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검은 옷을 입었다.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빳빳이도 다린 양복, 바지 주머니에 슬쩍 찔러넣은 왼손, 오른 손목과 팔꿈치에만 눈에 띄게 남은 구김 자국. 포마드로 한 올 삐짐 없이 넘긴 금발, 뒤로 넘어갈 정도로 당당하게 젖힌 상체와 딱 벌어진 어깨. 그 모두가 왕의 상징이다.
밤거리는 검다. 그는 밤거리의 왕이다. 특히나 오늘은 폭군이다. 호박색 눈을 범처럼 가늘게 뜨고 주위를 살피다 거슬리는 것이 눈에 띄는 대로 발길질을 하고 포효를 지른다. 그는 그래도 여자는 차지 않았다. 구두가 한 발짝 앞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고 대신 손이 벗다시피 한 여자들의 가슴을 몇 번 주무른다. 여자들은 자지러지게 비명을 지른다. 낄낄거리며 웃기도 하고 놀라서 몸을 뒤로 빼기도 한다. 몸을 빼면 왕이 주사를 부린다. 아가씨 몇 명은 그만 깜짝 놀라 울어버렸다. 질질 짜는 소리마저 왕의 심기를 거스를지 모르니, 옆에서 빨리 자리를 빠져나가라고 눈치를 준다. 남은 아가씨들은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입가가 굳었다. 속으로는 아까 울음을 터뜨리고 빠져나간 아가씨들을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가씨들은 자기들이 일회용 꽃으로 서 있는 걸 알고 최선을 다해 웃는다. 그러라고 있는 아가씨들이었다.
콥은 속이 시원했다. 그래, 그게 다들 살아가는 법이지. 콥은 최선을 다해 가슴을 피고 쉬지 않고 포효했다. 그러라고 있는 왕의 자리였다. 엿 같은 밤거리. 엿 같은 인생. 언제 머리에 총구멍이 날지 모르는 일회용 인생. 어쨌거나, 오늘 밤거리에서만큼은 그가 왕이다. 뻣뻣한 플라스틱 조화가 되어 피어 있는 아가씨들을 차례로 주무르다 보니 조화가 아닌 게 하나 있었다.
“이건 뭐야?”
왕의 시선은 정확히 소녀의 흉부에 꽂혀 있다. 어린 나이에 인생 망친 계집들이야 한둘이려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린 거야 그 알 바 아니다. 뒷골목 계집 같지 않게 하얗고 말랑말랑해 보이는 것도 그가 신경 쓸 바는 아니다. 젖가슴이 없다시피 한 것도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사실, 별 변태 같은 새끼들 취향 다 있나보네 하고 비웃고 넘어가면 되는 일이다. 진짜 문제는 계집애 그 자체였다. 웃고 있지도 않고 뻣뻣하게 서 있지도 않고 바닥에 시든 풀 같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무릎을 감싸 안은 계집애. 왕을 봐도 놀라는 척도 않고 멀거니 눈동자만 들다 만 계집애. 콥은 발길질을 했다. 시들어가는 풀이 고대로 엎질러졌다. 주변 아가씨들만 움찔하고 말았다. 이건 순 죽어가는 풀이었다. 옆으로 미끄러진 채로 계집아이는 밀랍 같은 목을 살짝 틀었다. 입을 열었다.
“당신, 괜찮아?”
어안이 벙벙해 잠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누가 누구보고 괜찮냐고 묻는 거야.
“이거 미친 년 아니야.”
재차 구둣발을 높이 드는 순간 소녀가 상체를 일으켰다. 머리에 대강 감겨 있던 붕대가 주륵 흘러내렸다. 구슬처럼 파란 오른쪽 눈을 마주쳤다. 그 눈이 곧 반달로 휘었다. 소녀가 웃자 까닭 모를 현기증이 일었다.
“당신 오늘 친구를 잃었잖아. 외롭지 않아?”
파란 안광이 유난히 번쩍인다 싶더니 순간 검은 밤거리가 하얗게 바랬다. 영사기로 띄운 영상처럼 과거가 돌아갔다. 그래, 오늘 콥은 자신을 믿는 친구를 불러냈다. 바람 부는 밤에 친구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었다. 빵 하는 총성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콥은 비틀거리며 이마를 쥐었다.
“이 년, 뭐야! 대체 뭐하는 년이야!”
“걱정 마, 당신을 놀리는 거 아니야.”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까지 뜨끈하고 말랑한 것이 닿았다. 소녀의 팔은 너무 작고 가녀려서 콥을 다 안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소녀는 되는 한껏 콥을 끌어안았다. 피 냄새 밴 양복 위로 작은 얼굴을 완전히 묻었다.
“나도 믿었던 사람들을 잃었거든.”
완전히 우습게 보이지 않으려면 당장 소녀를 다시 걷어차 떼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 꽉, 있는 힘을 다하여, 일말의 악의도 없이 닿는 것이 너무나 오랜만이고, 밤거리가 더 이상 까맣고 엿같지만은 않고 하얗고 덥게도 느껴져서. 자신에게 꼭 매달려서 들썩이는 어깨를 어쩌지도 저쩌지도 못하고, 그 밤이 지나고, 며칠이 지나고, 소녀가 그 듣던 ‘마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소녀를 주워간 지 두 보름도 더 지나서였다.
금방 죽어버릴 것 같던 풀은 물만 좀 축여줬다고 금세 생생하게 살아났다. 키우는 보람이 있었다. 밀랍 같던 얼굴에는 혈색이 돌고 부스스하던 머리에서는 윤이 났다. 물론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원래 너 만한 애들은 그만한 거냐, 아니면 니가 작은 거냐? 와, 이건 진짜 심하네. 어떤 미친놈이 저걸 데려가려나.”
마녀가 키득거렸다. 역시 미친년이다 싶어 질린 눈으로 보고 있으니 이블린은 콥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미친놈.”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떨어졌다. 저거, 진짜 미친 년 아니야. 그래도 웃고 있는 마녀의 얼굴을 보는 것이 그렇게 엿같지만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