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시아사랑해생일축하해♡] 탄생

탄생의 순간에 인간은 울었고 재료는 울지 않았다. 심약한 소년은 생각한다. 나는 울지도 못하고 세계에 짓눌리다가 종국에 압사하겠지. 겁 많은 소년에게 누이가 속삭인다. 탄생에 울지 않은 것은 우리가 특별한 까닭이야. 우리는 아름답고 영화롭도록 태어났기 때문에, 따라서 삶이 슬플 이유가 없기 때문에. 소년은 누이를 바라본다. 네 말은 틀림이 없겠구나, 영화롭고 아름다운 레드그레이브.

남자는 누이를 바라본다. 영화롭고 아름다운 레드그레이브, 영화롭고 아름다운 그라이바흐. 그리고 멜키오르. 너를 바라보면, 너희를 바라보면 그때 그 말은 틀리지 않았을지언데. 남자는 거울을 바라본다. 한참을 넋놓고 바라보던 거울 속에는 인형이 비친다. 존재의 탄생에 남자는 축사를 보낸다. 너는 가장 고귀한 사명을 띠고 공허로 떠나리라. 너는 그녀보다도 아름답고 영화롭도록 태어났기 때문에. 신이 되기 위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서 너는 태어나면서 울지 않는 것이다. 너는, 울지 않을 것이다. 진득한 저주가 쇠로 된 혈관과 코드로 된 신경에 녹아 붙었다.

아름답고 영화로운 신이 축복으로 태어난 지 200억년째. 스테이시아가 웃는다. 울지 않고 웃는다. 쉬지 않고 웃는다.

라우우닝현대AU

안 믿기겠지만 한번 들어봐. 그러니까 내가 대학 시절 짐배낭 하나 메고 떠돌아다니던 때 이야기일세. 겁도 없이 내 몸 하나만 믿고 중동 지역 돌아다니던 때 말이야. 그때 종교분쟁 때문에 막 뉴스에도 해외토픽이라고 실리고 그랬는데 그래도 난 이름난 여행지만 다니니까, 그런 건 남의 얘기겠거니 했지. 그런데 글쎄 그날따라 이상하더라니까. 사막답지 않게 날씨는 선선하고 좋은데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야. 냄새도 영 이상하고. 뭔가 타는 것처럼 매캐한 냄새가 코끝에 도는데, 나는 거기 모래 냄새가 원래 그런가 했어. 그런데 사람이 보이지는 않는데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하나, 둘, 다섯, 아니 열은 넘을 것 같은… 어리둥절해져가지고 누구 계세요, 하고 있는데 갑자기 퍽 소리가 나면서 눈앞에 별이 돌더라. 깨어나니까, 쩝. 뒷통수는 얼얼하고 손발은 안 움직여져. 묶여 있어. 발버둥칠수록 발목이랑 손목만 아픈 거야.

그 사람들 아주 웃긴 사람들이었어. 못알아듣는 말로 한창 뭐라 씨부리다가 나를 발로 차고 나서 멍들고 흉이 지면 약 같은 걸 발라주더라. 멀쩡하게 간수해서 인질로 쓰려고 그랬나. 그리고 갈수록 초조해 보이더라고. 인질협상이 잘 안 됐나봐. 나도 덩달아 초조해졌지. 수염은 까칠까칠 자라고 몸은 해쓱해지고 이러다가 쌩판 어딘지도 모르는 데서 비명횡사하게 생겼거든.

그날도 그랬어. 햇빛이 조금 들어왔던 거 보면 아마 오후나절이었을 거야. 밧줄 좀 어떻게 안되나 비벼 보다가 손목만 헐어내고 있는데 갑자기 그림자가 져가지구. 들켰나 싶어서 깜짝 놀라서 위를 올려다보니까 웬 어린 남자애 하나가 있더라고. 근데 애가 참.. 눈이 맑고. 말쑥하고 해사한 게 좀.. 뭐라고 하지. 살아있는 사람 같지가 않다고 해야 하나? 차라리 뭐랄까, 신 같아 보였다고 해야 하나? 그랬지, 그랬어. 나도 참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거기 있으면 한 패거리일 가능성이 높은데도 전혀 그런 생각 안했어. 너 왜 이런 데 있니. 여기 있다가 큰일 난다. 어서 도망가. 이런 데 있으면 안 돼, 나가야 해. 내 손부터 풀어달라는 소리도 안했어. 내 말도 못알아들을거 왜 이러고 있지, 한숨 푹 쉬고 있는데 걔가 웃더라. 저는 괜찮아요. 그러는 거야. 깜짝 놀라서 어깨를 으쓱하는데 손이 들리더라. 글쎄 밧줄이 깨끗하게 풀려 있더라고. 이게 대체 뭐야 하고 어리둥절해 있는데 걔가 쭈그리고 앉아서 내 손을 잡았어. 절 따라와요, 하는데 이상하게 그대로 믿어도 될 것 같았어. 쪼끄만 애가 이끄는 대로 계속 걸어가니까 햇빛이 보였어. 그게, 막, 눈물이 나더라. 내가 며칠 동안 갇혀 있었는지도 모르겠는데 햇빛을 보니까 너무 눈이 부셔서 눈물이 나. 울고 있는데 빛 속에서 그 남자애가 그러는 거야. 다음은 브라우닝 씨가 안내해요.

무슨 소리야, 너 원래 지내는 데는 어디냐? 하고 물어보니까 걔가 그러는 거야. 원래 있던 데요? 당신이 나오라고 해서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당신이 안내해요.

그러니까 내가 그랬잖아, 브라우가 어디서 왔는지 말해도 안 믿을 거라고. 아 이리 좀 와 봐, 브라우. 내 말 맞잖아. 틀렸어? 아 왜 웃기만 하는데. 그땐 감사했다고? 아 난… 정말. 내가 대체 뭘 데려온건지 모르겠다. 그게 뭐 중요하냐고? 하 것참…

마도조 네타합작 – 이블린

꽃.

공부라고는 해본 적이 없었다. 기억하는 건 어릴 때부터 거듭해 읽어온 오래된 동화책이 다였다. 나는 심하게 아팠고 쉽게 불안정해졌기 때문에 미셸은 내게 공부 같은 것은 좀처럼 시키지 않았다.

나는 가끔 현기증 속에 픽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드문드문 끊긴 기억 중에 잠이 깨면 얼굴이 거위 깃을 채운 베개 속에 움푹 묻혀있어서 숨이 막혔고, 눈을 번쩍 뜨고 숨을 몰아쉬면 새로 세탁한 침구의 세제 냄새가 폐부까지 가득히 들이찼다. 번진 시야 속 새하얀 시트 너머로 새하얀 병실 벽이 보였다. 멍하니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침대머리에 기대서 겨우 상체를 들었다. 허리를 일으키고 눈을 감은 채 가만 숨을 들이쉬면 머리맡에 놓은 꽃향기가 코끝부터 밀려와 손끝까지 들어찼다. 향기는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무한정 늘어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대로 옆을 돌아보면 역시 흰빛의 화병 안에 꽃이 있었는데, 때로는 짙은 색이었고 때로는 시트처럼 흰 색, 피처럼 붉은 색, 그보다는 엷은 색, 하늘을 닮은 색일 때도 있었다. 완전히 새하얀 방 안에서 색채가 보이는 것은 창밖과 화병 속이 전부였다. 창밖에는 손이 닿지 않았으니 나는 화병 속의 꽃대를 그러쥐어 꺼냈다. 꽃잎에 얼굴을 묻었다. 얼굴에 빛깔이 옮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러나 꽃은 금방 시들었다. 내가 병원에서 지낸 시간에 비해서는 너무나 금방. 그래서 어느날 자기 전 상태를 확인하러 온 미셸에게 물었다.

“꽃은 왜 시드는 거예요?”

미셸은 처음엔 웃으며 엉뚱한 소리 말고 눈부터 감으라며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겨 덮어주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나서도 같은 질문을 하고 다시 하자 미셀은 책 한권을 가져왔다. 갖가지 꽃과 나무의 그림이 그려진 두껍지 않은 식물도감이었다.

침대에 앉은 채로 책을 펼쳤다. 책을 읽어 보려고 했지만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았다. 미셸이 올 때마다 단어를 물어보고 다시 물어보기를 반복하자 미셸은 사전을 가져다주었다. 마침내 단어에서 막히는 일 없이 책을 읽을 수는 있게 되었지만 나는 계절과 숫자에 대해서 잘 몰라서 책에 나와 있는 각종 계산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미셸은 이번에는 자연과 수학에 관련된 책을 가져다주었다. 계산은 어려웠지만 끈질기게 반복을 하자 간단한 몇 가지 계산은 해낼 수 있게 되었다. 기뻤다. 몸에 긴장이 풀리면서 힘이 빠졌다. 나는 지쳐서 앉은 그대로 책을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얕은 잠에 막 빠져들 때 즈음 까닭 모를 의문스러운 감정이 들었던 것도 같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하려고 했더라?

나는 무엇을 하고 있더라?

 

갑작스러운 감촉에 잠이 깨었다. 보드라웠다면 미셸이었겠지만, 그렇진 않았으니 바로 불렀다.

“콘라드 선생님.”

어둠 속에 선생님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엄하게 꾸짖는 얼굴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대답하는 선생님의 어투는 생각보다 상냥했다.

“제대로 누워서 자야지, 이블린. 이러고 잠이 들면 어떡하니.”

선생님은 내 무릎 위에 있던 책을 들었다.

“아무래도 이 책은 내가 가져가야겠구나. 아픈 아이가 너무 무리하면 못 써.”

슬슬 어둠에 눈이 익으면서 선생님이 책을 덮는 것이 보이고, 선생님의 얼굴도 어렴풋이나마 보였다.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아까 궁금해하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선생님.”

“무슨 일이야, 이블린?”

“저, 궁금한 게 있어요. 꿈이란 뭔가요?”

“네가 밤에 잠든 후에 보고 아침에 깬 후에 미셸이 기록하는 그 꿈 말이니?”

“아니요, 그 꿈 말고요. 오늘 책에서 읽었는데.. 사람은 자신이 그리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고 했어요. 갑자기… 모르겠어요. 그 꿈이란 뭘까요? 사람의 꿈이란 뭘까요?”

선생님은 잠시 대답을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좋은 질문이구나, 이블린. 사람이 살면서 삶이 지금과 달라졌으면 하는 바, 그 원하는 모습을 그 사람이 그리는 꿈이라고 해.”

달라졌으면 하는 바. 꿈.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두통과 피로가 몰려왔다.

“그러면 사람은 언제나 꿈을 그려야 하나요?”

“꼭 그럴 필요는 없어. 가령… 아까 말했던 것처럼 밤에 잠이 들어서 꿈을 꿀 때의 기분을 생각해 보렴. 꿈 속에서 몽롱하고 제대로 생각이 되지 않는 상태 말이야. 그럴 때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기는 힘들겠지? 사람은 그렇게 꿈 없이 길을 헤맬 때도 있는 거란다.”

“그러면요, 선생님. 지금 이것도 꿈인가요?”

나는 꽃향기가 맡고 싶었다. 병실을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건강해지지 않았다. 책 한 권을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쇠하고 잘못된 자세로 잠이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몸에 힘을 잃었다. 숲에는 꽃이 지천인 시기여도 나는 미셸이 가져다주는 꽃밖에 볼 수가 없었고 책 속에 끼워 말린 압화에서는 향기가 나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아프고 나면 사람은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릴 수 있는 꿈은 오래 전에 시들어 말랐다.

“그래, 꿈이야.”

상냥한 선생님의 가운 위에서 약품 냄새가 알싸하게 풍겨와 코를 찔렀다. 몽롱하게 취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다행이다.”

나는 선생님의 몸 위로 미끄러졌다. 단단한 두 팔이 맥없는 내 등허리를 받아드는 것을 느꼈고, 멀리서 사각사각 무언가 기록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것으로 그날 꿈은 끝이었다.

 

깨어났을 때는 이른 새벽이었다. 책은 없었다. 커튼 사이로 보일 듯 말듯 가는 빛줄기가 새어 들어와 시트 위로 드리워지고 그 위로 눈물 몇 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새하얀 방 창가로 걸어가서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손을 뻗어 투명한 유리창에 온통 하얗게 입김이 서릴 때까지 한참이나 어루만졌다.

공통된 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합작 – 그라레그

당신이 사라진 지 정확히 스무날째 되는 밤이다.

파자마가 자꾸 손끝에서 미끄러진다. 미끄러지듯이 침대에 몸을 뉘이자 자동으로 불이 꺼진다. 눈을 감자 목이 죄인다. 숨이 막힌다. 비명을 지르려 하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머리맡의 장 위로 손을 뻗는다. 한 움큼 약을 쥐어 나오지 않는 비명을 지르는 입에 털어넣는다. 독한 약이 금세 녹아나 목구멍부터 위장까지 화끈거린다. 시야가 아득히 멀어지고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귀를 찌르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눈을 떴을 때, 뺨 위에 눅눅한 짠내가 말라붙어 있었다.

이제 증세가 개선되었다고 생각해 눕기 전 미리 약을 먹어두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주치의와 센서 레코드 전문가를 급히 다시 초빙해서 이야기를 나눠보았지만 결국 이러한 증세에 대해서 뚜렷하게 알아낸 것은 없다. 그저 그의 ‘죽음’이 재생되는 순간 지각 정보가 사라지면서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흩어졌고, 그렇게 발생한 ‘오염’의 잔해가 남았다고만 추론하고 있을 뿐. 확실한 치료 방안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해결된 채이다.

그라이바흐의 죽음의 원인 역시 미해결이다. 매일 치안관리국을 방문하여 담당 수사관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있지만 항상 결정적인 증거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에 흔적이 끊겨 버린다. 당국의 수사력을 의심해본 적은 일찍이 없었는데도 스무 날 동안이나 뚜렷한 진척이 없다.

사실은, 그간의 스무 날이 무엇을 하면서 지나갔는지 또렷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 흐릿한 감상 삭혀지지 않는 감정 꽉 막힌 울분과 발작적으로 방망이질하는 맥박. 그럼에도 하루하루 살아나간 오늘이 스물 한번째 날. 홍보국에서 이제 인터뷰를 하는 것은 어떻냐고 제의하지만 역시 아직까지는 거절하고 있는 중이다. ‘오염’의 후유증이 더욱 안정될 때까지 기자 초청은 최대한 연기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는 아직 정리할 것들이 남아 있기도 하다.

슬슬 공석인 그라이바흐의 후임에 대해 결정을 내릴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오토마타의 연구에 있어서 그라이바흐에 비견될만한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기에 홍보국과의 회의가 끝난 후 형질 연구소를 방문해 보았다. 나와 메르키오르 그리고 그라이바흐의 유전자 정보가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는 곳이었다. 연구소에는 우리 유전자의 외형정보까지 세밀하게 저장되어 있었고 나는 입체영상을 통해 그라이바흐의 유전자를 다시 발현시켰을 때의 성장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나는 그 영상을 바라보다가 치워주길 부탁했다. 영상은 웃고 있는데도 왼쪽 뺨에 보조개가 더욱 깊게 파이지 않았고 나를 바라보는 눈이 반쯤 접히지도 않았다. 그 모습이, 새로 만드는 개체는 그라이바흐가 아니며 연구의 공석을 당장 메울 수 있을 만큼의 지식을 가지지도 않으리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했다.

연구소를 나서는 길에 눈발이 날렸다. 가을 날짜에 걸맞지 않은 싸리눈이 나뭇가지 위로 걸려 한 겹씩 쌓였다. 그러고보니 그간 기상조절장치에 대해서 지시하는 것을 한참이나 잊고 있었다. 사실 예전에는, 고의로 눈이 내리도록 기상조절장치를 조절하기도 했었지만.

겨울의 한 달에 다섯 번쯤이었다. 사실 눈이란 것은 썩 효율적인 기후는 아니다. 그러나 아름다웠다. 눈발이 희게 희게 흩날리고 세상 어느 것도 흐릿한 가운데 바로 옆에 있는 그라이바흐만이 뚜렷이 보였다. 그 아름다운 날에 당신과 나는 손을 맞잡고 눈 속에서 춤을 추었다. 세상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보이는 것은 그 뿐이었던, 어깨에 진 모든 것을 잊고 다만 당신의 여자로 있을 수 있었던 찰나. 한참을 단둘만이 눈 속에 묻혀 있다가 눈발을 손 안에 낚아채면 곧 녹아버렸고 이 순간도 잠시뿐임을 깨달은 나는 씁쓸히 웃으며 돌아가 장치를 돌려놓았다. 그럴 때면 그는 말했다. 나보다 안정적으로 인민을 통치하는 오토마타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나는 그 진심이 금방 녹아버리는 거짓이라도 좋았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상 가운데, 잠시간의 오류였는지 눈이 그쳤다.

세계의 외각선이 머리 아플 정도로 또렷한 색채가 되어 아프게 눈을 찔렀다. 어지러워 욕지기가 났다. 몸이 떨렸다. 구역질을 하다 손을 옆으로 뻗어 허공을 낚았다. 이 손을 잡아줄 사람이 없다. 이 메스꺼움이 오염 같은 것일 리 없다. 당신이 없는 세상부터가 이 몸에 오염이었다. 당신이 사라진 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라이바흐, 당신이 사라진 세상을 어떻게 살지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았어.

남은 삶이 너무나 길어.

 

너무나 길었던 삶, 당신이 사라진 지 204948일째 되는 밤이다. 지상은 당신의 의지대로 다시 오토마타와 인간이 더불어 살아갈 것이고, 당신이 원했던 대로 이 세계를 통치하는 여자 역시 오토마타다. 오랜만에 눈발을 낚았다. 쇠로 이룬 손 위에서 눈은 녹지 않는다. 웃음이 났다.

그라이바흐. 당신이 아직도 녹지 않았어.

[콥블린] 생화

그는 검은 옷을 입었다.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빳빳이도 다린 양복, 바지 주머니에 슬쩍 찔러넣은 왼손, 오른 손목과 팔꿈치에만 눈에 띄게 남은 구김 자국. 포마드로 한 올 삐짐 없이 넘긴 금발, 뒤로 넘어갈 정도로 당당하게 젖힌 상체와 딱 벌어진 어깨. 그 모두가 왕의 상징이다.

밤거리는 검다. 그는 밤거리의 왕이다. 특히나 오늘은 폭군이다. 호박색 눈을 범처럼 가늘게 뜨고 주위를 살피다 거슬리는 것이 눈에 띄는 대로 발길질을 하고 포효를 지른다. 그는 그래도 여자는 차지 않았다. 구두가 한 발짝 앞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고 대신 손이 벗다시피 한 여자들의 가슴을 몇 번 주무른다. 여자들은 자지러지게 비명을 지른다. 낄낄거리며 웃기도 하고 놀라서 몸을 뒤로 빼기도 한다. 몸을 빼면 왕이 주사를 부린다. 아가씨 몇 명은 그만 깜짝 놀라 울어버렸다. 질질 짜는 소리마저 왕의 심기를 거스를지 모르니, 옆에서 빨리 자리를 빠져나가라고 눈치를 준다. 남은 아가씨들은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입가가 굳었다. 속으로는 아까 울음을 터뜨리고 빠져나간 아가씨들을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가씨들은 자기들이 일회용 꽃으로 서 있는 걸 알고 최선을 다해 웃는다. 그러라고 있는 아가씨들이었다.

콥은 속이 시원했다. 그래, 그게 다들 살아가는 법이지. 콥은 최선을 다해 가슴을 피고 쉬지 않고 포효했다. 그러라고 있는 왕의 자리였다. 엿 같은 밤거리. 엿 같은 인생. 언제 머리에 총구멍이 날지 모르는 일회용 인생. 어쨌거나, 오늘 밤거리에서만큼은 그가 왕이다. 뻣뻣한 플라스틱 조화가 되어 피어 있는 아가씨들을 차례로 주무르다 보니 조화가 아닌 게 하나 있었다.

“이건 뭐야?”

왕의 시선은 정확히 소녀의 흉부에 꽂혀 있다. 어린 나이에 인생 망친 계집들이야 한둘이려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린 거야 그 알 바 아니다. 뒷골목 계집 같지 않게 하얗고 말랑말랑해 보이는 것도 그가 신경 쓸 바는 아니다. 젖가슴이 없다시피 한 것도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사실, 별 변태 같은 새끼들 취향 다 있나보네 하고 비웃고 넘어가면 되는 일이다. 진짜 문제는 계집애 그 자체였다. 웃고 있지도 않고 뻣뻣하게 서 있지도 않고 바닥에 시든 풀 같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무릎을 감싸 안은 계집애. 왕을 봐도 놀라는 척도 않고 멀거니 눈동자만 들다 만 계집애. 콥은 발길질을 했다. 시들어가는 풀이 고대로 엎질러졌다. 주변 아가씨들만 움찔하고 말았다. 이건 순 죽어가는 풀이었다. 옆으로 미끄러진 채로 계집아이는 밀랍 같은 목을 살짝 틀었다. 입을 열었다.

“당신, 괜찮아?”

어안이 벙벙해 잠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누가 누구보고 괜찮냐고 묻는 거야.

“이거 미친 년 아니야.”

재차 구둣발을 높이 드는 순간 소녀가 상체를 일으켰다. 머리에 대강 감겨 있던 붕대가 주륵 흘러내렸다. 구슬처럼 파란 오른쪽 눈을 마주쳤다. 그 눈이 곧 반달로 휘었다. 소녀가 웃자 까닭 모를 현기증이 일었다.

“당신 오늘 친구를 잃었잖아. 외롭지 않아?”

파란 안광이 유난히 번쩍인다 싶더니 순간 검은 밤거리가 하얗게 바랬다. 영사기로 띄운 영상처럼 과거가 돌아갔다. 그래, 오늘 콥은 자신을 믿는 친구를 불러냈다. 바람 부는 밤에 친구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었다. 빵 하는 총성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콥은 비틀거리며 이마를 쥐었다.

“이 년, 뭐야! 대체 뭐하는 년이야!”

“걱정 마, 당신을 놀리는 거 아니야.”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까지 뜨끈하고 말랑한 것이 닿았다. 소녀의 팔은 너무 작고 가녀려서 콥을 다 안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소녀는 되는 한껏 콥을 끌어안았다. 피 냄새 밴 양복 위로 작은 얼굴을 완전히 묻었다.

“나도 믿었던 사람들을 잃었거든.”

완전히 우습게 보이지 않으려면 당장 소녀를 다시 걷어차 떼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 꽉, 있는 힘을 다하여, 일말의 악의도 없이 닿는 것이 너무나 오랜만이고, 밤거리가 더 이상 까맣고 엿같지만은 않고 하얗고 덥게도 느껴져서. 자신에게 꼭 매달려서 들썩이는 어깨를 어쩌지도 저쩌지도 못하고, 그 밤이 지나고, 며칠이 지나고, 소녀가 그 듣던 ‘마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소녀를 주워간 지 두 보름도 더 지나서였다.

금방 죽어버릴 것 같던 풀은 물만 좀 축여줬다고 금세 생생하게 살아났다. 키우는 보람이 있었다. 밀랍 같던 얼굴에는 혈색이 돌고 부스스하던 머리에서는 윤이 났다. 물론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원래 너 만한 애들은 그만한 거냐, 아니면 니가 작은 거냐? 와, 이건 진짜 심하네. 어떤 미친놈이 저걸 데려가려나.”

마녀가 키득거렸다. 역시 미친년이다 싶어 질린 눈으로 보고 있으니 이블린은 콥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미친놈.”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떨어졌다. 저거, 진짜 미친 년 아니야. 그래도 웃고 있는 마녀의 얼굴을 보는 것이 그렇게 엿같지만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