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키님 리퀘 리니씨씨타이

C.C.는 잘생긴 남자를 좋아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잘생긴 남자들을 좋아했다.

C.C.로 말하자면 연구소에서 가장 젊은 엔지니어였고, 또한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엔지니어였다. 허공을 보며 넋을 빼놓고 있다가 복잡한 도면을 한가득 그려 내는 모습을 보면 그 누구라도 혀를 내두르다가 끌끌 차고는 했다. 혀를 내두르는 이유는 그 압도적인 재능 때문이었고, 혀를 차는 이유는 그녀가 자신의 재능에 대해 제대로 인지를 못 하는 까닭이었다.

예전에 어느 엔지니어가 그녀의 재능과 그늘 없이 밝은 분위기에 첫눈에 반해 은근히 들이댄 적이 있었다. 호감을 가진 티가 나도 너무 나서, 연구소의 모두가 말은 안 해도 아련하게 따뜻한 눈빛으로 그 남자를 격려하고는 했다. 도무지 연구밖에 모르고 남자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는 저 아가씨를 누가 데려갈까, 요 어린 아가씨는 언제쯤에야 철이 들고 사랑이라는 걸 알까 다들 조금씩 걱정이었던 것이다.

하루이틀 계속 말을 붙이던 남자가 마침내 C.C.에게 이상형에 대한 얘기를 꺼냈을 때, 연구소에는 이상할 정도로 침묵이 감돌았다. 엘런은 설계에 열중하는 척했지만 도면 대신 허공을 보고 있었고 케인은 손바닥에 땀을 쥐다가 자기 침 삼키는 소리에 깜짝 놀라 허리를 곧추세웠다. 정작 두 사람은 온 연구원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잘도 떠들고 있었다.

“C.C.는 남자를 볼 때 어딜 보나요? 성격이라거나… 재능? 아니면 역시 외모?”

“으음~ 글쎄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에이.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냥 말해 봐요. 다 이해해요.”

그녀는 해맑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과의 케미요!”

 

한낱 가벼운 호감으로 뚫어내기에 그녀의 배리어는 너무 강했고 며칠 후 그녀가 대답한 의미를 이해한 남자 엔지니어는 자재창고에서 술이 떡이 되어 발견되었다. 이 엔지니어를 본인 요청에 따라 다른 연구소로 이적시켜 준 것이 바로 리니어스 상급기사였다. 그래서 리니어스에게 현재 연구소의 상황은 퍽 흥미로우면서도 난처했다. 설마 그 고고한 엔지니어가 하필 그 알게모르게 악명높은 아가씨에게 관심을 가지리라고 어느 누가 예상했을까.

둘 중 어느 누구도 놓치기가 아까운 인재였기에 리니어스는 이번엔 꽤 신중을 기해 상황을 지켜보았다. 기계에서 처음 또래의 여자로 방향을 바꾼 타이렐의 관심은 의외로 뭉근하고 집요하여 쉬이 식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C.C.는… 도무지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상대에게 은근히 호감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결정적인 찬스마다 천연덕스러운 말로 완전히 화제를 돌려 타이렐을 좌절시켜 버렸다. 이번 목요일에는 연구소가 쉬죠? 아, 네! 그랬었죠! 신작 보러 가야겠다! C.C.는, 무슨 종류의 작품을 좋아합니까? 아이 참.. 그게…. 타이렐도 이런 데 관심이 있나요? 여기요.

그리고 가장 슬픈 점은 타이렐이 좌절할지언정 포기하지는 못한다는 점이었다. 차라리 예전의 젊은이처럼 포기했다면 편했을 것을. 두 사람의 모습을 계속 유의해 지켜보며 리니어스는 타이렐을 동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깨닫게 된 점이, C.C.가 남들보다 자신과 타이렐에게 유독 밝게 인사한다는 사실이었다.

타이렐과 리니어스 두 남자를 대할 때마다 C.C.의 눈은 빛나고, 뺨에는 홍조가 돌았다. 며칠간 리니어스는 머리가 복잡해 잠을 설쳤다. 이거 좀 복잡해지는 거 아닌가 가끔 그 눈을 떠 버릴 정도로 골똘히 생각했다. 그대로 다음 사실을 깨닫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C.C.는 리니어스와 타이렐을 엮고 있었다.

 

이제 리니어스는 다른 의미로 잠을 설쳤다. 침대에 누우면 C.C.의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리는 눈이 떠올라 오한이 들고 기분이 착잡했다. 아니야. 이게 아닌데.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드디어 상급기사는 결단을 내렸다. 윗사람으로서 젊은이에게 직접 일러줘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C.C.를 따로 불러서,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서 직접 차근차근 얘기를 해보면 아무리 둔한 아가씨라도 상황에 대해 좀 감을 잡고 대처를 하게 되지 않을까. 사실, 무엇보다도 계속 C.C.에게 망상의 대상이 되는 것이 꺼림칙했다.

“이리 와 봐아, C.C.”

“네, 상급기사님.”

“내가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어어. 혹시 다음 휴무 때 시간 있어어?”

“앗, 아앗… 네, 상급기사님! 얼마든지요!”

지금 이 아가씨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리니어스 자신에 대한 호감에서 기인하는 거라면 나쁘지 않을 텐데. 리니어스는 난처하게 웃었다. 아마 연구나 개발에 대해 논의한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C.C.가 리니어스를 존경하고 따르는 것만은 확실했으니까. 아쉬운 기분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C.C. 저번에 제가 말했던 공연 말입니다. 이번 주 휴무에, 시간 괜찮습니까?”

평소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며, 흘끔거리는 시선 하며, 모로 보나 리니어스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새파랗게 어린 엔지니어에게 경계를 당하고 있자니 기분이 썩 좋지가 않았다. 나는 그런 게 아니야아. 바로 타이렐 너와 C.C.를 이어주려고 노력하고 있던 거라고.

“아, 저기 미안해요. 타이렐. 그때는 이미 선약이 잡혀서…”

그리고 하필 대답을 하면서 C.C.는 눈앞의 리니어스를 흘끗 쳐다보았다.

“설마 지금 두 사람…”

“네. 다음 정기 휴무는, 리니어스 상급기사님과 보내기로 했어요!”

기이하게도, 여자는 이 순간 뺨을 수줍게 붉히고 눈을 접어 웃었기에 영락없이 다른 종류의 자랑 같아 보였다.

“네? 뭐라고 했습니까, C.C.?”

리니어스는 언제나 나른하니 고고하던 엔지니어가 입을 뻐끔거리는 귀중한 장면을 아주 가까이서 구경하게 되었다. 경악에 찬 타이렐의 눈이 C.C.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뭐가 잘못됐느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에게서 아무런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 리니어스를 향했다. 이런이런, 수습하자아.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고 티를 내야지.

그렇지만 리니어스는 아무 말도 없이 타이렐을 보며 싱글싱글 웃고만 있었다. 이 상황이 이상하게도 즐거웠던 것이다.

일 초, 이 초, 삼 초. 시간이 지날수록 이 고고한 청년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더니, 마침내 눈앞의 여자에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C.C., 당신은 우수합니다. 그렇기에 더욱 용서할 수 없습니다!”

타이렐은 씩씩거리며 방을 박차고 나갔다. 쾅 하고 문 닫는 소리가 연구소 전체에 울릴 지경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C.C.는 울상이 되어 리니어스에게 매달렸다.

“으으, 상급기사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오…”

“걱정 마아, C.C. 타이렐은 금방 제 풀에 꺾여서 돌아올 거야아.”

손을 들어 머리를 슥슥 쓰다듬자 C.C.는 뺨을 붉히며 얼굴을 숙였다. 연애세포라고는 1g도 살아있지 않은 아가씨, 여느 남자에게 호감을 가지더라도, 저 남자 괜찮다며 남과 엮을 생각만 하고 본인의 감정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둔한 천재 아가씨. 알고 보면 꽤 귀여운 구석이 있는 아가씨. 리니어스에게 지금의 상황은 난처하면서도 괜찮은 기분이어서, 그는 타이렐이 계속 오해하게 두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엔지니어 커플링 합작 – 로쏘x마르그리드

로쏘라는 남자는 뼈에 스미게 현실적이었다. 그의 세상에서 모든 상태와 이치는 공식과 수치로 설명할 수 있는 것. 그런 남자에게 그녀는 신비를 말했다. 이미 죽었으나 살아 있는 것. 있지만 없는 것. 그게 바로 나야, 로쏘. 반듯한 이 세상에 바이러스와도 같은 그녀가 불쑥불쑥 나타나서 손으로 껴안거나 입술을 댈 때면 로쏘는 진저리쳤다. 그리고 그녀의 ‘감각’에 대해 알게 된 후에는 놀라더라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죽었다 다시 얻은 몸, 실체가 없는 몸. 그런 몸의 그녀에게는 고통도 쾌락도 반 푼짜리였다.

있거나 없는 몸에 체류하는 감각들에 그녀는 목놓아 울지도 못했다. 그도 그녀와의 의리를 지켜 웃음기가 없는 웃음을 웃어젖혔다. 그녀는 극도의 쾌락 혹은 극도의 고통만이 겨우 의미를 가지는 그런 몸을 가졌고 그는 그녀의 악다구니에 순순히 협조해 영상을 취했다.

레지멘트 부지에 비가 내리는 날이면 로쏘는 혼자 우산을 썼다. 그녀에게는 빗방울의 차가움이나 신체의 건강 따위는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음이다.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발자욱 질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로쏘는 옆에 함께 걷는 여자에게 신경도 쓰지 않는 척하지만 자꾸만 흘끔흘끔 눈길을 주게 되었다. 짧은 단발머리 아래 드러난 흰 목덜미. 빗방울이 똑 똑 떨어져 흐르는 그 목덜미.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그녀가 빙긋이 웃고 있었다.

길고 짧은 시간 동안 시선이 교차하고, 눈앞의 남자가 당황하기를 바라는 장난기 가득한 눈을 로쏘는 마주하고, 그는 그녀의 기대대로 당황하는 대신 눈썹을 찌푸리고 우산을 그녀의 머리 위로 올릴 뿐이다. 그리고 그때 그녀는 문득 느낀다. 감각도 제대로 되지 않는 반 푼어치 몸에 지금 닿는 빗방울이 지나치게 춥다고. 그리고 생각한다. 만약에 우리가 평범하게 연구소에서 만났다면.

어쩌면 그들은 평범하게 함께하고 평범하게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반 푼짜리 관계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그녀는 아이를 좇는 어머니의 망령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마르그리드’는 로쏘와 함께하고 예전에 어느 남자와 그랬듯이 연애하고 핀잔을 주고 함께 밤을 새웠을지도 모른다. 입을 맞추고 연구를 하다가 그녀는 하얀 드레스를, 그는 머쓱하게 검은 턱시도를 입고 식을 올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신부가 신랑에게 키스를 하고 신랑의 얼굴이 붉어지면 너도 사랑을 할 줄 아냐고 모두가 그를 놀렸겠지. 그러나 그는 틀림없이 그녀를 사랑했을 것이고, 그녀는…. 그녀도 신비가 아니었을 것이다. 쾌락은 진짜배기고 어쩌면 두 사람은 아이를 낳았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건강했을 수도 있고 건강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로쏘는 결코 마르그리드를 배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안다. 알기에 슬프다.

그리고 망상의 효력은 잠시뿐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만. 그녀는 우산을 흘끗 올려다보고는 키득키득 웃으며 실체를 드론 속으로 숨기고 투영된 몸이 드론 안으로 사라지면서 찰나의 생각도 죽었다. 그 남자가 사랑하는 것이 원래 그런 반 푼어치 여자였다. 그래서 그는 다시 우산을 내리고 한숨을 쉬며 웃음기가 없는 웃음을 웃어젖힌다.

엔지니어 커플링 합작 – 타이렐x레드그레이브

어린 타이렐의 방에는 책이 많았다. 어머니가 오실 때까지 기다리면서 항상 책을 읽었는데 어머니는 그것이 미안해 되는대로 책을 가져다주셨고 타이렐은 그것을 닥치는대로 읽으며 자랐다. 어머니는 기계를 다루는 엔지니어였고 책은 주로 기계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조금 더 자라서 타이렐은 기계 부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타이렐이 자랄수록 방에는 책보다 고물이 많아져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책은 전부 사라졌다. 타이렐이 콘솔을 만들어 책의 내용을 죄 기록해 넣은 탓이다.

정확히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든 것보다 뛰어났다. 고물상에서 버려진 조각들을 모아다 찾을 수 없는 부분들은 직접 만들었는데 이것이 시중의 제품보다 기능이 뛰어났다. 책을 읽으며 혼자 지내곤 하던 타이렐의 방은 어느새부터인가 소년이 만든 것으로 가득 찼다. 온갖 기계들이 쉬지 않고 미세한 작동음을 내며 화음을 이루었다. 가끔 타이렐은 그 방에서 창문을 열었다. 가로등 불빛과 고도가 높은 공중도시의 별빛이 섞이고, 야외의 약간의 소음과 방의 화음이 섞여들었다. 그 가운데 타이렐이 있었다. 판데모니움은 참, 안온한 곳이었다.

소년의 세상은 그렇게 안온했는데.

타이렐은 연구소에 나가기 시작했다. 고작 소년인 타이렐의 방 안에 완성된 콘솔을 본 어머니의 판단이었다. 어머니는 하급 엔지니어의 아들인 타이렐을 연구소에 견습으로 넣기 위해 어떤 견디기 힘든 일들을 했다고 하지만 타이렐은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그저 다른 상류계급의 자제님들이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뿐. 연구소에는 타이렐이 흥미를 가질 만한 기술의 정보와 자료가 잘 정리되어 있었고 고물상에서만 찾을 수 있던 자재가 지천으로 많았다. 기계를 만들고 만지며 타이렐은 어머니에게 감사했다. 도련님들이 교양도 없고 기계밖에 모른다고 이죽거릴 때 타이렐은 무시했다. 상대할 가치가 없었다. 발로 찼을 때는 웃었다. 분한 마음을 누르기 위해 웃었다. 기계를 부수었을 때 타이렐은 소리질렀다. 어머니를 원망했다. 판데모니움과 계급과 출신과 자신을 원망했다. 힘이 없음을 개탄했다.

어느 날 아침 소년 타이렐은 연구소로 나가지 않았고 어머니는 차마 묻지 않았다. 창문을 열자 온갖 기계의 소리와 바깥의 소리가 섞여들어 소년은 지레 놀라 창문을 확 닫았다. 자신이 만든 기계들의 익숙한 소리만 들렸다. 이렇게 안온한 세상에서, 타이렐은 조금 울었다.

잠시 기계에 흥미를 잃은 소년은 콘솔에 기록된 정보들 중 판데모니움 그 자체에 대해 읽었다. 공학이 신화를 이룬 세상의 역사에 대해 배웠다. 비합리와 비이성의 역사가 끝을 맺고, 효율과 발전을 추구하는 공학이 세계를 정복하여 이루어진 이 유토피아가 정체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지금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가장 빛나던 시절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 합리의 꽃으로 태어난 여자가 있었고, 세상은 발전하였고,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의 기록은 끊겨버렸다고. 이제는 흔적도 없이 스러져 전설이 된 합리의 기록을 꿈꾸다가 소년은 안온한 방 안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러 소년이 청년이 된 어느 날, 신화는 어느 날 제 발로 걸어 그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기계를 온 몸에 입은 그야말로 신성한 형상으로.

“그대가 타이렐인가. 나를 따라오게. 신분이나, 환경이나, 그 어떤 걱정도 없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게 해 주지.”

선택의 여부 따위는 없었다.

판데모니움은 참으로 안온한 곳이었다. 타이렐이 발을 옮기는 곳마다 그의 안온한 방의 일부가 되어 곧 타이렐의 방은 판데모니움 전체로 넓어지고 지상까지 이르렀다. 의회의 이름 아래 타이렐이 연구하고 만들고 개조하여 이루는 모든 것이 신화의 일부였다. 그의 곁에 여신이 비호하고 있었으므로.

이 여신은 총명하고 뛰어나 타이렐이 고안한 발명품을 모두 오래 지나지 않아 이해했다. 그녀와 함께하며 타이렐은 세상에서는 잊혀진 역사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는데, 여신의 곁에는 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뛰어난 남자들이 있었다. 황금의 이름이 붙은 그 빛나는 시절을 떠올리면 언제나 표정 없는 소녀의 얼굴에 이채가 서리고 목소리가 잠길 정도로 여신은 그들을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했다. 그래 타이렐은 착각을 하고 있다가 막 깨달은 소년처럼 뱃속 어딘가가 아렸다. 그리고 자신의 방 안으로 직접 걸어 들어오던 기계의 여신을 떠올리며 다시금 마음을 다스리게 되었다.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결코 여신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그 남자들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성과를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었다. 황금시대의 기술인 오토마타를 개량하고 성과를 보았을 때, 마침내 그녀가 짧게 말했다.

“짐도 예전에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황금시대에 들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소용돌이를 만들어낸 남자에게 들었다.”

“그 말씀은 칭찬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그것은 이제부터 보여줄 너의 활약 여부에 달려있다.”

“반드시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 정도의 성과라면 반드시 그녀의 기대에도 부응할 수 있으리라. 시체의 세상 한가운데에 그는 소년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서 있었다. 자신이 이루어낸 힘과 업적에 흥분해 환호하며 곧 찾아올 여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케이오시움의 브로치. 강철로 만든 기계 관절. 어디 하나 신성하지 않을 데 없는 모습으로 그녀가 처음과 같이 다가왔다.

“네놈이 기어코 그 녀석과 같이 세상을 멸망시킨 게로구나.”

어째서 그런 표정인가요. 저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나요.

“은정을 잊고 짐에게 거역한 것인가. 주변에서 네 인사를 말릴 때도 이번에만큼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믿었거늘, 이 꼴이 무언가.”

제가 지금 이렇게 이룬 것이 당신의 형제들, 천년 전 함께 신화를 이루었던 그들보다 인상적이지 못했던 건가요?

“짐은 제어할 수 없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이만 죄값을 받도록 할까.”

당신으로 인해 나는 세상에 나왔고 당신을 위해 나는 이곳 시체 가운데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디에 서 있고 그래서 당신은 누구이며 나는 언제야 어릴 적 읽던 신화의 세계에 닿을 수 있을까. 이 병기의 위력을 당신의 그 몸으로 체험해 본다면, 그때는 나를 인정하시렵니까?

괴물

눈을 떴다. 배와 허벅다리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감각으로 자신이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방은 어두워 시야가 제대로 가늠이 되지 않았다. 천장이 무척 낮게 느껴졌다. 호흡이 목을 긁어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났다. 시야가 붉은 색과 흰 색으로 일었다가 다시 가라앉고 목소리가 들렸다.

“깨어나셨군요.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물론. 당신은.

누구지?

대답을 하려고 힘을 주자 입안에 비릿한 것이 고였다. 익숙한 냄새였다. 피를 뱉고자 했으나 뱉을 턱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으나 꿈틀거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당신의 생각은 콘솔을 통해 나타나게 되니까요. 아직 의식을 가누기 어렵다면 다시 눈을 붙이셔도 됩니다. 아차, 눈을 붙인다는 말이 되지 않는 상태던가요.”

재미없는 농담은 그만둬, 로휀.

그래, 로휀.

그 이름을 떠올리자 다시 시야가 찌를 듯 부시게 얼룩이 지더니 의식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거품이 떠오르는 것처럼 단편적인 기억 기억이 무의식 중에 떠올랐다.

시녀들이 뒤돌아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주 작았던 그는 그녀들을 올려다보았으나 모두 그에게서 일부러 몇 발치씩 떨어져 있었다. 그는 그들을 향해 손을 뻗다가 닿지 않을 것을 깨닫고 그냥 그만두었다. 그리고 눈 앞 가까이에서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았다. 손을 뻗어 움켜쥐었다. 잠시 후 시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두 남자가 검을 뽑아들고 싸우고 있었다. 젊은 두 얼굴은 모두 그에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를 포함한 세 사람은 서로 싸우거나 짓밟아야 하는 운명으로 한 배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던가. 아주 어렸던 그는 일방적으로 짓밟히는 쪽이었기에 나서서 싸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일찍이 이렇게 바로 눈앞에서 모두가 부서질 것처럼 느껴진 적은 없었다. 그래서 더 보지 못하고 사이에 뛰어들었다. 그러자 한 명의 발이 그를 걷어차고 한 명의 검이 눈 앞에서 번뜩였다. 그는 풀썩 의식을 잃었다.

그는 다시는 사람의 일에 뛰어들지 않았다. 그렇게 공허한 눈으로 세상을 방관하는 그의 곁을 몇 명인가 떠돌았다. 기분 나쁜 노인의 말에 따라 들어간 곳에는 또래의 소년들이 있었다. 다시 뛰어들 생각은 없지만 곁에 두어도 싫지 않았던. 그러나 곧 방주는 부서지고 그는 다시 돌아온다.

사기가 높은 전장에서, 보급품을 전하러 찾아온 가신이 기지를 나서기 전 그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적국의 정세에 밝기로 이름난 자였다.

“이번 전투에선 조심하세요, 전하.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된다덥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기분 나쁘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지워지고 그는 하늘을 나는 배 위에서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몇 가지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몇 부위가 없었다. 자신의 일부를 잃고 몇날 며칠을 사경을 헤매던 그의 감각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무슨 기대를 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잘했다, 그만 쉬어도 좋다, 수고했다. 그 따위의 낡고 해진 소리들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곧 어머니의 목소리가 침착하고 서늘한 것을 알아챈다. 이 기억을 해내는 순간 그는 다시 꿈틀거렸다. 무의식 중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시녀들의 수군거림이 범벅이 되다가 마지막으로 가신의 속삭임이 들렸다.

그래. 그가 그렇게 말했었지.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 그는 이제 앞으로 무엇을 할지 생각했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렸다. 오감이 일그러져 반파된 시야 안에서 노인의 눈이 기묘하게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당신이 정말로 원하시는 것입니까?”

그는 인간이 아닌 양 배에서부터 들끓는 소리를 냈다.

“제가 재차 확인하는 이유를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 당신의 뇌는 손상되었습니다. 당신이 지금 그룬왈드 론즈브라우로서의 의식을 되찾는 데 시간이 걸렸듯이, 당신의 뇌가 제 기능을 되찾는 데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립니다. 지금 당신은 충동적이고, 절제를 담당하는 중추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정상적인 사람과 같은 상태가 결코 아니에요.”

알고 있어. 느끼고 있어.

“나중에 제정신을 되찾으시면 지금의 결정을 후회하실지도 모릅니다.”

상관 없어.

“잠깐의 선택으로 당신을 돌이킬 수 없게 될 터인데도요?”

상관 없어. 난 이미.

[수라플로] 언

은신의 과정은 명상과 닮아 있었다. 의식을 내면에 집중하며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대한 반응을 줄인다. 다만 첩보를 위한 은신의 경우에는 의식을 집중하는 대상이 외부의 물체가 된다는 것이 특별했다. 이번에 정보를 수집하는 대상은, 바로 한 여자였다.

왕도와 메르츠바우 간의 갈등이 있는 이상 루카의 요청이 있다면 여왕을 시해해야 하는 경우까지 생각하고 있었고, 자연히 여왕의 호위기사인 에이다 라쿠란을 지켜보게 되었다. 에이다로 말하자면 그야말로 명문가의 여식이었다. 고고하고 긍지 높고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수련한다. 그녀의 힘 자체는 이겨낼 자신이 있었지만 소문의 장갑병에 탑승할 경우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 주변을 살피다 보게 된 것이, 바로 플로렌스 브래포드였다.

플로렌스는 왕국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이들과는 확연히 외모가 달랐다. 가무잡잡한 피부와 검은 머리. 수소문을 해 보니 그녀는 소수민족 출신의 귀족 가문 입양아라고 한다. 소수민족 출신으로는 첫 고위직에 그것도 최연소로 오른 여자. 장갑병 부대의 훈련장에서 병사들은 몰래 혹은 대놓고 그녀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필요 의상의 호의가 주어질 때도 있었고 비웃음과 차별이 돌아올 때도 있었다. 아수라는 그런 모습을 계속 지켜보았다.

남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은, 기묘했다. 메르츠바우 귀족들로부터의 자신과 동료들에 대한 차별에 대해서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힘을 주면 죽어버릴 모기 같은 존재들. 다만 그런 것을 남의 모습에서 보자니 역시 이상한 느낌이 들어, 에이다 못지 않게 귀족적이고 당당한 태도를 취하는 플로렌스를 계속 지켜보고는 했다. 비슷한 처지를 이용한다면 어쩌면 회유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손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생각보다 훨씬 쉽게 여왕을 손에 넣을 기회를 잡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훈련을 마친 플로렌스가 천천히 걸어왔다. 아수라는 은신하기 좋게 큰 나무 위에 올라 있었는데, 아무래도 플로렌스 역시 그늘 아래서 쉬기는 큰 나무 아래쪽이 좋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수라가 숨어 있는 곳 바로 아래에 앉아 플로렌스는 늘어지게 기지캐를 켰다. 나무 기둥에 몸을 나른히 기대고 남들 앞에서 절대 쉬지 않던 한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녀는 작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한 개피가 아니었다. 한 갑을 내리 피워대는 동안 연기는 전부 플로렌스의 바로 위에 있던 아수라에게로 올라왔다. 소리가 날 테니 움직일 수도 없었다. 숨이 막혔다. 자기도 모르게 목 아래서 콜록거리는 소리가 났다. 플로렌스가 윗쪽을 올려다보았다.

“이봐요, 거기서 뭐 해요?”

훈련장이 바로 내려다보일만큼 가까운 장소였고 아수라는 지금 이 여자를 죽였다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서 발각될까 잠시 망설였다. 그 망설임이 잘못이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플로렌스? 혹시 날 부른 거야?”

“아니야. 잠깐만 거기서 기다릴래, 에이다? 조금만 이따 갈게.”

“알았어, 플로렌스.”

여기서 플로렌스를 죽였다가는 떨어져 있는 에이다에게 그 모습이 보여버리고 만다. 에이다가 특기인 기관총을 난사한다면,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각이 많은 속도 모르고 플로렌스는 계속 재잘거렸다.

“당신도 여기서 쉬고 있는 거야? 별난 사람이네. 나는 플로렌스 브래포드. 당신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름을 알려줄 이유는 없지.”

“정말 재미 없는 사람이네. 반가워서 그런데. 당신도 이민족 출신이지? 여기는 어떻게 왔어? 적응하기 어렵지 않았어?”

“어딜 가나 법도는 같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거지.”

“당신도 꽤 험한 데서 왔구나. 하지만 힘의 기준은 장소와 문화에 따라 다르지 않던가?”

“결국에는,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당신은 살아남기 위해 사는구나. 나는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은데, 지켜야만 할 것을 위해서는.”

“약한 자들이 하는 소리군.”

“그런가? 하지만 나에게는 이 각오가 강함이라고.”

플로렌스는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럼 살아남아, 살아남도록 해. 살아남아서 당신의 법도를 이곳에서 보여 봐. 나는 파트너가 기다려서 이만 가봐야겠는걸.”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탁탁 털고 플로렌스는 에이다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멀리서 다시 한 번 뒤를 돌아 웃으며 나무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럼 잘 가, 동방 위사대 씨.”

마지막 말이 귀에 걸렸다. 처음부터 하이덴의 용병임을 눈치채고 있었나.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죽이기엔, 너무 늦었다. 애초에 자신이 처음에 망설였던 것부터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빠르게 제거했다면. 하지만 그녀는, 아수라에게 살아남으라고 했다. 언젠가 어려서 들었던 말이다.

 

아수라는 달리고 있었다. 이제 루비오나에는 돌아갈 수 없다. 힘의 논리는 냉혹하고 지배자는 장기말을 가만 두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배신하고 또 배신해야만 했다. 달려 가던 길목 앞에, 권총을 들고 담배를 문 여자가 보였다.

“꾀 좀 부렸네, 아수라. 오랜만이지?”

“비켜. 넌 나에게 살아남으라고 했다. 방해하지 마.”

“난 죽음을 불사해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고 했어. 그런데도 처음 만났을 때 네 첩보 활동을 모른 체 했던 내가 멍청했었어. 그렇지?”

플로렌스는 후 하고 담배 연기를 불었다. 매캐한 냄새에 언뜻 어느 봄날의 기억이 스쳤다.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봐주어서는 안 되었던 그날 미루었다가 지금에야 다시 돌아온 대적(對敵).

“끈질긴 여자다. 내 손으로 끝을 내주지.”

아수라가 표창을 들고 플로렌스는 총을 겨누었다. 그들에게는 서로 지켜야 할 말이 있었다.

 

제국과의 대전투 후 메르츠바우의 일원들이 직접 사지에서 돌아온 오로루 부대를 마중 나왔다. 메르츠바우의 가신단이 고개를 숙이고 경의를 표하는 동안 끔찍한 전선에서 살아돌아온 장갑병들은 그들을 지나 당당하게 행진했다. 온통 빛나는 금발의 귀족들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외양의 두 사람이 있었다. 서로 일부러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다만 장갑병의 행렬이 동방위사대의 앞을 스쳐지나갈 때, 플로렌스가 변함없이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살아남았네?”

“지켜냈나.”

그리고 동시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약은 그날부터 이어져 이렇게 마침내 마지막 날에 다다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