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_미카슈 주제 : 꽃
오랜만에 썼더니 잘 써지지도 않는데다가 좀 타임오버네요 ^^; 이게 뭐지.. 이래저래 재활해볼 겸 의식의 흐름대로 썼습니다! 발키리와 꽃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얀끼 반 스푼 섞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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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거울을 보면 눈을 감고 오른쪽 눈 위를 손가락으로 가려보는 습관이 생겼다. 안대라도 해서 눈을 가려버리면, 역시 아이돌답지 않으려나. 지금도 스승님에게 반푼이 소리를 듣는데, 한쪽 눈으로만 생활하면 더 엉망이겠지. 카게히라 미카는 제풀에 피식 웃었다. 한숨이 섞인 웃음이었다.
양쪽 색이 다른 눈동자라는 게 결코 흔한 모습이 못 되어서, 어려서부터 미카의 얼굴은 남의 주목을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가장자리로 슬쩍 걸어도 쏟아지는 시선들은 결코 얌전하고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렌즈를 낀 거니? 병이라도 있는 거니? 관심받고 싶어? 눈치 없이 쏟아지는 무례한 질문들이 불쾌해, 카게히라 미카는 부러 사람들 눈을 피해다니고는 했다. 질문 중 하나에는 결코 정직하게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불쾌했다.
한쪽 눈 색이 다른 것이 사실 병이라면 병이었다. 어려서 간 신사에서, 기모노를 입고 마당을 쓸던 할머니가 미카를 흘끗 내려다보고는 혀를 차며 말했다.
‘너는 앞으로 많은 것을 보겠구나. 한낱 인간으로서는 굳이 보지 않아도 좋을 것들을 잔뜩 보겠구나. 너무 어린 아이에게, 신(神)의 눈이로구나. 복이라면 복이련만, 너는 정 외에는 원하지 않겠구나.’
당시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지막이 느릿느릿 읊조리듯 말하던 할머니의 어투가, 그리고 배경으로 들리던 낙엽 차르르 쓸리는 소리가 뇌리에 박혀서 어쩐지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머리가 굵어지면서, 카게히라 미카는 자연스럽게 그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간혹 이상한 것들이 보였다. 햇빛이 사물에 반사되어 망막에 맺히고 현재의 상(象)을 그대로 보게 하는 것이 사람의 눈일지언데, 이상하도록 밝게 파란 왼쪽 눈에는 사람과 사물의 미래와 과거가 보였다. 겉면을 보면 충분할 때에 본질이 보였고, 실물을 보고 싶은 순간에 환상이 보였다. 갑자기 보이는 환상 때문에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는 일이 잦아졌다. 이상한 아이라는 말을 듣는 일도 잦아졌다. 그래도, 이런 체질이 언제나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카게히라 미카는 아직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처음 보는 남자에게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분명히 눈앞에 지나가는 사람은 가냘플 정도로 깡마른 남자인데, 온몸에 끈덕지고 시꺼먼 것들을 덕지덕지 달고 있었다. 빛처럼 일렁이고 어둠처럼 기분 나쁘게 꾸물거리는 것들은 결코 이 세상의 광경은 아니었다. 환상이라면 그동안 수도 없이 많이 보았지만, 그중에서도 본 적이 없는 종류의 광경이었다. 아마 빛 같기도 하고 어둠 같기도 한 것들의 정체가 궁금해 견딜 수 없어서 그 남자를 따라나섰던 것 같다.
물론 이제 카게히라 미카는 이츠키 슈가 온몸에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것들의 이름을 잘 알고 있다. 미련, 책임감, 연민, 자긍심, 자기혐오, 집착, 사랑, 박애……. 이츠키 슈가 온몸에 두른 기분 나쁘고 끈덕지고 또 애틋한 감정들의 이름을 미카는 이제 수십 개, 아니 수백 개는 댈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왼쪽 눈이 시도때도 모르고 온갖 것을 보기 시작한 탓이다. 이츠키 슈를 볼 때마다 특히 그랬다. 그 사람을 보고 있으면 그의 현재가, 과거가, 미래가 주체할 수 없이 마구 보이면서 시야가 어지러울 정도로 뒤죽박죽이 된다.
어느 날인가 미카는, 바느질을 하는 슈의 머리색을 보며 집 밖에 잔득 핀 벚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꽃잎이 날리기 시작했다. 옅은 분홍빛 머리카락이 만발한 꽃무리가 되고, 이츠키 슈라는 벚나무에서 분홍의 꽃잎이 하염없이 날린다. 달짝지근한 내음이 짙게 풍겨와 취할 것만 같았다. 어느새 귓가에 웅장한 멜로디의 노래가 들리고 황금의 태엽으로 장식한 무대가 보인다. 모자를 쓴 남자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고,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들린다. 완연한 제왕이 눈앞에 있었다.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다시 벚꽃잎이 한바탕 눈앞에 흩날리며 시야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가 다시 뜨니, 이제 분홍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완전히 한 그루 벚나무가 된 참이었다. 스승님? 스승님? 당황해 주변을 둘러보니, 벚나무 아래 앳된 얼굴을 한 아이가 울고 있었다. 키류 씨, 키류 씨. 가지 마세요. 저를 두고 가지 마세요. 이 세상에, 저만 두고 가시면 안 돼요……. 쉴새없이 뇌까리며 섧게 흐느끼던 아이의 모습이 흐려지고, 이제 벚나무에서 꽃잎이 완전히 떨어졌다.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벚나무가 바싹바싹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했다. 늙고 마른 나무는 이제 남자의 모습이 되었다. 창백하게 깡마른 남자는 인형을 들고 중얼거린다. 아아, 마드모아젤. 나는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이냐. 대답을 해 다오! 이 세상엔 배신자뿐이고, 나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구나. 지쳤어. 전부 과거의 영광일 뿐이야…….
아, 당신은 몰락하는구나.
영안(靈眼)이 보여주는 환상을 관람하던 카게히라 미카가 퍼뜩 깨달았다. 지금껏 보지 못한 스승님의 모습이니 틀림없는 미래다. 언젠가 당신은 몰락하는구나. 지금 보이는 모든 강박과 책임감을 등에 이고,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지고 마는구나. 그러면, 나는.
그러면 나는 그 때도 당신의 곁에 있는 걸까? 있을 수 있는 걸까?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정신을 차리니 슈가 잔뜩 당황해 미카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카게히라. 카게히라! 왜 갑자기 허공을 보고 있는 거냐.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구나!”
미카는 달려가 슈의 한쪽 팔을 끌어안았다. 슈가 더욱 당황해 미카의 이름을 거듭 부르는 것도 아랑곳않고 더 팔을 넓게 벌려 스승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왜 갑자기 이렇게 수많은 환상을 보기 시작했을까? 신의 눈이라더니, 당신이 신에 가까워서 당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걸까? 아니, 어쩌면 이건 영안(靈眼) 같은 게 아니라 그저 단순한 병인지도 모른다. 사람이라면 대부분 한 번쯤은 앓는다는 병. 다른 사람을 원하고,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자 하고, 그 사람을 생각하고, 함께 있는 순간에도 사무치게 그리워하다 못해 그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까지 생각하는 병. 생각이 현실 이상으로 뻗어나가 그의 환상까지 그리워하며 끝까지 함께 있고자 하는 병. 미카는 품에 안은 남자를 더 꽉 끌어안았다.
뜨뜻한 체온이 느껴지고 당황해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린다. 당신은 꽃 같다. 과연 제왕답달까, 꽃이 가득히 만개한 고목처럼 화려해서 모두의 시선을 끈다. 그리고 이 나무는 더없이 선연한 꽃을 피우느라 무리하고 있다. 꽃잎이 제 양분을 전부 빨아먹는지도 모르고 제 몫을 다해 곱게 만발한 꽃을 피우고 있다. 언젠가 이 꽃은 앙상하게 시들고 잔해만 남을 것이다. 그리고 카게히라 미카는, 바닥에 떨어져 찢어진 흰 꽃의 잔해와 검게 비틀어진 나무등걸까지 자신의 몫으로 할 욕심이었다.
당신의 영광부터 비참까지 빠짐없이 계절처럼 사랑스럽다. 만족스럽다. 몸에 닿는 당신의 살은 봄처럼 따뜻하고, 이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의 모든 시간이 꽃무리처럼 아득히도 눈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