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우리도, 다른 사람은 상상 못할 만큼 긴 시간을 살아왔지. 세상이 일흔여섯 번 뒤집히고 사람들이 개미처럼 스러져가는 모습을 봐 왔어. 지루할만큼 긴 시간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저 순간 스쳐지나가는 바람이지. 그렇지만 처음은 달라…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겠지. 만일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건가? 예전의 친구라거나. 연인이라거나…”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네 녀석도 생각보다 우습구나. 수백 년 전에 묻혀버린 일을 이제와 입에 담다니.”
대답하는 레드그레이브의 눈에는 평소와 같이 광채가 없었다. 혹자들은 그것을 살아있는 기계의 눈이라며 소름끼쳐했지만, 마르세우스는 그저 모든 것에 아주 지친 자의 눈 같다고 생각했다.
다음 순간, 레드그레이브의 시야가 흐려졌다. 공기가 굴절되어 소리가 왱왱거리고 남자가 뭐라고 말하는 입모양만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럼 한번 볼까.’
레드그레이브는 몸을 흠칫 떨었다. 세찬 바람에 부드러운 머리칼이 날리며 얼굴을 때렸다. 눈을 찡그렸다가 얼굴에 무언가 닿는 감촉에 놀라 눈을 다시 뜨자 눈앞에는 한 사람이 난처하게 웃으며 그녀의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레드그레이브. 갑자기 표정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레드그레이브는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장난이지? 얼굴에 열이 화악 오르고 목이 바짝바짝 말라서 입고 있는 정장 셔츠의 단추를 하나 풀었다. 장난 치고는 너무 심하다. 불쾌했다.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레드그레이브… 있지, 내가 뭔가 잘못한 거야? 당신 좀처럼 그런 표정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뭔지 모르겠지만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웃어주지 않을래? 잠깐, 당신 울어? 내가, 내가 잘못했…”
레드그레이브는 그라이바흐에게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