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레그살가

쇠와 톱니바퀴는 단백질과 뉴런보다 안전하게 기억했다. 기계로 몸을 바꾼 레드그레이브는 어느 종류의 사람 앞에서도 기억력으로 흠집을 잡혀보거나 자신감을 잃는 따위의 일을 겪은 적이 없다. 그녀는 언제나 모든 질문과 의문에 조리있게 대답하고 상대에게 쉽게 신뢰를 얻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잊혀진 이름을 가진 어느 남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살가드는 이따금 그 남자에 대해 물었다. 그, 라이, 바흐, 라고 세 음절로 이루어진 이름을 발음할 때 살가드는 통증 비슷한 것을 느꼈으나 그럼에도 질문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한 번도 만족할만한 대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질문에도 명료한 정답으로 반응하던 레드그레이브가 그 질문을 들을 때면 그저 웃었다. 어린 소녀처럼 웃었다. 미소는 통증이나 갈망처럼 사내에게 다가오고 그는 보챈다. 레드그레이브님, 레드그레이브님께서는 제가 궁금해하는 질문에는 언제고 응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럴 때면 한 늙은 소녀와 한 젊은 남자는 짧은 시간 동안 작은 방에서 아주 긴 시간과 아주 넓은 세계를 헤매이게 된다. 6백 년을 거슬러 레드그레이브는 어느 지나간 옛적 시대에 생존했던 남자의 머리카락 색이라던가 논문에 저술한 내용이나 개발했던 기술 같은 것들을 서술하지만 이야기는 맥이 없고 자꾸 주변을 빙빙 돌게 된다. 그녀가 정작 중요한 것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 둘이 함께 어떤 빛깔의 꽃이 핀 들판을 거닐었는지, 아침에 일어나서 남자의 얼굴이 보일 때 어째서 세상의 어느 것도 겁나지가 않았었는지, 그가 어떤 향이 나는 홍차를 그녀의 코앞에 드밀면서 웃었었는지. 그리고 이렇게 질문하는 너는 어떤 이유로 그럭저럭 잊혀져 가는 감정들을 나에게서 끌어내려 하는지.

카젠님 리퀘 부활자크아인

가끔은 이 세상에 없는 세상의 기억이 떠오른다. 별의 이름을 가진 곳이었다.

추억도 지식도 없고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끼리 모여서 모두 하나만은 동의했었다. 이곳은 어디도 아니야. 사막을 걷다 보면 곧 눈보라가 치고 설원을 걷다 보면 곧 늪에 빠졌다. 이런 세상은 어느 곳일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기억이 없는 건, 원래 우리의 세상이 아닌 곳에 있어서가 아닐까. 아마 우리는 원래 있던 세상에 돌아가면 기억을 되찾게 되는 거야. 아니, 기억을 되찾으면 원래 있던 세계에 돌아가게 되는 거야.

그렇다면, 그 말대로 기억을 찾아 현세에 돌아온 지금은 그곳의 기억이 나지 않아야 맞는 게 아닌가.

 

이렇게 별이 밝은 밤이면 아이자크는 자신이 그 세상의 단 하나도 잊지 않았음을 알았다. 몸이 딱딱한 인형이 있었다. 가끔 안아달라고 떼를 써서, 한숨을 쉬고 팔을 향하면 품안에 쏙 들어오던 작은 인형이 있었다. 인형뿐만이 아니었다. 판데모니움에서 왔다는 엔지니어부터 수백 년 전에 죽었다는 사람, 어디서 왔을지 모를 동물 귀 달린 사람들도 있었다. 여자애 중에는 좀 더 귀염성이 없는 아이도 있었다. 고양이 귀를 단 여자아이였다.

아이자크는 제 별명이 군견이라는 걸 잘 알았다. 인형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둘은 개와 고양이라서 안 좋은 거지. 여자애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단 한 곳도 없었다. 어린애 주제에 사명을 다하겠다고 따박따박 나서는 모양새나, 재주도 능력도 없으면서 싸우겠다고 몸을 던지는 것, 도무지 세상 풍파에 맞서 싸우지는 못할 것 같은 가느란 팔다리, 짧은 치마에 하얗게 드러낸 맨다리, 를 하고서 속알 없이 웃는 것. 아이자크는 자주 잔소리를 하고 아인은 맞서서 투닥거렸다. 마음이 쓰이지 않는 구석이 단 한 곳도 없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언제까지고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곤 했다. 모두 지나간 이야기다. 현세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자마자 아이자크는 망설임 없이 이곳에 돌아왔으므로.

고양이 여자애 역시 하도 사명 사명거리는 녀석이었으니 아마 기억을 찾자마자 그 좋다는 사명을 지키러 있을 곳에 돌아갔겠지. 애초에 각자의 길로 되돌아가기 위해 잠시 머문 곳이었다. 더는 미련 둘 것 없는데, 그런데 왜 자꾸.

 

별의 이름을 가진 곳이었다. 별과 함께 기억을 헤아리다 용병단의 막사로 돌아왔을 때, 보초를 서던 동료가 아이자크를 보고는 반색하며 다가왔다. 방문자가 있어. 누군데? 말하지 말라던데, 일단 보면 안다고. 무슨 소리야,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들였다는 건가? 도대체가 보안 의식이 있는 거야?

“저예요.”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번쩍 뒤를 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상대는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머리 위로 세모난 귀가 쫑긋거렸다.

“저, 기억하세요…?”

소녀는 변한 구석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심지 굳은 파란 눈. 허리를 덮어 내려오는 긴 보라색 머리카락, 용병단 한가운데에 막무가내로 들어오는 배짱 하며, 도무지 세상 풍파에 맞서 싸우지 못할 것 같이 가느란 팔다리, 짧은 치마에 하얗게 드러난 맨다리, 를 하고서 속알 없이 웃는 것. 아마 아이자크 자신도 크게 변하지는 못한 듯하다. 단 한 곳도 눈을 뗄 수 있는 구석이 없었다.

어쩐지 그날은 별이 유난히도 밝았더란다.

멜키글. 텟샤알투재밌긔

어느 날 메르키오르는 문득 제 손가락이 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펜을 자주 쥔 검지가 눈에 띄게 바깥쪽으로 휘어 있었다. 자세히 보려고 고개를 들었더니 갑작스레 어지러웠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연구에만 열중하고 있던 탓이다. 숨이 막혀 그는 잔기침을 했다. 손에 쥐고 있던 펜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 구석까지 굴러간 펜을 줍고 몸을 일으킨 메르키오르는 벽면에서 문득, 거울을 보았다.

변한 것은 손가락뿐만이 아니었다. 목에는 주름이 지고, 허리도 앞으로 굽었고, 눈가도 움푹 꺼져 생기를 잃었다. 머리카락은 푸석거리고 뺨은 탄력을 잃었다. 이렇게 변한 게 언제부터였지, 얼마나 지난 거지. 노화가 더딘 몸으로 만들어졌으니 이리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아주 길었을 것이다. 그런데 메르키오르에게는 그동안의 모든 일들이 아주 짧게 느껴졌다. 마치, 그래, 어느 한 밤의 꿈처럼.

좇고 있던 꿈은 딱 하나인데 이렇게나 긴 것을 보니 그가 꾸고 있는 것은 아주 큰 꿈이었던 모양이다. 무슨 꿈이었지? 이제는 가물거린다. 처음으로 꿈을 꾸기 시작했던 감정과 논리와 확신이 생각이 날 듯, 나지 않을 듯도 하다. 그러나 꿈의 잔상만은 남아 있다. 아주 아름답고, 델 듯이 선득하고, 잊을 수 없는, 가슴께에서 팔딱거리던 그 무언가.

그는 다시 기침을 한다. 뚜렷이 느껴질 만큼 쇠약해진 몸을 일으키며 메르키오르는 생각한다. 습관적으로 아픈 데 이유가 따로 있지는 않으리라. 꿈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덕에 이 세상은 그에게 죄 병실이었다.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황혼이었다. 쇠락한 연구자는 창밖을 내다보며 하늘에서 보랏빛의 잔상을 찾는다. 꿈이, 다시 올 때도 되었는데.

맙님께 짤막하게 말세아리

세상의 연인들 중 열에 여덟은 서로를 의심해 싸우고, 헤어지고, 마음이 멀어져 다른 상대를 가까이 두기도 한답니다. 하지만 폐하, 우린 지금까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러니 앞으로도 그렇겠지요.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소원히 여기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의심할 일도 싸울 일도 멀어질 일도 영원토록 없겠지요. 사실 당신을 처음 뵐 때는 이렇게 여자도 연애도 모르는 순진한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제국의 폐하. 저의 폐하가 되어주셔서 기뻐요. 앞으로도 저의 마음을 의심할 필요는 없으실 거예요. 약속할게요.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날, 아리스텔리아가 마르세우스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냄새가 납니다, 폐하. 살 냄새요. 여자를 취하고 바로 제게 오시나요?”

“아름다운 아리스텔리아여. 그대가 아내의 책무를 다해 우리를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아 그렇지.”

아리스텔리아는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오늘은 또 어떤 여자를 구하신 건가요.”

“궁금한가, 아리스텔리아?”

“아니요. 그런 것 알아 저와 무슨 상관이겠어요.”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같은 얼굴, 같은 모습에 다른 눈이 아프게 찔러 온다. 오늘 마르세우스는 아리스텔리아의 얼굴을 볼 엄두가 되지 않아 그녀의 등을 돌렸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나고, 달큰한 향이 날 때 즈음. 이제야 그녀의 모습은 그에게 기억의 기록으로 박제되어 잊혀지지 않는 그녀를 닮았기에 그는 약속을 지키는 그녀의 얼굴을 안심하고 바라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