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켄레그] 느낌

청각은 오감 중 가장 발달이 늦는 감각. 오감 중에서도 시각과 청각은 쉽게 조화되지 못하고, 보통 시각이 경쟁에서 이겨서 감각을 지배한다. 따라서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소리 하나하나에 의존할 이유는 없었다. 시신경 회로가 무너지기 이전에는.

어디까지나 제한파인 레드그레이브는 살가드와 함께 직접 미지의 케이오시움 장치를 몰래 개발하고 있던 엔지니어들을 급습했고, 그 중 한 명이 장치를 작동시켜 그 빛을 쬐었을 뿐인데, 체내의 케이오시움이 반응하여 동작 기작이 꼬여버린 탓에 이렇게 되어버렸다. 짙은 어둠이 감각을 지배하고 아무 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죽 지상에 있는 닥터 워켄의 연구실에 갇힌 신세였다. 최대한 빨리 기능을 복구하기 위해서 닥터 역시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레드그레이브의 엉켜버린 회로를 분석하는 데 할애하고 있었지만, 케이오시움이 증폭되어 버렸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얼마 전에 회로를 건드려 본 이후로 무언가 보이기는 보이는데, 그것이 과거에 그녀가 본 이미지들이었다. 까만 어둠 속에 문득문득 저 먼 과거 황혼의 시대의 이미지들이 떠올라 마음을 어지럽히는 탓에 그녀는 울컥해서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워켄에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러자 워켄은 일단 과거의 이미지라도 볼 수 있도록 연결을 해 놓아야 시각의 오류를 찾는 데 용이하다고 대답했고,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지금 보는 과거의 이미지 중에는 너는 기억하지 못하는 네 모습이 있다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새까만 어둠 속에, 간혹 선명한 이미지로 떠오르는 과거들, 예민해지는 신경 속에, 청각은 극도로 예민해져만 간다. 그래서 전이라면 몰랐을 테지만,

“닥터.”

“그래. 여기 있어.”

“가까이 있네.”

“물론이지, 널 수리해야 하니까.”

“아니, 얼굴이 닿을 듯이 아주 가까이 있어. 이제는 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어.”

“…표정이, 자꾸만 울 것 같길래, 보다가-”

“그거, 네 탓인데.”

있지도 않은 심장에 무언가 울컥 얹혀서 말로 토했다. 손을 뻗었다.

생각대로, 자신의 얼굴 바로 가까이에 그의 얼굴이 있다. 더듬더듬 얼굴을 만지자, 표정이 굳은 것이 느껴진다. 꿀꺽 하고 목울대가 울리는 것도 느껴진다. 잠시 그대로 그렇게 멈추었다. 표정이 아마도 아주 엉망일 것이다.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라레그] 소생

“당신도 우리도, 다른 사람은 상상 못할 만큼 긴 시간을 살아왔지. 세상이 일흔여섯 번 뒤집히고 사람들이 개미처럼 스러져가는 모습을 봐 왔어. 지루할만큼 긴 시간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저 순간 스쳐지나가는 바람이지. 그렇지만 처음은 달라…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겠지. 만일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건가? 예전의 친구라거나. 연인이라거나…”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네 녀석도 생각보다 우습구나. 수백 년 전에 묻혀버린 일을 이제와 입에 담다니.”

대답하는 레드그레이브의 눈에는 평소와 같이 광채가 없었다. 혹자들은 그것을 살아있는 기계의 눈이라며 소름끼쳐했지만, 마르세우스는 그저 모든 것에 아주 지친 자의 눈 같다고 생각했다.

다음 순간, 레드그레이브의 시야가 흐려졌다. 공기가 굴절되어 소리가 왱왱거리고 남자가 뭐라고 말하는 입모양만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럼 한번 볼까.’

레드그레이브는 몸을 흠칫 떨었다. 세찬 바람에 부드러운 머리칼이 날리며 얼굴을 때렸다. 눈을 찡그렸다가 얼굴에 무언가 닿는 감촉에 놀라 눈을 다시 뜨자 눈앞에는 한 사람이 난처하게 웃으며 그녀의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레드그레이브. 갑자기 표정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레드그레이브는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장난이지? 얼굴에 열이 화악 오르고 목이 바짝바짝 말라서 입고 있는 정장 셔츠의 단추를 하나 풀었다. 장난 치고는 너무 심하다. 불쾌했다.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레드그레이브… 있지, 내가 뭔가 잘못한 거야? 당신 좀처럼 그런 표정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뭔지 모르겠지만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웃어주지 않을래? 잠깐, 당신 울어? 내가, 내가 잘못했…”

레드그레이브는 그라이바흐에게 키스했다.

[그라레그] step

“춤을 춰요, 레드그레이브.”
오랜만에 만난 여자에게 남자는 손을 내밀었다. 선율에 맞춰 한참을 그림처럼 휘몰아치던 두 사람의 스텝은 남자가 고개를 살짝 저으면서 끝났다.
“언제나 완벽해. 훌륭해, 레드그레이브. 그렇지만 역시 난 이 쪽이 좋네.”
말을 하곤 그라이바흐는 장난스럽게 레드그레이브의 뺨을 잡았다. 레드그레이브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거?”
“그거.”
이어진 것은 춤이라고도 할 수 없는 제멋대로의 스텝이었다. 그것이라고 지칭은 했지만 그저 두 사람이 함께 공부하던 시절에 장난처럼 연습하곤 하던 자기들만의 몸동작일 뿐이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오래 지난 탓인지 곧 발이 엉키고 레드그레이브는 그라이바흐의 품 위로 쓰러졌다. 웃음소리가 흐드러졌다.

[베른리리] 외면

진단메이커 키워드 : 나비, 한번만 도와줘, 작별

 

머리통이 크기 전 쌍둥이는 많이도 같이 들판을 쏘다녔다. 다람쥐를 쫓고 잠자리를 잡고 개울에서 물장구를 쳤다. 한동안은 프리드리히가 나비 수집에 재미를 들였다. 검은 날개를 팔랑거리는 제비나비 하며, 붉은 점이 알알이 박힌 붉은점모시나비하며, 날개에서 유난히 인편이 묻어나는 부전나비, 색이 고운 노랑나비. 그 중에서 특히 희귀한 것이 율리시스 나비였다. 큰 날개가 어른 손바닥만하고 오묘한 푸른 빛을 띄는 그 나비는 베른하드가 보기에도 퍽 고왔다. 그러나 내색은 않았다. 프리드리히는 유독 그 나비를 베른하드 앞에서 뽐내곤 했다. 그깟 나비가 뭐가 그렇게도 중요하고 좋을까. 베른하드에게는 프리드리히가 그 나비 잡고 먹이 구해주겠다고 들판을 쏘다니다가 굴러서 다치지나 않는 게 더 다행인 일이었다. 베른하드가 그렇게 관심없어하면 프리드리히는 샐쭉해 가지고는 가버리곤 했다. 그럴수록 더 부러움을 내색할 마음은 없었다.

며칠 새 프리드리히는 유난히도 열심히 나비를 돌보고 있었다. 빛깔이 고와야 한다며 이것저것을 가져다 먹이려 하고 이상한 게 묻지 않았나 살피고. 참 유난이다 싶었다. 그렇게 프리드리히는 또 베른하드를 끌고 산으로 나갔다. 그런데 아차, 신이 나 있던 프리드리히는 그만 깎아지른 경사를 못 보고 넘어지고 말았다. 채집통이 열렸다. 나비가 곧 날아갈 듯 했다. 발이 푹 빠져 바로 잡지를 못하는 채로 프리드리히는 애처롭게 형을 불렀다. “도와줘, 베른… 한 번만 도와줘, 베른!”

베른하드는 멍하니 프리드리히를 보고 다시 나비를 보았다. 부아가 치밀었다. 따지고보면 자기가 이렇게 또 프리드리히의 뒤치닥꺼리를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냥 날아가 버려라. 멀리멀리 날아가 버려라. 파아란 날개가 채집통 문에 끼어 파들파들거리다가, 결국 파란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어디까지 하늘이고 어디까지 나비인지 알기 힘들게 되어 버렸다. 시원섭섭하면서, 죄책감이 몰려왔다. 프리드리히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녀석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작별해 버렸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얼마 후가 두 아이의 생일이었다. 아직도 프리드리히를 대하기가 멋쩍던 베른하드는 부러 가서 동생에게 선물은 없냐고 툭툭 쳤다. 프리드리히가 힘없이 대답했다. “날아가 버렸어. 다시 안 와.”

그 후로 한동안 프리드리히의 무기력함은 풀리지 않았다. 베른하드와도 쉽게 말을 섞지를 않았다. 화내는 것보다 더 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그렇게 프리드리히와 떨어져 본 적 없던 베른하드는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쁜 꿈이 도무지 끝나지가 않는 것 같아서, 앞으로 살면서 나쁜 일만 벌어질 것 같았다. 다행히 어느 순간 둘은 다시 사이좋은 쌍둥이 형제로 지내고 있었다. 그게 어떻게 된 건지 베른하드는 지금도 정확히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그리고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언제부터 이렇게 둘이 서로를 의지하게 되었는지, 언제부터 이렇게……

불의의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다음부터였는지,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전에도 그리 서로를 애지중지하던 둘은 부쩍 서로 의지하게 되었고 분신처럼 늘 같이 붙어 지냈다. 베른하드도 모르지는 않았다. 아니 잘 알고 있었다. 동생이 간혹 웃으며 자신을 보는 눈빛. 살과 살이 닿을 때 서로의 몸 동작이 느려지는 것. 사는 게 그런 걸 어쩔 수 없잖아, 하고 안타깝게 웃음짓는 동생을 보면서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하고 얹히듯이 끓어오르는 것. 그래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술에 취해서 몸을 제대로 못 가누던 동생이 방에서 나가려는 베른하드를 뒤에서 끌어안았을 때, 목에 더운 숨이 닿아오고 긴 손가락이 움푹 패인 뺨을 따라 그리다가 입술을 만질 때, 베른하드는 멈칫해서 뒤를 돌아보고, 눈이 마주쳐 버렸다. 불처럼 뜨겁고 분명했다. 놀랐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오히려 몇 번이고 바라고 상상했던 순간이리라. 그래서 늘 생각했듯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팔을 뿌리치고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동생의 앓는 목소리가 들렸다.

“도와줘, 베른. 한번만 도와줘, 베른…”

여기서 동생을 뿌리치면, 다시 나쁜 꿈을 꾸게 될까? 내가 나쁜 형인 걸까? 아니, 이렇게 된 내 생애 자체가 나쁜 꿈인 건 아닐까?

나쁜 꿈이라도 좋았다. 베른하드는 뒤돌아 입을 맞췄다.

[살가레그] piece puzzles

정말, 절 사랑하십니까? 라이브러리안은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추고는 정중하게 물었다. 레드그레이브는 미소지었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저절로 그런 질문을 한 것이 부끄러워질 법한 자상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미소. 살가드는 웃지 않았다.

레드그레이브는 무릎 꿇은 살가드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진심으로 그대를 사랑하고 있다.

사실 사람이라면 그녀는 누구라도 좋았다. 누구든 사람이 사랑을 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눈물이 차오르게 한다. 그녀는 그렇게 만들어져 있으니까. 그 말은 속으로 삼켰다. 그러니 눈앞의 사서가 웃지 않더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말한 것만은 진심이었다. 살가드는 가만히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활짝 웃었다.

어딘가 어긋나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고, 그녀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그러니 어딘가 어긋나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과 다르다 해도, 그건 레드그레이브로서도 살가드로서도 어쩔 도리도 어쩔 필요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