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너는 그 수많은 아이들 중에 하나였지.
교단의 아이들은 모두 어딘가 비슷하다. 아이라고 믿을 수 없이 마냥 처진 눈매나 그 가운데서도 비현실적으로 반짝거리는 눈동자나 누구에게도 웃어보일 준비가 된 입매, 식사에 비해 과다한 활동량으로 나뭇가지처럼 가느다란 팔다리. 이블린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아이는 제 얼굴에 때가 앉은 것도 모르고 ‘신벌’을 돕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렇게 다른 아이들과 무엇 하나 다를 거 없는데도 이블린은 시선을 끌었다. 그 아이는 예뻤으니까.
불 속의 나무 장작 같은 눈동자나 올망졸망한 콧망울, 아이답잖게 깔끔하게 올라간 턱선과 도톰한 입술이나, 굳이 어느 한 구석만 따져 보지 않더라도 소녀는 그냥, 어쩐지 한 번씩 더 눈길을 가게 만드는 아이였다.
시간이 흐르고 아이가 좀 더 자라서 소녀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몸이 여물었을 때 이블린은 자연스럽게 교단에서 ‘내세우는’ 아이가 되었다. 사람을 모으고 여론을 호도해야 할 때 가장 앞장서서 들리는 아이의 고운 목소리. 이블린은 다른 아이들보다 더 자주 씻고 몸에 씨앗 기름을 바랐다. 그리고 때마다 확인을 받았다.
“이 정도면 괜찮나요, 교부님?”
“그래.”
그렇게 눈에 띄게 고운 채로 소녀는 노래를 부르고 연설을 배웠다. 곱게 치장한 이블린은 작전의 선두에 투입되었고 더 많이 노출되었고 더 자주 미끼가 되었다. 스스로 제안했던 계획이 잘 되어 가는데 어딘가 불안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콘라드는 고개를 천천히 젓는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그때부터 알았던 것처럼.
내 눈에 보물이 남의 눈에도 보물일까봐 불안했던 것처럼.
재앙 같은 소년이 교단에 나타나 머리가 길고 얼굴이 하얗고 목소리가 고운 여자아이를 찾은 일이나, 그게 이블린임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던 일이나, 그리고 그 많은 아이들 중에 하필 네가 신내림을 받고 까무룩 발작해버리는 이유라거나. 상황과 정황이 콘라드에게 외친다. 너는 이 아이를 감당할 수 없어. 그게 부모에게서 아이를 빼앗고 아이에게서 부모를 빼앗고 아이를 이용한 원죄의 대가야.
콘라드는 악몽에 시달리는지 끙끙거리는 이블린의 둥근 이마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왜 그 많은 아이들 중 네가 신내림을 받고 수많은 재앙과 악귀가 너를 노릴까? 너는 내 보물인데. 내가 빼앗고 내가 기르고 내가 알아봐 내가 윤을 냈어. 누구에게도 다시 빼앗기지 않아. 어떤 방법이라도 불사해서. 식은땀으로 이마에 달라붙은 아이의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팔에 약을 놓았다.
그 후로 이블린은 온전히 콘라드의 것이었다. 수십 년간 그랬다. 일상도 생각도 기억도 능력도 고민도 이야기도 자기 전에 작은 목소리로 하는 인사도 맥없는 웃음도 이제는 아무도 앗아갈 수 없어. 팔을 끌어안고서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불안을 털어놓는 소녀에게 자상하게 상담을 해준 후에 콘라드 선생님은 사람 좋게 미소지으며 밤 인사를 한다. 만 번째의 오늘도 좋은 꿈을 꾸렴.
2. 이블린은 자신의 몸이 아주 낡은 물건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내용물을 너무 많이 담아 한계가 넘은 것을 칭칭 동여매어 억지로 무너지지 않게 감싼 것. 조금만 무리하면 숨이 가쁘고 벅차 사지가 찢어질 것 같았다. 이블린은 매일 차가운 창문에 뺨을 가까이 대고 입김을 그렸다. 이런 모래성 같은 몸으로 밖에 나갈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꿈에서는 달랐다. 이블린은 맨발로 숲을 내달렸다. 신선한 새벽 공기를 들이마시다가 넘어지고, 그래도 아무 걱정 없이 웃고, 손을 내미는 콘라드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서로 웃다가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들었다. 꿈은 지나칠 정도로 생생했다. 마치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것처럼.
“이상하죠, 선생님. 자꾸 그런 꿈을 생생하게 꿔요. 저는 이 병실을 나간 적도 없는데.”
“그렇네. 정말 이상하구나.”
불안하고 이상해도 아무 걱정 없다는 듯 웃는 콘라드 선생님의 얼굴을 보면 안심이 되어서, 더 자꾸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었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아요. 꿈에서라도 나갈 수 있잖아. 그래도 이왕 이렇게 생생한 꿈을 꾼다면…….”
“꿈을 꾼다면?”
“다른 곳에도 가고 싶어요. 예를 들자면… 바다처럼, 평소에 보지 못하는 그런 곳이요.”
“그러면 그렇게 할까.”
“네?”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어 콘라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지만 약병을 내려다보는 콘라드의 얼굴에서 의중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면 그 꿈을 꾸면 되는 게 아니겠니. 자, 오늘은 함께 꿈을 꿀 거야.”
콘라드가 입을 닫는 것과 동시에 어깨를 주사바늘이 찌르는 느낌이 났다. 세상이 아찔했다. 까무룩하고 소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이상한 꿈이었다. 이블린은 얇은 원피스 하나를 입고 모래밭을 밟았다. 챙 넓은 모자를 쓴 콘라드가 옆에 함께였다. 소녀와 남자는 손을 잡고 해변을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다가 지쳐서 바닥에 엎드려서 모래성을 쌓았다. 다 쌓고는 함께 체중을 실어 성을 밟았다. 놔두면 어차피 곧 파도에 무너질 성이라고 그렇게 밟았건만 모래성의 잔해를 보자 이상하게도 눈물이 났다. 그러자 콘라드가 팔을 잡고 속닥거렸다.
하나도 속상해할 거 없어. 이건 꿈이야. 모두 꿈이란다. 알겠지, 이블린.
알았어요, 콘라드.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병실이었다. 또 별안간 정신을 잃고 꿈을 꾼 모양이다.
정말로 콘라드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꿈을 꾸게 되었잖아. 역시 선생님은 정말 유능한 분이야. 그런데, 정말 꿈이었을까? 그래. 이건 꿈이라고 했었지. 꿈이 현실이던가, 아니면 이 현실이 꿈이던가? 아무래도 좋다고 이블린은 생각한다. 내일은 또 무슨 꿈을 꿀까.
오래도록 공들인 모래성 안에서, 모래 소녀는 그럭저럭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