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우닝 오른쪽 합작 – 브라우x브라우닝

숨소리마저도 시끄럽게 느껴지는 적막한 밀실 안에서, 그는 화병 밑에 가려져 있던 굳은 자국을 발견했다. 이야말로 범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이 분명했다. 침을 꿀꺽 삼키고 그 위로 손을 올리는 찰나, 녹슨 경첩이 맞물려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문이 열렸다.

“발견해 버리셨군요.”

황급히 뒤를 돌아보는 그에게 비죽 웃고 있는 얼굴은 바로-

 

브라우닝은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의자에서 떨어졌다. 잘못 꺾인 듯 따끔따끔 아픈 허리를 짚자 절로 아이고 소리가 났다. 눈물이 핑 돌았다. 몸의 고통보다도, 정신적인 충격이 더 컸다. 그간의 전개를 떠올리자 다시 한 번 아득한 기분이 들어서 읽던 추리소설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그것을 흰 장갑을 낀 손이 주워들었다.

“괜찮으세요, 브라우닝 씨?”

입을 열었지만 차마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허리를 짚은 채 눈물을 글썽이는 브라우닝에게 청년은 재차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역시 가엾은 엘비스가 진범이라는 데 대한 충격이 크신 거죠? 당신은 좋으신 분이니까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았어요. 쫓기는 저를 걱정하고 도와주셨잖아요.”

갑작스런 찬사에 얼굴을 들자 브라우는 고개를 홱 돌려 아까까지 브라우닝이 앉아 있던 원목 의자를 만지작거렸다. 풀잎 빛의 짧은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보이는 귀 끝이 조금 붉은 것 같기도 하고. 오토마타에게도 그런 기능이 있나? 착각이겠지, 생각을 하는 브라우닝의 쪽을 브라우가 다시 돌아보았다. 부끄러운 생각을 하던 머릿속을 들킨 듯한 기분에 괜스레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행히도 브라우는 평이한 어투로 사무적인 내용만을 말할 뿐이었다.

“이런, 의자에 금이 갔네요. 제가 일단 수리해 볼 테지만 당분간 여기 앉을 때는 조심하시는 게 좋겠어요.”

의자 위로 몸을 굽히는 브라우의 모습 위로 그를 처음 봤던 때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눈앞에서 검은 피를 앞섶에 흠뻑 젖은 채로 웅크리고 있던 모습, 일단 병원부터 가자고 해도 한사코 거절하던 모습. 그리고 곧 총을 맞아 바닥에 맥없이 쓰러져 있던 가는 팔과 가는 허리.

“잠깐, 내가 옮기…”

“네?”

가슴까지 번쩍 올린 의자를 보고 브라우닝은 그만 머쓱하게 팔을 내렸다.

“아니네, 아무 것도.”

상대는 오토마타다. 사람이 편의를 위하여 만들어 낸, 무한의 기동력을 가진 기계. 그런데 왜 자꾸 여러모로 착각하게 되는지, 아무래도 눈앞에서 힘없이 바닥에 흩어져 있던 그 가는 사지가 각인이 된 것이 분명했다.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그 모습이 바로 브라우닝 자신이 지금의 여정을 시작한 계기이며, 어콜라이트라는 집단과 함께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도 그들이 자신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오토마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그날 밤 꿈에서 브라우닝은 밀실 안에 있었다. 낡은 경첩이 끼익- 하고 마찰하면서 문이 열리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브라우닝은 이미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의 가슴께까지밖에 오지 않는 여리고 작은 청년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그려낸 것처럼 상냥한 웃음을 말끔한 얼굴에 띠고서. 만들어질 때부터 내장된 기능임에 틀림이 없는 그 미소가 아름다우면서도 어쩐지 슬퍼, 브라우닝은 그것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깨어나서는 곧 꿈에 대해 잊어버렸다.

 

스스로를 ‘어콜라이트’라 지칭하는 의문의 남자들, 아니 오토마타 몇 구와 사립탐정 브라우닝이 기거하는 오두막은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깊은 숲 속에 있었다. 남향으로 높이 낸 창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한낮의 햇빛은 델 듯이 뜨거웠다. 사람의 살결을 바짝바짝 말려 가는 태양빛 속에 브라우닝이 건조한 책장을 팔랑팔랑 넘겨 가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한참을 지속되던 소리는 이내 멎고, 낮게 잠긴 목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지루하군.”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청아한 음성이 뒤를 이었다.

“마도 로젠부르그 시리즈는 아직 다 안 읽지 않으셨나요, 브라우닝 씨?”

그리고 푹푹 내쉬는 한숨 소리.

“읽고 안 읽고의 문제가 아니네. 아무리 소설을 읽는 것이 내 취미라지만, 며칠 내리 책만 읽고 있기는 적적하지 않겠나.”

여전히 그려낸 것처럼 상냥하게 웃고 있는 브라우의 얼굴이 지금은 갑갑하고 불편했다.

“이보게. 나는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 같은 일상에 지쳐서 자네들을 따라 나섰다네. 그런데 아무리 추적이 있다지만 이렇게 집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책만 읽고 있어서야 전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겠어.”

이렇게 말을 하면 과연 저 웃음이 가실까. 속이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을 죄어 오는 두려움에 시선이 떨렸다. 그러나 상대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러면 저와 함께 티타임이라도 가지시겠어요?”

 

오두막은 깊은 숲 안에 있었기에, 따스한 봄볕 아래 간혹 새 지저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 왔다. 입술에 닿는 수온은 딱 기분 좋을 만큼 따스했고, 엄선된 차향은 향기로웠으며, 청년은 상냥하고 아름다운 완벽한 시종이었다. ‘어콜라이트’라는 호칭을 온몸으로 증명하려는 것처럼.

홀로 읽는 추리소설은 금세 물리고 말았지만, 둘이 함께 소설의 전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새로운 기쁨으로 브라우닝을 즐겁게 했다. 그는 다시 책이 읽고 싶었다. 다시금 이 생활이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궁금증도 생겼다.

“브라우. 자네는 지금의 생활이 마음에 드나?”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년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따끔거렸다.

“나는 아까 불평을 했네만, 자네는 자신의 이야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지 않아. 이렇게 내내 집안에서 지내는 것, 자네는 견딜 만한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브라우는 바로 대답이 없었다. 역시 괜한 질문을 한 게야. 이 소년은 오토마타다. 완전하게 만들어진 시종이야.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리가 없지.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브라우닝 씨, 저는…”

소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저는 걱정이 됩니다. 바깥에 나가서 정보를 알아보고 있는 루드도, 자금을 모아 오는 메렌도, 추적을 교란시키는 비레아도 걱정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각별합니다. 완전한 해방을 위해서 지금 믿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서로밖에 없어요. 그리고 또-”

남자를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피어났다.

“당신이 있지요. 당신은 우리의 사정을 가엾게 여겨 분노하고 거리낌 없이 도와주겠다고 한 최초의 사람이에요. 아무리 우리가 서로에게 각별하다고 해도 브라우닝 씨, 당신만큼 특별한 사람은 또 없어요. 그러니 당신의 시중을 들고 늘 곁에서 지키는 것이야말로 제게 있어 가장 큰 기쁨입니다. 불만이 있을 턱이 없지요.”

이러한 표정을 단순히 제조된 웃음이라 치부했던 브라우닝 자신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그리고… 드디어 제 이름을 불러주셨네요. 기뻐요, 브라우닝.”

소년이 수줍은 것인지, 그 말을 듣는 브라우닝 자신이 수줍은 것인지 잘 분간이 가질 않았다.

 

그날 밤도 어김없이 꿈을 꾸었다. 이전과 같은 밀실 속, 청년의 웃음이 숨이 멎을 만큼 해사했다. 웃으며 다가오는 브라우의 뒤에서 무언가가 번뜩였다.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청년은 브라우닝을 밀쳐 쓰러뜨리고는 그 위에 올라타 가슴에 칼을 찔러 넣었다. 가슴이 쓰림을 느끼며 눈을 뜬 브라우닝은 이제야 그간의 꿈들을 기억해냈다. 어제 들었던 의문도 함께 기억해냈다.

어째서 브라우는 그 모든 추리소설의 내용을 알고 있었을까? 심지어 브라우닝이 어느 부분을 읽고 있었는지도.

온갖 행동에서 이유를 찾는 것은 직업병이야. 안 좋은 습관이다. 그리 되뇌어도 그는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동안 둘만의 티타임은 계속되었다. 브라우닝에게 청년은 정말로 온 정성을 다했다. 달달한 디저트를 만들고, 의견을 묻고, 책 위에 부스러기가 떨어지지 않을 법한 간식으로 메뉴를 바꾸고, 미리 따뜻하게 데워둔 찻잔에 갓 볶은 찻잎을 우려내어 차를 마시는 브라우닝의 만족스러운 얼굴을 확인하고, 기쁘게 웃었다. 시간은 온갖 은은하고 싱그러운 차향과 뒤죽박죽이 되어 꿈결처럼 달콤하게 지나갔다. 그러나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어콜라이트들이 가져오는 정보를 취합하여 추적자들의 계획을 예상하고, 그에 맞설 대책을 세우고, 종내에는 이 세계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 그것이 브라우닝의 역할이며, 그 목적을 위해서 브라우가 보통의 인간인 브라우닝이 습격으로부터 안전하도록 그를 옆에서 지키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차향이라는 것이 은은한 줄만 알았더니 달게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들이 태반인 것 같았다. 또렷하게 전략을 생각하는 것이 어째서 이리 힘든지, 무에 그리 탐정의 명민한 머리를 취하게 하는지. 멍하니 브라우가 따르는 잔을 받아들던 브라우닝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잔을 내려놓았다. 청년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전에 루드가 말했던 일 있잖은가. 갑자기 노파가 팔을 덥썩 잡았다던…”

하지만 브라우의 시선은 여전히 바닥에 놓인 찻잔에 꽂혀 있었고, 전에는 늘 비슷해보였던 얼굴이지만 그것이 풀죽은 얼굴임을 이제는 아는 터였다. 왜 여전히 그가 지켜주어야 할 여린 청년으로 느껴지는지 의문이 들었으나, 여하튼 브라우에게 사소한 심증으로 괜한 걱정을 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의심을 입 밖으론 내면 지금과 같은 평온한 티타임은 끝나게 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수명이 길고 노화가 드문 통기기구의 사람이 주름진 노파일 리가 없다. 합리적인 추리를 하는 것이 탐정 된 자의 도리다. 그리하여 브라우닝은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찻물과 함께 망상을 꿀꺽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억지로 삼킨 의심은 현실이 되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루드가 붉은 정장의 안쪽에 검은 피를 적시고 나타났을 때에도 브라우닝은 자신이 아직 꿈을 덜 깬 것인가 싶었다. 간혹 악몽처럼 한 청년의 피에 젖은 모습을 자꾸만 꿈에서 보고는 했기에. 그나마 추적을 따돌리는 데 성공해서 그들의 은신처인 이곳만은 들키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오랜만에 맛본 패배에 오두막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와중에도 브라우는 쟁반에 갓 구운 머핀과 윤이 나게 닦은 찻잔을 올려서 들고 온다. 하지만 브라우닝 스스로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미안하네, 브라우.”

브라우는 여전히 어서 받으라는 듯이 쟁반을 떠안고 있었지만, 브라우닝은 1인용 원목 의자에서 내려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자네는 내가 귀중하다고 말하면서 믿어주었지. 하지만 내가 주제에 탐정이라는 이름자를 달고서 이렇게나 어리석었어. 뻔히 보이는 단서를 당장의 평안에 눈이 멀어서 흘려보았지. 이렇게 자네의 호의를 받을 자격이 없다네.”

브라우는 쟁반을 탁 소리가 나게 세게 내려놓았다. 전에 없이 진지한 눈빛이었다. 그래, 마치 브라우닝에게 처음 케이스를 부탁했던, 브라우닝이 잊지 못해 케이스를 내버리지 못했던 그때와 같은 진지한 눈빛.

“그런 소리 말아요, 브라우닝. 우리에게는 지금 같은 생활을 누리는 것도 굉장한 기적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은인이에요. 처음 노움이 기적을 행해서 우리가 자아를 얻게 되었을 때, 우리가 기뻐했을 것 같나요? 아닙니다. 자신의 선택권도 존엄성도 없이 사람들의 발길질에 채이면서, 우리는 서커스의 웃음거리 주제에 자아를 얻게 된 운명을 매일같이 저주했어요. 특히 저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더. 그래서 우리는 그 괴로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고 당장 할 수 있는 것에 취미를 들인 거예요.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카드 마술을 하는 메렌은 도박을, 야수조련사인 루드는 야수 우리 옆에 피어난 꽃의 감상을, 단장과 사람들에게 원하든 원치 않든 차를 대접해야 하는 저는 홍차를. 그러니 스스로 원해서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지금이 얼마나 소중하고, 함께 해 주시는 당신이 어찌나 고마운지, 이걸 모르시겠나요?”

하지만 브라우닝에게 있어서 그 말은 위로와는 정반대의 소리로 닿았다. 그는 그만 맥이 풀려 의자에 앉은 자세가 비뚜름하게 무너져 내렸다. 허탈함에 웃음만 나왔다.

“하하하…”

“왜… 그러세요, 브라우닝 씨?”

“아니, 그러니까 자네 취미가 홍차였다는 거지. 그래서 같이 즐겨주는 내가 고마웠고.”

우물쭈물 어쩔 바를 모르는 브라우에게 브라우닝은 그저 웃어버렸다.

“아니, 자네는 잘못한 것 하나 없네. 그냥 내 자신이 한심해서 그래. 추리소설의 범인 하나 제대로 못 맞추고, 눈앞의 단서는 놓치면서 거기다 착각은 사서 하니 이거 탐정의 체면이 말이 아니구만.”

하지만 브라우는 여전히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러니까 자네는 잘못한 것 없대도-”

“착각이라고 생각하세요?”

아직 밀실의 꿈에서 덜 깬 것인가 싶었다.

“다시 말씀드려야 아시겠어요? 전 제가 원하는 사람에게 차를 따를 수 있어서 행복한 거예요.”

브라우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곧이 본다. 맑은 호박색의 눈동자 안에 바보같이 입을 헤 벌린 자신이 보이고, 오토마타든 그 무엇이든 상관없이 청년은 빼어나게 아름다웠고, 두근거리는 가슴에 말도 안 된다 생각하며 당황하여 몸을 뒤로 빼던 브라우닝은 그만-

우지끈 소리와 함께 의자가 부서졌다. 이번에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허리를 제대로 삐끗했는지 신음만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남자를 번쩍 안아 들고, 방으로 향하는 청년의 얼굴은 어쩐지 기뻐 보였다. 그리고 한 주 내내 뺨을 장밋빛으로 물들이며 청년은 침대에 누운 탐정의 시중을 들고, 그가 눈을 빛내며 쟁반에 한가득 담긴 차와 간식거리를 건넬 때마다 탐정은 두근거리는 가슴이 곤혹스러워 시선을 피하던 것은 꿈이 아님에도 꿈결같던 시간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