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워켄] 잠

이걸로 기억을 떠올렸나? 워켄.

닥터 워켄. 당신은 사람을 구성하는 건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타고난 신체? 아니면 지성적인 능력? 그래, 그런 것들을 생각하더군. 하지만 언젠가 나의 어머니 같은 이가 말했어. 잠은 기억의 정리를 해서 사람을 새로 만들지. 그렇다면 오늘의 자신은 죽고, 내일의 자신으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인 건 아닐까? 요컨대 사람을 구성하는 것은, 기억이라는 거지. 다른 사람들은 엉뚱한 소리라고 웃어넘길지도 몰라. 하지만 나만은 알지. 기억이 같지 않다면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아무리 유전자의 형질이 같고 아름다운 얼굴이 같고 종달새처럼 노래부르는 목소리가 닮아도 말이다, 기억과 경험이 같지 않은 이상 그 노래의 음을 낮추고 노래를 끝맺는 방법에서 차이가 나게 되거든.

그러니까, 나는 지금의 당신을 만들어낸 것과 같아. 놀랍지 않은가? 나는 드디어 죽은 사람을 다시 발생시키는 데 성공했으니. 너무 경계하지 말게. 나는 사실 그대와 같은 존재를 좋아해. 나를 닮았거든. 인간이 이상을 담으려 했으나 망가져버린 것.

이런, 그렇게 야박하게 굴 것 없지 않나. 내가 그대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이 무례한가? 하지만 그대는 지금까지 몇 명의 아이를 죽였지? 기억을 지우고 또 지우기를 몇십번 거듭하고 몇십의 아이를 죽였지? 왜. 이제야 두려운가? 죄책감이 드나? 표정을 보니 알겠군. 아아, 역시 그대는 나를 너무나도 닮았어. 이렇게나 많은 여자를 죽여왔다니, 괜찮은 취미이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우리는 생긴 것도 닮았어. 희고 아름다운 얼굴과 검은 머리카락. 인형을 만드는 박사라지만 나에게는 그대 쪽이 더 인형 같아 보이는군. 인간이 이상을 담으려 만든 것. 그러나 망가져버린 것. 내가 아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지.

그대를 화나게 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야. 그냥, 아주 재미없게 살 필요는 없다는 거야. 세계를 위해 봉사한다는 여자에게 협력하면서 그대는 사명과 보람이 느껴지던가? 나와 함께라면 좀 더 재미있는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세계가 우리를 위해 봉사하도록 하는 게 말이 맞지 않겠나? 그대는 무엇을 위해 되살아난 거지? 세계를 위해서인가, 자신을 위해서인가. 전자로 인해 죽었다면 다시 살아났을 때는 후자를 따르는 게 낫지 않겠나. 이건 일찍이 같은 일을 겪은 자로서 하는 말이야. 그대는 더 많은 쾌락을 배울 필요가 있어. 그대의 딸이었던 작은 인형도 내 덕분에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나.

아아, 정말 농을 즐길 줄 모르는 박사로군. 그러니까 딱딱하다는 거야. 여기 그대를 위해 준비한 와인이 있어. 이렇게 그대의 팔을 베었을 때, 보이는 체액의 색과 흡사하지. 인간의 피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아. 그새 또 한명의 카스토드를 죽였나. 인간이 부러 만들어낸 존재란 실로 대단하군. 내가 우수한 것과 같아. 그래, 나는 그대를 좋아한다니까. 아픈가? 두려운가? 하지만 걱정 말게. 나는 다시 그대에게 생명을 줄 수 있으니. 밤은 길다네, 워켄.

[스프아인] 귀향

마을 앞 어둑한 숲 초입에서는 길이 세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첫번째 길가에는 색색의 열매가 맺혔고 마을 사람들은 씨가 마르지 않도록 모든 나무에 열매를 조금씩 남겨두었다. 두번째 길은 건넛마을로 통하는 큰길이었다. 아직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아저씨가 다른 어른들과 함께 떠나는 모습을 배웅한 적이 있다. 세번째 길은 사실 어딘가로 이어진 길이 아니라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가는 장소로 곧 흐려져 끊겼다. 스프라우트는 숲 속에서 활을 든 파르모와 실프와 함께 사냥을 했다. 실프가 나서면 금방일 텐데, 실프는 가만 앉아 파르모가 활을 몇 번 쏘고 목표물의 숨통이 끊길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제법 크고 무거운 짐승도 실프가 있는 덕분에 옮기기 어렵지 않았다. 파르모와 스프라우트가 각자 한 손씩 실프의 등 위에 얹고 천천히 마을로 걸어가면 짚을 엮던 아주머니가 고개를 들고 화색으로 반겨주셨다. 스프라우트가 마당에서 사냥감의 가죽을 벗기고 약식으로 정리한 후 들어오면 파르모가 수고했다며 그릇 하나를 내밀었다. 갓 짜낸 우유를 데워서 고소했다. 작고 붉은 열매와 곁들이면 특히 맛있었다. 저녁 산책을 하면 어둑해져 가는 마을은 평화로웠고 주민 모두가 작은 스프라우트를 호기심이 섞인 눈으로 반겨주었다. 짐승을 닮은 귀와 노란 안광. 분명 신수의 가호라며 마을의 귀한 존재로 여기고 자랑스러워 하는 눈길들이, 실은 달갑지 않았다. 스프라우트에게는 이 마을이 아닌 돌아갈 곳이 따로 있었다.

소망을 위해 달아나다가 몸이 바뀌고 털이 돋아난 밤에 늑대가 된 소년, 소년이 된 소녀는 크게 앓았다. 가족들의 잠이 깨지 않도록 나와 있는 헛간에서 열이 달떠 끙끙거리며 수인은 짐승 같은 소리를 냈다. 헛간 창문 위로 보이는 달빛을 보자 그리웠다. 돌아가야 할 곳의 기억들. 달빛 아래서 빛났던 웃음과 약속과 따뜻한 체온. 언니, 언니를 찾아서 나는 돌아갈 거야, 언니에게로. 그리운 고향은 어느 작은 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년은 얼굴이 붉어져 밤을 울었다.

[워켄레그] 비행

닥터 워켄이 연구실의 문을 열었을 때 지금은 그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입니까, 송 씨.”

“그, 그것이…”

“무슨 일이냐니까요.”

거듭된 질문에 몸을 웅크린 이 엔지니어는 겁이 많았다. 그래도 대놓고 박대하는 워켄에게 움츠린 채로도 바로 대답할 만큼의 충직함은 있었다.

“지금 우리 카운실은 비상 상황입니다, 닥터. 혹시 레드그레이브님을 보지 못했습니까?”

“레드그레이브? 그 사람을 왜 여기까지 와서 찾지. 없어진 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한 나절입니다.”

“그렇다면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런 제멋대로인 여자 한 명 없다고 비상일 정도로 판데모니움의 관리 체계는 엉망이었습니까?”

“제멋대로라뇨. 얼마나 철두철미하신 분인데…”

“변덕스럽고 즉흥적이죠.”

“불경한 소리 함부로 하는 것 아닙니다, 닥터. 그분이 얼마나 먼 옛날 황금시대부터 만인지상에서 통치를 하는 존엄한 분이셨는데…”

“그냥 사람 놀려먹기를 좋아하는 여자애 같습니다만, 제 경험이 틀렸습니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송을 앞에 두고 워켄은 짐짓 무심하게 뒤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나는 아직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어서 말입니다. 지금 당신과 더 이렇다저렇다 말싸움하고 싶지는 않군요. 레드그레이브는 조만간 당신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만.”

통보에 가까운 인사와 함께 연구실의 문이 쾅 하고 닫힌 후, 워켄이 아까 쳐다보았던 뒷편에서 자박자박 한 명의 소녀가 나타났다.

“거짓말도 유창하군.”

“글쎄, 딱히 거짓을 말한 기억은 없는데.”

쇠로 된 팔과 다리를 지닌 소녀는 외양과는 달리 사뿐하게도 걸어와 접대용 의자 위로 풀쩍 뛰어올라 앉았다. 얼굴을 살짝 낮추고 워켄의 눈을 들여다보며 키득거렸다.

“변덕스럽다느니, 사람을 갖고논다느니 하는 언급도? 내 들으라고 하는 말들이 아니었어?”

“틀린 말 하나 없었지.”

위기감이라고는 한 점 없이 장난기만 가득한 소녀의 목소리에 워켄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의문이었다. 이 여자는 왜 또 여기에 왔을까. 나는 왜 그녀를 숨겼을까.

“아무튼 들었겠지. 비상 상황이라고 한다. 체면을 봐서 당장은 숨겨 줬다만, 당신도 이제 그만 돌아가도록 해.”

“싫다면?”

그리고. 왜 이렇게 여기서만 아이처럼 굴까. 저 중앙총괄탑 최상층의 옥좌 위에 올라 있을 때는 무섭도록 위엄이 서린 여자가 이렇게 연구소에 오면 흡사 도니타나 쉐리 같은 아이와 같았다. 워켄은 떼 쓰는 도니타에게 하듯이 허리를 굽히고 어르듯 속삭였다.

“당신이 의장이잖아, 판데모니움의. 저 공중도시는 당신의 권능 하에 하늘에 떠 있는 거 아닌가. 어서 돌아가야지.”

“내 권능으로 떠 있다니, 내가 잠시 나와서 판데모니움이 추락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영 틀린 말만 계속하는군. 게다가 그 의장의 몸을 만든 건 그대야. 내가 내 제작자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게 어떻단 말이지?”

“어떻기는, 남들 보기에…”

“남들 보기에?”

잔뜩 올라가 장난스럽게 채근하던 소녀의 눈썹이 곧 힘을 잃고 처졌다. 딱딱한 표정으로 소녀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내가 여기 있는 게 그렇게 싫은가? 부끄러워?”

가슴이 철렁해져 황급히 대답했다.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러면, 됐잖아.”

허공에 뜬 그녀의 작은 발이 신이 나 가뿐하게 공기를 휘휘 젓다가, 쇠로 된 손이 허리를 굽힌 워켄의 가운 자락을 가벼이 쥔다. 보랏빛의 눈이 분홍으로 짙어지며 살짝 휜다. 워켄은 흠칫 한 발짝 뒤로 물러나다가, 다시 한 발짝 그녀에게로 나섰다. 잠시 말이 없는 시간 동안 그는 등께가 가려웠다. 기계로 된 사지를 갖고도 소녀의 입술은 부드러웠다.

이것 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고. 우리는 당신의 손과 발 위에서 하늘을 날고 있잖아.

[로쏘마르] 해(解)

욕망이라고 이름붙인 것이 너무 말도 안 되게 커서 그는 구태여 감정의 크기를 쟀다. 그리움 한 줌, 열망 세 컵, 질투 일곱 톤. 기하급수적으로 증식하는 수치들은 한없이 무한대에 수렴하고 무한의 값으로 공식을 도출했을 때 구해낸 해의 이름은 사랑. 이제 의미 없어진 고리타분한 측정치를 구깃구깃 손에 쥐고 그는 정량 없이 긴 한숨만 내쉰다.

아무리 사료를 뒤적거려도 사랑의 문제는 불가해라고만 쓰여 있었고 그녀는 불가해답게 생물도 아닌 것이 생물의 흉내를 냈다. 그의 곁에서 웃다가, 품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눈을 반쯤 뜨고,

로쏘.

왜.

나는 답을 찾고 싶어. 진리를 구하고 싶어. 당신도 그렇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이지?

그래.

여자는 망령처럼 소망을 읊조리고 남자는 망령을 닮아갔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신도 악마도 진리도 망집도 버러지도,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삼 개월의 동침과 칠 개월의 배신. 이로써 그는 그녀가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었던 그 열 달을 넘었을까? 부질없는 희망에 취한 그는 답을 찾아 흥청거렸다. 동료를 배신하고 재료로써 연구했다. 몸을 내주고 이 세계와 저 세계를 넘나들었다. 진리를 찾아서 그녀의 손에 쥐어주어야지. 그녀가 원하는 진리를 주어 그녀의 배를 부르게 하고 더는 갈망에 고픈 눈으로 하늘을 보지 않아도 되도록. 그 눈이 마지막에는 이 쪽을 보도록.

그러나 진리에 닿는 과정은 험난했다. 동료를 주고 실존을 주고 금기를 주어도 전능에 닿아 있는 마지막 해는 쉬이 도달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함께 죽고 죽음을 뛰어넘고 수 년이 흘러서야 마침내 마르그리드가 말했다.

드디어 찾아냈어. 이번에 찾은 것을 취하면 분명히 해답이 될 거야. 할 수 있지?

당연한 소리를.

긴장하지 마, 로쏘.

마르그리드가 습관처럼 짧게 입을 맞췄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닌 주제에 긴장을 한 것은 여자 쪽이다. 그들은 답을 찾아서 스스로 수수께끼가 되었다. 죽어서 산 것. 사람도 아니면서 사람 같은 것. 모든 면이 그녀를 닮아갔다. 불가해의 그녀에게 진리를 주어 생을 주고 마음을 얻을 때 비로소 우리의 수식은 완성될까. 진리를 찾아서 신도 악마도 된 남자는 피가 줄줄 흐르는 반쪽짜리 팔로 검사를 몰아붙이며 웃었다. 그리고 드론이 조각났다. 마르그리드가 사라졌다.

그 순간에 벼락처럼 깨닫게 된 정답들.

당신이 유혹하는 속삭임. 닿지 않는 먼 곳을 그리워하는 눈. 짧은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하얀 뒷목과 바지 밑단 아래 복숭아뼈 명석한 연구와 속알 숨기지 않은 계략 그리고 생물 아닌 몸 녹색으로 점멸하는 드론 입술 위로 닿았다가 장난처럼 사라지는 감촉 당신이 그렇게 사라진 후에 조도가 낮아진 듯한 공기까지, 그 모든 것들이 나의 해였는데. 진리에 달해 더 원하는 것이 없는 연구자는 생을 놓는다.

키스데이 그라레그2

레드그레이브는 업무 중 집중이 필요할 때면 종종 안경을 썼다. 뛰어나게 조정되어 지나치게 예민한 감각은 때로는 오히려 독이다. 해상도를 낮추어 자극의 양을 줄이고 집중을 돕는 안경. 집무실 뒷편에서 레드그레이브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펜대를 빙글빙글 돌리던 그라이바흐가 말했다.

“그거, 꼭 써야해?”

“그런 말 할 시간 있으면 일이나 좀 도와주시겠어요, 엔지니어 그라이바흐?”

말이 들린 쪽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머리카락 한쪽을 귀 뒤로 넘기며 일에 집중하려던 레드그레이브는, 곧 입술을 삐죽이더니 홱 뒤를 돌았다.

“내가 안경 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니, 그런 문제가 아냐. 너는 항상 걱정될 정도로 넘치게 아름답지만.”

“그럼 왜?”

“왜일 것 같아?”

그라이바흐가 턱을 살짝 괴고 웃다가 레드그레이브의 쪽으로 한 발짝 다가왔다.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안 될걸?”

레드그레이브가 눈을 세모나게 뜨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라이바흐의 얼굴 위로 손을 올렸다. 레드그레이브는 그라이바흐에게 키스했다. 꽤 시간이 지나자 안경 위로 온통 하얗게 김이 서렸다. 레드그레이브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그러니까 방해될 거라니까.”

“알았어.”

그녀는 잠시 그에게서 떨어져서 안경을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대신 이따가 당신이 일해줘야 해요.”

“얼마든지, 귀여운 레드그레이브.”

“그렇게 말하는 건 당신뿐인데.”

그라이바흐는 킥킥 웃으며 레드그레이브의 허리를 한 팔에 안고 장애물이 없어진 눈가를 매만졌다. 그렇게 탁상 위 안경의 김이 전부 지워지고 또 남을 때까지 달큰한 시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