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레그] 빙결

레드그레이브는 겨울이면 기상조절장치를 한 달에 다섯 번쯤 고의로 조작했다.

눈이란 것은 사실 효율적인 기후가 아니었다. 그러나 흩날리는 눈발 속에, 세상 어느 것도 흐릿한 가운데, 바로 옆에 있는 연인에게 나는 당신밖에 없어요, 라고 고하는 순간이, 소복소복 쌓이는 눈 속으로 온 세상이 묻히고 절대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되는 그녀의 진심 담긴 허언이 세계로부터 차단되는 그 순간이. 눈발을 손 안에 낚아채 보지만 곧 녹아버리는 것을 보고 씁쓸히 웃으며 돌아가 장치를 꺼버리는 그 시절이.

레드그레이브는 오랜만에 눈발을 낚는다. 들고 온 사진은 판데모니움 가장 깊은 곳에 저장되었고, 지상은 그의 의지대로 오토마타로 다시 차고, 쇠로 이룬 손 위에서 눈은 녹지 않는다. 손끝을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하얗게 웃었다.

이거 봐, 그라이바흐. 당신이 아직도 녹지 않았어. 나는 당신밖에 없어요.

헤럴드 합작 – 로쏘

어두운 연구실 구석, 은은하게 퍼지는 전등 불빛에 소년의 가냘픈 얼굴이 비치었다. 내리쬐는 광선 밑으로 핼쑥하게 파인 뺨이 도드라진다. 늘 연구에 기력을 쏟느라 처진 눈매가 아이답지 않게 나른한 느낌을 주는 얼굴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눈동자에 빛나는 열정이 전반적인 인상을 뛰어넘었다.

한 마리, 두 마리. 하얗고 매끈한 쥐가 찍찍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발버둥을 칠 때마다 소년의 손에 꽉 낀 실험용 장갑이 질척질척 두꺼워졌다. 계속 그렇게 고개를 숙인 탓에 흘러내려오는 붉은 머리카락을 손등으로 거칠게 걷어 내자 이마에 핏자국이 도장처럼 찍혔다. 찍찍대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로쏘는 어머니의 새된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 무수한 변이군을 관찰해서 알아낸 게 겨우 그거니? 그 정도는 판데모니움의 어느 엔지니어라도 알 만한 사실이야. 새로운 지식은 조금도 파악해내지 못했구나.”

그렇게 말하며 어머니는 로쏘의 이마를 콕 찔렀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자 시야가 컴컴해지고, 어머니의 신경질적인 목소리만이 귓가에 울렸다.

“남들도 다 아는 지식 따위는 의미가 없어, 로쏘. 먼저 얻어내는 새로운 지식만이 가치가 있는 거야.”

로쏘의 어머니는 뛰어난 연구자였다. 과거형인 것은 그녀의 추론으로는, 남편과 아이에게 그 까닭이 있었다. 야망 있던 여자는 재능을 타고났지만 자신의 빛을 가릴 만큼은 아닌 신랑감을 찾아냈다. 각자의 뛰어난 정자와 난자를 추출해 실험관에서 아이를 배양하고, 인큐베이터에서 키워내 자식까지도 완벽하게 만들어낼 요량이었다.

하필 그 시기에 모성의 영향력에 대한 사회적 공론이 대두된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결코 비난받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콧대를 높이 들고 처음부터 그러길 바랐던 것처럼 아이를 뱃속에 품었다. 그리고, 분명 모성은 환상이었다. 몸이 무거워지고 손발이 묶인 그녀를 우울증이 거대한 파도처럼 덮쳤다. 게다가 약 일 년의 공백은 동료인 동시에 경쟁자였던 남편과 그녀와의 격차를 한참이나 벌려놓았다. 어느새 까마득하게 추락한 그녀는 쉽사리 예전의 위치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어떻게든 보상을 받기를 바랐던 그녀는, 희생의 대가로 얻은 아이에게 축문이자 저주를 계속해서 속삭였다. 진정으로 새로운 지식은, 혼자서만 얻을 수 있어.

 

“그래서 어떻게 됐어?”

마르그리드가 고개를 들고 로쏘에게 물었다.

“글쎄. 잘 기억나지는 않네. 그 돌연변이 쥐들의 뇌를 하나하나 다 해부하면서 행동을 기록했어. 총 이백 오십 삼 마리였나? 어머니가 칭찬해주기를 기대했던 것 같기도 하고.”

“어머나, 당신도 어릴 때는 꽤나 귀여운 아이였구나. 그래서 엄마한테 쓰다듬이라도 받았어?”

“아니. 이건 분명히 학계 어디에도 전에 없던 학설이라고 확신하고 꽤 신이 나서 연구 결과를 브리핑했는데, 어째 어머니는 들을수록 얼굴이 파랗게 질리더라. 그때가 되어서야 알았어. 이 여자는 내가 자기를 뛰어넘는 게 무섭구나. 난 지금 이 여자를 뛰어넘었구나. 새로운 지식 하나 알려주지 못하는 여자는 더 이상 재미가 없어져서, 이제는 잘 기억도 안 나.”

“무서워라. 이거 나도 흥미가 없어지면 버림받는 거 아냐?”

달처럼 희게 빛나는 마르그리드의 몸을 내려다보며 로쏘는 헛웃음을 삼켰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소리라니, 이 여자는 참 깜찍도 하다.

“아마 당분간은 그럴 일 없을 것 같은걸. 당신은 인간의 최대 난제라는 사후세계를 몸으로 겪은 여자잖아.”
“말이 좋아 그렇지, 일반적인 사후세계를 겪은 건 아니잖아?”
“그렇지만 난 아직 당신에 대해서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어.”

말을 이으며 로쏘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구조도. 생각도.”

마르그리드가 작게 키득거렸다.

“확실히, 로쏘 당신은 이계의 생물에는 박식하지만 정작 인간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으니까.”
“그럴지도 모르겠군.”

뺨에 여자의 손이 닿았다.

“조금 놀랐어. 순순히 인정할 줄은 몰랐는걸.”
“글쎄, 당신의 그 몸에 대해 탐구하다 보면 인간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될지도 모르지.”
“나보고 인간이 아니라 영상이라고 하지 않았어, 당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르그리드는 젖먹이를 어르는 어머니처럼 로쏘를 가슴께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품에 묻혀 로쏘는 아이처럼 칭얼거렸다.

“나는 알아낼 때까지 탐구하는 성격이라서 말이지. 알아듣겠어?”

마르그리드의 웃음소리가 몸을 타고 곧장 전해졌다. 그러나 그녀가 자처하는 요부보다는 차라리 자애로운 어머니에 가까이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다. 아주 까마득한 옛날, 어머니의 태내에서 들었을 것 같은 고요한 심장 박동이 느껴진다. 로쏘는 그것이 썩 좋으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연구자는 다시 둥근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녀를 한 올 한 올 탐구하기 시작했다.

 

 

결국에 로쏘는 그가 알고자 했던 진리의 끝까지 내달렸다. 움직여도 움직여도 시야 안에는 있지만 결코 손에 잡히지 않는 둥근 달 같은 여자를 좇아 뛰다가 죽음에까지 다다랐다. 그리고 인간의 최후의 난제라는 사후 세계를 직접 몸으로 겪고 부활했다.

하지만 나는 모르겠어. 마르그리드. 아직도 사람을 모르겠어. 나는, 당신을 알수록 모르겠어. 당신은 대체 무엇을 위해 죽었던 건지. 어디까지가 진심이었는지.

진흙이 질척질척 엉키는 현세의 땅 위에 서서 모래바람이 섞인 매캐한 공기를 들이쉬었다. 확실히 심상의 세계인 성유계와는 다르게 현세에 서 있는 순간은 잡티가 많고 쓰라렸다. 쓰린 가슴을 누르며 눈을 들자 사람들이 개미처럼 우글거렸다. 몸만 자란 소년은 희게 달라붙는 실험용 장갑 대신에 공간을 절단해내는 장갑을 꼈다. 메스 대신 케이오시움과 독가스를 들었다. 진리를 알아낼 때까지 연구할 표본은 그가 다시 돌아온 이 세계에 너끈히 차고 넘친다.

감금 합작 – 멜키레그

지친 새벽이었지.
나는 지나간 날을 곱씹고 너는 내일을 생각하라며 그리고 어스름이 동터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다운 네 모습이 보이자 나 홀로 지쳐 울었지.
사랑이라는 말은 입 밖에 꺼낼 수도 없었지.
아직도, 지친 지금이었지.

 

 

공중도시 판데모니움에서도 가장 높이 솟은 중앙통괄탑의 최상층. 이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 온 세상을 굽어보는 여자가 있었다. 아니, 여자라고 부르기에도 어폐가 있었다. 5세기 이상 뇌로 존재해온 괴물을 어느 누가 인간이라 여기겠는가? 그렇다고 ‘그것’이라 칭하기에는 레드그레이브의 감시망이 두려웠던 사람들은 결국 고대의 기록에 따라 그를 감시자라고 불렀다. 그 기록 중에 미모의 지도자에 대한 찬사가 가득하다는 사실은 뒤로 남겨둔 채.

레드그레이브 역시 옛날과 같은 숭배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눈을 뜬 감시자는 대신, 그 명칭처럼 도처에 감시의 눈을 깔고 현재에 대한 정보를 긁어모으는 일에 전념했다. 그렇게 세상을 분석한 후 감시자는 가장 먼저 두 가지의 정책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나는 이제 지상에 드물게 되어 버린 작업용 오토마타의 양산이고, 다른 하나는 지상에 만연한 소용돌이를 소멸시키기 위한 군대의 결성이었다.

정보 중에는 또한, 정체도 정체성도 불분명한 지도자에 대한 세간 사람들의 겁 섞인 수군거림도 있었다. 그러나 몸이 없는 지금은 오히려 그러한 두려움이 통치에 도움이 되는 바였다. 레드그레이브는 막연한 공포가 퍼져나가도록 놔두었다.

그에 관해서는 다시 움직일 수 있는 몸을 얻는다 해도 변할 것이 없다. 그녀는 부러 인간미가 없는 몸을 주문했다. 살이 거의 붙지 않은 상체와 아예 쇠로 이룬 다리에 더해, 더 신속한 업무 처리를 위한 보조전자두뇌까지. 연심이나 정열 같은 단어는 일말도 붙일 데 없는 몸을 뒤로 젖혀 옥좌에 기댄 채로 여왕은 오늘의 보고를 듣는다.

송이 전달한 첫 보고는 닥터 워켄과의 교섭 내용에 대한 이야기였다. 오토마타 제작에 인간의 몸을 사용하면 요구되는 스펙을 제때 납품할 수는 있지만 부작용이 따르게 되는데, 정말 실전에 투입할 것인지 여부를 되물었다고 한다. 가령 감정의 고조에 따른 폭주 같은 것 말이다. 레드그레이브는 이를 까득 깨물고 흘리듯이 속삭였다.

“그거야 감정이 과해지면 강제로 전원을 내리면 되는 문제로구나. 폭파라도 시켜 버리라고 이르거라.”

두 번째는 살가드로부터의 보고로, 레지멘트에 파견된 엔지니어들의 활동 경과와 예상 일정을 종합한 것이었다. 이제 곧 최초이자 최대의 소용돌이인 ‘결절점’, 디 아이의 공략에 착수할 예정이라 한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로구나.”

“괜찮으십니까, 레드그레이브님?”

“괜찮느냐니, 무엇이 말인가?”

살가드는 한 발짝 더 다가가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일찍이 말씀하신 대로라면, 그 소용돌이 안에 레드그레이브님의 형제 되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살가드여. 그대는 짐을 오백 년도 더 지난 사사로운 일에 마음을 쓰는 이로 보았던 것인가?”

“하지만 잠들어 계시던 레드그레이브님께는 그렇게 오래 전 일도 아닌 걸로……”

“그보다 어째 발목이 아프구나. 살가드여, 닥터 워켄을 불러주겠나?”

살가드가 머뭇대는 것을 보고서야 레드그레이브는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쇠로 된 접합부가 눈에 띄게 만든 무릎과 그 위로 한 겹 더 철구두를 씌운 발이 보인다. 통각을 느낄 리가 없는 부위였다. 환상통이다. 더없이 불쾌해진 레드그레이브는 방에 있던 엔지니어들을 모두 물려 버렸다.

홀로 남은 그녀는 정신을 맑게 하고 환각을 떨쳐버리려고 했으나, 그것에 너무도 정신을 소모해버린 탓에 저녁 보고를 들을 때는 도리어 환청 비슷한 것에까지 시달리는 상태였다.

“이것이 현장에서 겨우 수거해 온 기기입니다. 내부에 들어갔던 엔지니어의 시신이 사라진 현상과 관련하여 어떤 기능이 있는 것인지 아직 정확히 밝혀내지 못했지만……”

보고하는 목소리 사이로 언젠가 들었던 여성형 오토마타의 높은 웃음소리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황한 살가드가 그녀의 의중을 다시 확인했다.

“레드그레이브님?”

“설명을 계속하게. 그래, 이 기계가 그 가엾은 치가 연구해낸 작품이란 말이지…….”

별 일 없다는 투로 응대하며 레드그레이브는 ‘요람’ 안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당황했다. 만져져야 할 바닥이 없었다. 팔이 완전히 빠지고, 이윽고 상체가 무너질 때까지. 한 가지 색으로 형용할 수 없이 부신 빛이 본래 바닥이 있었어야 할 곳으로부터 쏟아지며 눈을 시리게 찔렀다. 거센 인력이 그녀를 끌어당겨 몸이 기우뚱 미끄러져 들어갔다. 시야가 무너지고 균형 감각이 놀라다 못해 제멋대로 요동을 쳤다. 다급히 자신을 부르는 수하의 목소리가 멀리로 사그라졌다. 세상이 빙빙 돌며 심연처럼 깊은 공동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간다고 느꼈다.

그 순간, 머리를 울리던 환청의 내용이 바뀌었다. 오래 전에 들었던 형제의 목소리였다.

‘케이오시움은 인간의 갈망에 응답해, 레드그레이브.’

 

 

적응이 되지 않는 광경에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늘이 – 끝없는 허공을 하늘이라고 이르는 것이 옳다면 – 보랏빛이었다가, 선홍색이었다가, 비취색으로 일렁였다. 땅이라고 할 수 있을 바닥은 썩은 진흙마냥 시꺼멓다. 황량한 땅의 사이사이로 간혹 거무죽죽한 나뭇가지 같은 것이 비죽 솟아 있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저 멀리에서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다가오는 괴물 뿐.

“이계의 생물…….”

소용돌이에 관한 것은 알고 있었다. 뇌를 들어내기 전에 직접 그 여파를 보아서도, 다시 깨어난 후에 질릴 만큼 들은 보고를 통해서도 알고 있다. 레드그레이브는 생각에 잠겼다. 소용돌이가 이계와의 교점이라고는 하지만 이리 직접적으로 공간이동을 한 사례가 얼마나 있던가? 손에 꼽을 것이다. 소용돌이로 추정되는 이 지점에서 판데모니움으로 돌아가야 한다. 단순 이동을 통해 벗어날 수 있을까? 어느 방향을 택해야 할 것인가? 턱을 괴고 갖가지 변수를 고찰하는 레드그레이브에게, 어느새 한 발치 앞으로 다가온 아까의 괴물이 달려들었다.

레드그레이브는 가뿐한 발돋움으로 자리에서 벗어났다. 목표물의 갑작스런 이동에 균형을 잃은 괴물에게 가슴의 브로치로부터 뻗어 나온 빔이 명중했다. 육중한 몸이 비틀거리며 바닥에 무너졌다. D형 생물은 대사가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지만 행동양식이 단순하다. 괴물이 다가오는 것을 인식했을 때부터, 레드그레이브의 보조전자두뇌는 이미 80% 이상 행동분석을 마쳐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레드그레이브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니고 있었으며 지금까지 변함이 없는 기질이었다.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에 버릇이 들은 뇌는 일곱 수를 앞서 계산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다른 생물을 시각 모듈에 인식했을 때마저도 그랬다.

그것은 퍽 어린 인상과 동시에 수백 년은 묵은 듯 주름진 껍데기를 지닌 기묘한 생물이었다. 레드그레이브는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를 바탕으로 저것이 이 소용돌이의 근원이 되는 케이오시움을 품은 코어 생물이리라 추론했다. 이 생물은 기이하게도 레드그레이브를 보자 잠시 멈칫하더니 공격 태세를 취하는 대신 뒤돌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추론은 확신으로 빛깔을 바꾼다. 이곳에서 무사히 나가기 전까지 저 생물과 같은 공간 안에 있게 되는 것은 필연일 터. 보조전자두뇌는 해당 생물의 공격성을 늦추고 무력화시키는 가장 적합한 해결책을 연산했다. 최선의 해결책을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품은 대뇌 역시 연동해야만 했다.

이제는 까마득히 먼 5백 년 전의 과거. 그 안에 지금은 말라비틀어진 시체 한 구가 있다. 레드그레이브는 오래 전에 죽어버린 여자의 정보를 끄집어냈다. 상냥한 목소리를 그려냈다.

“여전히 수줍음이 많구나, 멜키오르.”

지체 없이 달아나던 발이 멎었다. 어깨가 들썩이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잠시, 멜키오르는 다시 후다닥 도망치기 시작했다. 레드그레이브는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숨을 골랐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과거의 여자가 잦아들고 그녀는 다시 돌아갈 방안을 찾는 판데모니움의 감시자가 되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바디 손상으로 인한 자동 복구 시스템의 가동이 이제 일곱 번째였다. 눈을 찌르던 형광의 하늘은 거대한 괴물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첫 번째 괴물의 경로를 연산하여 달아나고 두 번째 괴물의 꼬리를 쳐내자 세 번째 괴물이 손톱으로 팔을 베었다. 레드그레이브는 낮게 신음하며 강박적으로 위치 추적 시스템을 기동시키려 애썼다. 공간이 왜곡된 소용돌이 내부에서는 동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괴물들의 틈새를 뛰쳐나가며 레드그레이브는 절로 이런 공간에서 수백 년을 살아남았을 한 남자를 떠올렸다. 그의 도움을 바라서는 안 된다고 고개를 젓는 사이 거대한 손이 그녀의 가는 팔을 움켜쥐었다. 몸이 아찔 허공에 들렸다. 높은 공중에서 머리가 하얗게 비어 땅을 내려다보았다. 거짓말같이 아까 생각했던 남자가 서 있었다.

멜키오르가 팔을 들자 괴물은 힘이 빠진 듯 레드그레이브를 놓았다. 바닥에 쓰러지고는 곧 입자로 화하여 대기 중으로 날아갔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쭈뼛 식은땀이 흘렀다. 안도보다 두려움의 감정이 더 컸다. 레드그레이브는 차라리 아까까지가 더 침착했었다. 사실은 그가 처음에 도망칠 때도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그런 그녀에게는 고맙게도 멜키오르는 곧 다시 얼굴을 가리고 달아났다. 늙어버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걸까. 사실 그런 겉모습 같은 것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그녀 역시 그저 만들어낸 몸이니 그의 외양에 대하여 느끼는 감정이라면 차라리 동질감에 가까웠다. 너도, 나도 변하는구나.

그럼에도 그가 사라지자 안도하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는지, 잿빛 도는 땅 위로 그녀는 털썩 소리가 나게 무너졌다. 갸름한 등이 둥글게 움츠러들었다. 남이 보지 못하도록 무릎을 감싸 안아 형성한 작은 공간 사이로야 겨우 밭은 숨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여전히 멜키오르가 지켜보고 있었고, 레드그레이브 역시 그것을 무리 없이 짐작하고 있었던 탓이다.

 

레드그레이브가 멜키오르로부터 도망치고, 괴물로부터 도망치고, 멜키오르가 레드그레이브로부터 도망치고 자동 복구 시스템의 동작 횟수는 일흔 번째를 훌쩍 넘을 무렵.

그녀는 무서웠다. 여전히 마음은 5세기 전에 두고 온 듯, 매일 듣던 3300년대의 보고가 멈추고 괴물들에게 시달리면서 밤에 꾸기 시작한, 형제들과 행복하던 시절의 꿈이 무서웠다. 그러다가 깨어나서는 곁에 있을 그라이바흐를 찾는 자신이 무서웠다. 무엇보다 오백 년 동안 그 시간을 곱씹고 있었을 멜키오르가 무서웠다. 수줍음을 기막힌 방패로 삼아 레드그레이브가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도록 놔두되 그녀가 죽지는 않게 지켜보는 멜키오르가 무서웠다.

무서웠으므로 벗어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마음을 움직여야만 했다. 역시 무서웠으나 그래도 시도해 볼 가치는 있었다. 눈이 예순 번째 마주쳤을 때 즈음부터, 멜키오르는 조금씩 고개를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눈이 마주치는 것은 찰나였지만 그 눈동자 안에 담긴 아쉬움과 그리움과 얽어매는 집착을 읽어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그보다는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남았을 거라 믿고 싶었다. 까마득히 먼 과거에서나마, 그들은 정말로 소중한 형제였으니까.

레드그레이브는 가만히 서서 오팔 빛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허리에 매인 리본이 나풀나풀 나부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면서 고개를 원형으로 젓던 도중에, 그녀는 시선을 그대로 멈췄다.

“멜키오르.”

오래 전에 하던 것처럼 상냥하게 완성된 표정으로 웃어 보려 했으나, 어쩐지 쓴웃음이 되었다.

“거기에 있는 거 알고 있어. 고마워, 지금까지 지켜 주어서……. 감사 인사는 얼굴을 보고 하고 싶은데, 이만 나와 주지 않겠어?”

한참을 그대로 있자 형제는 고개를 숙인 채 쭈뼛쭈뼛 나타났다. 가슴이 멀미가 날 듯 울렁거렸다. 레드그레이브는 달려가 주름진 그의 손을 주저 없이 잡았다.

“그동안 여기 있느라고 고생했지, 멜키오르? 코어와 융합해서 여기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거 알아. 나도 아주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으니까 잘 알아. 외로웠지? 쓸쓸했지? 알아. 알아, 멜키오르.”

떨리는 가슴을 감추려 상대의 손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나를 이만 여기서 내보내 줘. 당신이 반드시 여기서 나오게 해 줄게. 판데모니움의 모든 엔지니어의 연구를 동원해서 꼭 그렇게 할게.”

다시 제대로 웃으며 레드그레이브는 손에서 멜키오르의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가까이 있는 만큼, 눈 속에 담긴 감정이 더더욱 제대로 보였다. 말 대신 조용한 배신감과 분노로 멜키오르는 레드그레이브의 손을 뿌리쳤다. 그대로 우두커니 서서 멀어지는 멜키오르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어김없이 이계의 괴물들이 나타났다. 이제는 몸에 익은 대로 공격하고 달아나며 레드그레이브는 소리 없이 뇌까렸다. 역시 안 돼.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어. 처음부터. 그때부터……

 

“멜키오르!”

그를 다시 불러내는 것은 간단했다. 괴물들의 앞에 그저 멍하니 앉아 있으면 되었다.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을 심산이었다.

“또 어디 가는 거야? 저번에 나 때문에 화가 난 것 같아서 선물을 준비했는데.”

기계소녀는 달려가서 남자를 꼭 껴안았다. 뜀박질하는 심장 소리가 몸을 타고 그대로 전해졌다.

“고마워, 멜키오르……. 당신은 내 인생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람이야. 사랑하는 내 형제여.”

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올려다보면서 레드그레이브는 하얗게 웃었다.

“그리고 증오해.”

가슴의 브로치에서 빛이 번쩍였다. 시간이 아주 빠르게 가는 것 같기도 했고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 같기도 했다. 멜키오르는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침을 꿀꺽 삼키며 몸을 뒤집어 보자 제대로 명중한 듯, 남자의 가슴께에 난 구멍 사이로 검은 구슬에서 금이 가 치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잿빛 연기가 나고 있었다. 왈칵 눈물이 났다. 레드그레이브는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부터가 케이오시움을 파괴하기 위한 용도로 만든 레이저였다. 코어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면 이세계와의 교점이 사라지기 전에 빨리 소용돌이 바깥으로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눈앞의 장면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해방감인지 회한인지 모를 온갖 감정이 물밀 듯이 몰려와 자꾸만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가슴을 꽉 쥐고 달려가던 그녀의 흐릿한 시야에 검게 우글거리는 구름 같은 것이 비쳤다. 이계의 괴물들이 무리지어 나타나고 있었다. 뒤를 돌았다. 모든 생명체가 레드그레이브를 에워싸고 다가오고 있다. 발을 멈췄다. 레드그레이브는 울먹거렸다.

“나는 어쩔 수 없었어.”

아주 어릴 적에 형제들에게 하던 것처럼 아이 같은 어투로 울먹였다.

“어쩔 수 없었어, 멜키오르…….”

곧 가슴에서 붉은 피를 흘리는 남자가 나타나 레드그레이브를 붙잡고 바닥으로 내쳤다. 질척한 바닥에 누워 얼굴 위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맞으면서 레드그레이브는 악을 썼다.

“난 벗어날거야, 멜키오르……. 난 알아. 사실 알고 있다구. 코어 생물이 죽으면 소용돌이가 약화되고 코어가 회수하기 쉬워져. 디 아이가 모든 소용돌이의 중심이 되는 노드라고 엔지니어들이 내게 보고했어. 네가 죽으면 지상의 이 모든 혼란이 끝난다고. 그리고 난 벗어날 수 있어. 모든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어!”

기억.

그 기억이 문제였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라이바흐가 한 송이 한 송이를 공들여 가꾼 장미 화단은 물올라 발갛게 피어올랐다. 그윽한 향기에 이끌려 코를 갖다 대자 꽃잎이 살랑 얼굴을 간질였다. 레드그레이브는 그만 재채기를 했다. 장미에서 얼굴을 떼고 피식 웃고 있는 그라이바흐를 새침하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곧 두 웃음소리가 뒤섞여 정원 안에 만발했다. 레드그레이브는 내키는 대로 손을 뻗으면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미만을 골라 꺾었다. 가시가 손을 찔러 피가 흐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아름을 가득 솎아 안고 멜키오르의 연구실로 향했다.

병상에 누워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멜키오르의 앞머리를 넘겨주고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라이바흐의 정원에서 가장 싱싱한 꽃들만 골라 왔어. 익숙한 내음을 맡으면 조금이라도 더 힘이 나지 않을까 하고. 어서 기운을 되찾고 꽃이 만개한 정원에서 다시 만나기를 바라.”

황량한 연구소에는 사람이 전혀 없었기에 일부러 잠깐 얼굴이라도 보려고 시간을 내어 들른 터였다. 그렇기에 꽃을 꽂을만한 병이 없나 두리번거리던 레드그레이브가 들은 것은 의외의 말이었다.

“좀 더 같이 있어주면 안 될까, 레드그레이브?”

결국 책상 위 비커에다가 대충 꽃대를 꽂아 넣고 침대 맡에 앉아서 레드그레이브는 난처하게 웃었다.

“정말 미안해, 멜키오르. 오늘은 선약이 있는걸. 그럼, 다음에 보자.”

다시 뒤돌아서는 레드그레이브에게 멜키오르가 콜록거리며 물었다.

“그라이바흐와의?”

“응…….”

“내가 지금 왜 아픈지는 알아……?”

레드그레이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의 멜키오르는 자신의 앞에서 말수가 적다. 열에 들떠 그런지 형제는 평소와는 좀 다른 것 같았다.

“요즘 계속 몸살을 앓고 있잖아? 멜키오르는 어릴 때부터 항상 무리하는 습관이 있었으니까. 조금 더 자신의 몸에 신경을 기울여 줘요. 아 참 미안해, 멜키오르. 지금 빨리 가지 않으면 저녁 공연에 늦게 되어서……”

급한 일정에 정신이 팔려서 일단 문고리부터 잡았다. 문이 덜컹 덜컹 흔들렸다. 몇 번을 흔들어도 열리지 않았다. 순간 등골을 타고 까닭 모를 오한이 들었다. 등 뒤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케이오시움은 인간의 갈망에 응답해, 레드그레이브.”

동시에 와장창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놀라 뒤를 돌았더니 꽃을 꽂았던 비커가 책상 밑으로 떨어져 깨져 있었다. 붉은 꽃잎이 바닥 위에 잔뜩 쏟아져 내렸다. 레드그레이브는 저도 모르게 탄식하며 몸을 굽혀 탐스러운 꽃잎을 주우려 했다. 주워 담는 손을 멜키오르가 덮어 막았다. 잠시 그대로 있었다. 화들짝 놀라 상대를 밀쳐내다가 반대로 자신이 바닥에 미끄러졌다. 다시 일어나려니까 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려다보니 발목에 유리 조각이 박혀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힘을 주려 할수록 유리 조각이 더 깊이 박히는 것 같다. 신경을 타고 엄습하는 격통에 레드그레이브는 아무 말도 못하고 들숨만 거푸 들이켰다. 현기증 속에 겨우 입을 열어 형제를 불렀다.

“도와줘, 멜키오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에 압도되어서는 안 될 지도자인데도 상황과 일곱 수를 앞서 가는 추론이 절로 두려움을 낳는다. 발목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그저 관조하듯이 지켜보는 눈에 머리끝까지 소름이 끼쳤다.

“내 몸이 지금 이 모양인 건 혼돈이 갈망에 결합했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조금만 더 같이 있어줘.”

멜키오르가 다가왔다. 그녀에게 다가와 유리 조각이 꽂힌 발 대신 벌벌 떨리는 팔을 들었다.

“아파, 멜키오르. 도와줘……”

“가지 마, 레드그레이브.”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멜키오르는 레드그레이브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머리부터 뺨, 턱까지 차례로 대었다. 곧 손바닥에다 입을 맞췄다. 열병을 앓는 입술이 델 듯이 뜨거워 손 위로 열꽃이 피는 것 같았다. 침실 바닥 위로 붉은 꽃잎이 온통 흐트러져 있었다.

대리석과 문자로 쌓아 올린 울타리 안에서 세 사람의 세상은 오롯한 것이라 믿었다. 자신이라는 변수로 인해 아슬아슬 흔들리는 관계라는 것은 일찍이 알고 있었으나 깨지기 쉬운 것을 알기에 더욱 소중했다. 새벽녘에 남자는 눈물을 쏟으며 용서를 빌었고, 왜 오지 않았는지 다그치는 그라이바흐에게는 멜키오르의 상태가 퍽 좋지 않아 보여 밤새 병간호를 했다고 말했다. 그가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침묵을 지켰으나 기억이 몸에 남았다. 그때 진작 알았어야 했다. 언젠가 다시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알았어야 했다. 달달 떠는 레드그레이브에게 멜키오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알고 있어, 레드그레이브.”

멜키오르는 쓰러진 레드그레이브의 발목을 무릎으로 짓누르며 그녀 위로 올라섰다.

“너는 그때도 지금도 나를 몰라……. 내가 그동안 여기서 아무 생각도 없었을 것 같아? 나는 기다렸어. 네가 깨어날 때까지. 네가 깨어난 걸 알고서야 나도 이렇게 깨어난 거야.”

남자의 가슴팍에 드러나 있던 코어에서 이채가 돌았다. 상처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재생됐다. 그러나 피가 멎지 않았다. 벌건 집착이 여자의 얼굴 위로 뚝뚝 흘러내렸다. 레드그레이브는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멜키오르가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턱을 잡아 자신을 계속 보도록 했다.

“알아. 너는 모든 일 때문에 나를 용서할 수 없어. 결국 나를 사살하려고 군대를 조직하고 있잖아……. 세상 전반적인 것에 대해서는 네가 더 많이 알지도 모르지만, 우리 둘에 대해서는 내가 너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 아마 내 바람이 너를 이리로 불렀어. 알아. 네가 처음부터 나를 죽이려던 것도 알아. 용서는 바라지도 않아. 그냥, 이렇게 조금만 더 같이 있어줬으면 했어.”

“알면 죽어버려. 죽고 끝나서 내 세상에서 없어져 버려. 나는 여기서 벗어날 거야.”

다리가 매인 채 몸을 들썩이며 죽은 여자가 흐느꼈다.

“그건 안 돼.”

5백 년 동안 과거가 까맣게 부패할 때까지 곱씹고 곱씹던 남자는 그때 그대로 여자의 손을 들었다. 차가운 쇠로 된 손을 머리부터 턱, 뺨까지 차례로 대었다.

“나도 여기서 더 이상 원망을 사고 싶지는 않아. 그렇게 원한다면 보내줄게, 레드그레이브. 하지만 기억해. 보내주는 건 나도 여길 벗어나서, 이 밖에서 다시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니까.”

몇 마디를 더 중얼거리며 그는 철판으로 된 손바닥 위에 입을 맞췄다. 마치 낙인이었다.

 

 

해발 1.5km, 돔 형태의 막으로 둘러싸인 공중도시 판데모니움에서도 더욱 높은 하늘을 향해 치솟은 중앙통괄탑의 최상층. 이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 온 세계를 굽어보는 여자가 있었다. 세상을 사랑하고 지키라 태어난 여자는 하늘 위의 신이 되어 까마득한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서는 대공사도, 전쟁도 꼬물거리는 아가 발가락처럼 작디작기 그지없다. 제아무리 큰 움직임도 언젠가는 멎고 평화를 찾는다. 그것이 그녀가 온 힘으로 다스려 지켜내는 세상이었으니,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 절대 끊이지 않는 거대한 움직임이 있었다. 그녀를 지켜보는 디 아이(The eye)이다. 소용돌이는 인간이 볼 수 있는 모든 빛을 발하면서 벌레마냥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하늘로 솟는다. 그 오묘한 빛을 여자의 시각 모듈이 인지하고 뇌에서 연산한다. 뇌는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단 하나의 부위다. 어쩔 바 없이 그 빛깔 중에는 500년 전의 영광도 있고, 형제들에 대한 애정도 있고, 그리움도 좌절도 공포도 있고, 죽었다 여기었던 오래 전의 여자도 있다. 용솟음치는 빛깔이 눈에 띌 때마다 땅에서 뻗은 쇠사슬에 죄이는 것처럼 가슴이 아프다. 과거가 죽지 않는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고통이 늙지도 쇠하지도 않고 살아남아 영생할 것만 같다. 언젠가는 이 속박이 풀릴까. 귓가에 옛 형제의 마지막 말이 메아리친다. 팔을 감싸 안았다.

‘어느 곳에서든지 기억해. 나를. 나는 너를 놓지 않아.’

저 소용돌이를 하루 빨리 치워버리면 이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레드그레이브는 어깨를 움츠렸다.

[이오마르] 폐기됨

엔지니어로서 직위를 부여받은 사람 중에 판데모니움을 사랑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말 안 듣고 칭얼대는 아이들에게 어미는 짓궂게 일렀다. 너 지상으로 보내버린다. 개중에는 지상을 동경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래로 아래로 고이는 구정물을 목도하고 돌아오면 대개는 정결하고 위생적인 고향의 정취에 젖어 말하고는 했다. 아, 지상은 정말 멋진 풍광이었지. 다시 있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엔지니어들 중에서도 금숟가락 물고 태어난 이른바 우월한 개체들이 테크노크라트였다. 남들이, 특히나 지상 인간들이 선민의식이라고 하는 것을 그들은 부러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하긴커녕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했다. 다르고말고. 말초적인 풍류를 좇는 이들과 과학기술의 발전이라는 유구한 사명에 온몸을 바친 우리는 다르고말고. 입에 문 금숟가락을 굳이 흙바닥에 떨구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 그렇게들 합리화를 했다.

당시 학술원에 재학중이던 이오시프라는 자는 그중에서도 그 사명의 순수함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자였다. 그 어리숙이는 매일 샛별이 채 사라지지 않은 새벽에 일어나 책을 폈다. 그리고 즉물적인 쾌락에 자꾸 한눈을 파는 동료들에게 엔지니어의 본분에 충실하라며 엄하게 야단을 쳤다. 멀리서 히죽히죽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동료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그의 말에 따랐다. 그자의 주변은 늘 그렇게 진지했다.

그러나 그 무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 여자가 나타나면 책에 몰두하던 떼거리의 공기가 일순 술렁였다. 햇볕 아래서 그녀가 머리를 대강 올려 묶으면 갸름한 상앗빛 목이 드러났다. 살짝 붉은 꽃 위에 시선을 둔 더 붉은 눈동자가 고왔다. 사내는 자신도 그녀에게 꽤나 시선을 둔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었다. 그녀가 부딪쳐 오기 전에는.

“미안, 실수예요.”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가볍게 말을 하며 여자는 눈모를 휘었다.

“이오시프. 맞죠? 나는 마르그리드. 우리 서로 많이 봤던 것 같은데 말 나누는 건 처음이네요.”

“서로 많이 봤었나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굳이 이야기를 나눌 일이 없었던 거죠.”

장난치듯이 한없이 가벼운 태도에 불쾌해진 사내는 굳게 고개를 돌렸고 여자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돌아갔다. 그리고 여자가 남긴 향기가 뒤늦게야 코에 훅 끼쳤다.

공부만 하는 샌님을 놀리기 위한 내기 같은 것이 분명하다 여겼다. 어쨌거나 그 말 한 마디, 그 찰나의 감촉이 꽤나 효과가 있었다. 이오시프는 마르그리드가 나타나면 절로 시선을 빼앗기다가 그녀가 눈을 마주치고 생긋 웃으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정말로 정신을 차리는 데에는 2주가 더 걸렸다.

마르그리드는 아주 빼어난 여자였다. 목소리가 크고 분위기를 주도하는 이오시프와 의견이 갈리는 일이 있으면 화제가 다 끝나고 나서야, 참 아까 무슨 일로 시끄러웠나 봐요? 난 못 들었어요. 내 의견은 이러하지만. 이런 식으로 모르는 체를 했다. 그렇게 새침하게 굴다가도 갑자기는 솔직하게 외로움을 털어놓으며 눈물지었다. 어리숙한 사내로서는 처음 보는 타입의 사람이었지만, 그런 그가 보기에도 퍽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남녀는 그리 계속 서로를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이윽고 시선이 마주쳐서 서로 웃어주고 말았다. 눈동자에 담긴 애정과 호기심을 더 이상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2주를 사귀었다. 그 중 어느 날인가 마르그리드가 말했었다.

“나는 지상에 가 보고 싶어. 알지? 요즘 유행인 거. 땅이 끝도 없이 탁 트여서 공기에서 나는 냄새부터가 판데모니움이랑은 다르다는데, 당신이랑 같이 마셔 봐도 좋을 텐데.”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마르그리드는 학술원에서 사라졌다. 자신의 전공인 지상의 소용돌이를 직접 눈으로 관측하기 위해 수색대에 지원한 것이다. 사내는 가슴이 휑하기보다도 그 짧은 2주간이 오히려 꿈같았다. 아주 아름다운, 이 세상에는 원래가 없었던 꿈. 꿈을 꾼 사람이 곧 제정신을 찾는 것처럼 이오시프도 무탈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학술원 졸업 후, 연구소에서였다.

백의에 슬리퍼를 끌고, 피곤에 찌들어 그늘이 어린 눈으로 마르그리드가 복도를 걸어왔다. 마르그리드가 걸어왔다. 마치 꿈의 단편이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현실이 되었다. 마르그리드는 아주 빼어난 연구원이었다. 아름답다고만 느꼈던 붉은 눈동자가 소용돌이의 변화를 관측할 때는 사뭇 진지했다. 관측해낸 지표로부터 예측 가능한 변화에 대하여 논하는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밤새 연구하느라 메마른 입술이 연구소의 정책에 숨을 끼쳤다. 그녀는 더 이상 꿈이 아니었지만 꿈보다 더 경이로웠다. 아직도 자신이 어리숙하다 느끼면서, 남자는 이 놀라운 여자를 사랑했다.

그리고 2주 후에 마르그리드가 말을 걸었다.

“왜 내가 지상에 가고 나서 연락하지 않았어?”

남자는 멍청하게도 꽤 시간이 지나서야 대꾸했다.

“당신이 다시 나랑 만날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자 마르그리드는 채근하듯이 눈을 올려다봤다. 못난 남자가 애정과 호기심을 채 감출 수 있었을 리가 없다. 계속 눈을 확인하던 여자가 마침내 고개를 내리고 한숨을 푸 쉬었다.

“이오시프, 내가 당신과 함께 지상에 가고 싶다고 했었지?”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이었어. 당신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어. 나 사실은 전부터 당신을 보고 있었거든요. 당신과 내 부모님이 전부터 잘 알던 사이라는 거, 알고 있었어요? 그분들이 나한테 당신 이야기를 자주 했었거든. 당신이 학술원의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진지한 사람이라는 것도 쭉 봐왔어요. 난 사실은, 지상 따위는 다시 내려가고 싶지 않아. 여기 청결한 판데모니움에 당신과 함께할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 안에서 누구보다도 안락하게, 아름답게 살고 싶어…”

이오시프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였다.

결혼 후에도 누구나의 이목을 끄는 화려한 여자였던 마르그리드는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고는 긴 머리를 잘랐다. 늘씬한 다리가 드러나는 치마 대신 길게 내려오는 바지를 입었다. 누구든 두려움 없이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대화를 주도하던 여자가 과분한 행복에 차 있다는 듯 고개를 내리고 수줍게 웃었다. 마르그리드는 아주 빼어난 어머니였다. 사람들과 얘기하기 좋아하고 짓궂게 농담하곤 하던 여자가 약속을 줄이고 집으로 빠르게 돌아가 아기 용품을 매만졌다. 그러면 그 놀라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짧게 자른 머리 아래 드러난 흰 목덜미 위로 입을 맞췄다. 그리고 마르그리드는 하얗게 웃으며 달처럼 둥글게 차올라 가는 배를 쓰다듬었다.

“고마워요, 이오시프. 나 여기서 아이와, 당신과, 나 셋이서 이렇게 계속 행복하게 살고 싶어. 나를 이렇게나 행복하게 해 줘서 고마워.”

그 사람이 시시각각 바뀌어 가는 모습은 언제나 경이로웠다. 마르그리드는 피고 지는 꽃이었다. 차고 기우는 달이었다. 가만히 있지 않고 흐르고 넘치는 물이었다. 여자는 변화했고 남자는 경애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랬다.

여자가 흘러서 연구원, 연구원이 고여서 어머니, 어머니가 넘쳐서 배신자가 되었지만

나는   마르그리드를   사랑했다

이 기록은 곧 폐기될 것이다.

브라우닝 오른쪽 합작 – 브라우x브라우닝

숨소리마저도 시끄럽게 느껴지는 적막한 밀실 안에서, 그는 화병 밑에 가려져 있던 굳은 자국을 발견했다. 이야말로 범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이 분명했다. 침을 꿀꺽 삼키고 그 위로 손을 올리는 찰나, 녹슨 경첩이 맞물려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문이 열렸다.

“발견해 버리셨군요.”

황급히 뒤를 돌아보는 그에게 비죽 웃고 있는 얼굴은 바로-

 

브라우닝은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의자에서 떨어졌다. 잘못 꺾인 듯 따끔따끔 아픈 허리를 짚자 절로 아이고 소리가 났다. 눈물이 핑 돌았다. 몸의 고통보다도, 정신적인 충격이 더 컸다. 그간의 전개를 떠올리자 다시 한 번 아득한 기분이 들어서 읽던 추리소설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그것을 흰 장갑을 낀 손이 주워들었다.

“괜찮으세요, 브라우닝 씨?”

입을 열었지만 차마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허리를 짚은 채 눈물을 글썽이는 브라우닝에게 청년은 재차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역시 가엾은 엘비스가 진범이라는 데 대한 충격이 크신 거죠? 당신은 좋으신 분이니까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았어요. 쫓기는 저를 걱정하고 도와주셨잖아요.”

갑작스런 찬사에 얼굴을 들자 브라우는 고개를 홱 돌려 아까까지 브라우닝이 앉아 있던 원목 의자를 만지작거렸다. 풀잎 빛의 짧은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보이는 귀 끝이 조금 붉은 것 같기도 하고. 오토마타에게도 그런 기능이 있나? 착각이겠지, 생각을 하는 브라우닝의 쪽을 브라우가 다시 돌아보았다. 부끄러운 생각을 하던 머릿속을 들킨 듯한 기분에 괜스레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행히도 브라우는 평이한 어투로 사무적인 내용만을 말할 뿐이었다.

“이런, 의자에 금이 갔네요. 제가 일단 수리해 볼 테지만 당분간 여기 앉을 때는 조심하시는 게 좋겠어요.”

의자 위로 몸을 굽히는 브라우의 모습 위로 그를 처음 봤던 때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눈앞에서 검은 피를 앞섶에 흠뻑 젖은 채로 웅크리고 있던 모습, 일단 병원부터 가자고 해도 한사코 거절하던 모습. 그리고 곧 총을 맞아 바닥에 맥없이 쓰러져 있던 가는 팔과 가는 허리.

“잠깐, 내가 옮기…”

“네?”

가슴까지 번쩍 올린 의자를 보고 브라우닝은 그만 머쓱하게 팔을 내렸다.

“아니네, 아무 것도.”

상대는 오토마타다. 사람이 편의를 위하여 만들어 낸, 무한의 기동력을 가진 기계. 그런데 왜 자꾸 여러모로 착각하게 되는지, 아무래도 눈앞에서 힘없이 바닥에 흩어져 있던 그 가는 사지가 각인이 된 것이 분명했다.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그 모습이 바로 브라우닝 자신이 지금의 여정을 시작한 계기이며, 어콜라이트라는 집단과 함께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도 그들이 자신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오토마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그날 밤 꿈에서 브라우닝은 밀실 안에 있었다. 낡은 경첩이 끼익- 하고 마찰하면서 문이 열리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브라우닝은 이미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의 가슴께까지밖에 오지 않는 여리고 작은 청년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그려낸 것처럼 상냥한 웃음을 말끔한 얼굴에 띠고서. 만들어질 때부터 내장된 기능임에 틀림이 없는 그 미소가 아름다우면서도 어쩐지 슬퍼, 브라우닝은 그것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깨어나서는 곧 꿈에 대해 잊어버렸다.

 

스스로를 ‘어콜라이트’라 지칭하는 의문의 남자들, 아니 오토마타 몇 구와 사립탐정 브라우닝이 기거하는 오두막은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깊은 숲 속에 있었다. 남향으로 높이 낸 창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한낮의 햇빛은 델 듯이 뜨거웠다. 사람의 살결을 바짝바짝 말려 가는 태양빛 속에 브라우닝이 건조한 책장을 팔랑팔랑 넘겨 가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한참을 지속되던 소리는 이내 멎고, 낮게 잠긴 목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지루하군.”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청아한 음성이 뒤를 이었다.

“마도 로젠부르그 시리즈는 아직 다 안 읽지 않으셨나요, 브라우닝 씨?”

그리고 푹푹 내쉬는 한숨 소리.

“읽고 안 읽고의 문제가 아니네. 아무리 소설을 읽는 것이 내 취미라지만, 며칠 내리 책만 읽고 있기는 적적하지 않겠나.”

여전히 그려낸 것처럼 상냥하게 웃고 있는 브라우의 얼굴이 지금은 갑갑하고 불편했다.

“이보게. 나는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 같은 일상에 지쳐서 자네들을 따라 나섰다네. 그런데 아무리 추적이 있다지만 이렇게 집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책만 읽고 있어서야 전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겠어.”

이렇게 말을 하면 과연 저 웃음이 가실까. 속이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을 죄어 오는 두려움에 시선이 떨렸다. 그러나 상대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러면 저와 함께 티타임이라도 가지시겠어요?”

 

오두막은 깊은 숲 안에 있었기에, 따스한 봄볕 아래 간혹 새 지저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 왔다. 입술에 닿는 수온은 딱 기분 좋을 만큼 따스했고, 엄선된 차향은 향기로웠으며, 청년은 상냥하고 아름다운 완벽한 시종이었다. ‘어콜라이트’라는 호칭을 온몸으로 증명하려는 것처럼.

홀로 읽는 추리소설은 금세 물리고 말았지만, 둘이 함께 소설의 전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새로운 기쁨으로 브라우닝을 즐겁게 했다. 그는 다시 책이 읽고 싶었다. 다시금 이 생활이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궁금증도 생겼다.

“브라우. 자네는 지금의 생활이 마음에 드나?”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년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따끔거렸다.

“나는 아까 불평을 했네만, 자네는 자신의 이야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지 않아. 이렇게 내내 집안에서 지내는 것, 자네는 견딜 만한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브라우는 바로 대답이 없었다. 역시 괜한 질문을 한 게야. 이 소년은 오토마타다. 완전하게 만들어진 시종이야.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리가 없지.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브라우닝 씨, 저는…”

소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저는 걱정이 됩니다. 바깥에 나가서 정보를 알아보고 있는 루드도, 자금을 모아 오는 메렌도, 추적을 교란시키는 비레아도 걱정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각별합니다. 완전한 해방을 위해서 지금 믿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서로밖에 없어요. 그리고 또-”

남자를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피어났다.

“당신이 있지요. 당신은 우리의 사정을 가엾게 여겨 분노하고 거리낌 없이 도와주겠다고 한 최초의 사람이에요. 아무리 우리가 서로에게 각별하다고 해도 브라우닝 씨, 당신만큼 특별한 사람은 또 없어요. 그러니 당신의 시중을 들고 늘 곁에서 지키는 것이야말로 제게 있어 가장 큰 기쁨입니다. 불만이 있을 턱이 없지요.”

이러한 표정을 단순히 제조된 웃음이라 치부했던 브라우닝 자신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그리고… 드디어 제 이름을 불러주셨네요. 기뻐요, 브라우닝.”

소년이 수줍은 것인지, 그 말을 듣는 브라우닝 자신이 수줍은 것인지 잘 분간이 가질 않았다.

 

그날 밤도 어김없이 꿈을 꾸었다. 이전과 같은 밀실 속, 청년의 웃음이 숨이 멎을 만큼 해사했다. 웃으며 다가오는 브라우의 뒤에서 무언가가 번뜩였다.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청년은 브라우닝을 밀쳐 쓰러뜨리고는 그 위에 올라타 가슴에 칼을 찔러 넣었다. 가슴이 쓰림을 느끼며 눈을 뜬 브라우닝은 이제야 그간의 꿈들을 기억해냈다. 어제 들었던 의문도 함께 기억해냈다.

어째서 브라우는 그 모든 추리소설의 내용을 알고 있었을까? 심지어 브라우닝이 어느 부분을 읽고 있었는지도.

온갖 행동에서 이유를 찾는 것은 직업병이야. 안 좋은 습관이다. 그리 되뇌어도 그는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동안 둘만의 티타임은 계속되었다. 브라우닝에게 청년은 정말로 온 정성을 다했다. 달달한 디저트를 만들고, 의견을 묻고, 책 위에 부스러기가 떨어지지 않을 법한 간식으로 메뉴를 바꾸고, 미리 따뜻하게 데워둔 찻잔에 갓 볶은 찻잎을 우려내어 차를 마시는 브라우닝의 만족스러운 얼굴을 확인하고, 기쁘게 웃었다. 시간은 온갖 은은하고 싱그러운 차향과 뒤죽박죽이 되어 꿈결처럼 달콤하게 지나갔다. 그러나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어콜라이트들이 가져오는 정보를 취합하여 추적자들의 계획을 예상하고, 그에 맞설 대책을 세우고, 종내에는 이 세계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 그것이 브라우닝의 역할이며, 그 목적을 위해서 브라우가 보통의 인간인 브라우닝이 습격으로부터 안전하도록 그를 옆에서 지키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차향이라는 것이 은은한 줄만 알았더니 달게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들이 태반인 것 같았다. 또렷하게 전략을 생각하는 것이 어째서 이리 힘든지, 무에 그리 탐정의 명민한 머리를 취하게 하는지. 멍하니 브라우가 따르는 잔을 받아들던 브라우닝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잔을 내려놓았다. 청년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전에 루드가 말했던 일 있잖은가. 갑자기 노파가 팔을 덥썩 잡았다던…”

하지만 브라우의 시선은 여전히 바닥에 놓인 찻잔에 꽂혀 있었고, 전에는 늘 비슷해보였던 얼굴이지만 그것이 풀죽은 얼굴임을 이제는 아는 터였다. 왜 여전히 그가 지켜주어야 할 여린 청년으로 느껴지는지 의문이 들었으나, 여하튼 브라우에게 사소한 심증으로 괜한 걱정을 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의심을 입 밖으론 내면 지금과 같은 평온한 티타임은 끝나게 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수명이 길고 노화가 드문 통기기구의 사람이 주름진 노파일 리가 없다. 합리적인 추리를 하는 것이 탐정 된 자의 도리다. 그리하여 브라우닝은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찻물과 함께 망상을 꿀꺽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억지로 삼킨 의심은 현실이 되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루드가 붉은 정장의 안쪽에 검은 피를 적시고 나타났을 때에도 브라우닝은 자신이 아직 꿈을 덜 깬 것인가 싶었다. 간혹 악몽처럼 한 청년의 피에 젖은 모습을 자꾸만 꿈에서 보고는 했기에. 그나마 추적을 따돌리는 데 성공해서 그들의 은신처인 이곳만은 들키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오랜만에 맛본 패배에 오두막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와중에도 브라우는 쟁반에 갓 구운 머핀과 윤이 나게 닦은 찻잔을 올려서 들고 온다. 하지만 브라우닝 스스로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미안하네, 브라우.”

브라우는 여전히 어서 받으라는 듯이 쟁반을 떠안고 있었지만, 브라우닝은 1인용 원목 의자에서 내려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자네는 내가 귀중하다고 말하면서 믿어주었지. 하지만 내가 주제에 탐정이라는 이름자를 달고서 이렇게나 어리석었어. 뻔히 보이는 단서를 당장의 평안에 눈이 멀어서 흘려보았지. 이렇게 자네의 호의를 받을 자격이 없다네.”

브라우는 쟁반을 탁 소리가 나게 세게 내려놓았다. 전에 없이 진지한 눈빛이었다. 그래, 마치 브라우닝에게 처음 케이스를 부탁했던, 브라우닝이 잊지 못해 케이스를 내버리지 못했던 그때와 같은 진지한 눈빛.

“그런 소리 말아요, 브라우닝. 우리에게는 지금 같은 생활을 누리는 것도 굉장한 기적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은인이에요. 처음 노움이 기적을 행해서 우리가 자아를 얻게 되었을 때, 우리가 기뻐했을 것 같나요? 아닙니다. 자신의 선택권도 존엄성도 없이 사람들의 발길질에 채이면서, 우리는 서커스의 웃음거리 주제에 자아를 얻게 된 운명을 매일같이 저주했어요. 특히 저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더. 그래서 우리는 그 괴로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고 당장 할 수 있는 것에 취미를 들인 거예요.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카드 마술을 하는 메렌은 도박을, 야수조련사인 루드는 야수 우리 옆에 피어난 꽃의 감상을, 단장과 사람들에게 원하든 원치 않든 차를 대접해야 하는 저는 홍차를. 그러니 스스로 원해서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지금이 얼마나 소중하고, 함께 해 주시는 당신이 어찌나 고마운지, 이걸 모르시겠나요?”

하지만 브라우닝에게 있어서 그 말은 위로와는 정반대의 소리로 닿았다. 그는 그만 맥이 풀려 의자에 앉은 자세가 비뚜름하게 무너져 내렸다. 허탈함에 웃음만 나왔다.

“하하하…”

“왜… 그러세요, 브라우닝 씨?”

“아니, 그러니까 자네 취미가 홍차였다는 거지. 그래서 같이 즐겨주는 내가 고마웠고.”

우물쭈물 어쩔 바를 모르는 브라우에게 브라우닝은 그저 웃어버렸다.

“아니, 자네는 잘못한 것 하나 없네. 그냥 내 자신이 한심해서 그래. 추리소설의 범인 하나 제대로 못 맞추고, 눈앞의 단서는 놓치면서 거기다 착각은 사서 하니 이거 탐정의 체면이 말이 아니구만.”

하지만 브라우는 여전히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러니까 자네는 잘못한 것 없대도-”

“착각이라고 생각하세요?”

아직 밀실의 꿈에서 덜 깬 것인가 싶었다.

“다시 말씀드려야 아시겠어요? 전 제가 원하는 사람에게 차를 따를 수 있어서 행복한 거예요.”

브라우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곧이 본다. 맑은 호박색의 눈동자 안에 바보같이 입을 헤 벌린 자신이 보이고, 오토마타든 그 무엇이든 상관없이 청년은 빼어나게 아름다웠고, 두근거리는 가슴에 말도 안 된다 생각하며 당황하여 몸을 뒤로 빼던 브라우닝은 그만-

우지끈 소리와 함께 의자가 부서졌다. 이번에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허리를 제대로 삐끗했는지 신음만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남자를 번쩍 안아 들고, 방으로 향하는 청년의 얼굴은 어쩐지 기뻐 보였다. 그리고 한 주 내내 뺨을 장밋빛으로 물들이며 청년은 침대에 누운 탐정의 시중을 들고, 그가 눈을 빛내며 쟁반에 한가득 담긴 차와 간식거리를 건넬 때마다 탐정은 두근거리는 가슴이 곤혹스러워 시선을 피하던 것은 꿈이 아님에도 꿈결같던 시간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