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워켄이 연구실의 문을 열었을 때 지금은 그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입니까, 송 씨.”
“그, 그것이…”
“무슨 일이냐니까요.”
거듭된 질문에 몸을 웅크린 이 엔지니어는 겁이 많았다. 그래도 대놓고 박대하는 워켄에게 움츠린 채로도 바로 대답할 만큼의 충직함은 있었다.
“지금 우리 카운실은 비상 상황입니다, 닥터. 혹시 레드그레이브님을 보지 못했습니까?”
“레드그레이브? 그 사람을 왜 여기까지 와서 찾지. 없어진 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한 나절입니다.”
“그렇다면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런 제멋대로인 여자 한 명 없다고 비상일 정도로 판데모니움의 관리 체계는 엉망이었습니까?”
“제멋대로라뇨. 얼마나 철두철미하신 분인데…”
“변덕스럽고 즉흥적이죠.”
“불경한 소리 함부로 하는 것 아닙니다, 닥터. 그분이 얼마나 먼 옛날 황금시대부터 만인지상에서 통치를 하는 존엄한 분이셨는데…”
“그냥 사람 놀려먹기를 좋아하는 여자애 같습니다만, 제 경험이 틀렸습니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송을 앞에 두고 워켄은 짐짓 무심하게 뒤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나는 아직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어서 말입니다. 지금 당신과 더 이렇다저렇다 말싸움하고 싶지는 않군요. 레드그레이브는 조만간 당신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만.”
통보에 가까운 인사와 함께 연구실의 문이 쾅 하고 닫힌 후, 워켄이 아까 쳐다보았던 뒷편에서 자박자박 한 명의 소녀가 나타났다.
“거짓말도 유창하군.”
“글쎄, 딱히 거짓을 말한 기억은 없는데.”
쇠로 된 팔과 다리를 지닌 소녀는 외양과는 달리 사뿐하게도 걸어와 접대용 의자 위로 풀쩍 뛰어올라 앉았다. 얼굴을 살짝 낮추고 워켄의 눈을 들여다보며 키득거렸다.
“변덕스럽다느니, 사람을 갖고논다느니 하는 언급도? 내 들으라고 하는 말들이 아니었어?”
“틀린 말 하나 없었지.”
위기감이라고는 한 점 없이 장난기만 가득한 소녀의 목소리에 워켄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의문이었다. 이 여자는 왜 또 여기에 왔을까. 나는 왜 그녀를 숨겼을까.
“아무튼 들었겠지. 비상 상황이라고 한다. 체면을 봐서 당장은 숨겨 줬다만, 당신도 이제 그만 돌아가도록 해.”
“싫다면?”
그리고. 왜 이렇게 여기서만 아이처럼 굴까. 저 중앙총괄탑 최상층의 옥좌 위에 올라 있을 때는 무섭도록 위엄이 서린 여자가 이렇게 연구소에 오면 흡사 도니타나 쉐리 같은 아이와 같았다. 워켄은 떼 쓰는 도니타에게 하듯이 허리를 굽히고 어르듯 속삭였다.
“당신이 의장이잖아, 판데모니움의. 저 공중도시는 당신의 권능 하에 하늘에 떠 있는 거 아닌가. 어서 돌아가야지.”
“내 권능으로 떠 있다니, 내가 잠시 나와서 판데모니움이 추락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영 틀린 말만 계속하는군. 게다가 그 의장의 몸을 만든 건 그대야. 내가 내 제작자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게 어떻단 말이지?”
“어떻기는, 남들 보기에…”
“남들 보기에?”
잔뜩 올라가 장난스럽게 채근하던 소녀의 눈썹이 곧 힘을 잃고 처졌다. 딱딱한 표정으로 소녀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내가 여기 있는 게 그렇게 싫은가? 부끄러워?”
가슴이 철렁해져 황급히 대답했다.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러면, 됐잖아.”
허공에 뜬 그녀의 작은 발이 신이 나 가뿐하게 공기를 휘휘 젓다가, 쇠로 된 손이 허리를 굽힌 워켄의 가운 자락을 가벼이 쥔다. 보랏빛의 눈이 분홍으로 짙어지며 살짝 휜다. 워켄은 흠칫 한 발짝 뒤로 물러나다가, 다시 한 발짝 그녀에게로 나섰다. 잠시 말이 없는 시간 동안 그는 등께가 가려웠다. 기계로 된 사지를 갖고도 소녀의 입술은 부드러웠다.
이것 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고. 우리는 당신의 손과 발 위에서 하늘을 날고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