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조 네타합작 – 이블린

꽃.

공부라고는 해본 적이 없었다. 기억하는 건 어릴 때부터 거듭해 읽어온 오래된 동화책이 다였다. 나는 심하게 아팠고 쉽게 불안정해졌기 때문에 미셸은 내게 공부 같은 것은 좀처럼 시키지 않았다.

나는 가끔 현기증 속에 픽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드문드문 끊긴 기억 중에 잠이 깨면 얼굴이 거위 깃을 채운 베개 속에 움푹 묻혀있어서 숨이 막혔고, 눈을 번쩍 뜨고 숨을 몰아쉬면 새로 세탁한 침구의 세제 냄새가 폐부까지 가득히 들이찼다. 번진 시야 속 새하얀 시트 너머로 새하얀 병실 벽이 보였다. 멍하니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침대머리에 기대서 겨우 상체를 들었다. 허리를 일으키고 눈을 감은 채 가만 숨을 들이쉬면 머리맡에 놓은 꽃향기가 코끝부터 밀려와 손끝까지 들어찼다. 향기는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무한정 늘어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대로 옆을 돌아보면 역시 흰빛의 화병 안에 꽃이 있었는데, 때로는 짙은 색이었고 때로는 시트처럼 흰 색, 피처럼 붉은 색, 그보다는 엷은 색, 하늘을 닮은 색일 때도 있었다. 완전히 새하얀 방 안에서 색채가 보이는 것은 창밖과 화병 속이 전부였다. 창밖에는 손이 닿지 않았으니 나는 화병 속의 꽃대를 그러쥐어 꺼냈다. 꽃잎에 얼굴을 묻었다. 얼굴에 빛깔이 옮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러나 꽃은 금방 시들었다. 내가 병원에서 지낸 시간에 비해서는 너무나 금방. 그래서 어느날 자기 전 상태를 확인하러 온 미셸에게 물었다.

“꽃은 왜 시드는 거예요?”

미셸은 처음엔 웃으며 엉뚱한 소리 말고 눈부터 감으라며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겨 덮어주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나서도 같은 질문을 하고 다시 하자 미셀은 책 한권을 가져왔다. 갖가지 꽃과 나무의 그림이 그려진 두껍지 않은 식물도감이었다.

침대에 앉은 채로 책을 펼쳤다. 책을 읽어 보려고 했지만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았다. 미셸이 올 때마다 단어를 물어보고 다시 물어보기를 반복하자 미셸은 사전을 가져다주었다. 마침내 단어에서 막히는 일 없이 책을 읽을 수는 있게 되었지만 나는 계절과 숫자에 대해서 잘 몰라서 책에 나와 있는 각종 계산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미셸은 이번에는 자연과 수학에 관련된 책을 가져다주었다. 계산은 어려웠지만 끈질기게 반복을 하자 간단한 몇 가지 계산은 해낼 수 있게 되었다. 기뻤다. 몸에 긴장이 풀리면서 힘이 빠졌다. 나는 지쳐서 앉은 그대로 책을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얕은 잠에 막 빠져들 때 즈음 까닭 모를 의문스러운 감정이 들었던 것도 같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하려고 했더라?

나는 무엇을 하고 있더라?

 

갑작스러운 감촉에 잠이 깨었다. 보드라웠다면 미셸이었겠지만, 그렇진 않았으니 바로 불렀다.

“콘라드 선생님.”

어둠 속에 선생님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엄하게 꾸짖는 얼굴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대답하는 선생님의 어투는 생각보다 상냥했다.

“제대로 누워서 자야지, 이블린. 이러고 잠이 들면 어떡하니.”

선생님은 내 무릎 위에 있던 책을 들었다.

“아무래도 이 책은 내가 가져가야겠구나. 아픈 아이가 너무 무리하면 못 써.”

슬슬 어둠에 눈이 익으면서 선생님이 책을 덮는 것이 보이고, 선생님의 얼굴도 어렴풋이나마 보였다.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아까 궁금해하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선생님.”

“무슨 일이야, 이블린?”

“저, 궁금한 게 있어요. 꿈이란 뭔가요?”

“네가 밤에 잠든 후에 보고 아침에 깬 후에 미셸이 기록하는 그 꿈 말이니?”

“아니요, 그 꿈 말고요. 오늘 책에서 읽었는데.. 사람은 자신이 그리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고 했어요. 갑자기… 모르겠어요. 그 꿈이란 뭘까요? 사람의 꿈이란 뭘까요?”

선생님은 잠시 대답을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좋은 질문이구나, 이블린. 사람이 살면서 삶이 지금과 달라졌으면 하는 바, 그 원하는 모습을 그 사람이 그리는 꿈이라고 해.”

달라졌으면 하는 바. 꿈.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두통과 피로가 몰려왔다.

“그러면 사람은 언제나 꿈을 그려야 하나요?”

“꼭 그럴 필요는 없어. 가령… 아까 말했던 것처럼 밤에 잠이 들어서 꿈을 꿀 때의 기분을 생각해 보렴. 꿈 속에서 몽롱하고 제대로 생각이 되지 않는 상태 말이야. 그럴 때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기는 힘들겠지? 사람은 그렇게 꿈 없이 길을 헤맬 때도 있는 거란다.”

“그러면요, 선생님. 지금 이것도 꿈인가요?”

나는 꽃향기가 맡고 싶었다. 병실을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건강해지지 않았다. 책 한 권을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쇠하고 잘못된 자세로 잠이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몸에 힘을 잃었다. 숲에는 꽃이 지천인 시기여도 나는 미셸이 가져다주는 꽃밖에 볼 수가 없었고 책 속에 끼워 말린 압화에서는 향기가 나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아프고 나면 사람은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릴 수 있는 꿈은 오래 전에 시들어 말랐다.

“그래, 꿈이야.”

상냥한 선생님의 가운 위에서 약품 냄새가 알싸하게 풍겨와 코를 찔렀다. 몽롱하게 취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다행이다.”

나는 선생님의 몸 위로 미끄러졌다. 단단한 두 팔이 맥없는 내 등허리를 받아드는 것을 느꼈고, 멀리서 사각사각 무언가 기록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것으로 그날 꿈은 끝이었다.

 

깨어났을 때는 이른 새벽이었다. 책은 없었다. 커튼 사이로 보일 듯 말듯 가는 빛줄기가 새어 들어와 시트 위로 드리워지고 그 위로 눈물 몇 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새하얀 방 창가로 걸어가서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손을 뻗어 투명한 유리창에 온통 하얗게 입김이 서릴 때까지 한참이나 어루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