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캐빌 합작] 벨린다x빌헬름

군인이지만 그렇게 대범한 성품은 되지 못했다. 빌헬름 쿠르트의 출신지는 브론하이드 성으로부터는 한참 떨어진 왕국 서쪽 구석의 바닷가였다. 소금 짠내가 나는 해풍, 곳곳에 말린 비린내 나는 물풀들. 어려서는 빨래처럼 늘어진 물풀을 일일이 걷고 좀 더 커서는 자맥질해서 바다로 떠내려간 물건들 혹은 바다 아래 묻힌 귀중품들을 주워오는 것이 키가 크고 체력이 좋은 빌헬름 쿠르트의 몫이었다.

빌헬름 쿠르트는, 그 해안가 마을에서 지내기엔 조금 지나치게 키가 크고 체력이 좋았다. 해로를 통해 타국으로 다녀오던 특사가 떨어뜨린 진주 세공품을 바다 밑에서 주워왔을 때, 체격 좋은 빌헬름 쿠르트는 그의 눈에 띄었다. 마을의 모두가 기뻐했다. 젊고 가능성 넘치는 네가 언제까지고 여기 매여 있을 필요 있나. 어른들은 큰 고래를 잡았다. 불이 피어오르고 수평선 위로 탁 트인 하늘에서 별빛이 축복하듯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러나 기쁘지만은 않았다. 청년에게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말린 물풀 같은 고수머리를 가진 처녀. 처녀의 머리에서는 해초처럼 물비린내가 났다. 소금기가 말라붙어 머리카락 위에 하얀 보석처럼, 별이 내려앉은 것처럼 빛을 냈고 처녀의 눈동자도 물기 먹어 반짝였고 빌헬름 쿠르트는 오래 내려오는 이야기책 속 해묵은 병사들의 맹세를 입에 담는다. 꼭 살아 돌아올게, 성공해 돌아와서 너와 함께할게. 입에서 입으로 맹세를 전한 청년은 물기라고는 없이 가칠하게 메마른 브론하이드 성에서 승승장구했다.

살아남는 것이 그의 몫이었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죽여야만 했다. 내정은 혼란스럽지만 외적에 맞서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았고 고향이 그리워 간혹 울었던 신참내기 어린 청년은 소령이 되었다. 꺼질 듯 희미한 별을 바라보며 가냘픈 삶을 그리는 꿈은 용케도 전장을 이어져갔다.

언젠가는 소녀를 구했다. 언젠가는 장갑병들과 합세했다. 훈장이 점점 더 화려해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을 때, 그에게는 아직도 별이 빛났던가? 그에게 하늘을 보는 시간이 남아 있었던가? 뼈를 가르고 내장을 자르는 일에 익숙해질수록 서쪽 해안가 출신의 빌헬름 쿠르트는 쿠르트 소령으로 출세했다. 약속을 지키러 가는 일은 약속을 잊는 일. 남자를 죽이고 여자를 취할 때 더는 바다 물풀의 내음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일에 지쳤던 것 같기도 하고, 익숙해졌던 것 같기도 했던 어느 날.

그녀는 선고처럼 내려왔다. 고향에서 보던 것 같은 거대한 배가, 하늘에서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쏟아졌다. 쿠르트 소령은 앞을 바라본다. 전혀 기죽지 않아 보이는 흑태자의 뒷모습을, 기적을 가져오는 남자의 실루엣을 보며 그는 불길한 기분을 누르고, 전장에 나서기 전 늘 그렇듯이 소리를 지르며 기분을 고양시키고, 그리고 어느 때였던가. 물풀 같은 머리칼을 휘날리는 여장군이 보였다. 흰 군복을 입고 선 자태가 아름답고 풍만하고 우아했다. 휘장과 망토가 별처럼 빛났다. 답지 않게 망설이던 찰나에 그녀는 신이 난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지팡이를 휘두르고.

폭음이 진동했다. 순식간에 하반신이 뜨거워졌다. 뜨거운 기운이 울컥 목을 타고 입으로 튀어나오고 의식은 찰나에 흐려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하늘을 본다. 하늘에는 별이 없다. 안 되는데, 나는 살아남아야 하는데. 약속했는데. 뒤늦게 떠오른 뜨거운 약속들 속에 잠기고, 잠기고, 잠기고.

다시 눈을 뜨니 그녀가 보였다. 노란 눈이 빌헬름 쿠르트를 향한다.

“어째서 당신은 내 하인이 되지 않았나요?”

“죽을 수 없어.”

“그 상처라면, 분명히 죽었을 텐데. 내 하인이 되기 위하여 일어난 것일 텐데.”

“나 혼자만 여기서 죽을 수 없어.”

“아아.”

여자는 소녀처럼 황홀하게 웃는다.

“당신은 살아있는 죽음이로구나. 내 곁에 있어요.”

사랑스러워, 사랑스러워. 여자는 꺄르륵 웃으며 연신 무언가를 잡아 뜯는다. 죽을 수 없어. 죽을 수 없어. 하지만 어째서 죽지 않는 걸까. 빌헬름 쿠르트는 조각난 자신의 잔해를 바라보며 생각하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녀의 곁에서 하얀 보석처럼 빛나는 얼음 조각들. 얼음이 녹으며 나는 물비린내, 말린 물풀처럼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나는 아마 예전에, 꿈이 있었는데. 내 고향 말린 물풀이 널린 바닷가 마을에서 그녀와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키가 큰 빌헬름 쿠르트는 널린 자신의 내장을 걷어 담으려 하지만 여장군이 먼저 그를 지팡이로 찍어 누르며 입을 맞춘다. 강제로 몸이 뒤집히고 보니 어두워져 가는 하늘에 별이 반짝였다. 나는, 예전에 약속이 있었는데.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