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미카슈 – 농담

간만에 주간좀 쓰려는데 잘 생각이 안나서 도전의식을 느끼다가 그만 소재가 산으로.. 비몽사몽간에 써서 짧고 두서없습니다. 아포칼립스, 망취 주의

 

***

 

소녀가 그 남자를 보고 처음 느낀 감상은 기이함이었다. 모래바람이 부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기묘할 정도로 단정하게 정돈된 셔츠를 입고, 감정 없이 말간 얼굴로 서 있는 남자. 그 남자는 소녀를 보고 놀라는 기색도 없이 곧이 걸어왔다.

“그 발목은 다친 건가?”

“네, 당신은…….”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경계하며 몸을 빼던 소녀는, 그가 자신을 홱 안아 가볍게 들어올리자 당황해 얼굴을 붉혔다.

“너무 경계하지 마라. 그 발목을 계속 쓰게 둘 수는 없는 게다.”

“죄, 죄송합니다. 좀 놀라서…….”

“미안해 할 것 없어. 세상이 이 지옥이 된지 벌써 한 달째인가.. 너도 지금까지 많은 꼴을 보았겠지.”

남자는 자욱한 모래먼지 사이로 부옇게 보이는 하늘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더니, 희미하게 비치는 태양빛을 보며 말했다.

“빛을 본다고 모두가 빛을 향해 걸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한 달 전, 전국에 재해가 있었다. 해안에 파도가 몰아치고 땅이 갈라져 흙과 지반이 드러나고 오염되었다. 전기도 물도 길이 파괴되어 공급되지 않고, 지하 생태계의 미생물로부터 처음 보는 병이 돌았다.

라디오를 통해 겨우 들은 이국의 뉴스에서는, 병의 치료법이 밝혀질 때까지 재해 지역에 가까이 가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었다. 그 때 사람들은 깨달았다. 우리는 버림받았다. 흙바람이 부는 세상에서 재해로 고립된 사람들은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가끔 헬기를 통해 구호 물품이 뿌려졌고, 그것은 화폐 이상의 가치와 권력이 되었다. 굶지 않고 살아남아 망가진 생태계의 야생동물을 피하고, 다친 곳을 깨끗한 물로 씻기 위해서 사람들은 더 많은 구호품을 원했다. 그러므로 다른 이들을 습격했다. 사람의 첫번째 사냥감은 사람이었다. 그런 지옥에서 이 남자만은 묘하게도, 놀라울 정도로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저, 어디로 가는 건가요……?”

“조금 더 가면 동행인과 함께 지내는 캠프가 있어. 거기에서 네 상처를 씻기고 붕대를 감을 거다.”

“동행인이요?”

“너무 걱정할 것 없어, 네 또래의 깡마른 남자아이 하나다.”

“그리고 먹을 물도 모자라실텐데, 그래도 되는 건지…….”

“지금 어떤 병이 도는지 대충 알고 있지 않나? 그렇게 상처를 노출시키면 금방 감염되어 죽고 말 게다.”

“그래도 지금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는걸요. 자기 물품을 남을 위해 쓴다니…….”

그렇게 말하자, 남자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우리는 사람이다. 신이 있다면 이런 꼴을 절대로 놔두지 않아. 모두가 빛을 향해 걸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나는 그러고 싶어.”

그제야 소녀는 남자의 품 안에서 겨우 안심한 얼굴로 밝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남자는 여전히 무심한, 그러나 아까보다 훨씬 누그러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이츠키…….” 그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귀를 찢을 듯한 총성이 울렸다.

탕.

소녀는, 아니 방금까지 소녀였던 시체는 품 안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고깃덩이가 되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손안에 들고 있던 칼이 땅에 데구르르 떨어진다. 남자는 허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검은색으로 얼룩진 재킷을 입은 소년이 있다. 슈는 달려가 미카의 옷깃을 잡아챘다.

“무슨 짓을 한 거냐, 카게히라……!”

“조심해야지, 스승님. 칼 보면 모르나? 그 아, 스승님을 해치고 구호품을 갈취할 생각이었다. 모르는 사람 아무나 덥석덥석 상종하지 말라고 내가 말 했나 안했나? 까마귀 고기를 먹은것도 아니고, 우리 스승님은 왜이렇게 말을 해도해도 까먹을까?”

“하지만 그 아이는 다쳐있었다. 그대로 놔두면, 지금의 환경에서는 틀림없이 죽어……!”

“맞다. 그리고 그 아를 살리고 스승님이 죽을 뻔했지.”

옅은 보라색 눈과 양쪽 색이 다른 금색과 하늘색의 눈이 한참 말 없이 서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침내 슈가 짓씹듯이 내뱉었다.

“이렇게 남의 피로 몸을 씻으며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아니. 스승님은 그러지 못해.”

미카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대답했다.

“사람 말을 뭘로 듣고……!”

“스승님은 그러지 못해. 그러면 나를 이 지옥에 혼자 두게 되니까.”

미카가 다시 침착하게 말했다. 슈는 주저앉듯이 미카의 가죽재킷을 내려놓았다. 재킷은 굳은 피로 얼룩져 온통 덕지덕지 새까만 색이었다. 그리고 그 피의 대부분은, 미카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묻힌 것이다. 슈는 짧게 탄식했다.

“이런 건 내가 원한 게 아니야.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냐, 카게히라…….”

“내는 스승님에게 필요한 거라면 뭐든 한다. 아마 그런 일이 없었으면 내는 스승님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일을 했겠지. 아르바이트나, 무대나……. 하지만 지금 스승님한테 필요한 건 이런 거니까. 알잖아, 스승님. 빛을 본다고.”

슈는 그 말을 받아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모두가 빛을 향해 걸을 수 있는 건 아니지.”

두사람이 처음으로 ‘습격’을 받았을 때, 그래서 미카가 슈를 지키기 위해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을 때, 그리고 그 이후로, 슈가 미카를 위로하기 위해 몇 번이고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은 확실히 위로로서 효과가 있었고, 그리고 그 이상의 효과가 있어 카게히라 미카는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아니, 이것을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슈는 가끔 생각한다. 사람을 죽이고, 무기를 탈취하고, 시체에서 필요를 취해 모아두는 지금 이 존재를, 자신이 알던 카게히라 미카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도 좋을까. 한때는 참 어렸던 아이. 쉽게 겁에 질려 불안한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던, 그런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꾸지람을 하면 어째서인지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던 깡마르고 앳된 소년. 한때는 그렇게 사랑스러웠던.
그래서 지금도 사랑스러운.

“그러니까 스승님은 나를 버리지 못해.”

슈는 거듭 반복되는 미카의 말이 애원에 가깝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슈는 다시 미카의 옷깃을 쥐고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입을 맞추었다. 시야가 가려져 빛은 보이지 않고, 다만 모래 맛과 피 냄새가 났다.

 

그날 밤 슈는 잠든 미카의 옆에 나란히 누워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지옥같은 세상에서도 하늘만은 변함이 없고 별만은 여전히 눈부시게 빛나서, 꼭 예전의 그 좋은 시절에 함께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예전에도, 별이 빛나는 밤에 너를 처음 만났지. 그때 너는 온통 꾀죄죄한 차림새를 한 채 눈을 빛내며 말을 걸었고, 나는 이유도 모르고 너의 손을 잡았지. 그때 이후로 죽 함께해서 여기까지 오고 말았지. 차라리, 이 모든 게 농담이었으면 좋았을 거야. 그날 별이 빛나는 밤에 우리가 만났던 것도, 그리고 내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 너를 보면서 그 처음부터 설레었다는 사실까지도.

그냥 미카슈

이제는 눈치채지 못한 사람이 드물게 되었다. 그 애는 그 애를 좋아한다고. 늘 곁에 있고 싶어하고, 생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싶어하고, 눈길을 끌고 싶어서 목소리를 높여 뛰어다니고, 그 정도로는 모자라 새벽 숨부터 오후 단꿈까지 소유하고 싶어한다고.

“뭐, 생각해보면 전부터 그런 낌새가 있었지…?”
“이츠키 선배 본인만 빼고 다 알걸. 어련히 모르는 척 해줘야지.”

그렇게 주변을 떠도는 재잘거림 속에서 이츠키 슈는 언제나와 같았다. 가늘고 긴 팔을 들어 아침 요리를 하고, 옷의 치수를 재고, 레이스를 뜨고 무대를 그렸다. 그러므로 카게히라 미카는 제 마음도 언제나와 같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미 터질 것 같은 마음도 더 커질 수가 있는 모양이었다.

“카게히라. 앞치마를 부탁하마.”

미카가 졸린 눈을 비비며 부엌으로 나오자, 앞치마를 입은 채 반쯤 등을 돌린 슈가 보였다.

“어…? 이거 매달라고?”

대답 대신 슈가 뒷걸음질로 두어 발짝 다가가자 미카는 엉성한 품으로 등 쪽에 달린 끈을 양손에 쥐었다. 미카는 아직도 잠이 덜 깨어 몽롱한 눈을 들었다. 코앞에 살짝 숙인 하얀 뒷목이 보인다. 아침에 샤워를 한지 얼마 안 됐는지 달큰한 샴푸 냄새가 나고, 머리카락 끝에 살짝 물기가 남아 있다.

“뭐하고 있는 거지?”

“어, 어? 이게 잘 안 매지네. 손이 자꾸 미끄러진다.”

하지만 공중에 뜬 손에는 매듭을 지을 의지가 없다. 미카는 반쯤 숙인 슈의 뒷목 위로 고개를 숙였다. 숨이 닿을 듯, 혹은 겨우 닿지 않을 듯. 미카는 그대로 가만 눈을 내리깔았다. 당신은 이럴 줄은 꿈에도 모르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슈가 뒤를 홱 돌아보았다.

“그만.”

예기치 못하게 곧이 마주한 얼굴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그만해. 카게히라.”

완강한 목소리, 평소보다 더 가늘게 뜬 눈매. 날카로운 표정을 보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리고 웃음이 나는 것이 순서였다. 몇 번이나 상상해온 순간이었는데, 결국에는 이렇게 되고 마는구나. 모를 리가 없지. 누구라도 눈치채는 마음을 당사자만 모를 리가 없지.

“…미안, 스승님.”

그 정도로 말하고 넘어가면 좋을까. 하지만 더는 없는 척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가슴에, 눈가에 울컥 치솟는 것이 있었다.

“기분 나쁘지. 옆에 계속 붙어 있는 놈이 이러고 있고. 언제부터 알았나? 기분 나빴지? 어떻게 모른척 했나?”

“당연히 기분 나쁘지.”

그렇게 말하고 슈는 살며시 웃었다. 허물어지는 것 같은 미소였다.

“그렇게 이도저도 아닌 채 옆에서 간질거리고 있으면, 당연히 기분 나쁘지. 카게히라. 세상에 사랑받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 그러니까…….”

귓가에 속닥거리는 소리로, 독백 같은 욕망이 남았다. 네 애정이 온당하게 내 것이라고 말해줘.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 눈짓부터 손짓까지 전부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해줘. 슈는 마디가 앙상하게 튀어나온 손을 잡고 제 허벅지 위로 올렸다. 옷감이 버석거리는 소리가 나고, 손가락이 살 위로 움푹 들어간 자국이 생긴다.
그리고 짧은 한숨.

어느 병

#주간_미카슈 주제 : 애정
슈그녀 기반의 미카슈.

 

***

 

이츠키 슈는 작은 것들을 좋아한다. 키가 작고 채 팔다리가 여물지 못한 어린아이. 조밀하게 잡아 실을 박은 공단 프릴. 가느다란 은사를 정교하게 엮은 토션 레이스. 그 얼굴 안에 오밀조밀 이목구비가 모두 들어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그마한 도자기 인형. 바람이 훅 불거나 땅에 떨어지면 그대로 부서져버릴 것 같은, 작고 가볍고 바람에 쉽게 흩날리는 것들.

본래 사람들의 시선 밖에 있고 존재가 흐릿해서 곧 사라지더라도 크게 이목을 끌지 못할, 금방 사라질 것들을 사랑하는 습관. 카게히라 미카는 그런 습관은 질병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약한 것에 대한 책임을 떠맡게 되고, 가치 없는 것에 집착한다 손가락질을 당하고, 사랑하는 것이 스러질 때마다 상처받고. 그런 식으로 인생에 무엇 하나 도움이 되지 않는 습관이라면 애정보다는 질병에 가깝겠지.

아마도 이 질병은, 전염성이었던 모양이다.

***

사자를 동경했더니 털을 벗고 작은 고양이가 된 꼴이었다. 그것도 처량하게 울며 길을 떠도는 고양이. 동경해 올려다보던 사람을 곁에서 보살피다 보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가령, 금발머리의 여인을 작고 소년 이츠키 슈가 얼마나 사랑했는지의 여부 같은 것들. 어린아이의 부인에 대한 짝사랑이라니 흩날리는 눈송이보다도 의미없는 것이었을 텐데, 이츠키 슈는 이렇게 멀쑥하게 커서 끝끝내 그녀를 자신보다 훨씬 작은 존재로 만들어 놓지 않았는가.

새싹이 고목이 되듯이 시간이 흐를수록 깊이 뿌리를 내리고 거대하게 자라난 사랑. 일생을 꽉 메운 그런 사랑 앞에서 자신의 마음 따위는 정말로 눈송이처럼 사소한 것이 틀림없어서, 카게히라 미카는 가끔 사랑하는 상대에게 묻고 싶어졌다. 스승님, 스승님은 이런 걸 어떻게 견뎠어?

그해 겨울은 혹한이었다. 날씨가 갑자기 부쩍 추워진 탓에 슈의 몸상태가 좋지 못해서 ― 물론 날씨보다는 정신적인 문제가 더 클 거라고 미카는 짐작했다 ― Valkyrie의 연습은 한참이나 소강상태였고 두 사람은 수예부실에서 모포를 덮고 따뜻한 차를 마셨다. 슈는 여전히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대신 가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차를 옆에 두고 홀짝이며 의상을 만들고는 했고, 미카는 차를 끓여주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렇게나 섬세하고 부서질 것 같은 사람인지 이전에는 몰랐지. 그리고 나는 그런 것을 사랑하는 병이 옮았지. 그렇게 생각하며, 미카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바느질에 열중한 스승님의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러던 도중 슈가 갑자기 옷감을 탁상에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는 창가로 걸어가 유리창을 반쯤 열었다. 어느새 눈이 내리기 시작해 창문 밖은 흰빛이 완연하게 빛나는 설국이었다.

“얼레, 언제 이렇게 눈이 내렸대. 스승님 눈싸움 좋아하나?”

“별로.”

“그런데 왜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아는 사람의 장례식날, 눈이 내렸어.”

그렇게 말하며 슈는 아까까지 바느질을 하던 손가락을 창밖으로 내밀었다. 눈송이가 붉은 손끝에 스치다가, 체온에 닿아 곧 녹아내린다.

“그때도 꼭 이렇게 폭설이었지.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묘소에서 장례 절차를 밟는 데 애를 먹었어. 세상 모든 게 서럽더군. 눈 따위가 펑펑 내려서 그분의 장례를 방해하는 것도 서럽고, 다른 누구도 아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죽어버린 것도, 내 기원이 조금도 닿지 못한 것도 서럽고……. 그리고 그렇게 눈이 많이 내렸는데도, 오후가 되어서 햇빛이 내리쬐자 눈이 또 금방 녹아버린 것도 서럽더군. 처음부터 내 마음은 덧없는 거였구나. 보답을 바라지도 않았고 그저 나 혼자 바라보고 기리고 싶었는데, 그것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거였구나. 그래서 이렇게 전부 눈처럼 허망하게 녹아버린 거였구나.”

눈에 반사되는 빛을 받아서 하얗게 빛나는 얼굴로 뇌까리는 낯빛이 창백했다. 독백처럼 중얼거리던 슈는 멍한 표정의 미카를 돌아보고는 가만 고개를 주억거렸다.

“잔뜩 횡설수설했군. 이렇게 말해봐야 너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 잊어라.”

“그치만, 스승님.”

미카는 이를 악물었다.

“눈도 오래 쌓이면, 얼음이 되잖나. 무게가 실리면, 가지가 부러지거나 천막이 무너지거나 하기도 하고.”

꼭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세상에 그렇게 덧없는 게 있을 리가 없다. 아니, 아무런 의미를 남기지 못하면 어때. 눈이 많이 내렸으면, 누군가는 그 흔적을 좇아갈 수도 있는 거잖아. 스승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나?”

말을 마치자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이해받을 리가 없다. 이 마음은 부인을 사랑하는 아이만큼이나 처량하고 손끝에서 방금 녹은 눈송이만큼 덧없는 것이다. 십년간 외사랑을 간직한 사람에게 고작 한두 해 곁에 있던 사람의 마음이 닿을 리 없다. 내게는 녹지 않는 폭설이지만 당신에게는 작은 눈송이일 뿐이겠지.

바라보는 것으로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대가를 바라지 않는 애정이 있을까. 알리고 싶었다. 마음 한 켠을 차지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고 적어도 응답을 느끼고 싶었다. 눌러둔 마음과 함께 욕심이 가슴 속을 뭉텅뭉텅 비집고 나왔다. 몇 년이고 당신을 지켜본 내 무게는 이제 당신에게 조금쯤 얹혔을까?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 미카는 겨우 눈을 들어 상대의 표정을 확인해 보았다.

슈는 웃고 있었다. 아주 사랑스러운 것을 바라보듯이. 눈매가 둥글게 휘고 청보랏빛의 눈동자가 빛나고 둥글게 올라온 뺨이 발갛다. 감사와 연민과 감탄이, 뭉근한 애정이 가득 담긴 눈빛이 오롯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 눈앞이 아찔하고 눈시울이 뜨거워 미카는 눈을 들었다.
창 너머로 잔뜩 쌓인 눈의 무게에 휘어진 나뭇가지가 보인다.

 

그 추운 겨울에는 못된 전염병이 돌았다. 서로를 연민하고 사랑하는 병이 옮았다.

모순

#주간_미카슈 주제 : 모순

NTR, 앵스트, 약간의 수위성 주의. 커플이 아닌 것 같지만 마음의 눈으로 읽읍시다

 

***

 

어릴 적 들은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인어들은 늘 비슷했다. 아름답고, 인간을 쉽게 사랑하고, 세상에서 금방 사라져버린다. 미지근한 물을 채운 욕조에 손을 담그고 슈의 하얀 살결을 닦아내면서 미카는 이야기 속의 인어들을 떠올렸다. 세상이 그리운 듯, 세상을 떠날 듯 야트막한 물 속에 잠겨 지느러미를 꿈틀대는 인어들. 뽀그르르. 욕조에서 포말이 일었다. 민감한 부위 안쪽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긁어내자 슈가 읏, 하고 작은 신음소리를 냈다. 하지만 제지하지는 않는다. 미카는 허벅지 안쪽의 붉은 자국 위에 비누를 대고 문질렀다.

“안 지워지네.”

“쯧. 웬만하면 자국은 남기지 말라고 했는데…….”

“이번 남자랑은 오래 안 만나는 게 낫겠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응, 스승님이 알아서 하겠지.”

스승님은 완벽하니까. 미카가 그렇게 말하며 작게 웃자 슈가 문득 가려운 듯 물 속에 잠긴 다리를 꼬았다. 지느러미를 꿈틀대듯이. 아름답고,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주고 세상에서 금방 떠나버리는 인어들. 미카는 손에 꽃 향기가 나는 거품을 묻혀 남은 정사의 흔적을 조심스럽게 닦아내었다. 혹여나 거칠게 만지면 당신의 비늘이 상할까, 정성스러운 손길로 닦아내었다.

이츠키 슈가 느닷없는 커밍아웃을 한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나는 남자가 더 좋아. 헤에, 그랬구나. 미카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앞으로 사람을 만날 거다. 공개연애를 한다는긴가? 아이돌 활동은?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슈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섹스하고 싶은 거야.”

이츠키 슈는 보통 아홉 시에서 열한 시 사이에 나가서 열두 시가 되기 전에 들어왔다. 가끔은 한시나 두시까지 늦어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 카게히라 미카는 사탕을 씹거나, TV를 보고 청소를 하면서 새벽을 샌다. 심야 프로그램을 보면서 생각없이 웃다가, 벨이 울리는대로 현관으로 달려가서 벌컥 문을 열면 선글라스를 쓰고 화보처럼 꼿꼿하게 서 있는 슈가 문앞에 있었다. 미카가 손을 내밀면, 슈는 미카의 부축을 받고, 꼿꼿이 서 있던 품새가 곧바로 무너진다.

“무리한 거 아니가?”

“…친구와 같이 오겠다는 제안이 와서 받았는데. 지독했어.”

“싫으면 안 받으면 되잖나.”

“싫지 않으니까 받은 거다.”

아니, 하고 싶었으니까 받았지. 미카는 더 말하지 않고 욕실 불을 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몸의 이츠키 슈가 따라들어온다. 욕조에 받아둔 물에 첨벙, 주저앉은 슈가 몸을 늘어뜨리고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화나지 않아, 카게히라?”

“윽, 냄새……. 스승님, 술 마셨나? 어쩐지 오늘따라 더 늦더라.”

“같은 그룹 멤버인데 밤마다 섹스하러 다니고. 그것도 매번 다른 남자들이랑. 기분나쁘지 않냐고.”

“이상한 소리네. 고등학생 때도 말했던 것 같은데. 스승님이 어디서 뭘 하든, 나한테 스승님은 최고다. 천재고, 완벽이고,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사람이다.”

“남의 흔적을 닦으면서 그런 소리가 나와?”

“그런 건 상관없대도. 어쨌든 우리 스승님이잖아.”

슈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래. 너는 내가 남자를 좋아하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지. 난 그래서 무서웠어.”

“스승님 말은 고등학생 때도 그랬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스승님 일에 따지고 들 수는 없잖나? 그치만, 스승님 몸 걱정이 되긴 해. 요새 너무 험하게 하는 것 같은데, 좀 쉬면 안 되나?”

“해도해도 채워지지 않아서 그래.”

“으응, 그럼 스승님이 알아서 하겠지.”

슈는 눈살을 찌푸렸다. 뜨거운 물을 채운 욕실이 온통 더운 증기로 텁텁해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일어나서 대충 몸을 닦는데, 미카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스승님,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말기다.”

 

그날 밤 침실에는 파자마를 입은 미카가 쿠션 몇 개를 들고 나타났다. 헐렁한 파자마 자락을 팔락거리며 몽실몽실 솜이 빵빵한 쿠션을 슈의 몸 주변에 잔뜩 가져다 놓는다.

“지금 대체 뭐 하는 거냐?”

“오늘의 스승님은 왠지 혼자 둘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미카는 슈의 옆에 털썩 드러누웠다.

“괜찮지, 스승님?”

“괜찮아.”

등 뒤에서 금방 잠든 미카가 색색 뱉는 숨이 닿는 것을 느끼며, 슈는 계속 주문처럼 되뇌었다. 괜찮아. 지금 이대로 괜찮아.

 

다음 날은 모처럼 스케쥴이 없는 날이어서 아침부터 청소를 했다. 이불빨래를 하고, 비누거품을 내서 욕실을 닦고, 서로 장난으로 거품을 얼굴에 묻히다가 웃어버리고, 같이 손을 잡고 청소기를 돌리고, 노곤노곤하게 지친 밤에는 배달음식을 시키고서 TV에 나오는 고전 로맨스 영화를 틀고. 귓가에 샹송이 들리고 흑백 화면의 불빛이 얼굴 위에 아른거리는 동안 미카가 오늘은 나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슈가 쿠션을 끌어안은 채 대답했다.

“오늘은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씩 웃자 미카가 영문을 몰라 혼란스러운 표정을 하면서도 바보처럼 헤헤 웃는다. 뺨을 살짝 꼬집자 입술을 삐죽이다가도 뭐가 그리 좋은지 곧 다시 하얗게 웃는다. 지직거리는 TV화면이 미카의 웃는 뺨 위에 아롱거리는 것을 보며 슈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사실은 나는 연애도 섹스도 필요없었던 거지. 너의 몇 번의 눈길, 몇 번의 손길. 사실은 그거면 넘치고도 남아서 울고 싶었던 거지. 그리고 난 그게 무서웠던 거지.

계절

#주간_미카슈 주제 : 계절

저번주 주제였는데 계절감은 워낙 좋아하는 소재라 놓치고싶지 않아서 ^^; 괜찮겠지요.. 계속 참여에 의의를 두는 정도로 단문입니다.

 

***

 

지하 라이브하우스가 툭탁거리는 소리로 부산스러웠다. 대기실 벽 윗쪽으로 난 창문에 네모나게 재단한 에어캡을 대던 미카가 흘끗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때, 안 비뚤어졌나?”

“왼쪽을 조금 더 올리지……. 좋아. 나쁘지 않군.”

슈가 찍 소리나게 테이프를 잡아당기며 대답했다.

“스승님은 이런 걸 어떻게 알았대? 스승님네 집은 거 뭐냐, 반듯한 저택이잖아. 이런 잡일은 한 번도 안해봤을 것 같은데.”

“이러고 있는 게 다 네 녀석 때문이잖나. 아이돌의 기분은 체력 관리인데, 아무리 날씨가 쌀쌀해졌다고 해도 잔기침이나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냐.”

“잠깐 기침했다, 잠깐. 끄응, 솔직히 스승님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는 않은데…….”

“나를 뭘로 보는 거냐. 제왕은 제왕이니 제왕인 거야. 이제 다 끝났으니 저기 불이나 켜거라.”

“으응……. 뭐, 스승님은 빵만 먹고서도 라이브만큼은 완벽하게 해내니까 반박할 말이 없고마. 난로는 또 어디서 구해왔대.”

미카가 허리를 굽히고 한참을 끙끙대자 대기실 소파 옆에 있던 난로에 불이 들어왔다.

“스승님도 그만하고 이리와서 앉아라.”

미카가 옆자리를 두드렸다. 슈가 묵묵히 따라 앉기 무섭게, 방의 불빛이 몇 번 깜박거리더니 어둑해졌다.

“전등을 갈아야겠군.”

언제 날이 저물었는지 벌써 바깥은 어두웠다. 타닥, 타닥 붉게 타오르는 난롯불이 안 그래도 빛 없는 지하에서 가장 밝은 불이었다.

“오늘은 늦었으니께 내일 하교하면서 사오자. 근데 난롯불도 좀 불안한 것 같다?”

“땔감을 더 넣어야겠구나.”

“어, 잠깐만 기다려봐라.”

미카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섰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대기실 앞에는, 양손 가득 마른 낙엽더미를 모아들고 온 미카가 있었다.

“이 앞에 잔뜩 떨어져 있던 게 생각났다. 이거면 되겠지.”

얼굴에 지푸라기를 묻힌 채 환하게 웃는 미카를 보면서 슈는 혀를 쯧 차고는 뺨에 손을 올려 풀을 떼어주었다. 눈이 마주쳤다. 눈이 한두 번 깜박일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슈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미카에게서 낙엽더미를 받아들었다.

“손이 차구나. 내가 나갔다 올 걸 그랬군.”

“괜찮다.”

집게로 난롯불에 마른 낙엽더미를 밀어넣는 동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낙엽이라니, 벌써 가을이구나. 언제 이렇게 금방 계절이 바뀌었는지 모르겠군. 시간도, 벌써 밤인가?”

두 사람은 어둑한 방에서 나란히 난롯가에 앉아 불빛을 쬐었다. 묘하게 고즈넉한 방에서 타닥타닥, 낙엽 타들어가는 소리만 계속 난다.

“모두 어느새 변해버려. 카게히라. 네 녀석도 말이다. 비실비실 말라서 남 눈치를 보면서, 옆에서 챙겨주지 않으면 금방 픽 쓰러질 것처럼 불안해 보이던 게 엊그제 같은데…….”

눈꺼풀을 반쯤 내리깔고 천천히 눈을 깜박이는 슈의 얼굴을 미카가 제 어깨 위로 당겼다.

“졸리면 이대로 좀 자자. 어두컴컴한데 난롯불 쬐고 있으니까 노곤노곤하지.”

“……따뜻하네.”

“응. 따뜻하네.”

아직 몸에 밖에 나갔을 때의 한기가 남아있는 채로 그렇게 말했다. 눈앞에 너울거리는 불빛을 한참 바라보던 미카가 물었다.

“스승님, 자?”

대답은 없었다. 꾹 다문 입술, 감은 채로 가볍게 흔들리는 눈꺼풀, 대답 대신 몸을 통해 전해지는 심장 소리.

두근, 두근.

타닥타닥 타오르는 난로 불빛이 창백한 얼굴 위에 아롱거리고 속눈썹 아래로 그림자가 길게 떨어진다. 미카는 그 모습을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오랫동안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에, 미카는 침묵 아닌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집게를 들어 애꿎은 낙엽더미를 쿡쿡 찔렀다. 그렇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언제나 시간은 이렇게 빠르게 흘러간다. 세상 모든 것이 조금씩 형태를 바꾸어 간다. 계절은 지나가고, 낙엽은 떨어지고, 날이 쌀쌀해지고, 밤은 깊어가고, 우리의 심장이 뛰고 감정도 바뀌어 가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