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

의미 없는 단문, 우울함. 세미 아포칼립스, 재해 이후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미카와 슈.

주간미카슈 – 농담

에서 이어지지만 어차피 의미불명이므로 굳이 안 읽으셔도 됩니다.

 

***

 

카게히라가 돌아왔다. 멀리에 있었지만, 귀를 긁는 목소리 덕분에 겨우 알아챌 수 있었다. 카게히라의 목소리는, 이 탁한 세상에 미안하겠다 싶을 정도로 높고 명랑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카게히라가 왔는지 아닌지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시야가 계속 흐릿한 것이 모래바람이 자욱한 탓인지, 아니면 며칠 전부터 뱃속과 이마를 벌레처럼 간지럽히는 열 때문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둘 다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상한 것이 세상이 이상한 탓이거나, 아니면 세상이 이상한 것이 우리가 이상한 탓이거나.

“쨔잔. 이것 봐라, 스승님~! 운좋게 구해왔다 아이가.”

미카가 장난감을 자랑하는 어린아이처럼 큰 가방을 팔 위로 번쩍 들고 흔들었다. 슈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가, 매캐한 공기가 목구멍으로 들이치는 바람에 콜록거리며 금방 입술을 닫았다. 카게히라는 어떻게 저렇게 발랄한지 모를 노릇이었다. 이렇게 탁한 세상에서 어떻게 이렇게 힘차게 다닐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고, 가방을 갈취하는지……. 기침이 나는 바람에 이번엔 누구를 죽였냐고 묻지 않을 수 있던 것이 다행이었다.

“자아, 스승님. 이것만 쭉 들이키면 스승님도 금방 기운을 낼 거다.”

가방을 정신없이 뒤적거리던 미카가 작은 약병을 들어올리며 슈에게 씩 웃어보였다. 지금 재해 지역에 돌고 있는 정체불명의 열병에 대한 항생제. 슈는 구역질이 이는 것을 느끼며 미카의 가슴에 손가락 두어 개를 가져다대었다. 상대를 밀어낼 힘조차 없는 상태에서 하는 저항이었다.

“왜, 스승님?”

미카가 천진한 눈으로 묻는다.

“그러니까 너는 또, 나 때문에 사람을 죽인 거지…….”

“스승님은 항상, 그래. 잔걱정이 많다. 아무 생각 말고 일단 들이켜 도. 이거 의외로 달고 맛있고, 약효도 금방 올 기다. 금방 졸리거든. 그럼 그냥 한숨 푹 자면 된다.”

“지금은 아냐. 구역질이 날 것 같아…….”

힘없이 고개를 내젓던 슈가 문득, 얼굴을 들었다.

“카게히라.”

“응!”

“이 약이 어떤 식으로 듣는지, 어떻게 알고 있지?”

미카는 별 말을 다 한다는 듯 헤실헤실 웃었다. “아, 다른 사람을 보다보니까~!”

“그럴 리가. 약이 보였으면, 그 전에 네가 죽였겠지.”

호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간 미카의 입꼬리 끝에, 무언가 석연치 못한 기색이 걸렸다. 색이 밝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너, 설마…?”

믿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츠키 슈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간다. 모두가 병들어 가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미카만 건강하지? 아니, 미카만 건강할 리가 없다. 건강하게 보이고 싶었을 뿐이다. 무거운 것이 쾅, 하고 머리를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스승님.”

계속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었지만, 한 번도 다시 굴복하고 싶지는 않았던 절망이.

“스승님, 그런 표정 하지 말고.”

온 몸을 휘감고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자신이 아픈 건 괜찮아도, 카게히라가 병들었다는 것만은, 죽어가고 있다는 것만은 견딜 수 없다. 그리고 카게히라는 그걸 알았던 게다. 알기에 숨겼던 거다. 비탄이 흐느낌이 될 것 같았다.

“스승님.”

미카가 단호한 얼굴로 약뚜껑을 열더니 한입에 들이켰다. 그리고 슈의 옷깃을 잡아 자신 쪽으로 당겼다. 밀어낼 수 없었다. 네가 너무 안쓰럽고, 북받치고, 끔찍하면서도 사랑스러워서. 입 안으로 강제로 들어오는 물약은, 정말로 달았다. 저물어가는 세상에서 이렇게 달콤한 것은 애정뿐이니 밀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참 동안 정신없이 혀를 얽다가 겨우 떨어지고 보니, 흐릿하게 보이던 세상에 선명한 색채가 돌기 시작한다. 벌써 약효가 있는 건가? 아니, 그저 해가 저물고 있을 뿐이었다. 하늘이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한 붉은색으로 물들어간다. 슈는 이 색채가 아마 미카가 가져다 준 것이라고 믿는다. 아니지, 이 빛바랜 세상에 있는 모든 색채 자체가 미카가 아닐까? 너는 제 몸을 불태우면서 저물어가는 태양이 아닐까? 점멸하는 세상에서 언젠가 너는 떴다가, 붉게 가라앉았다가, 제 몸을 불사르면서 다시 떠오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끊겼다.

어떤 새의 꿈을 꾸었다. 새는 하늘을 날고 싶었으나, 죽어가는 사람의 시취에 이끌려 땅에 내려왔고, 그 사람이 주는 몇 조각 빵과 호의에 이끌려 곁을 맴돌게 되었다. 때문에 본래 창공을 날 수 있었을 새는 사람을 따라서 계속 땅을 기고 있다. 그리고 이츠키 슈는 그 새의 이름을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는 작은 까마귀, 내 거추장스럽고 사랑스러운…….

눈을 떴을 때는 곁에서 미카가 앉은 채로 졸고 있었다. 슈는 푹 꺼진 아이의 뺨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가져다 대다가, 차마 대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이것은 죄이다. 우리가 함께하고 교합함으로써 수많은 죄를 낳았다. 차마 만질 수 없었다. 하지만 눈을 돌리지는 않았다. 슈는 잠깐 망설이다가, 미카의 어깨 위에 가볍게 머리를 기댔다. 어깨 너머로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이 느껴진다. 자는 척 하고 있는 것을 금방 눈치채 버려서, 녀석이 얄궂으면서도 귀여웠다.

이츠키 슈는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 재해가 일어난 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슈는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해,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매일 자기 전마다 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어느 날이든 마지막에는, 결국 하나의 이름만 거듭해 외게 되는 것이었다. 카게히라 미카, 카게히라 미카, 카게히라 미카……. 하고, 가장 마지막까지 지울 수 없는 이름을.

슈는 몸에 바로 전해지는 미카의 심장 박동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차라리 이 모든 게 장난이었으면 좋겠어. 네가 나로 인해 지은 모든 죄와, 지금까지 했을 수많은 거짓과 노력과 그로 인한 달콤함과, 너의 기만과 그걸 모른 체 하는 나의 기만이. 그리고 이는 전부 나로부터 비롯되었으므로, 이 모든 것을 피할 수도 없고, 결코 피하지도 않을 거라는 사실을.

 

소나기

#주간_미카슈 주제 : 카페, 소나기

슈가 외국에 나가 있었다는 설정.

 

***

 

20xx년 7월 14일, 이츠키 슈는 공항에 도착했다. 기내에서 책을 읽다가 불편한 자세로 잠이 든 탓에 근육이 뭉친 데다가, 피로로 몸이 무거워 바닥에 늘어붙을 것 같았다. 수화물을 찾는 것도 통관 절차도 번거롭게 느껴져 어서 돌아가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귀에 들어오는 모국어는 정겨웠지만, 아직도 딱히 집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지 않았다. 얄브레한 가디건을 걸친 채 캐리어를 끌고 기계적으로 걸어가던 이츠키 슈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들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반 년간 보지 못한 얼굴을 떠올렸다. 창백하다시피 희게 마른 얼굴에 기이할 정도로 밝은 눈동자가 눈에 띄는, 꽤나 강렬한 인상이지만 여전히 앳된 기가 남아있는 청년의 얼굴. 그래, 이 나라에는 그 아이가 있다. 그리고 그제야 이츠키 슈는 생각한다. 나는 돌아왔어.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왁자지껄한 공항과 캐리어 바퀴 끌리는 소리, 구두 소리가 소음처럼 페이드 아웃되고 머릿속을 스치는 카게히라 미카의 목소리. 스승님. 슈는 빠른 발걸음으로 걸으며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소년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한데 이 목소리가 정말 미카의 것이 맞는지 아니면 자신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되뇌이다가 그려낸 환상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네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다.

갑작스러운 일정 때문에 온 도쿄였다. 미카에게 말하면 자신의 일정을 무리하게 빼서 공항에 마중나올 게 뻔하기에 일부러 말해놓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구나. 슈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1시 37분. 일요일의 느즈막한 아침이었다. 그러고 보니 미카가 최근에 주말마다 시간을 보내는 카페가 있다고 했던가. 공항 밖으로 나온 슈는 택시 문을 열고 더듬더듬 생각나는 주소를 불렀다.

택시 기사가 고개를 뜨덕이고 시동을 걸자 부연 창 밖으로 희끄무레한 도시가, 나무가, 거리가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여름이었다. 7월의 일본은 후덕지근한 날씨였지만 그마저도 어쩐지 특별하게 느껴졌다. 한참동안 그렇게 창밖을 내다보던 슈는 택시 기사가 부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여기가 맞냐고 묻지만, 미카에게 카페 이야기만 들었지 실제로 와 본 것은 처음이니 아마 맞을 거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베이지색으로 벽을 칠하고 원목 탁자 위에 흰색 다구를 놓고 전면 유리를 댄, 깔끔하고 조용한 카페였다. 미카는 왜 이곳을 좋아하게 된 걸까. 여기에서 무엇을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슈는 차를 주문하고 탁자에 앉아 비행기에서 읽던 책을 다시 펼쳤다. Essays in Love. 책을 읽어내려가며 연애하는 주인공과 끌로에를 따라 하이드 파크, 켄싱턴 스퀘어, 그리고 여러 런던의 거리를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세찬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소나기였다. 빗줄기가 유리벽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슈는 뒷머리를 긁었다. 그래, 일본의 여름 날씨는 변덕스러웠지. 세차게 내리는 비에 가로수의 꽃잎들이 바닥에 떨어져 콘크리트 바닥에 달라붙었다. 엉망이었다. 이츠키 슈는 그 꼴을 보며 혀를 차다가, 제 꼴이 더 우스워 쓰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이런 날씨면 너라도 밖에 나오지 않겠구나. 괜히 헛고생을 했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이츠키 슈가 읽던 페이지에 책갈피를 꽂고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을 때

눈을 드니 그 얼굴이 있었다. 하얗고, 창백하고 깡말라서 걱정되고 그리운 얼굴. 후드를 눌러쓴 채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고 느릿느릿 걷던 카게히라 미카는 카페 안에 앉아 있는 슈를 발견하고는, 제가 헛것을 보나 걱정되는지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크게 벌리고 있었다.

슈는 문을 열고 달려나갔다. 여즉 손에 책을 든 채라는 걸 미카의 코앞까지 가서야 깨달았다. 곧 책이 바닥에 나뒹굴고 빠르게 비에 젖어들었다.

몇 년 전, 여름보다 더 갈증이 나던 때가 있었어. 지치고 지쳐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세상이 아무 의미 없는 무채색으로 보였어, 그런 적이 있었어. 그런데 삭막한 세상에 네가 툭, 하고 한 방울, 떨어진 거야. 나는 너를 피하려고 했지만, 해진 종이에 한 방울 떨어진 물은 금방 끝까지 번지기 마련이라. 네 덕분에 세상은 금세 수채가 되었지. 물처럼 투명하고 촉촉한 것들이 세상에 아롱아롱 꿈처럼 번져서 색채가 되고 서정이 되었지.

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카가, 우산을 놓고 젖은 손을 들어 슈의 뺨을 확인하듯 만져보더니 우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발꿈치를 바짝 들었다. 환상이 아닌 걸 알았으니 남은 부분을 마저 확인할 차례였다.

세찬 소나기였다. 주인을 잃은 우산이 바닥에 뒹굴고 책이 완전히 젖어서 눌어붙었다. 빗방울은 차갑고 옷은 젖어들고 세상에 남은 온기는 서로뿐. 두 사람은 조금이라도 체온을 더 나누고자 몸을 밀착한다. 달라붙고 젖어들고 수채가 되어 아롱진다.

영안(英眼)

#주간_미카슈 주제 : 꽃

오랜만에 썼더니 잘 써지지도 않는데다가 좀 타임오버네요 ^^; 이게 뭐지.. 이래저래 재활해볼 겸 의식의 흐름대로 썼습니다! 발키리와 꽃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얀끼 반 스푼 섞어서.

 

***

 

언제부터인가 거울을 보면 눈을 감고 오른쪽 눈 위를 손가락으로 가려보는 습관이 생겼다. 안대라도 해서 눈을 가려버리면, 역시 아이돌답지 않으려나. 지금도 스승님에게 반푼이 소리를 듣는데, 한쪽 눈으로만 생활하면 더 엉망이겠지. 카게히라 미카는 제풀에 피식 웃었다. 한숨이 섞인 웃음이었다.

양쪽 색이 다른 눈동자라는 게 결코 흔한 모습이 못 되어서, 어려서부터 미카의 얼굴은 남의 주목을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가장자리로 슬쩍 걸어도 쏟아지는 시선들은 결코 얌전하고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렌즈를 낀 거니? 병이라도 있는 거니? 관심받고 싶어? 눈치 없이 쏟아지는 무례한 질문들이 불쾌해, 카게히라 미카는 부러 사람들 눈을 피해다니고는 했다. 질문 중 하나에는 결코 정직하게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불쾌했다.

한쪽 눈 색이 다른 것이 사실 병이라면 병이었다. 어려서 간 신사에서, 기모노를 입고 마당을 쓸던 할머니가 미카를 흘끗 내려다보고는 혀를 차며 말했다.

‘너는 앞으로 많은 것을 보겠구나. 한낱 인간으로서는 굳이 보지 않아도 좋을 것들을 잔뜩 보겠구나. 너무 어린 아이에게, 신(神)의 눈이로구나. 복이라면 복이련만, 너는 정 외에는 원하지 않겠구나.’

당시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지막이 느릿느릿 읊조리듯 말하던 할머니의 어투가, 그리고 배경으로 들리던 낙엽 차르르 쓸리는 소리가 뇌리에 박혀서 어쩐지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머리가 굵어지면서, 카게히라 미카는 자연스럽게 그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간혹 이상한 것들이 보였다. 햇빛이 사물에 반사되어 망막에 맺히고 현재의 상(象)을 그대로 보게 하는 것이 사람의 눈일지언데, 이상하도록 밝게 파란 왼쪽 눈에는 사람과 사물의 미래와 과거가 보였다. 겉면을 보면 충분할 때에 본질이 보였고, 실물을 보고 싶은 순간에 환상이 보였다. 갑자기 보이는 환상 때문에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는 일이 잦아졌다. 이상한 아이라는 말을 듣는 일도 잦아졌다. 그래도, 이런 체질이 언제나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카게히라 미카는 아직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처음 보는 남자에게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분명히 눈앞에 지나가는 사람은 가냘플 정도로 깡마른 남자인데, 온몸에 끈덕지고 시꺼먼 것들을 덕지덕지 달고 있었다. 빛처럼 일렁이고 어둠처럼 기분 나쁘게 꾸물거리는 것들은 결코 이 세상의 광경은 아니었다. 환상이라면 그동안 수도 없이 많이 보았지만, 그중에서도 본 적이 없는 종류의 광경이었다. 아마 빛 같기도 하고 어둠 같기도 한 것들의 정체가 궁금해 견딜 수 없어서 그 남자를 따라나섰던 것 같다.

물론 이제 카게히라 미카는 이츠키 슈가 온몸에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것들의 이름을 잘 알고 있다. 미련, 책임감, 연민, 자긍심, 자기혐오, 집착, 사랑, 박애……. 이츠키 슈가 온몸에 두른 기분 나쁘고 끈덕지고 또 애틋한 감정들의 이름을 미카는 이제 수십 개, 아니 수백 개는 댈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왼쪽 눈이 시도때도 모르고 온갖 것을 보기 시작한 탓이다. 이츠키 슈를 볼 때마다 특히 그랬다. 그 사람을 보고 있으면 그의 현재가, 과거가, 미래가 주체할 수 없이 마구 보이면서 시야가 어지러울 정도로 뒤죽박죽이 된다.

어느 날인가 미카는, 바느질을 하는 슈의 머리색을 보며 집 밖에 잔득 핀 벚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꽃잎이 날리기 시작했다. 옅은 분홍빛 머리카락이 만발한 꽃무리가 되고, 이츠키 슈라는 벚나무에서 분홍의 꽃잎이 하염없이 날린다. 달짝지근한 내음이 짙게 풍겨와 취할 것만 같았다. 어느새 귓가에 웅장한 멜로디의 노래가 들리고 황금의 태엽으로 장식한 무대가 보인다. 모자를 쓴 남자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고,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들린다. 완연한 제왕이 눈앞에 있었다.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다시 벚꽃잎이 한바탕 눈앞에 흩날리며 시야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가 다시 뜨니, 이제 분홍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완전히 한 그루 벚나무가 된 참이었다. 스승님? 스승님? 당황해 주변을 둘러보니, 벚나무 아래 앳된 얼굴을 한 아이가 울고 있었다. 키류 씨, 키류 씨. 가지 마세요. 저를 두고 가지 마세요. 이 세상에, 저만 두고 가시면 안 돼요……. 쉴새없이 뇌까리며 섧게 흐느끼던 아이의 모습이 흐려지고, 이제 벚나무에서 꽃잎이 완전히 떨어졌다.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벚나무가 바싹바싹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했다. 늙고 마른 나무는 이제 남자의 모습이 되었다. 창백하게 깡마른 남자는 인형을 들고 중얼거린다. 아아, 마드모아젤. 나는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이냐. 대답을 해 다오! 이 세상엔 배신자뿐이고, 나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구나. 지쳤어. 전부 과거의 영광일 뿐이야…….

아, 당신은 몰락하는구나.

영안(靈眼)이 보여주는 환상을 관람하던 카게히라 미카가 퍼뜩 깨달았다. 지금껏 보지 못한 스승님의 모습이니 틀림없는 미래다. 언젠가 당신은 몰락하는구나. 지금 보이는 모든 강박과 책임감을 등에 이고,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지고 마는구나. 그러면, 나는.
그러면 나는 그 때도 당신의 곁에 있는 걸까? 있을 수 있는 걸까?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정신을 차리니 슈가 잔뜩 당황해 미카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카게히라. 카게히라! 왜 갑자기 허공을 보고 있는 거냐.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구나!”

미카는 달려가 슈의 한쪽 팔을 끌어안았다. 슈가 더욱 당황해 미카의 이름을 거듭 부르는 것도 아랑곳않고 더 팔을 넓게 벌려 스승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왜 갑자기 이렇게 수많은 환상을 보기 시작했을까? 신의 눈이라더니, 당신이 신에 가까워서 당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걸까? 아니, 어쩌면 이건 영안(靈眼) 같은 게 아니라 그저 단순한 병인지도 모른다. 사람이라면 대부분 한 번쯤은 앓는다는 병. 다른 사람을 원하고,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자 하고, 그 사람을 생각하고, 함께 있는 순간에도 사무치게 그리워하다 못해 그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까지 생각하는 병. 생각이 현실 이상으로 뻗어나가 그의 환상까지 그리워하며 끝까지 함께 있고자 하는 병. 미카는 품에 안은 남자를 더 꽉 끌어안았다.

뜨뜻한 체온이 느껴지고 당황해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린다. 당신은 꽃 같다. 과연 제왕답달까, 꽃이 가득히 만개한 고목처럼 화려해서 모두의 시선을 끈다. 그리고 이 나무는 더없이 선연한 꽃을 피우느라 무리하고 있다. 꽃잎이 제 양분을 전부 빨아먹는지도 모르고 제 몫을 다해 곱게 만발한 꽃을 피우고 있다. 언젠가 이 꽃은 앙상하게 시들고 잔해만 남을 것이다. 그리고 카게히라 미카는, 바닥에 떨어져 찢어진 흰 꽃의 잔해와 검게 비틀어진 나무등걸까지 자신의 몫으로 할 욕심이었다.

당신의 영광부터 비참까지 빠짐없이 계절처럼 사랑스럽다. 만족스럽다. 몸에 닿는 당신의 살은 봄처럼 따뜻하고, 이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의 모든 시간이 꽃무리처럼 아득히도 눈부시다.

미카슈 브레스컨트롤

‘그 행위’를 시작한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어느새 이젠 둘 사이에 습관처럼 자리잡았다. 함께 연습을 하던 중이든, 요리를 하던 중이든 어느 때든 미카가 슈의 손을 끌어당겨 손끝으로 더듬다가 검지와 중지 마디 사이의 움푹한 곳을 찾아 누르면 그것이 신호였다. 지금은 그럭저럭 익숙해진 슈이지만 처음 미카에게서 청을 들었을 때는, 기겁했다. 그런 행위를 따로 칭하는 용어가 있는 줄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래도 어차피 녀석이 일종의 쾌감을 원해서 청하는 것이라면, 성교 따위보다는 이 쪽이 안전하고 위생적이고 간편하지 않은가. 처음 승낙할 때는 그런 계산이었던 듯도 하다.

미카는 슈의 손을 잡아끌고 가까운 벽에 몸을 기댄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새처럼 몸에 힘을 쭉 빼고는, 앞에 선 슈의 손을 잡아, 제 목 위에 올리는 것이다. 긴 손가락이 목을 감싸고, 그 손은 다시 미카의 손이 감싸고 있다. 미카가 목이 길게 빠지도록 고개를 들고 눈을 까닥거린다. 이제 손에 힘을 주면 되는 차례이다. 하지만 레이스를 뜨고 수를 놓던 손에 우악스런 행위는 익숙하지 않아, 행위는 오히려 조심스러운 시험의 단계에 가깝게 된다. 아직 채 굵게 여물지 못한 소년의 가느다랗고 하얀 목 위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천천히 엄지 끝에 힘을 가할수록, 벌어지기 시작하는 미카의 입술과 흐려지기 시작하는 눈빛. 그리고 동시에 스멀스멀 쾌감처럼 온몸을 죄어오는 것들. 손끝의 미세한 힘의 조절에 상대의 쾌감이 온전히 달렸다는 사실에 대한 묘한 달성감과, 여기서 자칫 조금만 실수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과, 자신의 손 위에서 파르르 떨리고 있는 양손에 대한 두려움과 나는 어째서 이 행위를 하고 있는가 하는 일말의 의문. 그리고 그 속에서 눈물 고인 채로 숨을 헐떡이는, 그러면서도 집념토록 이쪽을 향하는 푸른색과 노란색의 두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슈는 문득 의문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목을 조르는 것은 나인데 어째서 내가 이토록 죽을 듯 숨이 죄는지.

연금술사의 하루

리퀘스트 박스(연금술사 슈와 제자 미카) + 지난주 주간 주제 설탕 버무렸습니다. 판타지 세계관을 생각하고 리퀘주셨을 것 같은데 최근 읽은 창백한 말에 영향 받아서 적당히 흐로닝언입니다.. C’est la vie! 약간의 얀데레 주의.

 

***

 

1. 흐로닝언에는 진짜 연금술사가 있다는 소문이 있다.

 

 

2. 언제나와 같은 하루였다. 눈을 뜨고 창 밖을 보면 이미 금빛으로 빛나는 태양이 지붕 위 첨탑까지 올라 있는 느즈막한 아침. 길게 기지개를 켜고 탁자 쪽을 보면 계란과 호밀빵으로 차린 간소한 식사가 있다. 보통 연금술사와 그의 제자라고 하면, 식사나 잡무를 챙기는 것은 제자 쪽이 아닌가. 그게 아니더라도 집의 하녀들이 챙겨주면 되는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슈는 굳이 자신이 미카의 식사를 준비하기를 고집했다. “사람은 적당량의 고기와 곡류, 과일을 먹어야 해. 특히 너처럼 말라비틀어지고 내장이 뒤틀려 아무 것도 제대로 못 하는, 꼴불견인 녀석은 더더욱 그렇다. 더 이상 내게 실패작처럼 거치적거리지 마라.” 미카는 빵을 한 손에 들고 냠 베어물었다. 맛있으니까, 스승님의 그런 말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하인들이 사는 곳보다 별달리 나을 바 없는 다락방에 머물고 있지만, 슈에게 딸려서 이곳에 묵게 된 처지를 생각하면 나쁘지는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작은 손거울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며 옷깃을 단정하게 정리하고 – 안 그러면 슈가 또 잔소리를 할 것이다.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는 않지만 오늘은 참아야지 – 펜과 종이 더미를 챙겨서 2층으로 향했다.

복도를 종종거리며 지나가는 하녀들에게 눈인사를 하고, 방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죽인다. 혹시라도 스승님을 방해할까,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천천히 문을 열어 보면 어느새 중천까지 오른 한낮의 햇빛이 창문 틈으로 비죽 쏟아진다. 그렇다고 눈부시지는 않았다. 멀리서부터 초청받은 연금술사를 위해 일부러 남향으로 창을 낸 방이 주어졌지만, 직사광선에 종이가 변색되는 것을 싫어하는 슈는 창문 왼쪽 끝부터 오른쪽 끝까지 커튼을 쳐 두었다. 옅은 아이보리색의 리넨 커튼 뒤로 부드럽게 너울거리는 아침의 햇빛. 그리고 그 아래 책상에 얼굴을 박다시피 앉아있는 분홍색 머리카락의 남자. 미카가 방에 들어왔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종이 가득 수식을 써내려가고 있던 슈는, 펜으로 마지막 점을 찍자마자 미카가 서 있는 쪽을 휙 돌아보았다.

“뭘 멀뚱하게 서 있는 거냐. 옆에 앉아라, 미카.”

“와, 앗. 스승님. 내 못 본 줄 알았다!”

“흐로닝언의 연금술사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보다 지금이 몇 시지? 방에도 일찍 들어갔을 텐데, 너는 대체 왜 그렇게 늦게 일어나는 게냐.”

“응아, 스승님이 일찍 일어나는 거다이가~? 스승님은 맨날 아침 닭이 울기도 전에 새벽같이 일어나니께, 내 그 시간에 맞추기는 쪼까 힘들어서…….”

“웃기는 소리군. 너처럼 어린 녀석이 나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고서, 이렇게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일어난다고? 아직도 몸이 엉망인 건 아니겠지…….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겠지?”

“응, 걱정 마라! 내 잠을 쪼매 많이 잘 뿐이지, 이제는 밥도 잘 먹고, 팔다리도 일케 잘 움직이고 힘도 잘 쓰고, 몸에 아무 이상도 읎다!”

“네 걱정을 하는 걸로 보이나? 내 옆에 거치적거리는 녀석이 붙어있는 걸 참을 수 없을 뿐이야.”

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미카를 홱 쏘아보았다.

“지각한 주제에 또 쓸데없는 데 신경을 쓰게 하는구나……. 더 늦기 전에 오늘의 작업을 시작하지. 작업실을 준비해라, 미카.”

 

 

3. 연금술의 목표는 납 따위의 자잘한 물질을 황금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무슨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눈만 껌벅이고 있던 미카에게 언젠가 슈는 말했다. “그런 건, 여기 흐로닝언의 상인들을 현혹시키기 위한 소리야. 연금술의 목적은 그런 단순하고 세속적인 것이 아닌, 좀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지.”

“높은 가치?”

“그래. 자연의 법칙, 세계의 질서. 이 세상을 구성하는 단 하나의 진리. 영원으로 이끄는 것, 그 무엇과 대어도 견줄 수 없는 순도 깊은 진실.”

“뭐라카노. 스……승님이 하는 말은 정말 하나도 모르겠다!”

슈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애초에 너처럼 비천하고 멍청한 놈이 진리가 무엇인지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도, 대체 왜 너 같은 녀석을 내 제자로 삼는 건지……. 하지만 이왕 내 제자로서 행동하는 이상 늘 염두에 두고 기억하거라, 미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가장 순수한 하나의 진리에 있어. 연금술사는 늘 그런 마음으로 행동하는 거다.”

그렇게 말하며 슈는 긴 손가락을 들어 미카의 관자놀이에 가져다대었다. 기억해, 미카. 우리의 단 하나의 진리를. 옅은 보랏빛의 눈이 가늘게 좁혀지며 시야에 가까워진다. 얇은 눈썹이 어느 때보다도 진중하고, 결의가 서린 이마가 곧다. 진리란 무엇일까. 스승님은 대체 무엇을 추구하며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걸까. 스승님이 가르치는 수식과 추구하는 가치를 전부 이해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은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4. 미카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큰 솥을 닦았다. 관 사이에 입김을 불고, 깨끗이 삶은 헝겊으로 쇠막대를 감싸 관에 집어넣고 이물질을 제거했다. 순도 깊은 진리, 순도 깊은 작업. 슈는 미카에게 늘 강조했다.

“조금의 이물질이 매개 사이의 반응을 방해하는 수가 있어. 내 작업의 성패가 너에게 달린 거나 마찬가지다. 모든 기구는 될 수 있는 한 정결하게 유지하거라.”

헝겊을 둘둘 만 쇠막대가 들어갔다, 나왔다 관 사이를 왕복한다. 목 사이로 땀이 흐른다. 하지만 땀이 기구에 닿아서는 안 된다. 다급히 상체를 들자 자욱하게 피어오른 수증기 사이로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아무도 보지 않는 작업실에서도 겉옷을 단정히 여미고, 언제나 변함없이 진지한 얼굴로 실험에 일하는 남자. 매일 보는 남자이지만 언제나 낯설고, 언제나 새롭고……. 수증기 중에 숨이 막혀 아득함을 느끼던 미카는 퍼뜩 이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슈. 나의 스승님. 흐로닝언의 연금술사. 그가 소매를 걷는다. 왼손으로 오른팔을 받치고, 관을 들어, 쇠막대를 받쳐 시약을 조금씩 따른다. 유리병 안에 든 액체가 붉게 빛나기 시작한다. 미카가 침을 꿀꺽 삼켰지만 슈는 숨소리조차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시약 위로 푸른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붉은 빛과 푸른 빛이 일렁이고, 연결된 불꽃이 한차례 관 위로 튈 듯 하다가,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조용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젠장.”

신경질적으로 막대를 내려놓고 슈는 얼굴을 두 손 위에 묻었다.

“왜 안 되는 거지? 공식에서는 오류를 찾을 수 없어……. 증류가 충분하지 못했나? 아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고 포기할 수 있어. 하지만, 대체 어째서……?”

“와 그래 짜증을 내노? 스승님답지 않다~. 어디까지나 더 큰 진리를 찾는 과정이다. 눈앞의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마라~.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내 생각이야 그렇지. 하지만 후원자의 생각은 그렇지 않으니까.”

“후원자라고 하면, 그 하얀 옷 입은 도련님 말이가?”

“그쪽이겠지……. 나는 표면상으로는 그의 아버지의 손님이다만, 어디까지나 그의 호기심으로 이곳에 초빙된 거니까.”

“하지만, 스승님. 애초에 이상하지 않나. 처음 만났을 때 스승님은 후원자 같은 거 없이도 혼자서 연구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이런저런 사람들이 찾아왔으니께 스승님이 이름난 건 안다. 그때는 이렇게 기구도 많지 않았고 작업실도 작았지만, 스승님이 그런 걸 신경쓰지는 않았잖나. 근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왜 굳이 남의 집에 들어와서, 누구 지나갈 때마다 어울리지도 않게 굽신굽신 인사를 하고 있냐 이 말이다.”

슈가 천천히 눈을 들었다. 그리고는 미카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아까까지 보던 유리관이나 책 속이 아닌 아닌, 미카의 얼굴 위에서 답을 찾을 수 있기라도 할 것처럼 이마며 눈이며 턱이며 얼굴 구석구석을 요모조모 훑어보다가, 피식 웃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미카는 연금술사의 제자이다. 스승님은 언제나 질문을 하면 바로 대답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미카는 대답할 수 없다. 지금 대답하면, 어쩌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를 내고 말 것 같다.

 

 

5. “지금 가져갑니더~!”

미카는 빨래더미를 안고 종종거리며 뛰었다. 정식 손님이 아니라 연금술사인 슈에게 딸려 온 식객에 가까우므로, 작업이 끝난 저녁이면 잡일을 도우며 어느정도 밥값을 해야 눈치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저택 본관에서 빨래를 받고 빨래방에 가져가려고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하늘은 뉘엿뉘엿 붉은 놀이 지고 있었다.

“히야아, 예쁘구만…….”

붉게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저녁 시간을 알리는 성당의 종이 친다.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이곳에서 수도원과 주교는 힘을 잃은지 오래이니까.

흐로닝언, 북부의 상업도시. 이곳에는 예로부터 큰 강을 끼고 상인들이 모여들어 길드를 형성했고, 발달한 시장만큼이나 상인들이 인맥을 과시할 예술가와 후원을 원하는 학자들도 모여들었다. 배 몇척에 이국의 향신료와 공예품을 가득 쓸어모으는 거부들이 금팔찌를 반짝거리고 모피코트를 펄럭이는 대신, 자신이 후원하는 후원인의 성과를 휘두르는 도시. 그런 의미에서 연금술사 슈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이 도시에서 손꼽히는 거상 가문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이 도시에서 종교나 신 같은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곳의 신에 가까운 것은, 오히려…….

“거기 서서 뭘 하고 있니?”

옆을 돌아본 미카는 화들짝 놀라 빨랫감을 떨어뜨릴 뻔했다. 겨우 들고 있던 바구니를 부여잡고 눈앞의 남자에게 꾸벅 인사할 수 있었다.

“아, 안녕하십니꺼!”

“후후, 그렇게 격식 차릴 건 없잖아? 슈 군의 제자였지? 그렇다면 나에게도 손님인 셈인걸.”

과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말하는 본인도 그렇게 여기고 있지는 않을걸. 그렇게 생각하며 미카는 환하게 웃었다.

“이름이 뭐였지?”

“미카. 미카입니더.”

“성은?”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눈을 굴리는 미카에게 금발의 도련님은 온화하게 웃었다. “자네에게는 성이 없었지? 그래, 제자라고는 하지만 사실 길바닥에 버려져 있던 아이를 슈 군이 주워 왔다고 들었던 것 같네. 그래도, 슈 군도 보기보다는 배려심이 부족하구나. 성 정도는 붙여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응아아, 지는 괜찮습니더. 내 같은 사람한테 성이라니 가당키나 합니꺼.”

“글쎄, 미카 군. 내 생각은 다르거든. 사람은 달라질 수 있어. 출생이 비천해도 교육과 훈련을 통해 얼마든지 귀한 몸 행세를 할 수 있다고. 자네도 모처럼 예쁜 얼굴로 태어났는데, 흐로닝언의 연금술사의 제자 쯤이나 되어서 이런 꼴이라니 슬프구나.”

“지랑 스승님한테 관심이 많으시네예.”

미카가 더는 눈치 보지 않고 대답하자 도련님은 눈을 휘며 웃었다.

“맞아, 미카 군. 특히 자네의 스승님에게 관심이 많아……. 슈 군은 어쩐지 나를 경계하고 있지만, 나는 더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연금술의 성과는 아직일까?”

“한참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더. 스승님, 완벽주의에 사소한 오차도 넘어가지 못하고, 귀찮은 성격이니까예.”

“후후……. 그 점에서는 나와 생각이 맞는구나. 하지만 요즘 보기 드문 사람이지. 그 나이에 이미 다른 연금술사들이 이룬 업적을 뛰어넘는 천재이면서, 젊고, 곱상해. 지나치게 결벽적이고 오만하지만 그것마저도 이목을 끌 만한 태도지.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말이야.”

“스승님이예? 지 입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그 사람은 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할깁니더. 저번에도 밤을 새다가 문서 위에 커피를 엎을 뻔하지 않았습니꺼. 지가 잡아다 놓았으니 망정이지예.”

그렇게 말하자 도련님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키득키득 웃다가, 미카의 귓가에 얼굴을 숙였다. 숫제 어린아이가 비밀을 속삭이기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다.

“미카 군. 나는 자네 같은 사람을 알고 있어. 자네는 슈 군을 처음 만났을 때 앙상하게 굶주려서 길바닥을 헤매고 있었지. 궁금해서 조금 알아보았어, 물론 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자네는 그 눈에 띄는 눈동자와 반반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이용당했겠지. 사람이 모인 도시, 온갖 장사치들이 욕망을 따라 도착한 곳. 자네는 이 도시의 길바닥에서 온갖 더러움을 보았겠지. 얕보일수록 착취당하고, 아래에 있을수록 짓밟힌다는 걸 알겠지. 그렇게 버려졌다가 도련님에게 거두어졌으니, 얼마나 욕심이 날까. 처음 입어본 좋은 옷이, 양껏 먹을 수 있는 식사가, 가슴에 단 금장식이……. 하지만 슈 군처럼 처음부터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공부만 한 사람은, 그런 사람의 열망을 모르는 거야. 그러니 나를 도와줘, 미카 군. 자네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거야.”

황금빛의 저녁놀을 머리 뒤에 이고, 금발의 도련님은 천사처럼 웃는다.

“슈 군이 어서 무엇이든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도와줘. 그가 집착하는 수준의 학문이 아니어도, 바깥에 선보일 수 있다면 무엇이든 좋아. 나는 그를 선보이기 위해 데려왔어. 내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걸 알았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네가 내 소식통이 되어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 원하는 건 무엇이든 지원해줄게. 희귀한 재료나, 작업 도구나, 무엇이든 좋아. 아니면 자네에게 좋은 옷이나 식사나, 금이라도 가져다주지.”

“하지만 말입니더. 스승님 같은 사람이 도련님 뜻대로 따라드릴까예? 스승님을 연회의 장식품으로 쓰겠다는 거 아닙니꺼. 그 사람은 연구밖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인데예.”

“확실히 그는 결벽하지만, 연회의 늙은이들도 한때는 꿈으로 빛나는 청춘이었어. 놀랍지? 결벽한 사람일수록 유희와 권력의 맛을 보면 더 큰 욕망에 빠질 수 있다는 거야. 거기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 자네는 그저 슈 군이 무엇이든 성과를 내도록 도와주면 돼. 지금이야말로 내가 가문을 휘어잡을 적기거든……. 이미 소문은 내 놓았어. 흐로닝언에는 진짜 연금술사가 있고, 그와 함께하는 사람은 진리와 황금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이 도시 최고의 천재는 슈 군이지……. 잘만 되면, 자네는 이런 빨래 따위 할 필요 없이 평생 좋은 식사와 황금에 둘러싸여 탄탄대로를 걷게 될 거야. 슈 군의 제자라는 이름보다도 훨씬 빛나는 영예 속에 살 수 있게 내가 도와줄게.”

미카는 멍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무튼, 스승님이나 도련님이나 높으신 분들이 하는 말은 하나도 모르겠습니더……. 하지만, 좋습니더. 그러면, 방에 설탕 한 포대만 전해주이소.”

“설탕?”

“스승님이 연구하다가 자꾸 단 걸 찾는다 안캅니꺼.”

“그런 거라면, 우리 집에서 최고의 요리사들에게 디저트를 부탁하면 되는데.”

“그런데 사람이 또 입을 가려서, 아무거나 안 먹고 설탕으로 막 녹여 만든 과자나 찾는 깁니더. 그래서 그냥 지가 계속 만들어 줄라꼬예.”

 

 

6. 빨래를 마치고 녹초가 되어 돌아오자 의자에 앉아 있던 슈가 벌떡 일어났다가 민망한지 미카에게 되려 잔소리를 했다. “이제야 들어오는 거냐. 조금이라도 빨리 자야 좀 일찍 일어날 수 있을 게다.”

“헤헤, 내가 미안타. 오늘따라 손님이 많은지 일이 많대~.”

“쯧. 누구와 놀아나고 있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그리고, 그 꼴은 뭐냐. 물에 젖은 생쥐 꼴이로구나.”

“아. 아까 빨랫감을 쏟다가 물이 확 튀어버린기다. 이런 거 좀 냅두면 마르니께…….”

“안그래도 비쩍 마른 녀석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벗어라.”

“에, 에, 여기서~?”

“그럼 어디서 말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뜸 들이지 마라.”

미카가 쭈뼛거리며 상의를 벗자, 슈는 부드러운 천을 가져와 미카의 몸에서 물기를 살살 닦아냈다. “이것 봐라. 물기가 다 남아있지 않느냐…….” 그리고 제가 입고 있던 모피 외투를 벗어 미카에게 걸쳐주었다. 졸지에 큰 외투를 벗은 몸 위에 뒤집어 쓴 미카가, 외투 결을 살짝 쓸어보았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부드럽다. 미카는 부드러운 외투 자락을 들어 뺨에 대어보았다. 기분이 좋아 얼굴이 붉어졌다. 외투 자락을 양손에 꼭 쥔 미카가 슈에게 물었다.

“스승님. 스승님은 성공하고 싶나?”

“성공이라…….”

한참 창밖을 내다보던 슈가 입을 열었다.

“하고는, 싶지. 너도 언제까지 그 꼴로는 안 되지 않겠느냐……. 나처럼 연구밖에 관심이 없는 사람 옆에 붙어 있어서야, 길이 없지 않겠느냐는 게야. 네가 진정으로 연금술에 관심이 있다면, 나쁘지 않았겠지. 하지만 나와 함께 이곳에 묵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지어낸 자리에 불과하지 않느냐……. 너를 언제까지고 시종처럼 부릴 수는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성과를 내어서 재물을 얻어야겠지. 모처럼 근방 최고의 거상에게 후원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네게 계속 예의와 지식을 가르치고, 형편없는 몸에 살을 찌워서 제대로 선을 보일 생각이다. 좋은 혼처를 얻어서 그곳의 성을 받으면, 지금처럼 무시당하거나 험한 일을 할 필요도 없겠지. 안 그러냐, 미카?”

옅은 보랏빛 눈이 휘어져 웃고, 큰 손이 머리를 슥슥 쓰다듬는다. 미카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스승님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슈가 무안한지 눈을 돌린다. 고개를 돌리고 드러난 뒷머리 사이로 보이는 귀 끝이 살짝 붉었다. 미카는 몸을 움츠리는 슈에게 바짝 붙어서, 품 속에서 주섬주섬 종이 꾸러미를 꺼냈다.

“저기, 스승님. 이거 아까 부엌에 빨래 갖다주면서 얻어 왔다. 말린 과일인데, 내 없고 입 심심할때 좀 먹어 도.”

“아무튼, 쓸데없는 짓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미카가 손을 들어 슈의 입에 붉은 과육을 집어넣었다. 슈는 얌전히 입을 벌렸다.

“맛있제?”

“먹을 만, 하구나.”

“헤헤, 마리아 누나가 내 이뻐해서 주방 쪽 지나가면 자꾸 뭘 챙겨주고 그래. 내 잘 먹고 잘 지내고 있다. 그러니까 잡일하는 거 너무 안 좋게 생각하지 마라. 오늘은 어땠냐면…….”

조잘조잘 떠들다가 눈을 드니, 슈는 피곤했는지 눈을 감고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창 밖에서 달빛이 들어온다. 미카는 슈의 감은 눈매가 얇은 초승달 같다고 생각했다. 달은 사람을 미치게 하고 춤을 추게 한다고 했던가, 문득 그런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런 감정이 밝은 태양은 아니어도, 사람을 괴롭게 하고 망치는 광기일 리도 없다. 오히려 좀 다른 것에 가깝지 않은가.

 

 

7. 아직 달도 흐릿한 이른 새벽이었다. 온 몸을 천으로 감싼 사람이 발소리를 죽이고 복도를 걷는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복도를 헤매지도 않고 익숙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집에 아주 익숙한 사람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그는 어느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연금술사의 작업실 앞이었다. 그는 옆을 두리번거리다가 품 안에서 열쇠를 꺼내 작업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후드를 벗었다.

작업실의 한가운데에 아직도 약한 불로 끓고 있는 솥이 있다. 그는 증류중인 솥에서 용액을 떠내어 시약을 따랐다. 용액이 뒤섞이며 붉은 빛과 푸른 빛이 일렁이며 번쩍이기 시작한다. 증기가 피어오르고 부연 방 안에서 노랗고 푸른 눈동자만이 빛을 받아 빛난다. 푸른 불꽃이 튀기 시작하더니, 불이 일었다. 시약이, 관이, 방 전체가가 푸른 빛으로 빛난다. 미카는 장난에 성공한 아이처럼 해맑은 얼굴로 불빛을 바라보다가, 품 안에서 작은 종이뭉치를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 든 하얀 가루를 손가락 끝에 찍어 혀로 핥았다.

“다네.”

미카는 망설임 없이 종이를 뒤집어 설탕을 증류액 위에, 그리고 관에 쏟아넣었다.

“스승님은 틀리지 않았다. 스승님은 진짜 천재니께. 내도 수식을 확인해봤으니 안다. 그리고, 내도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삽시간에 모든 빛이 땅거미처럼 사라졌다.

“스승님이 말하는 진리는 대체 무얼까? 도련님이 원하는 건 무얼까? 영광과 영예? 훈장이나 금 장식, 황금과 칭송? 그런 게 진리일까? 내는 잘 모르겠다.”

방 안에 남은 빛이라고는 희미한 달빛과, 달빛 아래 아이처럼 웃고 있는 미카의 눈동자 뿐이었다.

“내는 진리를 이미 알고 있어. 처음부터 찾아낸 후였다. 그건 설탕처럼 달고, 꿀타래처럼 붕붕 뜨고, 불꽃처럼 어쩌지 못하고 사방에 튀는 거다. 우리가 늘 함께 있고, 곁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곳을 보면서 머리를 맞대고 수식을 고민하는 거다.”

방 안을 가득 울리는 어린 목소리가 흡사 오래된 노래나 예언 같았다.

“스승님은 천재야. 알 수 있다, 빛이 나니까. 하지만 어리석고 순진하기도 한 기다. 진짜 진리, 학문, 영원……. 그런 것에 정말로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도시에는 아무도 없다. 진리 같은 거에 가까워질수록 말이야, 노리는 이빨에 뜯길 뿐이라고. 스승님은 망토를 두르고 은관을 쓰고, 저 큰 홀에서 매일 열리는 연회에 상품처럼 전시되겠지. 그리고 아무도 스승님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다. 이전처럼은, 돌아갈 수 없을 거야……. 그렇다고, 이런 걸 말할까. 이 더러운 도시에서 제일 빛나는 내 스승님에게. 내는, 처음 보는 순간부터 알 수 있었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미카는 슈의 방 쪽에 들렀다. 창가에 놓인 침대 위로 곧게 누워 색색 고른 숨을 내쉬고 있는 슈의 얼굴이 보인다. 미카는 창을 밀어젖혀 슈의 얼굴 위로 손을 뻗어보았다. 손가락이 창백하게 마른 뺨 위를 헤맨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말을 하면, 대답할 것 같았다. 미카는 이미 진리를 알고 있다. 자신이 가슴에 품고 있는 진리의 이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진리는 손 안에 얻지 않고 추구하고 있기에 더 빛나는 게 아닐까? 연구에 몰두하는 슈의 모습을 보면서 미카는 종종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므로 미카는 진리의 이름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아도,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빛나고 있으므로. 두근거리는 심장에, 언뜻 느껴지는 체온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 남 몰래 소리 죽인 비밀에, 이러한 매일에.

“잘 자, 스승님.”

조심스럽게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오늘도 진리는 달빛 아래 스미듯 묻힌다.

 

 

1. 흐로닝언에는 진짜 연금술사가 있다. 한 스푼 설탕과 진리를 맞바꿀 수 있는 어린 연금술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