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신의 과정은 명상과 닮아 있었다. 의식을 내면에 집중하며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대한 반응을 줄인다. 다만 첩보를 위한 은신의 경우에는 의식을 집중하는 대상이 외부의 물체가 된다는 것이 특별했다. 이번에 정보를 수집하는 대상은, 바로 한 여자였다.
왕도와 메르츠바우 간의 갈등이 있는 이상 루카의 요청이 있다면 여왕을 시해해야 하는 경우까지 생각하고 있었고, 자연히 여왕의 호위기사인 에이다 라쿠란을 지켜보게 되었다. 에이다로 말하자면 그야말로 명문가의 여식이었다. 고고하고 긍지 높고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수련한다. 그녀의 힘 자체는 이겨낼 자신이 있었지만 소문의 장갑병에 탑승할 경우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 주변을 살피다 보게 된 것이, 바로 플로렌스 브래포드였다.
플로렌스는 왕국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이들과는 확연히 외모가 달랐다. 가무잡잡한 피부와 검은 머리. 수소문을 해 보니 그녀는 소수민족 출신의 귀족 가문 입양아라고 한다. 소수민족 출신으로는 첫 고위직에 그것도 최연소로 오른 여자. 장갑병 부대의 훈련장에서 병사들은 몰래 혹은 대놓고 그녀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필요 의상의 호의가 주어질 때도 있었고 비웃음과 차별이 돌아올 때도 있었다. 아수라는 그런 모습을 계속 지켜보았다.
남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은, 기묘했다. 메르츠바우 귀족들로부터의 자신과 동료들에 대한 차별에 대해서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힘을 주면 죽어버릴 모기 같은 존재들. 다만 그런 것을 남의 모습에서 보자니 역시 이상한 느낌이 들어, 에이다 못지 않게 귀족적이고 당당한 태도를 취하는 플로렌스를 계속 지켜보고는 했다. 비슷한 처지를 이용한다면 어쩌면 회유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손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생각보다 훨씬 쉽게 여왕을 손에 넣을 기회를 잡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훈련을 마친 플로렌스가 천천히 걸어왔다. 아수라는 은신하기 좋게 큰 나무 위에 올라 있었는데, 아무래도 플로렌스 역시 그늘 아래서 쉬기는 큰 나무 아래쪽이 좋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수라가 숨어 있는 곳 바로 아래에 앉아 플로렌스는 늘어지게 기지캐를 켰다. 나무 기둥에 몸을 나른히 기대고 남들 앞에서 절대 쉬지 않던 한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녀는 작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한 개피가 아니었다. 한 갑을 내리 피워대는 동안 연기는 전부 플로렌스의 바로 위에 있던 아수라에게로 올라왔다. 소리가 날 테니 움직일 수도 없었다. 숨이 막혔다. 자기도 모르게 목 아래서 콜록거리는 소리가 났다. 플로렌스가 윗쪽을 올려다보았다.
“이봐요, 거기서 뭐 해요?”
훈련장이 바로 내려다보일만큼 가까운 장소였고 아수라는 지금 이 여자를 죽였다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서 발각될까 잠시 망설였다. 그 망설임이 잘못이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플로렌스? 혹시 날 부른 거야?”
“아니야. 잠깐만 거기서 기다릴래, 에이다? 조금만 이따 갈게.”
“알았어, 플로렌스.”
여기서 플로렌스를 죽였다가는 떨어져 있는 에이다에게 그 모습이 보여버리고 만다. 에이다가 특기인 기관총을 난사한다면,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각이 많은 속도 모르고 플로렌스는 계속 재잘거렸다.
“당신도 여기서 쉬고 있는 거야? 별난 사람이네. 나는 플로렌스 브래포드. 당신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름을 알려줄 이유는 없지.”
“정말 재미 없는 사람이네. 반가워서 그런데. 당신도 이민족 출신이지? 여기는 어떻게 왔어? 적응하기 어렵지 않았어?”
“어딜 가나 법도는 같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거지.”
“당신도 꽤 험한 데서 왔구나. 하지만 힘의 기준은 장소와 문화에 따라 다르지 않던가?”
“결국에는,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당신은 살아남기 위해 사는구나. 나는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은데, 지켜야만 할 것을 위해서는.”
“약한 자들이 하는 소리군.”
“그런가? 하지만 나에게는 이 각오가 강함이라고.”
플로렌스는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럼 살아남아, 살아남도록 해. 살아남아서 당신의 법도를 이곳에서 보여 봐. 나는 파트너가 기다려서 이만 가봐야겠는걸.”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탁탁 털고 플로렌스는 에이다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멀리서 다시 한 번 뒤를 돌아 웃으며 나무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럼 잘 가, 동방 위사대 씨.”
마지막 말이 귀에 걸렸다. 처음부터 하이덴의 용병임을 눈치채고 있었나.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죽이기엔, 너무 늦었다. 애초에 자신이 처음에 망설였던 것부터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빠르게 제거했다면. 하지만 그녀는, 아수라에게 살아남으라고 했다. 언젠가 어려서 들었던 말이다.
아수라는 달리고 있었다. 이제 루비오나에는 돌아갈 수 없다. 힘의 논리는 냉혹하고 지배자는 장기말을 가만 두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배신하고 또 배신해야만 했다. 달려 가던 길목 앞에, 권총을 들고 담배를 문 여자가 보였다.
“꾀 좀 부렸네, 아수라. 오랜만이지?”
“비켜. 넌 나에게 살아남으라고 했다. 방해하지 마.”
“난 죽음을 불사해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고 했어. 그런데도 처음 만났을 때 네 첩보 활동을 모른 체 했던 내가 멍청했었어. 그렇지?”
플로렌스는 후 하고 담배 연기를 불었다. 매캐한 냄새에 언뜻 어느 봄날의 기억이 스쳤다.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봐주어서는 안 되었던 그날 미루었다가 지금에야 다시 돌아온 대적(對敵).
“끈질긴 여자다. 내 손으로 끝을 내주지.”
아수라가 표창을 들고 플로렌스는 총을 겨누었다. 그들에게는 서로 지켜야 할 말이 있었다.
제국과의 대전투 후 메르츠바우의 일원들이 직접 사지에서 돌아온 오로루 부대를 마중 나왔다. 메르츠바우의 가신단이 고개를 숙이고 경의를 표하는 동안 끔찍한 전선에서 살아돌아온 장갑병들은 그들을 지나 당당하게 행진했다. 온통 빛나는 금발의 귀족들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외양의 두 사람이 있었다. 서로 일부러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다만 장갑병의 행렬이 동방위사대의 앞을 스쳐지나갈 때, 플로렌스가 변함없이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살아남았네?”
“지켜냈나.”
그리고 동시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약은 그날부터 이어져 이렇게 마침내 마지막 날에 다다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