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배와 허벅다리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감각으로 자신이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방은 어두워 시야가 제대로 가늠이 되지 않았다. 천장이 무척 낮게 느껴졌다. 호흡이 목을 긁어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났다. 시야가 붉은 색과 흰 색으로 일었다가 다시 가라앉고 목소리가 들렸다.
“깨어나셨군요.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물론. 당신은.
누구지?
대답을 하려고 힘을 주자 입안에 비릿한 것이 고였다. 익숙한 냄새였다. 피를 뱉고자 했으나 뱉을 턱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으나 꿈틀거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당신의 생각은 콘솔을 통해 나타나게 되니까요. 아직 의식을 가누기 어렵다면 다시 눈을 붙이셔도 됩니다. 아차, 눈을 붙인다는 말이 되지 않는 상태던가요.”
재미없는 농담은 그만둬, 로휀.
그래, 로휀.
그 이름을 떠올리자 다시 시야가 찌를 듯 부시게 얼룩이 지더니 의식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거품이 떠오르는 것처럼 단편적인 기억 기억이 무의식 중에 떠올랐다.
시녀들이 뒤돌아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주 작았던 그는 그녀들을 올려다보았으나 모두 그에게서 일부러 몇 발치씩 떨어져 있었다. 그는 그들을 향해 손을 뻗다가 닿지 않을 것을 깨닫고 그냥 그만두었다. 그리고 눈 앞 가까이에서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았다. 손을 뻗어 움켜쥐었다. 잠시 후 시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두 남자가 검을 뽑아들고 싸우고 있었다. 젊은 두 얼굴은 모두 그에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를 포함한 세 사람은 서로 싸우거나 짓밟아야 하는 운명으로 한 배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던가. 아주 어렸던 그는 일방적으로 짓밟히는 쪽이었기에 나서서 싸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일찍이 이렇게 바로 눈앞에서 모두가 부서질 것처럼 느껴진 적은 없었다. 그래서 더 보지 못하고 사이에 뛰어들었다. 그러자 한 명의 발이 그를 걷어차고 한 명의 검이 눈 앞에서 번뜩였다. 그는 풀썩 의식을 잃었다.
그는 다시는 사람의 일에 뛰어들지 않았다. 그렇게 공허한 눈으로 세상을 방관하는 그의 곁을 몇 명인가 떠돌았다. 기분 나쁜 노인의 말에 따라 들어간 곳에는 또래의 소년들이 있었다. 다시 뛰어들 생각은 없지만 곁에 두어도 싫지 않았던. 그러나 곧 방주는 부서지고 그는 다시 돌아온다.
사기가 높은 전장에서, 보급품을 전하러 찾아온 가신이 기지를 나서기 전 그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적국의 정세에 밝기로 이름난 자였다.
“이번 전투에선 조심하세요, 전하.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된다덥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기분 나쁘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지워지고 그는 하늘을 나는 배 위에서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몇 가지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몇 부위가 없었다. 자신의 일부를 잃고 몇날 며칠을 사경을 헤매던 그의 감각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무슨 기대를 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잘했다, 그만 쉬어도 좋다, 수고했다. 그 따위의 낡고 해진 소리들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곧 어머니의 목소리가 침착하고 서늘한 것을 알아챈다. 이 기억을 해내는 순간 그는 다시 꿈틀거렸다. 무의식 중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시녀들의 수군거림이 범벅이 되다가 마지막으로 가신의 속삭임이 들렸다.
그래. 그가 그렇게 말했었지.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 그는 이제 앞으로 무엇을 할지 생각했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렸다. 오감이 일그러져 반파된 시야 안에서 노인의 눈이 기묘하게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당신이 정말로 원하시는 것입니까?”
그는 인간이 아닌 양 배에서부터 들끓는 소리를 냈다.
“제가 재차 확인하는 이유를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 당신의 뇌는 손상되었습니다. 당신이 지금 그룬왈드 론즈브라우로서의 의식을 되찾는 데 시간이 걸렸듯이, 당신의 뇌가 제 기능을 되찾는 데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립니다. 지금 당신은 충동적이고, 절제를 담당하는 중추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정상적인 사람과 같은 상태가 결코 아니에요.”
알고 있어. 느끼고 있어.
“나중에 제정신을 되찾으시면 지금의 결정을 후회하실지도 모릅니다.”
상관 없어.
“잠깐의 선택으로 당신을 돌이킬 수 없게 될 터인데도요?”
상관 없어. 난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