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샬롯] 스킬명 합작 – 상냥한 밤

모든 것이 명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비단 내가 지금 이 빛이 없는 세계에 와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후로 겪게 된 세상에 비하면 그때는 아픔이나 슬픔, 그리움조차도 없는 흐릿한 무채색에 가까운 시절이었다.

집이 있었다. 집 바깥으로는 풀이 있고 나무가 있었다. 가끔은 꽃도 있었다. 풀과 나무와 꽃은 집에서 멀어질수록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는데, 선생님은 그것을 숲이라고 부르셨다. 숲에는 온통 안개가 자욱해서 멀리까지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숲 깊이로 들어갈수록 풀 비린내가 강해지는 것은 알았다. 풀냄새가 아직 싱그러운 숲의 초입에서 선생님은 멈추어 서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셨다. 나는 그 선율을 반주로 성가를 불렀다. 그러고 있으면 파랑새가 날아와 내 어깨 위로 앉았다. 금방 날아갈 것 같이 희미한 무게였다.

노래를 멈추고 새에게 손을 뻗었다. 흰 털을 부풀린 배가 퍽 따스하고 보드라웠다. 가느스름한 숨결을 느끼고 있자니 선생님도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따라 손을 뻗으셨다. 새를 한 손으로 움켜쥔 선생님은 숲 깊은 방향으로 걸어가 나무에 대고 손을 누르셨다. 새가 좌우로 꽁지깃을 흔들면서 아까는 들어보지 못했던 높은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다가 나무 위로 빨간 얼룩이 튐과 동시에, 새의 울음과 움직임이 함께 클라이막스에 도달하고는 멎었다. 선생님이 손을 놓으시자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새는 붉은 자국과 함께 풀밭 속으로 툭 떨어졌다.

“이게 뭐예요?”

“죽음이라는 거란다.”

무엇을 이르는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선생님은 알아들으셨다. 나는 언제고 선생님과 함께였으니까.

“죽음을 맞은 생물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돼. 이 새가 죽은 것은, 샬롯이 호기심이 지나치게 많은 아이이기 때문이야. 샬롯은 순백의 소녀로 남아있어야 하는데 다른 생명체와 닿았으니 이렇게 죽음이 찾아오는 거란다.”

이제와 생각하면 선생님은 내가 다른 생물과 닿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도 같다. 그러나 나는 그때 죽음이 그렇게 무섭지 않았기에 다시 새에게 손을 뻗을까 생각하다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만두었다. 나는 움직이는 것에 닿고 싶었다.

“제가 순백의 소녀로 남아있어야 해요?”

“그렇단다.”

“그건 어째서예요?”

선생님이 내 어깨 위로 손을 얹으셨다. 나는 그대로 우두커니 멈추었다. 손이 닿는 곳은 방금 새가 앉았던 자리였다. 선생님이 어깨를 누르는 힘은 자그마한 새의 무게보다 훨씬 느끼기가 쉬웠다. 그러나 그도 곧 사라졌다.

“자, 보렴. 새가 앉았던 흔적이 남았지.”

선생님이 내민 깃털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시야를 파랗게 휘저었다.

“시간은 어떻게든 흔적을 남긴단다. 백색에는 얼룩이 지고 세포는 독소로 오염돼. 인간은 노화해서 살가죽이 부패하고 정신이 혼탁해지지. 생을 살며 많은 사람을 만나 인과에 개입하고 상념이 뒤죽박죽 얽히다 보면 결국 영혼은 가능성의 힘을 다해 소멸하고 만단다. 그게 이 세계의 순리야.”

이야기는 눈앞에 흔들리는 깃털만큼이나 정신이 없었다.

“그러니 반대로, 세상 그 어떤 것에도 닿아 더럽혀지지 않은 순백의 아이가 있다면 무엇이든 정화할 수 있게 돼. 노화도, 흡혈귀의 주술도, 수많은 영혼을 삼켜서 수명을 늘린 악마에게 끼치는 저주도……. 나는 아주 오래 살면서 업을 쌓았기에 너를 필요로 해, 샬롯.”

이야기가 지나치게 어려웠기에 나는 손을 모아 쥐고 선생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선생님은 짧게 말씀하셨다.

“선생님이 사라졌으면 좋겠니?”

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아직 궁금한 것이 남아있었다.

“어째서 선생님은 그렇게 오래 사신 건가요?”

“복수를 위해서란다.”

“복수라는 건 뭔가요?”

선생님은 대답을 않고 내 뺨에 손을 가져다 대셨다. 손에 얼굴이 더 가득 닿도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선생님은 손을 금세 아래로 치우셨다.

“자. 이제 들어가자꾸나.”

사실 나는 집에 있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집 안에는 움직이는 물체가 전혀 없었다. 숲과는 달리. 숲은 나와 다른 저절로 움직이는 것들로 가득했다. 어렴풋이는 안개 낀 청록색이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석구석 총천연색으로 메워진 곳이 바로 숲이었다. 해가 뜨면 눈부신 새벽 어스름이 하늘을 채우다가 저녁이 되면 노을이 져 붉어졌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나부끼고 더 기다리면 잎새가 빛깔을 바꾸었다. 가끔은 산새나 토끼도 눈에 띄었다. 봄에는 분홍 주홍 색색의 꽃이 피지만 겨울이 되면 전부 얼어붙어 꽃도 동물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눈발이 날리는 광경은 가끔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나무 밑둥에 앉아 시시각각 변화하는 숲을 바라보며 저 청록의 안개 너머로 몸을 던지고 싶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그러고 있자면 선생님이 다가와 눈을 가렸고, 나는 선생님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집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선생님과 나 둘 뿐. 나는 선생님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어머나, 귀여운 아가씨로구나. 카렌베르크에게 이런 깜찍한 딸이 있는 줄은 몰랐네. 아니면 새로운 취미?”

가슴이 미친 듯이 달음박질쳤다. 여자는 눈꼬리를 휘며 보랏빛 손톱을 나에게 향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인도로 며칠에 한 번씩 대성당에 앉아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내부가 보이지 않는 기도실에서로, 나는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볼 뿐 누구도 내게 말을 건 적은 없었다.

“손대지 마, 비르기트. 그 애는 ‘순백의 소녀’니까.”

“어머.”

여자는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두었다. 호박색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 그런 게 가능했던 거야? 그랬나 보네, 당신이 이렇게 멀쩡한 걸 보면. 그래……. 그럼 내 집 안에다 손대지도 못하는 애를 들여다 놓은 거네? 재미없게.”

“장난치지 마, 비르기트…….”

선생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이 애를 너에게 보여주러 온 거야. 내 불사는 이제 완전해. 비르기트, 그러니 나와 함께 가자.”

“당신이야말로 장난치지 마. 이런 반쪽짜리 불사를 가지고 와서 이 비르기트에게 과거로 돌아가자고 하는 거야? 안 그래도 본분을 잊은 심복 때문에 머리가 아파. 당신한테까지 신경 써 줄 의향은 없어.”

여자가 손톱으로 내 뺨을 콕 찔렀다. 따끔했다. 선생님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갯짓을 했다.

“잠깐 다른 방 안에 들어가 있으렴, 샬롯.”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성이 오고가는 것을 처음 듣는 가슴이 새처럼 콩닥거리며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도망치듯이 뒤를 돌아 발걸음을 서둘렀다.

 

마음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저택은 지나치게 크고 넓었으나 그간 내가 들어가 본 곳은 밀폐된 기도실 혹은 나지막한 천장의 오두막이 전부로, 고개를 들어도 천장까지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가 눌렸다. 심장이 계속 달음박칠쳤다. 끝없이 이어진 복도를 걷고 또 걸으며 눈앞에 늘어선 방문 앞마다 멈추어 서서 귀를 기울였다. 방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원래 있던 집 안에는 선생님이라도 계셨으나 저택의 방 안을 들여다보면 그 무엇도 움직이지 않으니 도무지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그렇게 복도를 계속해서 걸었다.

처음에는 복도의 끝이 어두워 보이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걸으며 다가가 보니, 어둠 속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땅보다 더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처음 보았다. 아마 이런 공간을 지하라고 했던 것 같다. 계속 하던 그대로 귀를 기울여 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음에 실망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나직한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짐승의 숨처럼 그르렁대는 소리였다.

나는 호기심이 지나치게 많은 아이였다.

어두컴컴한 계단을 한 발짝 한 발짝 내려가 지하에 들어서니 서늘한 공기가 맨살에 훅 끼쳤다. 처음에는 거의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곧 희미한 불빛에 눈이 익어 겨우 앞으로 향할 수는 있었다. 처음 들어와 본 지하를 희미한 불빛과 그르렁거리는 숨소리에 의지하여 나아갔다. 가슴이 아까와는 다른 느낌으로 두근거렸다.

아, 바로 그 순간이었지.

마침내 보인 것은 지금까지 봐온 그 어떤 생물과도 다른 형체였다. 사지는 인간을 닮았으나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쇠와 같았고, 반원형의 두 뿔이 머리로부터 눈에 띄게 솟았다. 얼굴에는 살이라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검은 망토를 걸친 듯 보이는 그 기묘한 형체는 바닥의 그림자에 붙들린 것처럼 앞으로 무너진 채 몸을 움찔이며 신음하고 있었다. 가만가만 다가가서 덫에 걸린 짐승 같은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바깥에는 이렇게 생긴 사람도 있던 걸까, 아니면 사람을 닮은 동물인 걸까. 생각하고 있던 찰나,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순간 눈앞이 번뜩였다. 그가 번개같이 내 발목을 낚아채 나는 엉덩이부터 바닥에 굴렀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지하실 바닥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봤군. 이 모습.”

‘그’는 속박된 채 얼굴만을 들어 내동댕이쳐진 나를 보고 있었다. 안광이 붉었고 숨소리는 인간과 짐승을 섞어놓은 듯 그르렁거렸다. 그러나 그 소리가 곧 멈추었다. 내 발목을 잡은 손부터 하얗게 인간의 살결로 바뀌고 있었다. 신체를 속박하고 있던 어둠도 곧 스르르 스러져 그는 윗몸을 들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얀 셔츠 사이로 드러난 가슴팍이 희었고 연한 청록의 머리가 찰랑이며 흘러내렸다. 머리 사이로 드러난 귀는 뾰족했으나 그마저도 아주, 아름다운 생물이었다.

“너…….”

그대로 물끄러미 나를 보던 그가 씩 웃었다.

“추하지는 않군.”

만족한 듯 한결 누그러진, 아니 상냥한 목소리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몸을 뿌리쳤다.

“다른 생명체에 닿으면 죽어.”

그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우두커니 나를 보다 이윽고 물었다.

“그건 네 생각이지, 다른 누가 그렇게 말한 거지?”

“……선생님이. 내가 호기심이 지나치게 많아서 남에게 닿으려 하는 거라고.”

“선생님?”

“카렌베르크 선생님.”

그러자 그는 나도 선생님도 하지 않는, 처음 보는 방식으로 웃었다.

“아……그래. 정말 해 버렸군, 그 작자. 지금 속박이 풀린 것도 이해가 가. 그리고 그게 내 앞으로 떨어졌고.”

그러나 역시 퍽 아름다웠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는 내 옷 위로 살짝 드러난 목에 손을 대었다. 냉방에 방치되어 있던 살결의 싸늘함에 목에서부터 으스스 소름이 끼쳤다. 가만 그렇게 있자, 머리끝까지. 신기한 마음에 상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다른 생물과 닿는 게 싫어?”

“아니.”

“좋아?”

“응.”

“너, 이름이 뭐지?”

“샬롯.”

“그렇군. 샬롯.”

“응. 샬롯.”

목소리가 떨렸다. 다른 이에게 내 이름을 말해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와 같이 여기서 나가자, 샬롯.”

그가 속삭이는 목소리는 선생님이나 노래를 부르는 나의 목소리보다도 훨씬 고왔다. 소리가 숨과 함께 귀에 닿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잠시 숨이 멎는가 했다.

“카렌베르크가 만든 아이라면 너는 분명 어딘가 갇혀서 거의 나오지 못했겠지. 그렇지? 다른 누구를 만나는 것도, 마음을 나누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았겠지. 그러니 얼마나 갈망했을까. 다른 생명에게 끝없이 닿고 또 닿고 싶다고 느끼는 채워지지 않는 마음, 그건 외로움이라는 거다. 그러나 평생 외롭고자 하는 자는 없다. 갇혀 있던 너도, 나도. 이제부터는 다른 이와 마음껏 부대끼도록 해 줄게. 나와 함께 여기를 나가자, 샬롯.”

갑작스런 제안에 대답을 미처 못하는 내게 그가 다시 속삭였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뭔가 변할 거라 생각하니?”

같은 것을 두고 선생님은 호기심이라, 그는 외로움이라 했다.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개를 들자 마주친 눈동자는 숲과 같이 안개 낀 청록이었다. 그리고 나는 곧 닥쳐올 죽음이 그렇게 무섭지 않았고, 그것은 선생님과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외로움이 지나치게 많은 아이였기 때문에. 팔을 올려 머리 위로 얹힌 무게에 손을 뻗었다. 무게가 뺨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와 내 눈가에 고인 물을 닦아냈다. 손에 얼굴이 더 가득 닿도록 고개를 기울였다. 지하의 먼지가 하얀 뺨 위에 묻었다.

모든 것이 명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비단 내가 이 세계에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함께 외로운 공간을 나서자 내민 그 손을 맞잡은 후로 도착한 모든 세계의 감각이 갇혀 있던 내게는 인지의 극을 흔들어 달릴 만큼 아찔했기에. 맨발로 숲 속을 내달리고, 살에서 땀을 흘리고, 백색에 얼룩이 지고, 몸에서 피를 흘리며 새로이 만나는 모든 세상이 내게 형용할 수 없이 흘러넘치는 희열이고 행복이었기에. 그리고 희미하기는 하지만 곧 내 기억은 끊긴 채로 이 빛 없는 세계에 오게 되기에. 그러나 그날이 아주 상냥한 밤이었던 것은 기억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내가 서 있는 지금은, 얼어붙은 밤이다. 선생님은 내가 죽음을 맞으면 다른 이와 헤어진다는 것을 알려 주지 않으셨다. 어둠 속 그가 가르쳐 준 외로움이 죽음과 함께 손끝에 아리게 스민다. 추억만이 행복을 만들어 나는 눈발을 맞아 곱은 손을 감싸 쥐며 이것이 그의 서늘한 손이라 꿈을 꾼다.

아아, 그는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