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니어로서 직위를 부여받은 사람 중에 판데모니움을 사랑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말 안 듣고 칭얼대는 아이들에게 어미는 짓궂게 일렀다. 너 지상으로 보내버린다. 개중에는 지상을 동경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래로 아래로 고이는 구정물을 목도하고 돌아오면 대개는 정결하고 위생적인 고향의 정취에 젖어 말하고는 했다. 아, 지상은 정말 멋진 풍광이었지. 다시 있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엔지니어들 중에서도 금숟가락 물고 태어난 이른바 우월한 개체들이 테크노크라트였다. 남들이, 특히나 지상 인간들이 선민의식이라고 하는 것을 그들은 부러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하긴커녕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했다. 다르고말고. 말초적인 풍류를 좇는 이들과 과학기술의 발전이라는 유구한 사명에 온몸을 바친 우리는 다르고말고. 입에 문 금숟가락을 굳이 흙바닥에 떨구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 그렇게들 합리화를 했다.
당시 학술원에 재학중이던 이오시프라는 자는 그중에서도 그 사명의 순수함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자였다. 그 어리숙이는 매일 샛별이 채 사라지지 않은 새벽에 일어나 책을 폈다. 그리고 즉물적인 쾌락에 자꾸 한눈을 파는 동료들에게 엔지니어의 본분에 충실하라며 엄하게 야단을 쳤다. 멀리서 히죽히죽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동료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그의 말에 따랐다. 그자의 주변은 늘 그렇게 진지했다.
그러나 그 무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 여자가 나타나면 책에 몰두하던 떼거리의 공기가 일순 술렁였다. 햇볕 아래서 그녀가 머리를 대강 올려 묶으면 갸름한 상앗빛 목이 드러났다. 살짝 붉은 꽃 위에 시선을 둔 더 붉은 눈동자가 고왔다. 사내는 자신도 그녀에게 꽤나 시선을 둔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었다. 그녀가 부딪쳐 오기 전에는.
“미안, 실수예요.”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가볍게 말을 하며 여자는 눈모를 휘었다.
“이오시프. 맞죠? 나는 마르그리드. 우리 서로 많이 봤던 것 같은데 말 나누는 건 처음이네요.”
“서로 많이 봤었나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굳이 이야기를 나눌 일이 없었던 거죠.”
장난치듯이 한없이 가벼운 태도에 불쾌해진 사내는 굳게 고개를 돌렸고 여자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돌아갔다. 그리고 여자가 남긴 향기가 뒤늦게야 코에 훅 끼쳤다.
공부만 하는 샌님을 놀리기 위한 내기 같은 것이 분명하다 여겼다. 어쨌거나 그 말 한 마디, 그 찰나의 감촉이 꽤나 효과가 있었다. 이오시프는 마르그리드가 나타나면 절로 시선을 빼앗기다가 그녀가 눈을 마주치고 생긋 웃으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정말로 정신을 차리는 데에는 2주가 더 걸렸다.
마르그리드는 아주 빼어난 여자였다. 목소리가 크고 분위기를 주도하는 이오시프와 의견이 갈리는 일이 있으면 화제가 다 끝나고 나서야, 참 아까 무슨 일로 시끄러웠나 봐요? 난 못 들었어요. 내 의견은 이러하지만. 이런 식으로 모르는 체를 했다. 그렇게 새침하게 굴다가도 갑자기는 솔직하게 외로움을 털어놓으며 눈물지었다. 어리숙한 사내로서는 처음 보는 타입의 사람이었지만, 그런 그가 보기에도 퍽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남녀는 그리 계속 서로를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이윽고 시선이 마주쳐서 서로 웃어주고 말았다. 눈동자에 담긴 애정과 호기심을 더 이상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2주를 사귀었다. 그 중 어느 날인가 마르그리드가 말했었다.
“나는 지상에 가 보고 싶어. 알지? 요즘 유행인 거. 땅이 끝도 없이 탁 트여서 공기에서 나는 냄새부터가 판데모니움이랑은 다르다는데, 당신이랑 같이 마셔 봐도 좋을 텐데.”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마르그리드는 학술원에서 사라졌다. 자신의 전공인 지상의 소용돌이를 직접 눈으로 관측하기 위해 수색대에 지원한 것이다. 사내는 가슴이 휑하기보다도 그 짧은 2주간이 오히려 꿈같았다. 아주 아름다운, 이 세상에는 원래가 없었던 꿈. 꿈을 꾼 사람이 곧 제정신을 찾는 것처럼 이오시프도 무탈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학술원 졸업 후, 연구소에서였다.
백의에 슬리퍼를 끌고, 피곤에 찌들어 그늘이 어린 눈으로 마르그리드가 복도를 걸어왔다. 마르그리드가 걸어왔다. 마치 꿈의 단편이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현실이 되었다. 마르그리드는 아주 빼어난 연구원이었다. 아름답다고만 느꼈던 붉은 눈동자가 소용돌이의 변화를 관측할 때는 사뭇 진지했다. 관측해낸 지표로부터 예측 가능한 변화에 대하여 논하는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밤새 연구하느라 메마른 입술이 연구소의 정책에 숨을 끼쳤다. 그녀는 더 이상 꿈이 아니었지만 꿈보다 더 경이로웠다. 아직도 자신이 어리숙하다 느끼면서, 남자는 이 놀라운 여자를 사랑했다.
그리고 2주 후에 마르그리드가 말을 걸었다.
“왜 내가 지상에 가고 나서 연락하지 않았어?”
남자는 멍청하게도 꽤 시간이 지나서야 대꾸했다.
“당신이 다시 나랑 만날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자 마르그리드는 채근하듯이 눈을 올려다봤다. 못난 남자가 애정과 호기심을 채 감출 수 있었을 리가 없다. 계속 눈을 확인하던 여자가 마침내 고개를 내리고 한숨을 푸 쉬었다.
“이오시프, 내가 당신과 함께 지상에 가고 싶다고 했었지?”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이었어. 당신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어. 나 사실은 전부터 당신을 보고 있었거든요. 당신과 내 부모님이 전부터 잘 알던 사이라는 거, 알고 있었어요? 그분들이 나한테 당신 이야기를 자주 했었거든. 당신이 학술원의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진지한 사람이라는 것도 쭉 봐왔어요. 난 사실은, 지상 따위는 다시 내려가고 싶지 않아. 여기 청결한 판데모니움에 당신과 함께할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 안에서 누구보다도 안락하게, 아름답게 살고 싶어…”
이오시프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였다.
결혼 후에도 누구나의 이목을 끄는 화려한 여자였던 마르그리드는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고는 긴 머리를 잘랐다. 늘씬한 다리가 드러나는 치마 대신 길게 내려오는 바지를 입었다. 누구든 두려움 없이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대화를 주도하던 여자가 과분한 행복에 차 있다는 듯 고개를 내리고 수줍게 웃었다. 마르그리드는 아주 빼어난 어머니였다. 사람들과 얘기하기 좋아하고 짓궂게 농담하곤 하던 여자가 약속을 줄이고 집으로 빠르게 돌아가 아기 용품을 매만졌다. 그러면 그 놀라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짧게 자른 머리 아래 드러난 흰 목덜미 위로 입을 맞췄다. 그리고 마르그리드는 하얗게 웃으며 달처럼 둥글게 차올라 가는 배를 쓰다듬었다.
“고마워요, 이오시프. 나 여기서 아이와, 당신과, 나 셋이서 이렇게 계속 행복하게 살고 싶어. 나를 이렇게나 행복하게 해 줘서 고마워.”
그 사람이 시시각각 바뀌어 가는 모습은 언제나 경이로웠다. 마르그리드는 피고 지는 꽃이었다. 차고 기우는 달이었다. 가만히 있지 않고 흐르고 넘치는 물이었다. 여자는 변화했고 남자는 경애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랬다.
여자가 흘러서 연구원, 연구원이 고여서 어머니, 어머니가 넘쳐서 배신자가 되었지만
나는 마르그리드를 사랑했다
이 기록은 곧 폐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