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메르키오르는 문득 제 손가락이 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펜을 자주 쥔 검지가 눈에 띄게 바깥쪽으로 휘어 있었다. 자세히 보려고 고개를 들었더니 갑작스레 어지러웠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연구에만 열중하고 있던 탓이다. 숨이 막혀 그는 잔기침을 했다. 손에 쥐고 있던 펜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 구석까지 굴러간 펜을 줍고 몸을 일으킨 메르키오르는 벽면에서 문득, 거울을 보았다.
변한 것은 손가락뿐만이 아니었다. 목에는 주름이 지고, 허리도 앞으로 굽었고, 눈가도 움푹 꺼져 생기를 잃었다. 머리카락은 푸석거리고 뺨은 탄력을 잃었다. 이렇게 변한 게 언제부터였지, 얼마나 지난 거지. 노화가 더딘 몸으로 만들어졌으니 이리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아주 길었을 것이다. 그런데 메르키오르에게는 그동안의 모든 일들이 아주 짧게 느껴졌다. 마치, 그래, 어느 한 밤의 꿈처럼.
좇고 있던 꿈은 딱 하나인데 이렇게나 긴 것을 보니 그가 꾸고 있는 것은 아주 큰 꿈이었던 모양이다. 무슨 꿈이었지? 이제는 가물거린다. 처음으로 꿈을 꾸기 시작했던 감정과 논리와 확신이 생각이 날 듯, 나지 않을 듯도 하다. 그러나 꿈의 잔상만은 남아 있다. 아주 아름답고, 델 듯이 선득하고, 잊을 수 없는, 가슴께에서 팔딱거리던 그 무언가.
그는 다시 기침을 한다. 뚜렷이 느껴질 만큼 쇠약해진 몸을 일으키며 메르키오르는 생각한다. 습관적으로 아픈 데 이유가 따로 있지는 않으리라. 꿈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덕에 이 세상은 그에게 죄 병실이었다.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황혼이었다. 쇠락한 연구자는 창밖을 내다보며 하늘에서 보랏빛의 잔상을 찾는다. 꿈이, 다시 올 때도 되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