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새벽이었지.
나는 지나간 날을 곱씹고 너는 내일을 생각하라며 그리고 어스름이 동터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다운 네 모습이 보이자 나 홀로 지쳐 울었지.
사랑이라는 말은 입 밖에 꺼낼 수도 없었지.
아직도, 지친 지금이었지.
공중도시 판데모니움에서도 가장 높이 솟은 중앙통괄탑의 최상층. 이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 온 세상을 굽어보는 여자가 있었다. 아니, 여자라고 부르기에도 어폐가 있었다. 5세기 이상 뇌로 존재해온 괴물을 어느 누가 인간이라 여기겠는가? 그렇다고 ‘그것’이라 칭하기에는 레드그레이브의 감시망이 두려웠던 사람들은 결국 고대의 기록에 따라 그를 감시자라고 불렀다. 그 기록 중에 미모의 지도자에 대한 찬사가 가득하다는 사실은 뒤로 남겨둔 채.
레드그레이브 역시 옛날과 같은 숭배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눈을 뜬 감시자는 대신, 그 명칭처럼 도처에 감시의 눈을 깔고 현재에 대한 정보를 긁어모으는 일에 전념했다. 그렇게 세상을 분석한 후 감시자는 가장 먼저 두 가지의 정책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나는 이제 지상에 드물게 되어 버린 작업용 오토마타의 양산이고, 다른 하나는 지상에 만연한 소용돌이를 소멸시키기 위한 군대의 결성이었다.
정보 중에는 또한, 정체도 정체성도 불분명한 지도자에 대한 세간 사람들의 겁 섞인 수군거림도 있었다. 그러나 몸이 없는 지금은 오히려 그러한 두려움이 통치에 도움이 되는 바였다. 레드그레이브는 막연한 공포가 퍼져나가도록 놔두었다.
그에 관해서는 다시 움직일 수 있는 몸을 얻는다 해도 변할 것이 없다. 그녀는 부러 인간미가 없는 몸을 주문했다. 살이 거의 붙지 않은 상체와 아예 쇠로 이룬 다리에 더해, 더 신속한 업무 처리를 위한 보조전자두뇌까지. 연심이나 정열 같은 단어는 일말도 붙일 데 없는 몸을 뒤로 젖혀 옥좌에 기댄 채로 여왕은 오늘의 보고를 듣는다.
송이 전달한 첫 보고는 닥터 워켄과의 교섭 내용에 대한 이야기였다. 오토마타 제작에 인간의 몸을 사용하면 요구되는 스펙을 제때 납품할 수는 있지만 부작용이 따르게 되는데, 정말 실전에 투입할 것인지 여부를 되물었다고 한다. 가령 감정의 고조에 따른 폭주 같은 것 말이다. 레드그레이브는 이를 까득 깨물고 흘리듯이 속삭였다.
“그거야 감정이 과해지면 강제로 전원을 내리면 되는 문제로구나. 폭파라도 시켜 버리라고 이르거라.”
두 번째는 살가드로부터의 보고로, 레지멘트에 파견된 엔지니어들의 활동 경과와 예상 일정을 종합한 것이었다. 이제 곧 최초이자 최대의 소용돌이인 ‘결절점’, 디 아이의 공략에 착수할 예정이라 한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로구나.”
“괜찮으십니까, 레드그레이브님?”
“괜찮느냐니, 무엇이 말인가?”
살가드는 한 발짝 더 다가가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일찍이 말씀하신 대로라면, 그 소용돌이 안에 레드그레이브님의 형제 되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살가드여. 그대는 짐을 오백 년도 더 지난 사사로운 일에 마음을 쓰는 이로 보았던 것인가?”
“하지만 잠들어 계시던 레드그레이브님께는 그렇게 오래 전 일도 아닌 걸로……”
“그보다 어째 발목이 아프구나. 살가드여, 닥터 워켄을 불러주겠나?”
살가드가 머뭇대는 것을 보고서야 레드그레이브는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쇠로 된 접합부가 눈에 띄게 만든 무릎과 그 위로 한 겹 더 철구두를 씌운 발이 보인다. 통각을 느낄 리가 없는 부위였다. 환상통이다. 더없이 불쾌해진 레드그레이브는 방에 있던 엔지니어들을 모두 물려 버렸다.
홀로 남은 그녀는 정신을 맑게 하고 환각을 떨쳐버리려고 했으나, 그것에 너무도 정신을 소모해버린 탓에 저녁 보고를 들을 때는 도리어 환청 비슷한 것에까지 시달리는 상태였다.
“이것이 현장에서 겨우 수거해 온 기기입니다. 내부에 들어갔던 엔지니어의 시신이 사라진 현상과 관련하여 어떤 기능이 있는 것인지 아직 정확히 밝혀내지 못했지만……”
보고하는 목소리 사이로 언젠가 들었던 여성형 오토마타의 높은 웃음소리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황한 살가드가 그녀의 의중을 다시 확인했다.
“레드그레이브님?”
“설명을 계속하게. 그래, 이 기계가 그 가엾은 치가 연구해낸 작품이란 말이지…….”
별 일 없다는 투로 응대하며 레드그레이브는 ‘요람’ 안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당황했다. 만져져야 할 바닥이 없었다. 팔이 완전히 빠지고, 이윽고 상체가 무너질 때까지. 한 가지 색으로 형용할 수 없이 부신 빛이 본래 바닥이 있었어야 할 곳으로부터 쏟아지며 눈을 시리게 찔렀다. 거센 인력이 그녀를 끌어당겨 몸이 기우뚱 미끄러져 들어갔다. 시야가 무너지고 균형 감각이 놀라다 못해 제멋대로 요동을 쳤다. 다급히 자신을 부르는 수하의 목소리가 멀리로 사그라졌다. 세상이 빙빙 돌며 심연처럼 깊은 공동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간다고 느꼈다.
그 순간, 머리를 울리던 환청의 내용이 바뀌었다. 오래 전에 들었던 형제의 목소리였다.
‘케이오시움은 인간의 갈망에 응답해, 레드그레이브.’
적응이 되지 않는 광경에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늘이 – 끝없는 허공을 하늘이라고 이르는 것이 옳다면 – 보랏빛이었다가, 선홍색이었다가, 비취색으로 일렁였다. 땅이라고 할 수 있을 바닥은 썩은 진흙마냥 시꺼멓다. 황량한 땅의 사이사이로 간혹 거무죽죽한 나뭇가지 같은 것이 비죽 솟아 있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저 멀리에서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다가오는 괴물 뿐.
“이계의 생물…….”
소용돌이에 관한 것은 알고 있었다. 뇌를 들어내기 전에 직접 그 여파를 보아서도, 다시 깨어난 후에 질릴 만큼 들은 보고를 통해서도 알고 있다. 레드그레이브는 생각에 잠겼다. 소용돌이가 이계와의 교점이라고는 하지만 이리 직접적으로 공간이동을 한 사례가 얼마나 있던가? 손에 꼽을 것이다. 소용돌이로 추정되는 이 지점에서 판데모니움으로 돌아가야 한다. 단순 이동을 통해 벗어날 수 있을까? 어느 방향을 택해야 할 것인가? 턱을 괴고 갖가지 변수를 고찰하는 레드그레이브에게, 어느새 한 발치 앞으로 다가온 아까의 괴물이 달려들었다.
레드그레이브는 가뿐한 발돋움으로 자리에서 벗어났다. 목표물의 갑작스런 이동에 균형을 잃은 괴물에게 가슴의 브로치로부터 뻗어 나온 빔이 명중했다. 육중한 몸이 비틀거리며 바닥에 무너졌다. D형 생물은 대사가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지만 행동양식이 단순하다. 괴물이 다가오는 것을 인식했을 때부터, 레드그레이브의 보조전자두뇌는 이미 80% 이상 행동분석을 마쳐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레드그레이브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니고 있었으며 지금까지 변함이 없는 기질이었다.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에 버릇이 들은 뇌는 일곱 수를 앞서 계산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다른 생물을 시각 모듈에 인식했을 때마저도 그랬다.
그것은 퍽 어린 인상과 동시에 수백 년은 묵은 듯 주름진 껍데기를 지닌 기묘한 생물이었다. 레드그레이브는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를 바탕으로 저것이 이 소용돌이의 근원이 되는 케이오시움을 품은 코어 생물이리라 추론했다. 이 생물은 기이하게도 레드그레이브를 보자 잠시 멈칫하더니 공격 태세를 취하는 대신 뒤돌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추론은 확신으로 빛깔을 바꾼다. 이곳에서 무사히 나가기 전까지 저 생물과 같은 공간 안에 있게 되는 것은 필연일 터. 보조전자두뇌는 해당 생물의 공격성을 늦추고 무력화시키는 가장 적합한 해결책을 연산했다. 최선의 해결책을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품은 대뇌 역시 연동해야만 했다.
이제는 까마득히 먼 5백 년 전의 과거. 그 안에 지금은 말라비틀어진 시체 한 구가 있다. 레드그레이브는 오래 전에 죽어버린 여자의 정보를 끄집어냈다. 상냥한 목소리를 그려냈다.
“여전히 수줍음이 많구나, 멜키오르.”
지체 없이 달아나던 발이 멎었다. 어깨가 들썩이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잠시, 멜키오르는 다시 후다닥 도망치기 시작했다. 레드그레이브는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숨을 골랐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과거의 여자가 잦아들고 그녀는 다시 돌아갈 방안을 찾는 판데모니움의 감시자가 되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바디 손상으로 인한 자동 복구 시스템의 가동이 이제 일곱 번째였다. 눈을 찌르던 형광의 하늘은 거대한 괴물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첫 번째 괴물의 경로를 연산하여 달아나고 두 번째 괴물의 꼬리를 쳐내자 세 번째 괴물이 손톱으로 팔을 베었다. 레드그레이브는 낮게 신음하며 강박적으로 위치 추적 시스템을 기동시키려 애썼다. 공간이 왜곡된 소용돌이 내부에서는 동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괴물들의 틈새를 뛰쳐나가며 레드그레이브는 절로 이런 공간에서 수백 년을 살아남았을 한 남자를 떠올렸다. 그의 도움을 바라서는 안 된다고 고개를 젓는 사이 거대한 손이 그녀의 가는 팔을 움켜쥐었다. 몸이 아찔 허공에 들렸다. 높은 공중에서 머리가 하얗게 비어 땅을 내려다보았다. 거짓말같이 아까 생각했던 남자가 서 있었다.
멜키오르가 팔을 들자 괴물은 힘이 빠진 듯 레드그레이브를 놓았다. 바닥에 쓰러지고는 곧 입자로 화하여 대기 중으로 날아갔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쭈뼛 식은땀이 흘렀다. 안도보다 두려움의 감정이 더 컸다. 레드그레이브는 차라리 아까까지가 더 침착했었다. 사실은 그가 처음에 도망칠 때도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그런 그녀에게는 고맙게도 멜키오르는 곧 다시 얼굴을 가리고 달아났다. 늙어버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걸까. 사실 그런 겉모습 같은 것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그녀 역시 그저 만들어낸 몸이니 그의 외양에 대하여 느끼는 감정이라면 차라리 동질감에 가까웠다. 너도, 나도 변하는구나.
그럼에도 그가 사라지자 안도하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는지, 잿빛 도는 땅 위로 그녀는 털썩 소리가 나게 무너졌다. 갸름한 등이 둥글게 움츠러들었다. 남이 보지 못하도록 무릎을 감싸 안아 형성한 작은 공간 사이로야 겨우 밭은 숨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여전히 멜키오르가 지켜보고 있었고, 레드그레이브 역시 그것을 무리 없이 짐작하고 있었던 탓이다.
레드그레이브가 멜키오르로부터 도망치고, 괴물로부터 도망치고, 멜키오르가 레드그레이브로부터 도망치고 자동 복구 시스템의 동작 횟수는 일흔 번째를 훌쩍 넘을 무렵.
그녀는 무서웠다. 여전히 마음은 5세기 전에 두고 온 듯, 매일 듣던 3300년대의 보고가 멈추고 괴물들에게 시달리면서 밤에 꾸기 시작한, 형제들과 행복하던 시절의 꿈이 무서웠다. 그러다가 깨어나서는 곁에 있을 그라이바흐를 찾는 자신이 무서웠다. 무엇보다 오백 년 동안 그 시간을 곱씹고 있었을 멜키오르가 무서웠다. 수줍음을 기막힌 방패로 삼아 레드그레이브가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도록 놔두되 그녀가 죽지는 않게 지켜보는 멜키오르가 무서웠다.
무서웠으므로 벗어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마음을 움직여야만 했다. 역시 무서웠으나 그래도 시도해 볼 가치는 있었다. 눈이 예순 번째 마주쳤을 때 즈음부터, 멜키오르는 조금씩 고개를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눈이 마주치는 것은 찰나였지만 그 눈동자 안에 담긴 아쉬움과 그리움과 얽어매는 집착을 읽어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그보다는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남았을 거라 믿고 싶었다. 까마득히 먼 과거에서나마, 그들은 정말로 소중한 형제였으니까.
레드그레이브는 가만히 서서 오팔 빛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허리에 매인 리본이 나풀나풀 나부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면서 고개를 원형으로 젓던 도중에, 그녀는 시선을 그대로 멈췄다.
“멜키오르.”
오래 전에 하던 것처럼 상냥하게 완성된 표정으로 웃어 보려 했으나, 어쩐지 쓴웃음이 되었다.
“거기에 있는 거 알고 있어. 고마워, 지금까지 지켜 주어서……. 감사 인사는 얼굴을 보고 하고 싶은데, 이만 나와 주지 않겠어?”
한참을 그대로 있자 형제는 고개를 숙인 채 쭈뼛쭈뼛 나타났다. 가슴이 멀미가 날 듯 울렁거렸다. 레드그레이브는 달려가 주름진 그의 손을 주저 없이 잡았다.
“그동안 여기 있느라고 고생했지, 멜키오르? 코어와 융합해서 여기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거 알아. 나도 아주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으니까 잘 알아. 외로웠지? 쓸쓸했지? 알아. 알아, 멜키오르.”
떨리는 가슴을 감추려 상대의 손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나를 이만 여기서 내보내 줘. 당신이 반드시 여기서 나오게 해 줄게. 판데모니움의 모든 엔지니어의 연구를 동원해서 꼭 그렇게 할게.”
다시 제대로 웃으며 레드그레이브는 손에서 멜키오르의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가까이 있는 만큼, 눈 속에 담긴 감정이 더더욱 제대로 보였다. 말 대신 조용한 배신감과 분노로 멜키오르는 레드그레이브의 손을 뿌리쳤다. 그대로 우두커니 서서 멀어지는 멜키오르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어김없이 이계의 괴물들이 나타났다. 이제는 몸에 익은 대로 공격하고 달아나며 레드그레이브는 소리 없이 뇌까렸다. 역시 안 돼.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어. 처음부터. 그때부터……
“멜키오르!”
그를 다시 불러내는 것은 간단했다. 괴물들의 앞에 그저 멍하니 앉아 있으면 되었다.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을 심산이었다.
“또 어디 가는 거야? 저번에 나 때문에 화가 난 것 같아서 선물을 준비했는데.”
기계소녀는 달려가서 남자를 꼭 껴안았다. 뜀박질하는 심장 소리가 몸을 타고 그대로 전해졌다.
“고마워, 멜키오르……. 당신은 내 인생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람이야. 사랑하는 내 형제여.”
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올려다보면서 레드그레이브는 하얗게 웃었다.
“그리고 증오해.”
가슴의 브로치에서 빛이 번쩍였다. 시간이 아주 빠르게 가는 것 같기도 했고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 같기도 했다. 멜키오르는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침을 꿀꺽 삼키며 몸을 뒤집어 보자 제대로 명중한 듯, 남자의 가슴께에 난 구멍 사이로 검은 구슬에서 금이 가 치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잿빛 연기가 나고 있었다. 왈칵 눈물이 났다. 레드그레이브는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부터가 케이오시움을 파괴하기 위한 용도로 만든 레이저였다. 코어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면 이세계와의 교점이 사라지기 전에 빨리 소용돌이 바깥으로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눈앞의 장면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해방감인지 회한인지 모를 온갖 감정이 물밀 듯이 몰려와 자꾸만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가슴을 꽉 쥐고 달려가던 그녀의 흐릿한 시야에 검게 우글거리는 구름 같은 것이 비쳤다. 이계의 괴물들이 무리지어 나타나고 있었다. 뒤를 돌았다. 모든 생명체가 레드그레이브를 에워싸고 다가오고 있다. 발을 멈췄다. 레드그레이브는 울먹거렸다.
“나는 어쩔 수 없었어.”
아주 어릴 적에 형제들에게 하던 것처럼 아이 같은 어투로 울먹였다.
“어쩔 수 없었어, 멜키오르…….”
곧 가슴에서 붉은 피를 흘리는 남자가 나타나 레드그레이브를 붙잡고 바닥으로 내쳤다. 질척한 바닥에 누워 얼굴 위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맞으면서 레드그레이브는 악을 썼다.
“난 벗어날거야, 멜키오르……. 난 알아. 사실 알고 있다구. 코어 생물이 죽으면 소용돌이가 약화되고 코어가 회수하기 쉬워져. 디 아이가 모든 소용돌이의 중심이 되는 노드라고 엔지니어들이 내게 보고했어. 네가 죽으면 지상의 이 모든 혼란이 끝난다고. 그리고 난 벗어날 수 있어. 모든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어!”
기억.
그 기억이 문제였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라이바흐가 한 송이 한 송이를 공들여 가꾼 장미 화단은 물올라 발갛게 피어올랐다. 그윽한 향기에 이끌려 코를 갖다 대자 꽃잎이 살랑 얼굴을 간질였다. 레드그레이브는 그만 재채기를 했다. 장미에서 얼굴을 떼고 피식 웃고 있는 그라이바흐를 새침하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곧 두 웃음소리가 뒤섞여 정원 안에 만발했다. 레드그레이브는 내키는 대로 손을 뻗으면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미만을 골라 꺾었다. 가시가 손을 찔러 피가 흐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아름을 가득 솎아 안고 멜키오르의 연구실로 향했다.
병상에 누워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멜키오르의 앞머리를 넘겨주고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라이바흐의 정원에서 가장 싱싱한 꽃들만 골라 왔어. 익숙한 내음을 맡으면 조금이라도 더 힘이 나지 않을까 하고. 어서 기운을 되찾고 꽃이 만개한 정원에서 다시 만나기를 바라.”
황량한 연구소에는 사람이 전혀 없었기에 일부러 잠깐 얼굴이라도 보려고 시간을 내어 들른 터였다. 그렇기에 꽃을 꽂을만한 병이 없나 두리번거리던 레드그레이브가 들은 것은 의외의 말이었다.
“좀 더 같이 있어주면 안 될까, 레드그레이브?”
결국 책상 위 비커에다가 대충 꽃대를 꽂아 넣고 침대 맡에 앉아서 레드그레이브는 난처하게 웃었다.
“정말 미안해, 멜키오르. 오늘은 선약이 있는걸. 그럼, 다음에 보자.”
다시 뒤돌아서는 레드그레이브에게 멜키오르가 콜록거리며 물었다.
“그라이바흐와의?”
“응…….”
“내가 지금 왜 아픈지는 알아……?”
레드그레이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의 멜키오르는 자신의 앞에서 말수가 적다. 열에 들떠 그런지 형제는 평소와는 좀 다른 것 같았다.
“요즘 계속 몸살을 앓고 있잖아? 멜키오르는 어릴 때부터 항상 무리하는 습관이 있었으니까. 조금 더 자신의 몸에 신경을 기울여 줘요. 아 참 미안해, 멜키오르. 지금 빨리 가지 않으면 저녁 공연에 늦게 되어서……”
급한 일정에 정신이 팔려서 일단 문고리부터 잡았다. 문이 덜컹 덜컹 흔들렸다. 몇 번을 흔들어도 열리지 않았다. 순간 등골을 타고 까닭 모를 오한이 들었다. 등 뒤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케이오시움은 인간의 갈망에 응답해, 레드그레이브.”
동시에 와장창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놀라 뒤를 돌았더니 꽃을 꽂았던 비커가 책상 밑으로 떨어져 깨져 있었다. 붉은 꽃잎이 바닥 위에 잔뜩 쏟아져 내렸다. 레드그레이브는 저도 모르게 탄식하며 몸을 굽혀 탐스러운 꽃잎을 주우려 했다. 주워 담는 손을 멜키오르가 덮어 막았다. 잠시 그대로 있었다. 화들짝 놀라 상대를 밀쳐내다가 반대로 자신이 바닥에 미끄러졌다. 다시 일어나려니까 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려다보니 발목에 유리 조각이 박혀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힘을 주려 할수록 유리 조각이 더 깊이 박히는 것 같다. 신경을 타고 엄습하는 격통에 레드그레이브는 아무 말도 못하고 들숨만 거푸 들이켰다. 현기증 속에 겨우 입을 열어 형제를 불렀다.
“도와줘, 멜키오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에 압도되어서는 안 될 지도자인데도 상황과 일곱 수를 앞서 가는 추론이 절로 두려움을 낳는다. 발목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그저 관조하듯이 지켜보는 눈에 머리끝까지 소름이 끼쳤다.
“내 몸이 지금 이 모양인 건 혼돈이 갈망에 결합했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조금만 더 같이 있어줘.”
멜키오르가 다가왔다. 그녀에게 다가와 유리 조각이 꽂힌 발 대신 벌벌 떨리는 팔을 들었다.
“아파, 멜키오르. 도와줘……”
“가지 마, 레드그레이브.”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멜키오르는 레드그레이브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머리부터 뺨, 턱까지 차례로 대었다. 곧 손바닥에다 입을 맞췄다. 열병을 앓는 입술이 델 듯이 뜨거워 손 위로 열꽃이 피는 것 같았다. 침실 바닥 위로 붉은 꽃잎이 온통 흐트러져 있었다.
대리석과 문자로 쌓아 올린 울타리 안에서 세 사람의 세상은 오롯한 것이라 믿었다. 자신이라는 변수로 인해 아슬아슬 흔들리는 관계라는 것은 일찍이 알고 있었으나 깨지기 쉬운 것을 알기에 더욱 소중했다. 새벽녘에 남자는 눈물을 쏟으며 용서를 빌었고, 왜 오지 않았는지 다그치는 그라이바흐에게는 멜키오르의 상태가 퍽 좋지 않아 보여 밤새 병간호를 했다고 말했다. 그가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침묵을 지켰으나 기억이 몸에 남았다. 그때 진작 알았어야 했다. 언젠가 다시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알았어야 했다. 달달 떠는 레드그레이브에게 멜키오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알고 있어, 레드그레이브.”
멜키오르는 쓰러진 레드그레이브의 발목을 무릎으로 짓누르며 그녀 위로 올라섰다.
“너는 그때도 지금도 나를 몰라……. 내가 그동안 여기서 아무 생각도 없었을 것 같아? 나는 기다렸어. 네가 깨어날 때까지. 네가 깨어난 걸 알고서야 나도 이렇게 깨어난 거야.”
남자의 가슴팍에 드러나 있던 코어에서 이채가 돌았다. 상처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재생됐다. 그러나 피가 멎지 않았다. 벌건 집착이 여자의 얼굴 위로 뚝뚝 흘러내렸다. 레드그레이브는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멜키오르가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턱을 잡아 자신을 계속 보도록 했다.
“알아. 너는 모든 일 때문에 나를 용서할 수 없어. 결국 나를 사살하려고 군대를 조직하고 있잖아……. 세상 전반적인 것에 대해서는 네가 더 많이 알지도 모르지만, 우리 둘에 대해서는 내가 너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 아마 내 바람이 너를 이리로 불렀어. 알아. 네가 처음부터 나를 죽이려던 것도 알아. 용서는 바라지도 않아. 그냥, 이렇게 조금만 더 같이 있어줬으면 했어.”
“알면 죽어버려. 죽고 끝나서 내 세상에서 없어져 버려. 나는 여기서 벗어날 거야.”
다리가 매인 채 몸을 들썩이며 죽은 여자가 흐느꼈다.
“그건 안 돼.”
5백 년 동안 과거가 까맣게 부패할 때까지 곱씹고 곱씹던 남자는 그때 그대로 여자의 손을 들었다. 차가운 쇠로 된 손을 머리부터 턱, 뺨까지 차례로 대었다.
“나도 여기서 더 이상 원망을 사고 싶지는 않아. 그렇게 원한다면 보내줄게, 레드그레이브. 하지만 기억해. 보내주는 건 나도 여길 벗어나서, 이 밖에서 다시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니까.”
몇 마디를 더 중얼거리며 그는 철판으로 된 손바닥 위에 입을 맞췄다. 마치 낙인이었다.
해발 1.5km, 돔 형태의 막으로 둘러싸인 공중도시 판데모니움에서도 더욱 높은 하늘을 향해 치솟은 중앙통괄탑의 최상층. 이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 온 세계를 굽어보는 여자가 있었다. 세상을 사랑하고 지키라 태어난 여자는 하늘 위의 신이 되어 까마득한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서는 대공사도, 전쟁도 꼬물거리는 아가 발가락처럼 작디작기 그지없다. 제아무리 큰 움직임도 언젠가는 멎고 평화를 찾는다. 그것이 그녀가 온 힘으로 다스려 지켜내는 세상이었으니,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 절대 끊이지 않는 거대한 움직임이 있었다. 그녀를 지켜보는 디 아이(The eye)이다. 소용돌이는 인간이 볼 수 있는 모든 빛을 발하면서 벌레마냥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하늘로 솟는다. 그 오묘한 빛을 여자의 시각 모듈이 인지하고 뇌에서 연산한다. 뇌는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단 하나의 부위다. 어쩔 바 없이 그 빛깔 중에는 500년 전의 영광도 있고, 형제들에 대한 애정도 있고, 그리움도 좌절도 공포도 있고, 죽었다 여기었던 오래 전의 여자도 있다. 용솟음치는 빛깔이 눈에 띌 때마다 땅에서 뻗은 쇠사슬에 죄이는 것처럼 가슴이 아프다. 과거가 죽지 않는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고통이 늙지도 쇠하지도 않고 살아남아 영생할 것만 같다. 언젠가는 이 속박이 풀릴까. 귓가에 옛 형제의 마지막 말이 메아리친다. 팔을 감싸 안았다.
‘어느 곳에서든지 기억해. 나를. 나는 너를 놓지 않아.’
저 소용돌이를 하루 빨리 치워버리면 이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레드그레이브는 어깨를 움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