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에 평소에는 없는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 발 한 발 딛을 때마다 붉은 치맛자락이 나풀나풀 휘날렸다.
“닥터!”
감정 모듈이 극도의 흥분 상태에 달해 손끝에 싣는 힘의 양이 조절되지 않았다. 달려온 도니타가 홱 열어제낀 문의 고리는 그대로 벽에 부딪혀 짜부라졌다. 콘솔을 조작하고 있던 워켄은 멍하니 얼굴을 들었다. 내가 만든 아이에게 도대체 무슨 변화가 일어난 걸까.
“닥터, 저기 물어볼… 게…”
거기다가 갑자기 말소리가 작아지면서 더듬기까지 한다.
“지금 상태가 안 좋은 것 같구나, 도니타. 신경 신호라도 한번 점검해보겠니?”
“필요없어요, 닥터! 아니, 이게 아니라… 물어볼 게… 그러니까…”
순간 워켄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치켜 보던 도니타는 다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역시 언어 모듈에 이상이 발생한 건 아닐까, 심각한 표정의 워켄 앞에서 도니타는 입술을 겨우 작게 벌려서 음성을 조성했다.
“남자애가 주말에… 만나자고 하면… 왜 그러는 거예요?”
“남자애가?”
눈을 크게 뜬 워켄에게 도니타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그 얘기만 들어서는 모르겠구나. 그 아이도 나처럼 오토마타의 행동 양식에 관심이 있는 걸까? 어린 나이에 자동기계에 흥미를 가지다니, 드문 일이구나.”
도니타는 잠깐 눈을 감고 손을 꽉 쥐더니 결국 들고 있던 책을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던졌다.
서재는 연구실 안에서 도니타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었다. 워켄의 조수 인형을 맡고 있는 도니타는 늘 바지런히 연구실의 잡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지만, 바쁜 일과 짬짬이 서재에 들어와 종이 냄새를 맡고 그 내음이 초대하는 환상의 세계에 빠지는 것이 소녀가 하루 중에 즐기는 낙이었다.
어쩐지 직접 판데모니움에 가기를 꺼리는 닥터 대신 판데모니움에 가게 되면서 처음 들른 곳도 도서관이었다. 거대한 건축물 안으로 한 발짝을 들어서면서 이미 도니타는 꿈 속으로 잠겨든다고 느꼈다. 발이 닿는 바닥에서부터 머리 위 까마득한 높이에까지 하늘처럼 쌓아올린 책들이 끝없이 늘어지고, 낡은 종이 냄새가 그득히 후각을 자극하고, 그렇게 신경 회로를 눅진히 채워가던 시각과 후각 가운데에, 밤색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우아하게 늘어뜨리고 고요히 책을 읽고 있는 소년이. 도서관이라는 이야기책을 막 펼쳐 본 도니타는 대번에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즐겁던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는 그날 도니타가 판데모니움을 떠나면서 짤막하게 끝났다. 하지만 다시 판데모니움에 가게 될 때마다 그 이야기 좋았지, 라고 회상하면서 도서관에 들르게 되면 어김없이 소년은 도서관 안에 있고. 소녀는 다시 가슴 설레는 이야기에 초대받고, 그렇게 후속편이 이어지고 이어지고 계속 이어지고. 마침내 소년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심부름이 없어도 판데모니움에 와줄 수 없냐고 물었을 때 도니타는 펼치고 있던 책장을 자기도 모르게 구겨버렸다.
다른 소녀가 겪을 만한 사회 경험이 희박한 소녀 인형은 그 결핍된 공간을 이야기책과 꿈으로 대신 채우고 있었다. 타인의 접근이 낯선 소녀의 머릿속에서 설렘과 망상이 뭉게뭉게 피어나 천장까지 닿았다. 복닥거리는 연구실 창고를 뒤져 먼지 앉은 전신거울을 꺼내놓았다. 평소와는 좀 다르게 입는 게 좋겠지? 아아, 나는 왜 이렇게 여벌의 옷이 부족하지. 일곱 벌의 옷을 바닥 가득 늘어놓고 소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키는 큰 게 좋을까, 작은 게 좋을까? 손가락을 살짝 물고 높은 구두굽으로 바닥을 두 번 쳤다. 남자들은 키가 작은 걸 좋아한다는 이야기도 있던 것 같고, 하지만 키가 서로 맞게 된다면… 동화책에서 왕자님과 공주님이 만나면.
도니타는 바닥에 주저앉아 양 팔로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묻었다. 꿈 속에서 소녀는 조금 어린 왕자님에게 입맞춤을 받다가, 또 기회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까치발을 들어 소년의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추다가. 아. 머리가 흐트러졌잖아. 도니타는 머리에서 팔을 떼고 다시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거울을 보고 최대한 어여쁘게 방긋 웃어보였다. 익숙하지가 않아서 영 괴상한 표정이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 예뻐요, 닥터?”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도니타는 침을 꼴깍 삼켰다. 폐허에서 괴물들을 베어나가면서도 긴장한 적 없던 사지가 뻣뻣했다. 불만이 있는지 찌푸린 닥터의 미간을 보니 아에 시간이 멎는 것 같았다.
“그런 걸 물을 줄은 몰랐구나.”
워켄의 목소리가 진지하게 내려앉았다.
“도니타. 너는 내가 만든 인형이야. 내 인형은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아름다움에 있어서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단다. 네가 내 인형인 이상, 미추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어.”
가슴에 응어리져 있던 것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아까 하던 몽상에서 이어서 생겨난 의문이었다. 소년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왕자님인 것은 분명하지만 도니타 자신은 과연 어여쁜 공주님이 될 자격이 있는 것인지. 하지만 닥터가 이렇게까지 말해주었다. 뛰는 가슴으로 닥터를 올려다보면서 배시시 웃었다.
“응. 나 지금까지 인형이라서 이렇게 좋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나를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닥터.”
도니타는 자기도 모르게 까치발을 들어서,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연습을 하던 그대로 워켄의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한참 동안이나 닥터 워켄의 연구실에는 스스로 놀란 도니타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입술을 문질러 닦다가 이윽고 울먹거리면서 이번엔 문이 떨어져나갈만큼 쾅 닫고 도니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면서, 워켄은 도니타를 다시 검사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한참이나 고민했다.
그리고 닥터의 머리 위, 하늘 위에 꿈결처럼 떠 있는 판데모니움의 돔 내부, 울상인 얼굴로 도서관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소녀에게 왕자님이 다가오면서 어여쁜 공주님의 몽상은 현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