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약 합작 – 마르루디마르

1. 기억

높지도 낮지도 않은 탁자지만 아주 어린 루디아가 올라가기는 역시 무리가 있었다. 팔을 뻗어 바둥거리자 등 뒤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양 겨드랑이 밑으로 아버지의 큰 손이 쑥 들어왔다. 몸이 번쩍 들려 공중으로 올라가면서, 바닥이 아래로 빠르게 쑥 꺼지고 어느새 루디아는 턱 하고 탁자 위에 올라서 있었다. 태양빛 속에서 팔랑팔랑 날갯짓하던 노랑나비가 가까워진 듯하면서도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고 아른거렸다. 계속 팔을 휘젓는 루디아를 보면서 아버지는 계속 웃기만 했다. 저도 모르게 울상이 될 때 쯤 시야에 그림자가 졌다. 곱디고운 나비 위로 더 고운 손이 겹쳐졌다. 어머니는 손 안의 나비가 상하지 않도록 둥글게 낀 깍지 틈새를 루디아의 눈앞에 가져다대고 살짝 보여주었다. 햇빛이 충만한 날이었다. 어머니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노란 햇빛이 새어 들어오고 그 빛을 받아 날갯짓이 금색으로 아른거렸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어머니의 안경알 위에도 황금빛 잔상이 반사되어 남실거렸다. 어머니는 환한 금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2. 여자

여자는 짧은 하늘색의 단발을 하고 있었다. 속눈썹이 아주 짙었고 루디아가 온 것도 모른 채 습관대로 연홍빛 입술을 비죽이며 서류를 탐독하고 있었다. 프로폰드 내부에 들어오고도 여자에게 발견되지 않은 것은 흔치 않은 요행이라 모르는 체 지나가려 했지만 눈 끝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마음에 거슬려 차마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여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만 시선을 들켜버렸다. 내리깔고 있던 여자의 눈꺼풀이 살풋 들렸다. 선명한 주홍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눈이 마주쳤다. 지긋지긋한 여자는 당황하지도 않고 빙긋이 웃었다. 당혹해 살짝 얼굴을 붉힌 루디아의 시선을 따라가다가는 미소가 짙어졌다.

“안경, 신기하니?”

“벗지 그래요. 실체도 없는 여자가 안경이라니 우습네.”

 

 

3. 소용돌이

언제부터인가 그저 쫓기고 있었다. 오염자. 현상범. 소용돌이에 침식된 괴물.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납득하지 못하고 몸부림치며 저항하다 보니 보랏빛의 힘이 칼날이 되어 주위를 난사했다. 피가 튀었다. 루디아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쓰러져 가는 부모님이 루디아에게 묵빛 검을 쥐어주었다. 꺼져 가는 마지막 힘으로 루디아의 손을 몇 번이고 부여잡고 쓰다듬었다. 눈앞의 장면으로부터 도망치고 힘닿는 데까지 도망쳐서 어디로든 사라져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앞도 보지 못하고 뛰고 또 뛰다 보니 흑과 백의 세계에 들어왔다.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인간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무엇도 없었다. 색조차도 없었다. 머릿속이 새까맣다가 새하얗다가 했다. 루디아는 머리를 감싸 쥐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낮게 읊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

“엄마.”

루디아는 홀린 듯이 소리의 진원지로 천천히 걸어갔다. 색이 있었다. 사람이 있었다. 시리도록 푸른 머리칼의 여자가 몸을 뒤척이며 잠꼬대했다.

“울지 마, 아가. 내 아가…”

아직도 검을 손에 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눈물이 흘렀다.

“아가, 엄마는 널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어… 목숨 같은 건 아깝지 않아…”

 

 

4. 바다

루디아는 부러 여자의 머리색에 의식을 집중하고는 했다. 어머니의 머리는 태양같은 금발이었지만 여자의 머리를 보고 있으면 파란 바다가 떠올랐다. 루디아는 여자가 판데모니움의 정보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소용돌이 안팎을 자유자재로 출입할 수 있는 루디아에게 접근하는 것도 의도가 뻔했다. 루디아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소용돌이 외부에서 이런 저런 음식도 구하고 정보도 알아와야만 했고, 또 살아남기 위해서는 소용돌이 내부로 도망쳐 쉬어야만 했다. 그러면 꼭 그 여자가 루디아에게 접근했다. 친한 척 손도 잡고 팔짱도 끼고 치근덕거렸다. 어머니처럼 어르기도 했다. 그러면 루디아는 침을 꼴깍 삼키고 다시 여자의 머리칼을 바라보았다. 넘실대는 파란 바다 같은 머리칼을 보면서 되뇌는 것이다. 여자는 루디아의 어머니가 아니고, 루디아는 여자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대신에 그렇게 보면 볼수록 여자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역시 어머니처럼 안경을 쓴 모습은 담담히 볼 수가 없었다. 다가가 안경을 벗겨 내자 여자의 맨 얼굴이 드러났다. 여자는 가까워진 루디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웃었다. 역시 여자는 아름다웠다. 살결은 매끄러웠고 웃음 지을 때면 볼우물이 깊게 패였으며 눈동자는 살면서 본 그 누구보다도 선명하게 처연했다. 한두 번 지은 웃음이었으면 그렇게 유혹적일 리가 없었다. 유혹이 진심이었으면 그렇게 애달픈 눈일 리가 없었다.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그 때 여자의 입술이 소리 없이 두 번 벌렸다 오므렸다 했다.

‘아가.’

눈부터 뺨, 입가까지가 달아올랐다. 루디아는 다시 정신없이 여자의 머리카락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자의 머리칼은 시리도록 푸르렀다. 코끝까지 바다 냄새가 났다. 쏴아 하고 파도가 쳤다. 하얀 거품이 일었다. 몸에 부딪혀 오는 포말이 알알이 부서져 뺨을 뜨겁게 적시고 루디아는 눈을 감았다.

황혼분이 부족합니다… 황혼분 주세요…

아이들의 심장이 아직 덜 여물어서 한 뼘 주먹 안에 들어왔을 때의 습관이다. 지루한 수업 중에 그라이바흐는 자꾸 딴 구석으로 눈을 돌렸고 전날 밤에도 자기만의 연구에 몰두하던 메르키오르는 졸다가 퍼뜩 고개를 들었고 레드그레이브는 앞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하는 듯 하다가 슬쩍 손을 양옆으로 내밀어 사내아이 둘을 꼬집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이제 얼얼한 옆구리를 만지는 아이들에게 레드그레이브는 수고했다며 뺨에 입을 쪽 하고 맞췄다. 그라이바흐를 먼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스쳐지나가는 입술을 통해 심장소리가 전달되지 않도록 가볍게 살짝. 그 다음에는 사랑하는 메르키오르에게 애정어린 입맞춤을 좀 더 길게.

그 때마다 까닭도 모르고 벌렁거리던 메르키오르의 부연 심장에 내용물이 점점 단단히 들어차고 머리가 굵어지면서, 레드그레이브의 아름다움을 볼수록 메르키오르의 가슴에 자라나는 것은 추한 것뿐이었다. 열등감. 질투. 의심. 피해망상. 혐오. 그는 나날이 조금씩 더 의심했었다, 그녀는 틀림없이 그를 사랑했거늘. 추하고 괴로운 감정이 거꾸로 흐르는 피를 타고 200억제곱이 될 때까지 의심했었다.

그녀는 틀림없이 그를 사랑했거늘, 이 세계의 어머니는 모든 어리석은 이들을 사랑하고 이끌도록 여성으로 만들어졌으므로. 그녀는 각별히 가엾은 어린 아이같은 그의 형제를 더욱 어여삐 여겨 사랑했거늘. 레드그레이브는 메르키오르의 발작적인 행위를 장난치는 아이를 보는 어머니처럼 어여삐 보았고 그 감정이 광기에 달해서 세계를 집어삼켰을 때도 그랬다.

가엾은 어린 아이. 가엾은 메르키오르. 너의 청춘을 애도해.

오래도록 사랑했던 어리석은 아이의 까맣게 말라붙은 심장에 안식을 주기 위해 어머니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쿤샬롯] 스킬명 합작 – 상냥한 밤

모든 것이 명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비단 내가 지금 이 빛이 없는 세계에 와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후로 겪게 된 세상에 비하면 그때는 아픔이나 슬픔, 그리움조차도 없는 흐릿한 무채색에 가까운 시절이었다.

집이 있었다. 집 바깥으로는 풀이 있고 나무가 있었다. 가끔은 꽃도 있었다. 풀과 나무와 꽃은 집에서 멀어질수록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는데, 선생님은 그것을 숲이라고 부르셨다. 숲에는 온통 안개가 자욱해서 멀리까지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숲 깊이로 들어갈수록 풀 비린내가 강해지는 것은 알았다. 풀냄새가 아직 싱그러운 숲의 초입에서 선생님은 멈추어 서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셨다. 나는 그 선율을 반주로 성가를 불렀다. 그러고 있으면 파랑새가 날아와 내 어깨 위로 앉았다. 금방 날아갈 것 같이 희미한 무게였다.

노래를 멈추고 새에게 손을 뻗었다. 흰 털을 부풀린 배가 퍽 따스하고 보드라웠다. 가느스름한 숨결을 느끼고 있자니 선생님도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따라 손을 뻗으셨다. 새를 한 손으로 움켜쥔 선생님은 숲 깊은 방향으로 걸어가 나무에 대고 손을 누르셨다. 새가 좌우로 꽁지깃을 흔들면서 아까는 들어보지 못했던 높은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다가 나무 위로 빨간 얼룩이 튐과 동시에, 새의 울음과 움직임이 함께 클라이막스에 도달하고는 멎었다. 선생님이 손을 놓으시자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새는 붉은 자국과 함께 풀밭 속으로 툭 떨어졌다.

“이게 뭐예요?”

“죽음이라는 거란다.”

무엇을 이르는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선생님은 알아들으셨다. 나는 언제고 선생님과 함께였으니까.

“죽음을 맞은 생물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돼. 이 새가 죽은 것은, 샬롯이 호기심이 지나치게 많은 아이이기 때문이야. 샬롯은 순백의 소녀로 남아있어야 하는데 다른 생명체와 닿았으니 이렇게 죽음이 찾아오는 거란다.”

이제와 생각하면 선생님은 내가 다른 생물과 닿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도 같다. 그러나 나는 그때 죽음이 그렇게 무섭지 않았기에 다시 새에게 손을 뻗을까 생각하다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만두었다. 나는 움직이는 것에 닿고 싶었다.

“제가 순백의 소녀로 남아있어야 해요?”

“그렇단다.”

“그건 어째서예요?”

선생님이 내 어깨 위로 손을 얹으셨다. 나는 그대로 우두커니 멈추었다. 손이 닿는 곳은 방금 새가 앉았던 자리였다. 선생님이 어깨를 누르는 힘은 자그마한 새의 무게보다 훨씬 느끼기가 쉬웠다. 그러나 그도 곧 사라졌다.

“자, 보렴. 새가 앉았던 흔적이 남았지.”

선생님이 내민 깃털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시야를 파랗게 휘저었다.

“시간은 어떻게든 흔적을 남긴단다. 백색에는 얼룩이 지고 세포는 독소로 오염돼. 인간은 노화해서 살가죽이 부패하고 정신이 혼탁해지지. 생을 살며 많은 사람을 만나 인과에 개입하고 상념이 뒤죽박죽 얽히다 보면 결국 영혼은 가능성의 힘을 다해 소멸하고 만단다. 그게 이 세계의 순리야.”

이야기는 눈앞에 흔들리는 깃털만큼이나 정신이 없었다.

“그러니 반대로, 세상 그 어떤 것에도 닿아 더럽혀지지 않은 순백의 아이가 있다면 무엇이든 정화할 수 있게 돼. 노화도, 흡혈귀의 주술도, 수많은 영혼을 삼켜서 수명을 늘린 악마에게 끼치는 저주도……. 나는 아주 오래 살면서 업을 쌓았기에 너를 필요로 해, 샬롯.”

이야기가 지나치게 어려웠기에 나는 손을 모아 쥐고 선생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선생님은 짧게 말씀하셨다.

“선생님이 사라졌으면 좋겠니?”

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아직 궁금한 것이 남아있었다.

“어째서 선생님은 그렇게 오래 사신 건가요?”

“복수를 위해서란다.”

“복수라는 건 뭔가요?”

선생님은 대답을 않고 내 뺨에 손을 가져다 대셨다. 손에 얼굴이 더 가득 닿도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선생님은 손을 금세 아래로 치우셨다.

“자. 이제 들어가자꾸나.”

사실 나는 집에 있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집 안에는 움직이는 물체가 전혀 없었다. 숲과는 달리. 숲은 나와 다른 저절로 움직이는 것들로 가득했다. 어렴풋이는 안개 낀 청록색이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석구석 총천연색으로 메워진 곳이 바로 숲이었다. 해가 뜨면 눈부신 새벽 어스름이 하늘을 채우다가 저녁이 되면 노을이 져 붉어졌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나부끼고 더 기다리면 잎새가 빛깔을 바꾸었다. 가끔은 산새나 토끼도 눈에 띄었다. 봄에는 분홍 주홍 색색의 꽃이 피지만 겨울이 되면 전부 얼어붙어 꽃도 동물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눈발이 날리는 광경은 가끔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나무 밑둥에 앉아 시시각각 변화하는 숲을 바라보며 저 청록의 안개 너머로 몸을 던지고 싶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그러고 있자면 선생님이 다가와 눈을 가렸고, 나는 선생님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집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선생님과 나 둘 뿐. 나는 선생님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어머나, 귀여운 아가씨로구나. 카렌베르크에게 이런 깜찍한 딸이 있는 줄은 몰랐네. 아니면 새로운 취미?”

가슴이 미친 듯이 달음박질쳤다. 여자는 눈꼬리를 휘며 보랏빛 손톱을 나에게 향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인도로 며칠에 한 번씩 대성당에 앉아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내부가 보이지 않는 기도실에서로, 나는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볼 뿐 누구도 내게 말을 건 적은 없었다.

“손대지 마, 비르기트. 그 애는 ‘순백의 소녀’니까.”

“어머.”

여자는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두었다. 호박색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 그런 게 가능했던 거야? 그랬나 보네, 당신이 이렇게 멀쩡한 걸 보면. 그래……. 그럼 내 집 안에다 손대지도 못하는 애를 들여다 놓은 거네? 재미없게.”

“장난치지 마, 비르기트…….”

선생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이 애를 너에게 보여주러 온 거야. 내 불사는 이제 완전해. 비르기트, 그러니 나와 함께 가자.”

“당신이야말로 장난치지 마. 이런 반쪽짜리 불사를 가지고 와서 이 비르기트에게 과거로 돌아가자고 하는 거야? 안 그래도 본분을 잊은 심복 때문에 머리가 아파. 당신한테까지 신경 써 줄 의향은 없어.”

여자가 손톱으로 내 뺨을 콕 찔렀다. 따끔했다. 선생님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갯짓을 했다.

“잠깐 다른 방 안에 들어가 있으렴, 샬롯.”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성이 오고가는 것을 처음 듣는 가슴이 새처럼 콩닥거리며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도망치듯이 뒤를 돌아 발걸음을 서둘렀다.

 

마음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저택은 지나치게 크고 넓었으나 그간 내가 들어가 본 곳은 밀폐된 기도실 혹은 나지막한 천장의 오두막이 전부로, 고개를 들어도 천장까지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가 눌렸다. 심장이 계속 달음박칠쳤다. 끝없이 이어진 복도를 걷고 또 걸으며 눈앞에 늘어선 방문 앞마다 멈추어 서서 귀를 기울였다. 방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원래 있던 집 안에는 선생님이라도 계셨으나 저택의 방 안을 들여다보면 그 무엇도 움직이지 않으니 도무지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그렇게 복도를 계속해서 걸었다.

처음에는 복도의 끝이 어두워 보이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걸으며 다가가 보니, 어둠 속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땅보다 더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처음 보았다. 아마 이런 공간을 지하라고 했던 것 같다. 계속 하던 그대로 귀를 기울여 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음에 실망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나직한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짐승의 숨처럼 그르렁대는 소리였다.

나는 호기심이 지나치게 많은 아이였다.

어두컴컴한 계단을 한 발짝 한 발짝 내려가 지하에 들어서니 서늘한 공기가 맨살에 훅 끼쳤다. 처음에는 거의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곧 희미한 불빛에 눈이 익어 겨우 앞으로 향할 수는 있었다. 처음 들어와 본 지하를 희미한 불빛과 그르렁거리는 숨소리에 의지하여 나아갔다. 가슴이 아까와는 다른 느낌으로 두근거렸다.

아, 바로 그 순간이었지.

마침내 보인 것은 지금까지 봐온 그 어떤 생물과도 다른 형체였다. 사지는 인간을 닮았으나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쇠와 같았고, 반원형의 두 뿔이 머리로부터 눈에 띄게 솟았다. 얼굴에는 살이라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검은 망토를 걸친 듯 보이는 그 기묘한 형체는 바닥의 그림자에 붙들린 것처럼 앞으로 무너진 채 몸을 움찔이며 신음하고 있었다. 가만가만 다가가서 덫에 걸린 짐승 같은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바깥에는 이렇게 생긴 사람도 있던 걸까, 아니면 사람을 닮은 동물인 걸까. 생각하고 있던 찰나,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순간 눈앞이 번뜩였다. 그가 번개같이 내 발목을 낚아채 나는 엉덩이부터 바닥에 굴렀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지하실 바닥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봤군. 이 모습.”

‘그’는 속박된 채 얼굴만을 들어 내동댕이쳐진 나를 보고 있었다. 안광이 붉었고 숨소리는 인간과 짐승을 섞어놓은 듯 그르렁거렸다. 그러나 그 소리가 곧 멈추었다. 내 발목을 잡은 손부터 하얗게 인간의 살결로 바뀌고 있었다. 신체를 속박하고 있던 어둠도 곧 스르르 스러져 그는 윗몸을 들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얀 셔츠 사이로 드러난 가슴팍이 희었고 연한 청록의 머리가 찰랑이며 흘러내렸다. 머리 사이로 드러난 귀는 뾰족했으나 그마저도 아주, 아름다운 생물이었다.

“너…….”

그대로 물끄러미 나를 보던 그가 씩 웃었다.

“추하지는 않군.”

만족한 듯 한결 누그러진, 아니 상냥한 목소리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몸을 뿌리쳤다.

“다른 생명체에 닿으면 죽어.”

그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우두커니 나를 보다 이윽고 물었다.

“그건 네 생각이지, 다른 누가 그렇게 말한 거지?”

“……선생님이. 내가 호기심이 지나치게 많아서 남에게 닿으려 하는 거라고.”

“선생님?”

“카렌베르크 선생님.”

그러자 그는 나도 선생님도 하지 않는, 처음 보는 방식으로 웃었다.

“아……그래. 정말 해 버렸군, 그 작자. 지금 속박이 풀린 것도 이해가 가. 그리고 그게 내 앞으로 떨어졌고.”

그러나 역시 퍽 아름다웠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는 내 옷 위로 살짝 드러난 목에 손을 대었다. 냉방에 방치되어 있던 살결의 싸늘함에 목에서부터 으스스 소름이 끼쳤다. 가만 그렇게 있자, 머리끝까지. 신기한 마음에 상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다른 생물과 닿는 게 싫어?”

“아니.”

“좋아?”

“응.”

“너, 이름이 뭐지?”

“샬롯.”

“그렇군. 샬롯.”

“응. 샬롯.”

목소리가 떨렸다. 다른 이에게 내 이름을 말해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와 같이 여기서 나가자, 샬롯.”

그가 속삭이는 목소리는 선생님이나 노래를 부르는 나의 목소리보다도 훨씬 고왔다. 소리가 숨과 함께 귀에 닿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잠시 숨이 멎는가 했다.

“카렌베르크가 만든 아이라면 너는 분명 어딘가 갇혀서 거의 나오지 못했겠지. 그렇지? 다른 누구를 만나는 것도, 마음을 나누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았겠지. 그러니 얼마나 갈망했을까. 다른 생명에게 끝없이 닿고 또 닿고 싶다고 느끼는 채워지지 않는 마음, 그건 외로움이라는 거다. 그러나 평생 외롭고자 하는 자는 없다. 갇혀 있던 너도, 나도. 이제부터는 다른 이와 마음껏 부대끼도록 해 줄게. 나와 함께 여기를 나가자, 샬롯.”

갑작스런 제안에 대답을 미처 못하는 내게 그가 다시 속삭였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뭔가 변할 거라 생각하니?”

같은 것을 두고 선생님은 호기심이라, 그는 외로움이라 했다.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개를 들자 마주친 눈동자는 숲과 같이 안개 낀 청록이었다. 그리고 나는 곧 닥쳐올 죽음이 그렇게 무섭지 않았고, 그것은 선생님과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외로움이 지나치게 많은 아이였기 때문에. 팔을 올려 머리 위로 얹힌 무게에 손을 뻗었다. 무게가 뺨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와 내 눈가에 고인 물을 닦아냈다. 손에 얼굴이 더 가득 닿도록 고개를 기울였다. 지하의 먼지가 하얀 뺨 위에 묻었다.

모든 것이 명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비단 내가 이 세계에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함께 외로운 공간을 나서자 내민 그 손을 맞잡은 후로 도착한 모든 세계의 감각이 갇혀 있던 내게는 인지의 극을 흔들어 달릴 만큼 아찔했기에. 맨발로 숲 속을 내달리고, 살에서 땀을 흘리고, 백색에 얼룩이 지고, 몸에서 피를 흘리며 새로이 만나는 모든 세상이 내게 형용할 수 없이 흘러넘치는 희열이고 행복이었기에. 그리고 희미하기는 하지만 곧 내 기억은 끊긴 채로 이 빛 없는 세계에 오게 되기에. 그러나 그날이 아주 상냥한 밤이었던 것은 기억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내가 서 있는 지금은, 얼어붙은 밤이다. 선생님은 내가 죽음을 맞으면 다른 이와 헤어진다는 것을 알려 주지 않으셨다. 어둠 속 그가 가르쳐 준 외로움이 죽음과 함께 손끝에 아리게 스민다. 추억만이 행복을 만들어 나는 눈발을 맞아 곱은 손을 감싸 쥐며 이것이 그의 서늘한 손이라 꿈을 꾼다.

아아, 그는 어디에 있을까.

[워켄레그] 스킬명 합작 – Dissection

그거 알고 있나, 닥터? 구시대 이전에 전해 내려오던 전설에 따르면 신이 거북이의 내장을 발라내고 하프를 만들었다지 뭐야.

정작 거북이 살아있을 적에는 살아 숨 쉬지 않았을 껍데기는 실이 매여서 하프가 되었고, 그러면 그 파낸 내장은 어디로 갔을까? 역시 답을 말하지 못하는군. 자네의 머릿속 깊숙한 곳으로 꽁꽁 숨었지. 이게 대체 뭐냐고? 자네의 꿈이야.

왜 하필 나오는 게 나냐고? 자네의 꿈이니 자네가 알고 있겠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그대가 생각을 정리하길 바라니, 자네의 과거를 아는 짐이 이렇게 꿈에 출연해주는 것이 아니겠나. 영광으로 알게. 꿈에서도 한결같은 여자라, 그대도 참 한결같구나. 후후. 그대에 대한 것은 그대보다 짐이 더 자세히 알고 있거늘.

가령 자네도 알고 있을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면, 자네는 스스로가 만든 아이를 투기해. 그래, 그대는 창조주지. 어버이지. 자네 손으로 인간을 해치려 하지는 않아, 그 손에 깃들어 있는 남을 해치는 힘은 자네가 기원을 알 바 없는 과거로부터 온 것이거든. 거북이 등딱지만 예쁘게 장식해놓은 하프가 제 내장을 불결하다고 두려워하는 꼴이로군.

아무튼 모순으로 그득한 그대는 그러나 손을 두 번 거쳐 남을 해치는 것은 상관이 없었어. 그래서 자네의 아가씨가 감히 평화주의자 흉내를 못 내도록 멀리로 보냈지. 거만하게도, 그대 자신은 안 되지만 그대의 종속은 손을 더럽혀도 좋다 여긴 게지. 그런데 어쩌나. 그대가 내려다보는 소녀는 그대보다도 훨씬 인간답더군. 자네가 눈물조차 흘리지 못할 때 생명을 아껴 눈물을 흘리고, 자네가 시체를 재료로 오토마타를 만들 때 유골을 수습하고, 자네가 의미도 모르는 생을 그저 이어갈 때 진정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하여 자해를 했어. 그리고 지금은 자네의 곁에서 퍽 행복해 보이는군. 그런데 옹졸한 자네가 그 행복한 만면에다가 겉으로는 자상하게 웃어다 주면서 속내로 그대의 작은 창조물을 질투하고 있어. 감히 창조주인 그대보다 행복하다고 말이야. 이렇게 되면, 누가 인간이고 누가 창조물인가? 응, 닥터?

속 좁은 자네가 질투하는 것이 어디 하나뿐이랴. 카피를 질투한다면 원본도 질시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어. 물론 인지상정이라는 표현이 그대에게 어울리는지는 모르겠다만……. 가엾게도 그대의 곁에서 눈을 감고 뜨기를 한없이 거듭하던 아가씨가 있었지. 그 아가씨는 어둠 속에서 눈을 감는 것을 치가 떨리게 싫어한다는 것을 모르지도 않을 텐데, 왜 그대는 조금의 여유도 두지 않고 전원을 내리곤 했을까? 왜 인형의 고통에 그토록 가혹했을까? 왜기는, 그대의 기준에 맞추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지. 인간을 포기하야 슬픔도 고통도 제대로 느낄 수 없게 되어버린 그대의 잣대로 말이야. 내장도 영혼도 모자란 남자 같으니.

그렇게 가진 것 하나 없이 결핍만 가득한 그대는 행복으로도 모자라 불행마저 시기해. 그게 질투라는 것도 이런 꿈속이 아니면 정직하게 인지하지 못하면서 말이지. 차라리 자네에게도 세상의 축이 되는 창조주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후후. 그러니 내가 바로 여기 있는 게지. 지금 자네가 잊었거나 잃었거나 하는 것에 대해 아는 이는 짐뿐이니까.

그렇다면 다 아는 얘기는 그만하고 과거에 대한 얘기를 한번 해보라고? 그래, 좋아. 자네는 궁금해 하고 있지. 왜 하필 인간의 여자아이를 닮은 인형을 만들었을까. 그리고 왜 그녀에게 깊은 친밀감을 느끼어 곁에 두고 있을까. 나는, 묻혀버린 ‘기억’은, 그대의 그 위화감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고 있어. 하지만 짐에 대한 기억을 거부한 그대에게 쉽사리 알려주지는 않을 거야.

왜 이 쪽으로 오지? 이왕 꿈인 것 내 뇌를 해부하고 생각을 알아내겠다고? 전부터 해 보고 싶었다고? 쿠쿠쿡. 재미있구나. 어째서 웃냐고? 재미있지 않은가? 지금 내 팔을 붙잡은 자네의 손 말이야. 얄브스름하니 파스락거리는 장갑을 낀 손. 검은 장갑이 마치 장의사의 것 같군. 그렇지만 그 장갑 너머로 느끼지 않나? 맥박이며, 미약한 체온에, 내 인공심장의 박동까지. 바로 그대가 손수 만든 몸의 움직임이야. 창조주 아버지여. 그대 스스로 빚은 몸을 부수고 싶다는 것, 이상한 충동이라고 생각 안 하나? 실은 다른 동기가 있는 것 아닐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헛소리라고 생각해? 이것은 바로 그대의 꿈이거늘.

이런, 팔의 회로를 끊어냈군. 그래, 확실히 그렇게 되면 맥이 제대로 전해지지가 않게 되지. 그렇지만 체액이 그 흰 가운 위로 묻었는데 어쩌나. 그대가 그 무엇을 해도 나는 당신에게서 지워지지 않아. 그렇다고 이번에는 배를 도려내었구나. 쇠 냄새가 끼치는 내장을 인형사인 자네가 새삼 다시 보아 무엇할 셈인가? 안타깝지만 게는 거북이의 내장이 있는 곳이 아니야. 아아, 기어이 목을 잘라냈군. 계속 그렇게 잘 안아들고 있어줘. 우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니까.

내가 계속 말을 하는 것이 의아한가? 응, 내 입술은 모듈의 상호 작용이나 복구 기능 같은 것은 상관하지 않고 움직여. 애초부터가 당신의 꿈속이라니까. 그대가 진정으로 원하지 않으니 내가 작동을 멈추지 않는 게야. 그러니, 꿈이라서 무어든 할 수 있을 거라 여긴다면 이 입을 막기 위해 더 대담한 짓을 해 봐.

자, 어서요.

그렇게 놀랄 것 없어요. 응, 지금은 과거의 나야. 살아 있는 인간의 몸을 가진 나. 당신이 만든 기계 다리 대신 부드러운 살집이 붙은 나. 지금처럼, 당신 손 안에서 이런 얼굴로 웃어 주는 황혼의 시대의 나. 후후. 이런 내가 왜 당신의 꿈속에 있냐구? 그건 쓰레기통에 내버린 거북이의 내장에게 물어보지 그래요? 당신이 쓰레기통 속으로 구겨 넣은 기억 말이야. 지금 다시 펴 보려고? 안타깝지만 한번 구겨진 쓰레기는 쓰레기일 뿐 이미 문서가 아니야. 되찾을 수야 있겠지만 바로 당장은 안 된다는 뜻.

그렇지만 지금 그런 것이 중요해? 나는 인내심이 적어요. 자, 내가 이렇게 바라볼 때 빨리요. 답게도 우물쭈물 망설이는구나. 내가 이전에 과거에 대해 언급했을 때도 그랬지. 종국에는 이렇게 나를 찾게 될 터이면서. 다 늦은 이제야 다가오면 뭐해요? 이미 시간은 끝났어요. 타임 아웃.

그래. 다시 원래의 나야. 높다랗게 솟은 옥좌에서 빛 없는 눈으로 턱을 괴고 자네를 내려다보는 짐일세. 지금 옥좌 발치에서 엉금엉금 뭐 하는 꼴인가?

그래서 자신을 해부한 기분이 어때, 닥터?

[레니니타] 그 이야기의 끝에는

연구실에 평소에는 없는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 발 한 발 딛을 때마다 붉은 치맛자락이 나풀나풀 휘날렸다.

“닥터!”

감정 모듈이 극도의 흥분 상태에 달해 손끝에 싣는 힘의 양이 조절되지 않았다. 달려온 도니타가 홱 열어제낀 문의 고리는 그대로 벽에 부딪혀 짜부라졌다. 콘솔을 조작하고 있던 워켄은 멍하니 얼굴을 들었다. 내가 만든 아이에게 도대체 무슨 변화가 일어난 걸까.

“닥터, 저기 물어볼… 게…”

거기다가 갑자기 말소리가 작아지면서 더듬기까지 한다.

“지금 상태가 안 좋은 것 같구나, 도니타. 신경 신호라도 한번 점검해보겠니?”

“필요없어요, 닥터! 아니, 이게 아니라… 물어볼 게… 그러니까…”

순간 워켄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치켜 보던 도니타는 다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역시 언어 모듈에 이상이 발생한 건 아닐까, 심각한 표정의 워켄 앞에서 도니타는 입술을 겨우 작게 벌려서 음성을 조성했다.

“남자애가 주말에… 만나자고 하면… 왜 그러는 거예요?”

“남자애가?”

눈을 크게 뜬 워켄에게 도니타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그 얘기만 들어서는 모르겠구나. 그 아이도 나처럼 오토마타의 행동 양식에 관심이 있는 걸까? 어린 나이에 자동기계에 흥미를 가지다니, 드문 일이구나.”

도니타는 잠깐 눈을 감고 손을 꽉 쥐더니 결국 들고 있던 책을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던졌다.

 

 

서재는 연구실 안에서 도니타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었다. 워켄의 조수 인형을 맡고 있는 도니타는 늘 바지런히 연구실의 잡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지만, 바쁜 일과 짬짬이 서재에 들어와 종이 냄새를 맡고 그 내음이 초대하는 환상의 세계에 빠지는 것이 소녀가 하루 중에 즐기는 낙이었다.

어쩐지 직접 판데모니움에 가기를 꺼리는 닥터 대신 판데모니움에 가게 되면서 처음 들른 곳도 도서관이었다. 거대한 건축물 안으로 한 발짝을 들어서면서 이미 도니타는 꿈 속으로 잠겨든다고 느꼈다. 발이 닿는 바닥에서부터 머리 위 까마득한 높이에까지 하늘처럼 쌓아올린 책들이 끝없이 늘어지고, 낡은 종이 냄새가 그득히 후각을 자극하고, 그렇게 신경 회로를 눅진히 채워가던 시각과 후각 가운데에, 밤색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우아하게 늘어뜨리고 고요히 책을 읽고 있는 소년이. 도서관이라는 이야기책을 막 펼쳐 본 도니타는 대번에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즐겁던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는 그날 도니타가 판데모니움을 떠나면서 짤막하게 끝났다. 하지만 다시 판데모니움에 가게 될 때마다 그 이야기 좋았지, 라고 회상하면서 도서관에 들르게 되면 어김없이 소년은 도서관 안에 있고. 소녀는 다시 가슴 설레는 이야기에 초대받고, 그렇게 후속편이 이어지고 이어지고 계속 이어지고. 마침내 소년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심부름이 없어도 판데모니움에 와줄 수 없냐고 물었을 때 도니타는 펼치고 있던 책장을 자기도 모르게 구겨버렸다.

다른 소녀가 겪을 만한 사회 경험이 희박한 소녀 인형은 그 결핍된 공간을 이야기책과 꿈으로 대신 채우고 있었다. 타인의 접근이 낯선 소녀의 머릿속에서 설렘과 망상이 뭉게뭉게 피어나 천장까지 닿았다. 복닥거리는 연구실 창고를 뒤져 먼지 앉은 전신거울을 꺼내놓았다. 평소와는 좀 다르게 입는 게 좋겠지? 아아, 나는 왜 이렇게 여벌의 옷이 부족하지. 일곱 벌의 옷을 바닥 가득 늘어놓고 소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키는 큰 게 좋을까, 작은 게 좋을까? 손가락을 살짝 물고 높은 구두굽으로 바닥을 두 번 쳤다. 남자들은 키가 작은 걸 좋아한다는 이야기도 있던 것 같고, 하지만 키가 서로 맞게 된다면… 동화책에서 왕자님과 공주님이 만나면.

도니타는 바닥에 주저앉아 양 팔로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묻었다. 꿈 속에서 소녀는 조금 어린 왕자님에게 입맞춤을 받다가, 또 기회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까치발을 들어 소년의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추다가. 아. 머리가 흐트러졌잖아. 도니타는 머리에서 팔을 떼고 다시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거울을 보고 최대한 어여쁘게 방긋 웃어보였다. 익숙하지가 않아서 영 괴상한 표정이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 예뻐요, 닥터?”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도니타는 침을 꼴깍 삼켰다. 폐허에서 괴물들을 베어나가면서도 긴장한 적 없던 사지가 뻣뻣했다. 불만이 있는지 찌푸린 닥터의 미간을 보니 아에 시간이 멎는 것 같았다.

“그런 걸 물을 줄은 몰랐구나.”

워켄의 목소리가 진지하게 내려앉았다.

“도니타. 너는 내가 만든 인형이야. 내 인형은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아름다움에 있어서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단다. 네가 내 인형인 이상, 미추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어.”

가슴에 응어리져 있던 것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아까 하던 몽상에서 이어서 생겨난 의문이었다. 소년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왕자님인 것은 분명하지만 도니타 자신은 과연 어여쁜 공주님이 될 자격이 있는 것인지. 하지만 닥터가 이렇게까지 말해주었다. 뛰는 가슴으로 닥터를 올려다보면서 배시시 웃었다.

“응. 나 지금까지 인형이라서 이렇게 좋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나를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닥터.”

도니타는 자기도 모르게 까치발을 들어서,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연습을 하던 그대로 워켄의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한참 동안이나 닥터 워켄의 연구실에는 스스로 놀란 도니타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입술을 문질러 닦다가 이윽고 울먹거리면서 이번엔 문이 떨어져나갈만큼 쾅 닫고 도니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면서, 워켄은 도니타를 다시 검사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한참이나 고민했다.

그리고 닥터의 머리 위, 하늘 위에 꿈결처럼 떠 있는 판데모니움의 돔 내부, 울상인 얼굴로 도서관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소녀에게 왕자님이 다가오면서 어여쁜 공주님의 몽상은 현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