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약 합작 – 마르루디마르

1. 기억

높지도 낮지도 않은 탁자지만 아주 어린 루디아가 올라가기는 역시 무리가 있었다. 팔을 뻗어 바둥거리자 등 뒤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양 겨드랑이 밑으로 아버지의 큰 손이 쑥 들어왔다. 몸이 번쩍 들려 공중으로 올라가면서, 바닥이 아래로 빠르게 쑥 꺼지고 어느새 루디아는 턱 하고 탁자 위에 올라서 있었다. 태양빛 속에서 팔랑팔랑 날갯짓하던 노랑나비가 가까워진 듯하면서도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고 아른거렸다. 계속 팔을 휘젓는 루디아를 보면서 아버지는 계속 웃기만 했다. 저도 모르게 울상이 될 때 쯤 시야에 그림자가 졌다. 곱디고운 나비 위로 더 고운 손이 겹쳐졌다. 어머니는 손 안의 나비가 상하지 않도록 둥글게 낀 깍지 틈새를 루디아의 눈앞에 가져다대고 살짝 보여주었다. 햇빛이 충만한 날이었다. 어머니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노란 햇빛이 새어 들어오고 그 빛을 받아 날갯짓이 금색으로 아른거렸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어머니의 안경알 위에도 황금빛 잔상이 반사되어 남실거렸다. 어머니는 환한 금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2. 여자

여자는 짧은 하늘색의 단발을 하고 있었다. 속눈썹이 아주 짙었고 루디아가 온 것도 모른 채 습관대로 연홍빛 입술을 비죽이며 서류를 탐독하고 있었다. 프로폰드 내부에 들어오고도 여자에게 발견되지 않은 것은 흔치 않은 요행이라 모르는 체 지나가려 했지만 눈 끝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마음에 거슬려 차마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여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만 시선을 들켜버렸다. 내리깔고 있던 여자의 눈꺼풀이 살풋 들렸다. 선명한 주홍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눈이 마주쳤다. 지긋지긋한 여자는 당황하지도 않고 빙긋이 웃었다. 당혹해 살짝 얼굴을 붉힌 루디아의 시선을 따라가다가는 미소가 짙어졌다.

“안경, 신기하니?”

“벗지 그래요. 실체도 없는 여자가 안경이라니 우습네.”

 

 

3. 소용돌이

언제부터인가 그저 쫓기고 있었다. 오염자. 현상범. 소용돌이에 침식된 괴물.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납득하지 못하고 몸부림치며 저항하다 보니 보랏빛의 힘이 칼날이 되어 주위를 난사했다. 피가 튀었다. 루디아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쓰러져 가는 부모님이 루디아에게 묵빛 검을 쥐어주었다. 꺼져 가는 마지막 힘으로 루디아의 손을 몇 번이고 부여잡고 쓰다듬었다. 눈앞의 장면으로부터 도망치고 힘닿는 데까지 도망쳐서 어디로든 사라져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앞도 보지 못하고 뛰고 또 뛰다 보니 흑과 백의 세계에 들어왔다.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인간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무엇도 없었다. 색조차도 없었다. 머릿속이 새까맣다가 새하얗다가 했다. 루디아는 머리를 감싸 쥐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낮게 읊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

“엄마.”

루디아는 홀린 듯이 소리의 진원지로 천천히 걸어갔다. 색이 있었다. 사람이 있었다. 시리도록 푸른 머리칼의 여자가 몸을 뒤척이며 잠꼬대했다.

“울지 마, 아가. 내 아가…”

아직도 검을 손에 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눈물이 흘렀다.

“아가, 엄마는 널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어… 목숨 같은 건 아깝지 않아…”

 

 

4. 바다

루디아는 부러 여자의 머리색에 의식을 집중하고는 했다. 어머니의 머리는 태양같은 금발이었지만 여자의 머리를 보고 있으면 파란 바다가 떠올랐다. 루디아는 여자가 판데모니움의 정보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소용돌이 안팎을 자유자재로 출입할 수 있는 루디아에게 접근하는 것도 의도가 뻔했다. 루디아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소용돌이 외부에서 이런 저런 음식도 구하고 정보도 알아와야만 했고, 또 살아남기 위해서는 소용돌이 내부로 도망쳐 쉬어야만 했다. 그러면 꼭 그 여자가 루디아에게 접근했다. 친한 척 손도 잡고 팔짱도 끼고 치근덕거렸다. 어머니처럼 어르기도 했다. 그러면 루디아는 침을 꼴깍 삼키고 다시 여자의 머리칼을 바라보았다. 넘실대는 파란 바다 같은 머리칼을 보면서 되뇌는 것이다. 여자는 루디아의 어머니가 아니고, 루디아는 여자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대신에 그렇게 보면 볼수록 여자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역시 어머니처럼 안경을 쓴 모습은 담담히 볼 수가 없었다. 다가가 안경을 벗겨 내자 여자의 맨 얼굴이 드러났다. 여자는 가까워진 루디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웃었다. 역시 여자는 아름다웠다. 살결은 매끄러웠고 웃음 지을 때면 볼우물이 깊게 패였으며 눈동자는 살면서 본 그 누구보다도 선명하게 처연했다. 한두 번 지은 웃음이었으면 그렇게 유혹적일 리가 없었다. 유혹이 진심이었으면 그렇게 애달픈 눈일 리가 없었다.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그 때 여자의 입술이 소리 없이 두 번 벌렸다 오므렸다 했다.

‘아가.’

눈부터 뺨, 입가까지가 달아올랐다. 루디아는 다시 정신없이 여자의 머리카락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자의 머리칼은 시리도록 푸르렀다. 코끝까지 바다 냄새가 났다. 쏴아 하고 파도가 쳤다. 하얀 거품이 일었다. 몸에 부딪혀 오는 포말이 알알이 부서져 뺨을 뜨겁게 적시고 루디아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