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조 합작 – 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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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라이바흐의 심미안은 세상 어느 현인에도 뒤지지 않았다. 누구의 명언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고 누구의 규칙에도 기대지 않았다.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스스로 이해하기엔 너무 깊고 바다처럼 넓었다가는 자갈처럼 옹졸했다.
처음이었다, 아무 갈피도 잡을 수 없는 것은. 잡고 싶었다. 잡히지 않는 그녀를 잡고 싶었다. 책을 뒤져 조언을 구하면서 그라이바흐는 울었다. 혼자서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 분해서 조금 울었고 그녀가 그 모든 조언 속 묘사보다 아름다워서 많이 울었다.
레드그레이브를 사랑하냐고 하면 그라이바흐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일반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모른다. 레드그레이브에게 가진 것과 비슷한 감정은 세상 어디에도 가질 수 없다. 그러니 모른다. 이 감정을 무어라 불러야 하는가, 빗댈 수 있는 곳이 어디도 없었다.
경이고 꿈이고 가슴에 부푸는 아름다움. 그는 공중에 떠오르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현실에 발 붙이고 있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녀로 가슴이 차올라 공중에 떠오르는 형제가 있었다. 그라이바흐는 그녀가 조금 덜 꿈같았으면 했다. 여신이 손 안으로 떨어졌으면 했다.
너는 사람일 뿐이야, 한명의 여자일 뿐이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꿈이여 부디 내 일상이 되어 주오. 꿈이여, 내 신성한 통속이여.

 

2. 멜키오르는 경전도 시도 아니 믿었지만 자신과 케이오시움만 믿었다. 그가 사랑하는 수정은 그 눈에 어느 물체보다도 매끄럽게 빛났다. 더없이 작은 세상인 만큼 무한히 넓은 세상이었다. 다른 누가 뭐라 한들 그는 이해를 구한 적도 없었고 이해를 바란 적도 없었다. 그녀를 보기 이전에는.
아름다운 보랏빛 눈을 마주했을 때,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다 안다는 듯 그 눈이 휘어져 웃었을 때. 멜키오르는 발바닥이 간지럽고 어깨가 날아갈 듯 가볍게 느껴졌다. 그는 모래 먼지가 되어 날아가고 싶었다. 눈짓 하나에 그의 세계는 아무 것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우주의 여신과도 같은 그녀가 압도적인 세계로 존재했다. 저를 믿던 멜키오르는 세상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 채 서서 벌을 기다리는 작은 어린아이가 되었다.
멜키오르는 먼지가 되고 싶을 만큼 그녀를 사랑했다, 시기했다, 증오했다, 사랑했다.

 

3. 레드그레이브는 가끔 생각한다. 엔지니어들은 세 사람을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어째서 곧 무너지고 말 행복 같은 것을 부여했을까.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녀가 아름다웠고 형제들은 서로를 사랑했으므로. 이제는 행복 아니게 된 행복이었다. 형제들이 그녀를 너무나 사랑하고 말았으므로.
지난 날을 떠올리며 레드그레이브는 손을 힘주어 쥔다. 쇠로 된 손마디가 세게 마찰해 끼각거리는 소리가 난다. 더 이상 그날의 아름다운 여자는 없다. 그러니 그런 행복을 빼앗길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다시는 그토록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몸은 들어냈지만 그때를 기억하는 뇌는 들어내지 못했다. 수백 계절을 꼬박 새고도 벗어내지 못한 시절이 작은 몸에 넘치게 아리다.

레그우닝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 곤란하네.”

“잠시만 시간을 내 주시면 됩니다. 아니면, 대답하지 못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당당하게 눈을 들었지만 뒷짐 진 손가락 끝은 양복 끝자락을 더듬어 잡고 있었다. 위험한 도박이었다. 너무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것이라면 자칫 상층부의 표적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고, 더 물러설 곳은 없었고, 그녀의 태도에서 조금의 단서라도 얻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글쎄… 그건 내가 물어야겠는걸. 이 세계의 비밀이 알고 싶다고? 굳이 알려주지 못할 건 아니야.”

살풋 미소를 짓고 레드그레이브는 일어나 차에서 내렸다. 화색이 도는 걸 미처 숨기기도 전에, 질릴 듯이 선명한 눈동자가 브라우닝을 빤히도 응시하고 있었다.

“브라우닝이라고 했나… 자네는 세계의 비밀이 뭐라고 생각하지?”

“그것을 알기 위해 제가 여기에 온 겁니다. 자살로 위장한 타살 사건의 진상을 알면…”

“자네는 그 피살자가 누구였는지 아나?”

“예술가라고만 기록되고 자세한 정보는 극비에 부쳐져 있지만 있지만… 세이리어스 그라이바흐. 당신과 함께 세계의 발전을 담당했던 세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아닙니까?”

가진 패를 내보이고 브라우닝은 가만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레드그레이브는 틀린 대답을 부정하는 스승마냥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야… 어디 보자. 탐정 일이라면 나도 조금 할 줄 안다네. 자네의 다려놓았지만 해진 소매. 이런 곳에 입고나올만한 옷은 아니야. 단벌로 어딘가에 머물고 있군? 급한 사정이 있어서라 쳐도 얼굴은 가칠하고 수염은 머리도 정돈되지 않고.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생활에 길들여져 있어. 평소에 관리하는 타입은 아니군. 제대로 된 연애 경험은, 없지.”

“이런 식으로 화제를 돌리시려는 거라면…”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단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죽은 그라이바흐는 내 가족이고, 친우고, 그 무엇보다도 내 연인이었다는 게지.”

순간 브라우닝은 귀를 의심했다. 당황해 레드그레이브의 표정을 보려 했지만 여자는 브라우닝이 그럴 것을 미리 알기라도 한 듯이 해사하게도 웃었다.

“그러니까, 말해준다 한들 자네가 알겠나? 그 감정들을 이해하고 추리할 수 있겠어? 그림자가 길어지면 일몰이 기다려지는 것. 누군가의 숨소리가 귀에 익은 것. 나보다 열등한 존재를 질투하게 되는 것. 한 쌍 눈동자의 빛이 천 가지의 정보보다 크게 닿아오는 것. 보고 들어도 궁금해서 더 알고자 하는 것. 그래서 더 가까이 있고자 하는 것, 그리고 바로 귓가에 속삭이는 것을, 말해주면 자네는 알겠어?”

어느새 여자의 얼굴이 부쩍 가까이 있었다.

“아니면, 알고 싶어? 세계의 비밀이, 정말은 어떤 것인지.”

웃음 짓는 숨이 뺨에 살짝 닿았다.

자기전에 되는대로 찌끄렸던 그라레그

그라이바흐의 심미안은 세상 어느 현인에도 뒤지지 않았다 누구의 명언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고 누구의 규칙에도 기대지 않았다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스스로 이해하기엔 너무 깊고 바다처럼 넓었다가는 자갈처럼 옹졸했다
처음이었다 아무 갈피도 잡을 수 없는 것은 잡고 싶었다 잡히지 않는 그녀를 잡고 싶었다 책을 뒤져 조언을 구했다 그라이바흐는 울었다 혼자서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 분해서 조금 울었고 그녀가 그 모든 조언 속 묘사보다 아름다워서 많이 울었다
레드그레이브를 사랑하냐고 하면 그라이바흐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일반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모른다 레드그레이브에게 가진 것과 비슷한 감정은 세상 어디에도 가질 수 없다 그러니 모른다 이 감정을 무어라 불러야 하는가 빗댈 수 있는 곳이 어디도 없었다
경이고 꿈이고 가슴에 부푸는 아름다움 그는 공중에 떠오르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현실에 발 붙이고 있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녀로 가슴이 차올라 공중에 떠오르는 형제가 있었다 그는 그녀가 조금 덜 꿈같았으면 했다 여신이 손 안으로 떨어졌으면 했다
너는 사람일 뿐이야 한명의 여자일뿐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꿈이여 부디 내 일상이 되어 주오. 꿈이여, 내 신성한 통속이여.

[그라멜키] 어느 세계에선가, 너의 목소리 너머 @ 4/1

멜키오르라는 소년의 방은 얼핏 보면 온갖 잡동사니로 난잡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연구에 불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결벽에 가까운 무색의 공간에 파르스름한 그림자만이 비쳤다. 소년의 고독은 스스로 선택한 바였다. 동정을 구한 적도 없었다. 침입을 허락한 적도 없었다. 물론 허락하고, 하지 않고는 그의 ‘형제’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연구에 몰두하고 있던 멜키오르는 문득 종이 위로 비치는 붉은빛을 보았다. 창문 너머로 해가 떨어져간다. 쫓기는 사람처럼 자명종을 확인하며 소년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째깍째깍거리는 시계 소리가 무겁게 귀를 눌렀다. 초침이 몸 안으로 흘러들 것 같았다. 일곱 시가 가까워지면 허벅다리가 떨렸다. 배가 뒤틀렸다. 다시 펜을 잡고 종이 위에 손을 올렸지만 의미 없이 공중에 떠 있을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멜키오르는 종이 위로 고개를 묻었다. 그림자가 떨렸다.

마침내 차임벨이 울렸을 때, 멜키오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스스로 당황했다.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나는 그라이바흐를 기다린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그렇게 아프고, 그렇게 부끄럽고… 그렇다면 문을 열지 않으면 되었다. 딸깍, 전자음과 함께 보안 장치가 해제되었다. 지금 문을 닫아도 어차피 내일 낮에 다시 보아야 하니까. 제 욕구를 인정하기도 겁을 내는 여린 소년이 자기정당화를 하는 동안 문이 열렸다. 멜키오르는 고개를 들어 형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나처럼 오만하고, 언제나처럼 우아했으며, 언제나처럼 반가웠다.

“들어와, 그라이바흐.”

 

홀린 듯이 침대 위로 다리를 올려놓다가 어제 시달린 허벅지에 통증이 엄습했다. 그제서야 덜컥 겁이 났다.

“저기, 그라이바흐, 오늘은 그냥 지나가면 안될까…?”

“뭘 그렇게 긴장하고 있는 거야.”

그러나 형제는 이미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할 새도 막을 새도 없었다. 이번에도 그에게 선택권 따위는 없었다.

“긴장 풀어, 멜키오르. 우리는 형제잖아.”

그림자 진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천사처럼 아름답고 악마처럼 진득했다.

“그럼 시작하자, 멜키오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그라이바흐가 그의 등을 떠밀어 상체를 침대 위에 비뚜루 뉘였다. 굳은 근육이 억지로 당겨 신음이 흘렀다. 머리카락 몇 움큼이 시트 위로 흐트러졌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는 방 안에서 두 소년의 그림자가 길게 떨어졌다. 눈을 반쯤 뜬 그라이바흐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침대 시트가 삐걱거렸다.

“아, 윽, 그라이바흐, 그, 그만…”

“좀 참아, 멜키오르… 나도 나름대로 힘들다고…”

“하지만, 그라이바흐… 거긴 너무, 너무 아파…”

“그거야 항상 앉아만 있으니까 여기 근육이 뭉쳐서 그렇지.”

그라이바흐가 힘껏 잡아당기던 어깻죽지를 팡팡 두들겼다.

“만날 그렇게 운동도 안하고! 책상에 앉아서 날밤만 새우니까…! 키가 안 크는 거라고! 말했지!”

“으윽, 나도 안 크고 싶어서 안 크는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좀 참아! 마사지라도 해서! 몸을 좀 풀어줘야지! 좀 더 크든 말든 할 거 아니야!”

사정없이 근육을 힘주어 누르는 손길에 멜키오르는 반쯤 흐느끼고 있었다. 정말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될 것을 알면서도, 알면서도 자신은 왜 또 그라이바흐를 방에 들여놓았을까. 아프지만 시원했다. 정말이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리고 알면서도 읽고 있는 님들도… 헿…

티켓 한뭉안에 인형이랑 유리카 다 먹으면 유레블린 쓴다

세상은 소음으로 가득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옷자락은 젖어 바닥에 끌렸다. 비 맞은 어깨를 떨면 그만큼 더 냉기가 스치는 것이 싫었다. 빗방울이 고막을 때려 어지러웠다. 배를 주린 것이 며칠째였던가. 이블린은 휘청 바닥에 주저앉았다. 수군거리는 소리는 금세 빗속에 녹았고 멈춰 앉은 이블린의 주변으로 세상이 예사처럼 흘러갔다. 눈물과 빗물이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 다음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니 따뜻했다. 파랑과 노랑과 주홍이 흐릿하게 뭉그러졌다. 눈이 맑아지니 색유리로 빛을 댄 벽이 보였고, 다시 한번 눈을 깜박이니 머리 위에서 일렁거리는 촛불이 보였다. 미동도 없이 초를 들고 서 있는 수녀가 처음에는 정교한 조각상이라고 생각했다.

“깨어나셨습니까.”

이블린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저에게 달라진 것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온 몸이 깨끗했고 넓은 소매가 펄럭일 때마다 하얗게 광이 나는 가벼운 로브가 입혀져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 이 답례는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런 것은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자매님께서는 그저 이곳에 머물며 자매님의 평안을 찾으시면 됩니다.”

차분한 대답에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유난히 물끄러미도 바라보는 수녀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이블린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높은 천장은 금으로 장식되었고, 바닥에는 창을 부드럽게 투과한 색색의 햇빛이 흘러넘쳤다.

“여기는… 좋네요. 아름답고 조용해요. 꼭 전에 지내던 곳 같아요. 세상은 너무 시끄러워서…”

“소리가 싫은가요?”

이블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날부터인가 귀를 메우는 악마의 목소리가 싫었다. 감금되다시피 자란 병실에서 나와 갑자기 내던져진 영문 모를 세상이 싫었다. 모두가 싫었고 모든 소음이 싫었다. 고개 숙인 채 제 팔을 꼭 안은 이블린의 주변을, 수녀가 빙 둘러 몇 걸음을 걷다가 바로 옆에 멈추었다. 목소리가 바로 귀에 닿을 것 같았다.

“자매님께서 아직 복음의 소리를 모르셔서 그렇습니다. 소리가 싫다면, 소리로 가라앉히면 되는 법이지요.”

“복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환청도 떨쳐버릴 수 있는 건가요?”

“당연하죠. 처음에 자매님을 보았을 때는 죽은 사람인가 했는데, 이렇게 건강히 살아 계셔서 다행이에요.”

아이에게 이르듯 조근조근 대답을 하고 수녀는 이블린의 로브 너머 허벅다리를 꾹 눌렀다. 어째 다리가 따끔거렸다. 눈썹을 찌푸리고 로브 자락을 걷어들었다. 이블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깨끗하게 씻어낸 하얀 허벅지 위에, 얇은 칼로 여러 번 그어놓은 것처럼 붉은빛 띤 실금이 가득했다. 놀라 숨을 크게 들이쉬며 뒷걸음질치자 실금마다 붉어지며 방울방울 피가 맺혔다. 기겁하여 로브를 놓으니 흰 옷자락 위로 붉은 피가 아롱아롱 번져나갔다. 이블린이 당황해 물었다.

“저 그런데, 수녀님, 이건 무슨…”

고개를 드니 놀랍게도 수녀는 웃고 있었다. 아름다운 미소라고 생각했다.

“살아있어야 복음을 전할 수 있으니까.”

소녀가 그 미소를 홀린 듯이 바라보는 동안 수녀는 팔을 등 뒤로 옮겼다. 금속질의 무거운 것이 바닥에 끌려 끼릭거리는 소리가 났다. 고요하던 성당에 소리가 가득 찼다.

그날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