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쏘라는 남자는 뼈에 스미게 현실적이었다. 그의 세상에서 모든 상태와 이치는 공식과 수치로 설명할 수 있는 것. 그런 남자에게 그녀는 신비를 말했다. 이미 죽었으나 살아 있는 것. 있지만 없는 것. 그게 바로 나야, 로쏘. 반듯한 이 세상에 바이러스와도 같은 그녀가 불쑥불쑥 나타나서 손으로 껴안거나 입술을 댈 때면 로쏘는 진저리쳤다. 그리고 그녀의 ‘감각’에 대해 알게 된 후에는 놀라더라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죽었다 다시 얻은 몸, 실체가 없는 몸. 그런 몸의 그녀에게는 고통도 쾌락도 반 푼짜리였다.
있거나 없는 몸에 체류하는 감각들에 그녀는 목놓아 울지도 못했다. 그도 그녀와의 의리를 지켜 웃음기가 없는 웃음을 웃어젖혔다. 그녀는 극도의 쾌락 혹은 극도의 고통만이 겨우 의미를 가지는 그런 몸을 가졌고 그는 그녀의 악다구니에 순순히 협조해 영상을 취했다.
레지멘트 부지에 비가 내리는 날이면 로쏘는 혼자 우산을 썼다. 그녀에게는 빗방울의 차가움이나 신체의 건강 따위는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음이다.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발자욱 질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로쏘는 옆에 함께 걷는 여자에게 신경도 쓰지 않는 척하지만 자꾸만 흘끔흘끔 눈길을 주게 되었다. 짧은 단발머리 아래 드러난 흰 목덜미. 빗방울이 똑 똑 떨어져 흐르는 그 목덜미.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그녀가 빙긋이 웃고 있었다.
길고 짧은 시간 동안 시선이 교차하고, 눈앞의 남자가 당황하기를 바라는 장난기 가득한 눈을 로쏘는 마주하고, 그는 그녀의 기대대로 당황하는 대신 눈썹을 찌푸리고 우산을 그녀의 머리 위로 올릴 뿐이다. 그리고 그때 그녀는 문득 느낀다. 감각도 제대로 되지 않는 반 푼어치 몸에 지금 닿는 빗방울이 지나치게 춥다고. 그리고 생각한다. 만약에 우리가 평범하게 연구소에서 만났다면.
어쩌면 그들은 평범하게 함께하고 평범하게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반 푼짜리 관계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그녀는 아이를 좇는 어머니의 망령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마르그리드’는 로쏘와 함께하고 예전에 어느 남자와 그랬듯이 연애하고 핀잔을 주고 함께 밤을 새웠을지도 모른다. 입을 맞추고 연구를 하다가 그녀는 하얀 드레스를, 그는 머쓱하게 검은 턱시도를 입고 식을 올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신부가 신랑에게 키스를 하고 신랑의 얼굴이 붉어지면 너도 사랑을 할 줄 아냐고 모두가 그를 놀렸겠지. 그러나 그는 틀림없이 그녀를 사랑했을 것이고, 그녀는…. 그녀도 신비가 아니었을 것이다. 쾌락은 진짜배기고 어쩌면 두 사람은 아이를 낳았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건강했을 수도 있고 건강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로쏘는 결코 마르그리드를 배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안다. 알기에 슬프다.
그리고 망상의 효력은 잠시뿐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만. 그녀는 우산을 흘끗 올려다보고는 키득키득 웃으며 실체를 드론 속으로 숨기고 투영된 몸이 드론 안으로 사라지면서 찰나의 생각도 죽었다. 그 남자가 사랑하는 것이 원래 그런 반 푼어치 여자였다. 그래서 그는 다시 우산을 내리고 한숨을 쉬며 웃음기가 없는 웃음을 웃어젖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