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타이렐의 방에는 책이 많았다. 어머니가 오실 때까지 기다리면서 항상 책을 읽었는데 어머니는 그것이 미안해 되는대로 책을 가져다주셨고 타이렐은 그것을 닥치는대로 읽으며 자랐다. 어머니는 기계를 다루는 엔지니어였고 책은 주로 기계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조금 더 자라서 타이렐은 기계 부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타이렐이 자랄수록 방에는 책보다 고물이 많아져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책은 전부 사라졌다. 타이렐이 콘솔을 만들어 책의 내용을 죄 기록해 넣은 탓이다.
정확히 만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든 것보다 뛰어났다. 고물상에서 버려진 조각들을 모아다 찾을 수 없는 부분들은 직접 만들었는데 이것이 시중의 제품보다 기능이 뛰어났다. 책을 읽으며 혼자 지내곤 하던 타이렐의 방은 어느새부터인가 소년이 만든 것으로 가득 찼다. 온갖 기계들이 쉬지 않고 미세한 작동음을 내며 화음을 이루었다. 가끔 타이렐은 그 방에서 창문을 열었다. 가로등 불빛과 고도가 높은 공중도시의 별빛이 섞이고, 야외의 약간의 소음과 방의 화음이 섞여들었다. 그 가운데 타이렐이 있었다. 판데모니움은 참, 안온한 곳이었다.
소년의 세상은 그렇게 안온했는데.
타이렐은 연구소에 나가기 시작했다. 고작 소년인 타이렐의 방 안에 완성된 콘솔을 본 어머니의 판단이었다. 어머니는 하급 엔지니어의 아들인 타이렐을 연구소에 견습으로 넣기 위해 어떤 견디기 힘든 일들을 했다고 하지만 타이렐은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그저 다른 상류계급의 자제님들이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뿐. 연구소에는 타이렐이 흥미를 가질 만한 기술의 정보와 자료가 잘 정리되어 있었고 고물상에서만 찾을 수 있던 자재가 지천으로 많았다. 기계를 만들고 만지며 타이렐은 어머니에게 감사했다. 도련님들이 교양도 없고 기계밖에 모른다고 이죽거릴 때 타이렐은 무시했다. 상대할 가치가 없었다. 발로 찼을 때는 웃었다. 분한 마음을 누르기 위해 웃었다. 기계를 부수었을 때 타이렐은 소리질렀다. 어머니를 원망했다. 판데모니움과 계급과 출신과 자신을 원망했다. 힘이 없음을 개탄했다.
어느 날 아침 소년 타이렐은 연구소로 나가지 않았고 어머니는 차마 묻지 않았다. 창문을 열자 온갖 기계의 소리와 바깥의 소리가 섞여들어 소년은 지레 놀라 창문을 확 닫았다. 자신이 만든 기계들의 익숙한 소리만 들렸다. 이렇게 안온한 세상에서, 타이렐은 조금 울었다.
잠시 기계에 흥미를 잃은 소년은 콘솔에 기록된 정보들 중 판데모니움 그 자체에 대해 읽었다. 공학이 신화를 이룬 세상의 역사에 대해 배웠다. 비합리와 비이성의 역사가 끝을 맺고, 효율과 발전을 추구하는 공학이 세계를 정복하여 이루어진 이 유토피아가 정체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지금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가장 빛나던 시절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 합리의 꽃으로 태어난 여자가 있었고, 세상은 발전하였고,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의 기록은 끊겨버렸다고. 이제는 흔적도 없이 스러져 전설이 된 합리의 기록을 꿈꾸다가 소년은 안온한 방 안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러 소년이 청년이 된 어느 날, 신화는 어느 날 제 발로 걸어 그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기계를 온 몸에 입은 그야말로 신성한 형상으로.
“그대가 타이렐인가. 나를 따라오게. 신분이나, 환경이나, 그 어떤 걱정도 없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게 해 주지.”
선택의 여부 따위는 없었다.
판데모니움은 참으로 안온한 곳이었다. 타이렐이 발을 옮기는 곳마다 그의 안온한 방의 일부가 되어 곧 타이렐의 방은 판데모니움 전체로 넓어지고 지상까지 이르렀다. 의회의 이름 아래 타이렐이 연구하고 만들고 개조하여 이루는 모든 것이 신화의 일부였다. 그의 곁에 여신이 비호하고 있었으므로.
이 여신은 총명하고 뛰어나 타이렐이 고안한 발명품을 모두 오래 지나지 않아 이해했다. 그녀와 함께하며 타이렐은 세상에서는 잊혀진 역사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는데, 여신의 곁에는 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뛰어난 남자들이 있었다. 황금의 이름이 붙은 그 빛나는 시절을 떠올리면 언제나 표정 없는 소녀의 얼굴에 이채가 서리고 목소리가 잠길 정도로 여신은 그들을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했다. 그래 타이렐은 착각을 하고 있다가 막 깨달은 소년처럼 뱃속 어딘가가 아렸다. 그리고 자신의 방 안으로 직접 걸어 들어오던 기계의 여신을 떠올리며 다시금 마음을 다스리게 되었다.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결코 여신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그 남자들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성과를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었다. 황금시대의 기술인 오토마타를 개량하고 성과를 보았을 때, 마침내 그녀가 짧게 말했다.
“짐도 예전에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황금시대에 들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소용돌이를 만들어낸 남자에게 들었다.”
“그 말씀은 칭찬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그것은 이제부터 보여줄 너의 활약 여부에 달려있다.”
“반드시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 정도의 성과라면 반드시 그녀의 기대에도 부응할 수 있으리라. 시체의 세상 한가운데에 그는 소년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서 있었다. 자신이 이루어낸 힘과 업적에 흥분해 환호하며 곧 찾아올 여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케이오시움의 브로치. 강철로 만든 기계 관절. 어디 하나 신성하지 않을 데 없는 모습으로 그녀가 처음과 같이 다가왔다.
“네놈이 기어코 그 녀석과 같이 세상을 멸망시킨 게로구나.”
어째서 그런 표정인가요. 저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나요.
“은정을 잊고 짐에게 거역한 것인가. 주변에서 네 인사를 말릴 때도 이번에만큼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믿었거늘, 이 꼴이 무언가.”
제가 지금 이렇게 이룬 것이 당신의 형제들, 천년 전 함께 신화를 이루었던 그들보다 인상적이지 못했던 건가요?
“짐은 제어할 수 없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이만 죄값을 받도록 할까.”
당신으로 인해 나는 세상에 나왔고 당신을 위해 나는 이곳 시체 가운데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디에 서 있고 그래서 당신은 누구이며 나는 언제야 어릴 적 읽던 신화의 세계에 닿을 수 있을까. 이 병기의 위력을 당신의 그 몸으로 체험해 본다면, 그때는 나를 인정하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