하며 에이치는 초조한 기분으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정장을 입은 그는 유메노사키의 교문에서도 눈에 띄어, 지나가는 사람 몇이 그를 보고 수군거렸다. 가끔 알아보는 기색을 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멀리에서 수군대다가 사라지는 것이 전부다. 나름대로 작년까지 ‘황제’로서 군림했던 남자였으나, 그가 졸업하고 유메노사키에 발을 끊고 나서 한때의 전설은 한때의 전설로만 남았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청춘은 현실 속에 묻혀버린다. 시간은 한 번도 그의 편인 적이 없었다.
‘바보 같네.’
한때 그렇게 집착했던 청춘이 덧없이 흘러가버린 것을 피부로 느끼며 에이치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유메노사키 근방에 있는 기업체와의 회견에 굳이 대표인 직접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은 바로 에이치 자신이었다. 회견은 한 시간 후, 출발하기까지 남는 시간은 고작해야 30분. 지금 그의 몸은 결코 좋은 상태가 아니었고, 바깥에 서서 쌀쌀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동안 오한이 들었다. 텐쇼인 에이치는 결코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원하는 것은 곧바로 팔을 뻗어 손안에 움켜쥐어야만 하는 성미였다. 지금까지 그 과정에서 망가뜨린 것들에게는 미안함을 안고 있었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시간은 한 번도 그의 편인 적이 없었기에.
하지만 어쩐지 지금은 얌전한 아이처럼 교문 앞에 서서 하염없이 기다리게 되는 것이었다. 어째서? 에이치는 자문했다. 그리고 문득, 겨울이 끝나가던 날의 졸업식을 떠올린다. 몽글몽글한 눈송이가 흩날리며 시야를 부옇게 하고, 졸업을 축하하러 온 후배들 중에서 이제는 낯이 익은 한 소녀를 마주치고, 자신도 모르게 짓궂은 소리를 했던 순간을.
“그동안 고마웠어, 안즈쨩. 너에게는 많은 고생을 시켰구나. 이렇게 내가 졸업하는 게, 네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려나?”
마지막까지 얄궂은 소리에 소녀는 당황한 표정을 했다.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순간까지 이런 얼굴을 보며 즐거워하는 자신도 참 악취미라고 생각하며 에이치는 자조했다. 하지만 소녀는 곧 거짓말처럼 웃는 것이었다.
“마지막처럼 말하시네요.”
“그야, 이제 졸업이잖아.”
“선배는 계속 업계에 있으실 거잖아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저도 금방 따라갈게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순진한 말을 하던 소녀의 얼굴을 떠올리고 에이치는 피식 웃었다. 너는 내게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오한이 가라앉았고, 학생들의 시선이 아까처럼 신경쓰이지 않았다. 곧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왁자지껄 교실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그중에 책가방을 대충 걸친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있었고, 세상이 흐드러졌다.
이제 3학년이 된 안즈는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티 없는 웃음을 입가에 띠고 있었다. 여자라기엔 너무 티가 없고, 소녀라기엔 이제 부쩍 여자 태가 나는 그녀는 뒤따라가는 한 무리의 학생들 틈에서 의젓하게 앞장서고 있었다. 신설된 프로듀서과의 아이들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제 유메노사키는 다시는, 한 명의 독재자가 이끄는 학원은 되지 못할 것이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나는 언젠가 네가 나를 부수어주기를 기다렸지. 하지만 너희는 나에게 복수하지 않았어. 순진하게도 모든 것이 잘 될 것처럼 굴었지. 그렇게 생각하며 에이치는 걸어가는 안즈를 지켜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순진한 꿈을 꾸는 소녀는 짧은 머리가 길어 이제 허리까지 내려왔고 눈웃음이 짙어졌다. 키가 좀 더 커서 치마가 껑충 올라갔고 그럼에도 아직 보조개가 핀 뺨에 앳된 기가 남아있었다.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대로인 부분 혹은 달라진 구석 하나하나가 눈에 박혔다. 그리고 그런 것을 의식하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나는 네가 언제야 다 필지 궁금해. 순진한 네가 졸업을 하고 이 지독한 토양에 나오면 너는 견디지 못하고 엉망진창이 되어 시들어버릴까, 아니면 내 앞에서 버티었듯이 만개해서 짙은 향기를 피우게 될까. 에이치는 눈을 반 접어 웃었다. 즐겁고 황홀했다. 아, 나는 이걸 위해 여기까지 왔구나. 어떤 쪽이든 기대되어 견딜 수가 없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다림이 두근거린다는 걸 알았어. 처음으로, 시간이 내 편을 들어주었어.
그러니까 지금은 이 기다림을 만끽해야지. 에이치는 다시 한 번 시계를 확인하고 등을 돌렸다. 회의까지는 조금 시간이 남았지만, 아직은 지켜보며 기다리는 것만으로 이 두근거림을 만끽할 셈이었다. 주머니에서 기기를 꺼내어 차를 부르려는 찰나, 등 뒤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선배!”
등을 돌리자 말간 낯에 웃음기를 띠고 손을 흔들며 이 쪽으로 달려오는 안즈가 보인다. 꽃이 피듯이 환하게 웃는 얼굴이 보이고, 하얀 얼굴이 흔들리며 점점 이쪽으로 가까워지고, 에이치는 손을 들어 안즈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그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 늘 그랬듯, 그녀의 당황한 얼굴을 바라보며 아이처럼 웃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손안에 쥔 아이처럼 해맑은 얼굴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