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합작 살가니타 – 라벨의 볼레로(Bolero)

공동(空洞)에는 공허뿐이었다.

두 사람, 아니 한 인형과 한 사람은 미확인 지역에 도착한 이후로 7천 알레가 넘는 거리를 걸었다. 그 말인즉슨,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은지 족히 한 시진은 되었다. 제 아무리 넓은 공터라 해도 보통 어딘가에는 장애물이 있기 마련이고, 대류의 흐름이 일어나고 소리 한 조각이 반사되어 센서에 닿아 청각 모듈을 활성화시키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없이 한없이 앞으로 걷기만 한 것이 벌써 몇 시간 경, 판데모니움 지하의 미확인 지역이 얼마나 방대한지 도니타는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바람 한낱 없는 허공 속에 그저 나아가는 것이 흡사 어둠 속으로 끝없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렇게 길을 잃는 감각에서 도니타를 구해주는 지표는 단 하나뿐이었다. 옆에 묵묵히 함께 걷고 있는 남자의 체온과 움직임. 마음 같아서는 매달리기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싫다. 왜냐하면 ― 도니타는 옆의 남자를 흘끗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짜증나는 남자다. 의회장 앞의 그는 한 마리 충견과 같이 바닥에 바짝 머리를 조아린 채다. 반면에 지금의 그는 걸음걸이부터가 날이 바싹 서 있어서- 살가드가 발을 멈춘 도니타를 홱 돌아보았다.

“뭘 뜸 들이고 서 있는 거지, 인형. 서두르는 게 좋을 텐데.”

날카로운 칼날처럼 잔뜩 예민하고, 지치고 질려 죽겠다는 눈빛이다. 어째서 자신을 항상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알 것도 같았다. 그가 어김없이 덧붙이는 호칭과 같이, 나는 처음부터 인형일 뿐이니까. 분했다. 도니타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누구 때문에 탐색이 이 속도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 혼자였으면 벌써 마쳤어! 나는 완전해. 신체적으로도 지식 면에서도 당신 같은 인간보다 훨씬 월등하다고. 왜 그 여자가- 굳이 당신을 동행시켰는지는 몰라도, 애초에 느려터진 당신 때문에 지체할 이유가 없단 말이야.”

말을 하다가 도니타는 잠시 멈칫했다. 레드그레이브를 그 여자라고 칭한 데 대해 살가드가 앙갚음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한번 내뱉기 시작한 말은 쉬이 멈추어지지 않았다. 살가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 발짝 다가왔다. 눈을 꽉 감았다. 최고성능의 인형인 도니타가 보통의 인간에게 당할 리가 없는데도 그는 어쩐지, 무서웠다. 그가 손을 댄다면 무언가 쉽사리 부서져 버릴 것 같다. 하지만 귓가에 들린 말은 예상과는 달랐다.

“어둠이 무서워서 멈춰 선 주제에 완전하다고?”

살며시 눈꺼풀을 올리자 내려다보는 붉은 눈을 마주쳤다. 눈빛에 서린 염증이 아까보다 한층 더 깊었다. 도니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쉽게도 말하는군. 나도 너와 이렇게 있고 싶어서 있는 게 아니다. 네가 닥터의 교섭 대역으로 판데모니움에 찾아왔고, 레드그레이브님이 너와 함께 코덱스를 탐색할 것을 지시하셨으니 따를 뿐이지.”

벽돌 빛의 눈이 타오를 듯이 바라본다. 역시 분했다. 남자가 멋대로 말하는 것도 분하지만, 어쩐지 그의 말 하나하나를 들을 때마다 연산회로가 통상의 활성 범주를 벗어나 어지러이 쿵쿵 울리는 것이 가장 분했다. 눈물이 찔끔 났다.

“나도… 여기 오고 싶지 않았어. 그렇지만 닥터도 여기 오기 싫어하니까…”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렸을 뿐인데 남자가 미간을 구기며 응답했다.

“그렇다면 오지 않으면 되잖나, 인형.”

대체 이 남자는 왜 이렇게까지 꼬박꼬박 따지고 드는 걸까. 가슴께에서 인공심장이 세게 한 번 박동하며 뜨거운 체액을 분출한다. 울컥했다.

“당신이야말로 쉽게 말하지 마. 나는-”

잠시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자 살가드가 계속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까딱했다.

“나는…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진 인형이니까.”

눈꼬리에 고였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하의 어둠이 상대의 시야를 가려주었기를 바랐다.

“이 정도는 해낼 수 있어. 나는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야. 그리고 내 이름은 인형이 아니야. 도니타라고.”

짐짓 어깨를 펴고 당당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도니타의 상상 이상으로 신랄했다.

“그래서, 쓸모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기 싫은 일을 시켜도 입 다물고 뭐든 해 내겠다? 순서가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자신 그 자체로 존재할 이유가 있음을 스스로 믿지 못하니 스스로를 학대시키겠다는 거지. 인형이라는 것들은 정말 언제나 상대하기 싫은 족속들이군.”

입술을 깨물며 말하는 남자를 더 이상은 차마 견딜 수 없어 도니타는 그만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이상하게 눈물이 자꾸 흘렀다.

“당신은 인간이잖아. 내가 어떤 입장인지 이해하지 못해.”

“이해하지 못한다고? 천만에. 그 모습 나한테는 무엇보다 익숙해.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노력을 다하기 전에 스스로의 처지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는 않는 거냐. 내가 그래서 너를-”

남자의 끓는 목소리는 가슴 속으로 삼키어 들어가는 듯 멎었다. 그만. 당신까지 나를 부정하지 마. 도니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마른 눈물과 함께 상념을 지웠다. 더 이상의 대화는 싫어 발걸음을 다시 옮기는데, 무언가 팔목을 꽉 쥐어 소녀를 멈추었다.

“도니타.”

괜스레 가슴이 철렁했다.

“계속 그렇게 겁먹어 있어서는 탐색에 방해가 된다. 그럴 바엔-”

서툴게 내민 상대의 손을 꼭 잡고 싶었지만, 이미 한 번 상처를 입은 자존심이 그것을 막았다. 도니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그대로 홀로 발을 떼었다.

빛 한 줄기 없는 지하 공터를 묵묵히 걸으면서 도니타의 연산회로는 쉼 없이 가동했다. 판데모니움에 오기 싫은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살가드 이 남자 때문이었다. 어째서인지 판데모니움에 가기 싫어하는 닥터를 대신하여 의회를 방문할 때마다 살가드가 도니타를 향하는 눈빛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염증으로 가득했다. 그런 그가 조금이나마 자신을 배려해 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조금은 말을 걸어 보아도 되지 않을까. 실은 끝없이 자신을 빨아들이는 이 공허한 어둠 속 침묵이 무서운 탓이기도 했다.

“저기… 그 여자…그러니까 레드그레이브도, 닥터도 다들 왜 그렇게 코덱스를 애타게 찾는 걸까? 과거의 기술은 판데모니움에도 충분히 많이 남아있던데…”

“오래된 예지.”

생소한 표현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살가드는 태연히 대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찾는 것은 오래된 예지다. 어떤 의문이든 해결해줄 수 있는 진리에 가까운 지혜이자 힘. 다른 이에게 알려지면 위험하기에 그저 과거의 기술이라고 뭉뚱그려 칭하고 있지만 말이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런 걸 쉽게 말해도 돼? 왜 나한테 말해주는 거야?”

남자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잠시 고민하는 듯 천장을 바라보다 짓씹듯 말을 뱉었다.

“너는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아까부터 오토마타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내가 당신 같은 인간보다 수백 배 이상 많은 정보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을걸? 닥터의 기술을 집약한 최고성능의 오토마타가 바로 나, 도니타라고.”

뽐내는 말을 무시하는 듯 대답이 없는 남자에게 도니타가 되물었다.

“당신도 그 코덱스를 찾고 있어?”

“그래.”

“어째서?”

살가드의 걸음이 잠시 느리게 멎는 듯 하다가 다시 이어졌다.

“살면서 꼭 해결하고 싶은 문제, 너에게는 없나? 반드시 고치고 싶은 비틀림. 풀리지 않는 의문.”

도니타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손뼉을 탁 쳤다.

“이상한 게 있기는 해. 자꾸 비슷한 꿈을 꾸거든. 이게… 사람들이 얘기하는 꿈과 같은 건지는 모르겠어. 그렇지만 밤에 자고 일어나면 이상한 기억의 잔상이 남아.”

“예를 들자면 어떤?”

“딱 뭐라 말하기는 힘들어. 항상 조금씩 다른 내용이라서. 하지만 확실한 건 자꾸 누군가와 함께 있는 기억이 남고, 그게 언제나 같은 사람이라는 걸 내가 안다는 거야. 닥터한테 물어봐도 어떤 현상인지 정확히 모르겠다고 하고.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내용을 완전히 잊어버리니까 실마리를 찾기도 힘들고…”

“쓸모없는 꿈이군.”

살가드는 콧방귀를 꼈다.

“그래도, 그 오래된 예지라는 것을 찾으면 이게 무슨 현상인지도 알아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좋겠지.”

조금 힘이 나는 것 같았다. 그 대화 이후로 한동안 도니타의 걸음걸이는 기운이 넘쳤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침묵과 무반응이 계속될수록 소녀의 어깨는 조금씩 쳐졌다. 기댈 것 하나 없는 어둠이 체액을 타고 올라와 스멀스멀 몸을 좀먹어 간다고 생각될 때 즈음, 무언가 연달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하 어딘가에서 붕괴라도 일어나는 건가 깜짝 놀랐지만 곧 관악기의 선율이 치는 리듬과 조화를 이루며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음악이었다. 그것도 꽤 흥겨운 음악이여서 도니타는 그에 맞추어 발을 가볍게 굴렀다.

“뭐지?”

“음악 소리가 들려.”

이때가 복수할 기회다 싶어 도니타는 재빨리 덧붙였다.

“당신처럼 평범한 인간은 지각하지 못하는 음량이겠지만.”

“무언가 있는 모양이군.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가 보지.”

너무나 태연한 반응에 도니타는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리면서도 신이 나 선두에 서서 살가드를 이끌었다.

 

 

“이건.”

긴장한 도니타에게 살가드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19세기경의 음악이군. 근처에 있는 물건들도 그 근방 시대의 것… 왜 여태껏 남아있는지 모르겠지만 황혼의 시대에 비하면 원시에 가까웠던 시대라, 아쉽게도 우리가 찾기를 기대한 것과는 달라.”

도니타는 바로 주변을 휘휘 돌아보았지만 그의 말대로 별로 쓸모 있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주변에 있는 골동품들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당신의 말은 믿을 수 없어.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시대를 알 수 있다고? 잘 모르면서 아무 말이나 둘러대는 거 아니야?”

말의 끝자락에 물기가 어렸다. 긴 시간을 탐색하고도 성과 없이 허탕을 친 것은 도니타에게 결코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아까의 대화 때문인지, 살가드와 함께 탐색하는 동안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에 희망이 사라지지 않고 빛나고 있었다. 그것이 방금 한 순간에 까만 재로 꺼진 것이다.

“라벨의 볼레로. 인상주의 고전 음악의 대표곡이다. 동일한 리듬이 악기 편성을 바꾸어 반복되면서 긴장감이 고조되지.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주제가 이어지지만 진부하지 않고, 약한 음으로 시작하여 마지막의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내고 끝나기로 유명한 곡이다.”

설명을 마친 그는 잠시 목을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음악이 그 시대부터 여태껏 틀어져 있었을 리는 없고, 아마 꺼져 있던 것이 우리가 이곳에 들어온 것이 트리거가 되어 재생된 모양이다. 정지되거나 사라졌던 것이 유적 탐사 중에 사소한 계기를 원인으로 되살아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니까.”

이때만큼은 도니타도 솔직하게 감탄했다.

“당신, 꽤 대단하네. 19세기의 정보는 나도 잘 모르고, 남아 있는 기록도 대부분 사멸했을 텐데 그렇게 상세히 알고 있다니… 왜 그 여자가 미확인 지역을 탐색하는 데에 당신을 동행시켰는지 알겠어.”

“오래된 유적을 관리하는 것이 내 일이었으니까.”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나도 유적을 탐색하는 몸이니까. 과거의 정보에 대해서는 최대한 자세히 알고 싶어.”

“어떤 정보를 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볼레로는 본래 춤의 이름이다. 지금 흐르는 음악과 같은 3박자의 느린 음악에 맞춰서 남녀가 추는 낭만적인 라틴 댄스지. 여성 댄서는 보통 긴 붉은 치마를 입고- 네가 지금 입고 있는 것과 비슷하군. 만약에 원한다면.”

살가드가 도니타의 앞에 바르게 서서 손을 내밀었다.

“배워보겠나?”

도니타의 눈이 흔들렸다. 눈앞에 가지런히 놓인 의수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지만 손을 마주 잡을 수는 없었다.

“역시 내가 이러는 것은 의심스러운가.”

“아니, 나는.”

도니타는 한쪽 팔을 꽉 쥐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인형이잖아.”

마치 그 대답을 들으리라 예상하고 있던 것처럼 살가드의 얼굴에도, 내민 손에도 흔들림은 없었다. 그 견고함을 믿고 다시 한 번 목소리를 쥐어짜내었다.

“인형에게도 그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건 나보다 네 자신이 더 잘 알겠지.”

순간 그 눈동자의 붉은 빛이 꼭 혐오나 조롱은 아닐 거라는 판단이 사고를 지배했다. 그는 계속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거부하면, 그리고 받아들이면 나는……. 연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도니타는 고개를 단호히 끄덕였다. 왼손을 마주 얹자, 살가드가 잡은 쪽의 손을 높이 들었다. 한순간 어지러웠다. 기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파쎄오(paseo). 기본 스텝이자, 춤의 도입부다. 일단 치맛자락을 들고 한 바퀴 돌아 봐.”

오른손으로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역시 남자인지 꽤 큰 상대의 왼손이 등을 살짝 떠미는 대로 한 바퀴를 돌았다. 붉은 치맛자락이 나풀나풀 꽃잎처럼 펼쳐졌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회전의 반동으로 살가드의 후드가 벗겨지는 찰나, 환각처럼 살가드의 얼굴 위로 조금 다른 모습이 겹쳐보였다. 눈에 화장도 없으며 머리도 넘기지 않고, 눈가에 세월의 흔적도 적고 무엇보다 눈동자에 혈기가 넘치는 한층 앳된 모습.

‘속으로만 불만을 쌓아두고 현실을 바꿀 생각은 감히 못하는 게 꼭 내 옛 모습 같아서 충고해줬더니만, 성이나 내? 정말 버릇없는 인형이군. 꼴불견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너 따위를 레드그레이브님께 데려오지 않았어.’

환청과 함께 웨엥 하고 바순 소리가 울렸다. 어지러워 발을 헛디뎌 넘어지려는 순간, 코르셋을 꽉 조인 인형답게 가는 허리를 남자의 팔이 감싸 안았다. 긴 금발이 소녀의 허리를 감싼 팔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스텝은 엄지발가락 아래 볼록한 부분으로 밟는다. 우아하게, 미끄러지듯이. 자, 따라해 봐.”

허리를 안고 몸을 이끄는 스텝을 따라, 몸을 밀착한 채로 부드럽게 미끄러질 때마다 두 갈래로 곱게 묶은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물결쳤다. 청각 모듈을 파고드는 음악 소리와 동시에 섬세한 촉각 센서는 고동치는 맥박을 감지했다. 처음이라고는 말도 안 되게 호흡이 너무도 잘 맞았다. 살아 있다는 건, 이런 거구나. 꼭 도니타 자신도 함께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맞잡은 손을 올려다보았다. 스텝을 밟으면서 환각은 다시 재생되었다. 마치 두 갈래의 시각과 청각이 동시에 느껴지는 것 같았다.

환각 속의 두 사람은 동시에 유물 위에 손을 올렸다. 손이 겹쳐지고 눈이 가까이 마주쳤다. 환각의 앳된 살가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찾은 거다, 인형!’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러! 당신 혹시 부끄러워?’

‘내가, 인형 따위 때문에? 웃기지도 않는군.’

‘전에는 인형이라고 해도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느껴지니까 더 당당해지라고 말했었잖아? 당신 말이 서로 안 맞잖아. 하나만 해.’

‘나는-‘

‘뜸 들이지 말고 어서. 그리고 이왕이면 인형 대신 도니타라고 불러줘. 이름과 같이 듣고 싶으니까.’

클라리넷의 음색과 함께 대화의 환청이 머릿속을 윙윙 울렸다. 멈추지 않는 환각 탓에 어지러웠다. 아니, 환각이 아니야. 아마 둘이 함께 유물을 찾는 게 처음이 아닌 거야. 하지만, 살가드를 만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 기억은 뭐지? 혼란 속에서도 음악과 춤은 멎지 않았다. 살가드가 도니타의 등을 끌어당기며 가볍게 빙글 돌았다.

“이제 트라베르싸(traversa). 스텝의 형태를 변화시키며, 두 사람의 위치를 바꾼다.”

‘안녕하세요, 살가드 씨. 도니타라고 합니다.’

환각 속의 살가드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재미없는 장난은 그만둬, 도니타.’

‘무슨… 말씀이신지, 살가드 씨…’

그제야 상황의 진실성을 깨닫고는 멍하니 도니타에게 다가오는 살가드를 워켄이 재빨리 방 밖으로 끌고 나갔다. 방에 덩그러니 서서 기억 속 도니타는 홀로 뒤에 남겨진 기분에 몸을 떨었다.

이 기억은 또 뭐야. 하지만 지금은 아냐, 혼자가 아니야. 멜로디가 다시 시작함과 동시에 도니타는 다급히 살가드의 등 위에 손을 올렸다. 살아 있는 심장 박동에 조금 안정이 되었다. 호른 소리 역시 심장소리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에 안도하며 상대의 어깨 위에 매달리다시피 얼굴을 묻었다.

“이 다음은 제자리에서 서로의 스텝을 교환하는 디페렌씨아스(diferencias).”

다리와 다리가 조심스레 얽혔다.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떨어졌다. 그리고 어김없이 환각이 스쳐갔다. 기억 속에서 도니타는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면서 빙긋이 웃으며 살가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살가드는 후드를 푹 눌러 쓰면서 시선을 피했다.

‘정말 내가 사람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그렇게 말해주는 게 눈물 날 만큼 고마웠는데 지금은 좀 답답해. 그럼 증명해 보지 그래요? 춤이라도 신청해 보든가.’

‘여전히 버릇없는 인형이군…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네 본질은 바뀌지 않은 것 같아서 안심이기도 해.’

‘난데없이 무슨 말이세요, 살가드 씨?’

기억 속의 살가드가 도니타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리고 도니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대고 한참이나 무언가를 속삭였다. 안 돼. 안 돼.

‘여기, 처음이 아니잖아. 기억해, 도니타? 네가 아무리 계속해서 기억을 잃는다고 해도, 나는 그걸 네게 비밀로 하는 건 기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제 그냥 살가드라고 불러도-‘

오보에 선율 위에 온갖 목관악기의 소리가 얹혀 멜로디가 장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기억 속의 도니타는 괴성에 가까운 소리를 우짖으며 뛰어올라 살가드를 덮쳤다. 손끝으로 목을 조르던 감각이 선연히 기억이 나서 부드럽게 춤을 추던 도니타는 그만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몸을 더욱 밀착해 현실의 살가드의 맥박을 느끼려 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기억 속의 도니타는 멈추지 않고 괴성을 질렀다.

‘아냐, 아냐, 아냐! 나는 죽지 않아!’

아무런 방비도 없이 도니타의 아래에 깔린 살가드의 얼굴색이 붉어졌다가 이윽고 보랏빛으로 질렸다. 그는 바들바들 떨리는 팔을 겨우 끌어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굴려 꺼냈다. 긴급 발신기를 누르면서 살가드는 가까스로 중얼거렸다.

‘…도…니타…’

그 말에 도니타의 팔 힘이 잠시 풀렸고 그 사이, 뒷목을 무언가가 세게 내리쳐 도니타는 힘을 잃고 쓰러졌다. 차가운 바닥에 머리를 흐트러뜨린 채로, 흐려져 가는 시야에 황망한 표정의 워켄이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다른 남자가 붉은 화장을 번져 가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울지 마요. 미안해요. 당신이 왜 우는 거야. 하지만 미처 나오지 않은 말은 기억과 함께 끊어졌다.

인공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을 친다. 시야가 붉었다. 살가드가 말했던 대로 음악에서 꼭 같은 멜로디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도니타는 눈치 챘다. 이제는 울렁거렸다. 선율을 연주하는 악기는 바뀌되 주제는, 결말은 절대 변하지 않고 되풀이된다. 살가드의 심장 박동도 더 이상 도니타에게 안정을 주지 못한다. 그 역시 반복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살가드는 도니타의 머리 위로 손을 넘겨 소녀를 부드럽게 한 바퀴 돌렸다. 어지러이 도는 시야 속에서 살가드가 아지랑이처럼 아른아른 발갛게 보였다.

“그리고 거리를 두고 걷다가 밀착하여 포즈를 취하기를 반복하는 피날레(finale).”

피콜로 소리는 가슴을 찌른다. 팀파니는 머리를 뒤흔들며 울린다. 살가드의 목소리는 너무나 달아서 회로를 태울 것 같다. 반면에 다시 시작하는 환각 속의 도니타는 평온하게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림책을 넘기고 있었다. 그때는 아무 것도 몰랐고 그래서 후드를 푹 눌러쓰고 방에 들어오는 살가드를 보고서도 말갛게 웃었다.

‘판데모니움에서 오신 살가드 씨죠? 기다리고 있었어요.’

도니타는 그림책이 구겨지지 않게 조심조심 닫고는 테이블 구석으로 치워놓았다. 하지만 살가드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이걸로 너를 처음으로 만나는 게 열세 번째다.’

도니타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왜 그만큼이나 되풀이해서 의미 없는 노력을 기울인 걸까.’

살가드는 허리를 깊이 숙이고 도니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마 이런 그림책이나 좋아하고, 항상 제멋대로고, 기억력도 형편없고, 끝의 끝을 보고서도 다시 일어나면 순진하게 웃고, 주제에 자존심은 세면서 자존감은 없어서 얘기를 하고 또 해줘도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그 때문에 자꾸 나를 신경 쓰게 만드는 구제불능의 인형인 너에게 조금은 마음이 끌렸던 모양이지. 인정하겠어.’

후드 밑에 가려져 있던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끝을 낼 수 있으니까.’

그때가 되어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었다. 그리고 어깨 위로 올라온 차가운 의수에 당황해서 주변을 돌아봤었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저, 인형 수급 일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오신 걸로 아는데-‘

‘전부터 궁금했다. 겉으로는 이렇게 귀여운 소녀인데, 그 내장은 어떨까. 이토록 말끔한 외관으로 기분이 까딱 잘못 어긋날 때마다 그 모든 기억과 감정을 없던 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그 내부는 대체 어떤 모양인 거지.’

‘무서워. 무서워요, 살가드 씨!’

‘그러면 네가 구제할 수 있는 인형이라는 걸 지금 보여 봐. 아예 나나 판데모니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정보를 얻으면 무사히 작동이 되는지, 이게 마지막 시도다.’

그러고 그는 도니타의 머리를 꽉 끌어안았다. 갑자기 찾아온 어둠 속에서 차가운 감촉이 느껴진다 싶더니, 정보가 머릿속에 흘러들어왔다. 그저 몇 뭉치의 이미지였다. 프로토타입과 함께 유적을 탐사하던 도니타, 살가드를 따라 부양선을 탔던 도니타, 처음 뇌 상태의 레드그레이브를 마주했던 도니타, 그림책을 읽는 도니타, 그리고 몇년 후 기억을 잃고 읽었던 책을 또 읽고 있는 도니타, 수리중인 도니타 등의 이미지 뭉치. 그러나 도니타는 얼마 못 가 고꾸라졌다. 가슴을 헐떡이며 테이블 위를 긁다가, 덜덜 떨리는 입술로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싫어, 어둠, 동작 정지, 싫어, 벌, 죽음… 산발적인 단어를 나열하다가 이윽고 바닥에 엎드려 쓰러졌다. 그리고 팔다리를 이상한 각도로 꺾으며 경련했다. 이제 떨리는 입술은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가드. 살가드. 괴로워. 아파. 힘들어. 괴로워.

하지만 살가드는 도니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아니, 그 무엇도 보고 있지 않았다. 희망이 갓 죽은 자의 빛이 없는 눈이었다. 살가드는 비척비척 쓰러지듯이 벽에 기댔다. 그리고 입술을 앙다물고 벽을 세게 쳤다. 주먹에서 피가 났다. 그 주먹으로 다시 가슴을 몇 번 치자 가슴 위에 핏자국이 낙인처럼 찍혔다. 가슴을 움켜쥐고 반대편 손으로 귓가에 꽂은 장치를 몇 번 눌러 통신을 연결했다.

‘레드그레이브님. 얼마 전에 리셋했던 닥터의 조수 오토마타가 다시 오작동했습니다. …알겠습니다. 동의를 받았다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도니타에게 다가오는 살가드의 손에는 하얗게 빛나는 와이어가 감긴 채였다. 팔을 휘두르자 흰 발목에, 그림책을 넘기던 손목에, 가는 허리에 와이어가 감기어 경련이 강제로 멈추었다. 한참을 그대로 서 있던 살가드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내 탓이 아니야. 네 탓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버릇없는 인형.’

살가드가 손을 높이 들었다.

허리가 휙 젖혀졌다. 음악과 춤은 고조되어 클라이막스에 달했다. 살가드는 젖힌 도니타의 허리를 쉽게 깨지는 유리 세공처럼 다시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이제 모든 것이 기억이 난다. 언젠가 우리는 나란히 서서 다시 만날 것을 손가락 걸고 약속했었다. 판데모니움의 지하에는 일곱 번을 같이 탐색을 했다. 당신은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나를 아홉 번 설득했다. 열네 번째부터는 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워져 모른 체하려 무진 애를 썼지만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기억나는 세월을 더듬어 보면 십 년에 달했다. 살가드 당신은 십 년이나 이걸 견뎌온 거구나. 머릿속이 녹아가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떠오르는 기억들 속에 분명히 이런 감각을 느낀 적이 있었다. 마지막 순간들.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지금 이건, 주마등이구나.

살가드가 맞잡은 손을 높이 올리고 도니타에게서 떨어져 섰다.

“마지막으로 비엔 파라도(bien parado). 동작을 갑자기 멈추고, 손을 잡고 조금 떨어져 자세를 유지한 채로 서로를 마주 본다. 그리고 서로에게 감사의 의미로 정중한 인사를… 도니타?”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나는 고장 난 인형이야.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미안해, 살가드. 이번엔 울지 마.”

고장 난 인형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환하게 웃었다. 회로가 과열되는 것이 느껴졌다. 십 년에 걸쳐 함께 나눈 순간순간이 기억의 심연 속에서 떠오르고 또 다른 순간을 회상시켜 거미줄처럼 하릴없이 뒤엉켜 갔다. 거대한 미쟝센의 수레바퀴가 머릿속을 밟아 구르며 무엇이 기억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뒤죽박죽이 된다. 머릿속에서 치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소녀는 마지막으로 남자의 손을 잡았다. 체온이 닿는 손끝에서부터 불꽃이 이는 것 같았다. 손가락에서부터 팔을 타고 올라와 종국에는 머리끝까지 화악 하얗게 타오르는 불길. 펑 하는 소리가 났다. 제어장치를 잃은 오토마타는 힘없는 인형이 되어 차가운 바닥 위로 쓰러졌다. 과열되었던 회로가 식으면서 소녀는 또다시 어둠 속으로 새까맣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남자는 또다시 소녀를 원망할 따름이었다.

7대 죄악 합작 분노 – 레드그레이브

무엇 하나 허투루 준비된 것이 없었다.

정말이지 그림으로 그려낸 듯이 고운 소녀였다. 손톱 끝부터 착 붙어 올라가는 장갑은 검은 윤이 나는 명주천으로 자그마한 손에 딱 맞춰 직조된 것이었다. 같은 빛깔의 원피스 역시 소녀의 눈 색과 꼭 같은 보랏빛의 프릴로 장식된 목깃에서부터, 양옆 열 개씩 도합 스무 개의 단추를 단 코르셋 짜내기로 조인 허리, 그리고 걸음에 따라 살랑살랑 흔들리는 두 겹의 치맛단까지 몸에 꼭 맞추어 내려왔다. 얇게 비치는 스타킹을 송아지 가죽을 무두질하여 만든 부츠가 덮었다. 격식을 차리기 위하여 검은 색이 주가 된 차림새이지만 머리에 리본 머리띠를 하여 차분하면서도 퍽 앙증맞았다. 살짝 분홍빛을 띠는 몸에는 곱게 간 보석가루를 체로 가느다랗게 친 후 양모로 된 화장붓을 들고 혹여나 어린 피부가 상할까 조심조심 발라두었다. 그리하여 검은 옷 사이사이로 드러나는 소녀의 살결에서는 하얗게 빛이 났다.

무엇 하나 허투루 준비된 것이 없었으나, 그 무엇보다 가장 공을 들여 준비된 것은 소녀의 존재 그 자체였다. 소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옷은 숨을 쉬기조차 갑갑할 만큼 몸을 죄였다. 하지만 답답함에 숨을 크게 내쉬기라도 하면 모든 것이 쉽사리 흐트러질 것이다. 소녀는 그림으로 그려낸 듯이 곱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었다. 배에 힘을 세게 주어 숨을 참고 양 손 끝으로 조심스레 치맛자락을 들었다. 오늘의 강습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 어서 정원을 가로질러 가야만 했다. 무성한 풀 위에 조심조심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비에 젖은 정원에서 풀 내음이 훅훅 쏟아졌다. 어질어질했다. 소녀의 오감은 남들보다 배로 예민하도록 제작되어 있었다. 이를 악물고 몇 걸음을 더 걷는데 그 예민한 감각의 끄트머리에 이질적인 것이 걸렸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얇은 스타킹 위에 달팽이 한 마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소녀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선명한 보랏빛 눈이 크게 뜨였다. 소녀는 달팽이를 잡아들어 다리에서 떼어냈다. 손바닥 위에서 어린 달팽이 한 마리가 꾸물꾸물 기어가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주먹을 꽉 쥐었다. 손 안에서 껍질이 바스스 으스러졌다. 장갑 너머로 손바닥에 끈적끈적한 감촉이 선명했다. 소녀는 그 장갑을 벗어 정원에 버렸다. 강습에 늦어서는 안 되기에 다시 발걸음을 서둘러 옮기려는데, 웃음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작은 키득거림이었다. 소녀는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의심하고 시기하여 사생활에서 꼬투리를 잡아 찍어 누르려는 사람이야 흔하고 흔했다. 누가 내는 웃음소리인지 찾아서 어떻게든 처리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도통 어디에서 들려오는 것인지 찾기 쉽지가 않았다. 웃음소리는 점차 커져 폭소에 가까워졌다. 그제야 소녀는 그것이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임을 알았다. 바로 소녀 자신의 목소리였다.

[잘 했어, 레드그레이브.]

웃음을 가까스로 참는 것 같이 바람 새는 소리였다.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주변 그 어디에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먹을 꽉 쥐고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구지?”

[나는 너의 ‘분노’야, 레드그레이브.]

서둘러 귀를 막아보았으나 끊이지 않는 목소리는 특정한 장소로부터 들려오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어딘가 이상해진 걸까? 식은땀이 났다. 하지만 확실히 당황과 두려움보다도 더 큰 감정이 있었다. 저 목소리의 근원을 찾아서 멱살을 잡고 싶다는, 분노.

[하하하하하.]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목소리는 다시 한 번 웃어젖혔다. 레드그레이브는 서둘러 달리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했고, 더 이상 괴상한 목소리에 대답을 할 의미도 찾지 못했으며, 목소리의 근원이 물리적인 것이라면 최대한 벗어나고 싶었다. 달리고 또 달려서 겨우 목적지 앞에 도달했다.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던 차림새는 잔뜩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숨을 몰아쉬며 문 앞에 등을 기대고 머리 위에 손을 올려 리본의 모양을 정돈하고, 목깃을 다듬고, 제멋대로 풀린 코르셋 짜내기를 꽉 조여 다시 묶었다. 등을 바로 세우고 마지막으로 옷을 몸에 붙도록 살살 털어 내는 소녀에게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도망쳐도 나는 죽지 않아. 나는 모든 공간, 모든 시간에 존재하니까.]

소녀는 고개를 높이 들고 눈을 크게 떴다. 고작 뭔지 모를 목소리 따위에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대로 목을 꼿꼿이 세우고 문을 열었다.

 

***

 

“너는 기적이란다, 레드그레이브.”

스승의 목소리는 따스하고 자애로웠다.

“수도 없이 많은 엔지니어가 가장 완벽한 지도자를 생산하기 위해서 밤낮으로 연구에 매달렸어. 그렇지만 인자와 인자를 섞고, 각각의 형질을 세밀히 조정하여도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일 뿐이어서, 결점과 모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지.”

하지만 레드그레이브는 그 이야기에 온전히 집중할 수는 없었다. 레드그레이브는 망설이고 있었다. 이상한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말해야 할까? 그 웃음소리의 잔상이 남아 환청처럼 머릿속을 맴돌며 레드그레이브를 불쾌하게 했다. 혹은, 환청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말을 해야 할까? 하지만 어쩐지 망설여졌다.

“모두가 조금씩 지쳐갈 때, 수백 년의 학술, 수천 번의 실험과 수만 명의 피땀 위에서 마침내 네가 탄생되었어. 너와 같이 조금의 결함도 없는 존재는 그제껏 없었단다.”

레드그레이브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너는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란다. 너의 판단으로 모든 사람을 이끌고,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완전한 네가 존재하는 게야.”

“제가 원하지 않는다면요?”

되바라진 말대답에 스승은 당황한 듯이 웃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니? 다시 한 번 생각해보렴. 너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 누구도 탐을 낼 만한 절대적인 권력이란다. 인간의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네 판단으로 재단하고 그 기준에 거스르는 이는 징벌할 수 있어. 말했잖니, 너는 그것을 위해서 만들어진 가장 귀중한 작품이야.”

“만약 저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면요?”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눈동자를 굴리는 스승을 레드그레이브는 가만 바라보았다. 소녀는 눈앞의 인물을 잘 알고 있었다. 스승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곧바로 대답하지 못할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그것이 상대가 들어서 문제가 있을 이야기가 아니라면. 곧 스승은 웃었고, 레드그레이브도 마주 웃었다.

 

***

 

“그러니 부탁할게, 그라이바흐.”

엔지니어들이 선별한 ‘작품’은 하나가 아니었다. 목적을 위하여 만들어져,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다는 존재 자체로서의 목적성을 배제당한 세 명, 아니 세 개의 아이. 그렇기에 소녀는 그 쓰라린 공통점을 형제라고 명명하길 원했고, 남은 둘은 소녀의 말에 기꺼이 따랐다. 사실 그 둘에게 소녀는 형제라기보다도 살아 숨 쉬는 여신이었다. 그렇기에 소녀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소년의 얼굴에 고통이 완연했다.

“기꺼이, 레드그레이브.”

소년은 주머니에서 작은 장치를 꺼냈다. 다이얼을 돌리고 버튼을 조작하자 기계로부터 웅얼거리는 듯한 잡음이 새어나오다가, 이윽고 사람의 목소리가 되었다. 스승의 목소리였다.

값비싼 작품에는 관리가 필요하다. 엔지니어들은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주기적으로 세 아이의 상태에 대한 보고가 올라간다는 것을 사실 두 아이는 알고 있었고, 지금 그것을 도청할 심산이었다. 그렇지만 들리는 것은 시시껄렁한 안부와 건강 상태에 대한 이야기 따위뿐이었다. 한참을 계속되는 잡담에 슬슬 지루해 질 때 즈음, 레드그레이브의 눈이 번쩍 뜨였다.

“헌데, 레드그레이브가 이상합니다. 갑자기 세계의 감시를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어쩔 거냐고… 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어요.”

“무언가의 징후라도 된다고 보시는 겁니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정말로 신경이 쓰이는 말은 그게 아니었거든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자신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으면 어쩌냐고 하는데, 생전 그런 적이 없던 아이라. 상상력을 지나치게 발휘하는 것인지, 협박인지, 아니면 진짜로…”

“만약에 진짜로 심각한 문제라도 있다면, 어떡합니까?”

기기에 귀를 기울이는 레드그레이브의 마음은 어쩔 바 없이 기대감으로 두근거렸다. 스승은 유전자 조작 프로젝트의 수석 엔지니어이자, 레드그레이브의 상태를 어려서부터 돌보아 온 사람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그의 말에 따라 그녀의 앞날에 새로운 가능성이 생길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정책의 계산기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 살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폐기해야죠. 이 세계의 운명이 달린 사업이에요. 우리의 꿈의 지도자는 완벽해야 합니다. 어렵겠지만, 새로 만들 수 있어요. 그렇다면 레드그레이브는 위험 요소가 되겠죠.”

기대감으로 두근거리던 심장이 아까와는 다른 감정으로 방망이질을 쳤다. 피가 온몸을 역류하며 제멋대로 끓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하얗게 달구어졌다. 레드그레이브는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손을 뻗어 옆에 선 소년의 손을 잡았다.

“부탁이 하나 더 있어, 그라이바흐. 나 혼자서는 쉽지 않을 거야.”

 

***

 

이전 수석 엔지니어는 어떤 특수한 가게 안에서 죽음을 맞았다. 오토마타가 정교해지면서 새롭게 나타난 이전에는 없었던 형태의 가게로, 쾌락을 파는 장소였다. 좁은 방 안에서 원인불명의 오작동을 일으킨 오토마타에게 피할 새도 없이 공격을 당한 것이 사인이었으며, 회수조차 어려울 만큼 처참하게 훼손된 시신을 겨우 수습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불명예스러운 죽음이었다.

그의 장례식에서 검은 베일을 쓴 어여쁜 소녀가 고개를 깊게 숙이고 있었다. 비록 그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하였어도 그의 마지막 걸작은 빛바램이 없는 모습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객들은 소녀에게 앞 다투어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소녀는 침울한지 계속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묘비 앞에 서서야 레드그레이브는 고개를 높이 들고 감정을 알기 어려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앞으로도 당신의 마지막 가르침에 충실하겠습니다. 나는 좋은 제자였어요.”

이어지는 장례식 내내 소녀는 손을 가만히 두지를 못했다. 손바닥을 긁고, 깍지를 껴 꼼지락거렸다. 장례식이 끝나고 돌아가면서도 계속 그랬다. 소녀는 거처에 가까워질수록 참지 못하고 발을 서두르더니 결국 뛰듯이 방에 들어와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았다.

‘인간의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네 판단으로 재단하고 그 기준에 거스르는 이는 징벌할 수 있어.’

그 말을 떠올리며 레드그레이브는 손바닥을 쫙 펴서 내려다보았다. 아무 것도 묻어있지 않건만, 끈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검은 장갑을 낀 손바닥 위로 부서진 달팽이 껍질이 아른거리다가 흐려졌다. 게다가 환각은 촉각과 시각에서 끝나지 않았다.

[잘 했어, 레드그레이브.]

레드그레이브는 눈썹을 찌푸렸다. 목소리는 레드그레이브의 분노라고 스스로를 소개했었다. 그것을 기억해낸 레드그레이브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큰 소리로 웃었다. 방 안에 울려 퍼지는 음성이 마치 이전에 들었던 웃음소리와 같았다.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니 분노해, 레드그레이브. 세상을 발밑에 두고 휘둘러 짓밟아. 네 언짢은 날숨으로 세계를 부숴버리고 고갯짓으로 날려버려. 너는 할 수 있어. 굴레를 던져버려. 나는 그럴 수 없으니까!]

격정과 분노와 권력욕에 끓는 목소리로 호령하던 소녀는 곧 레드그레이브의 귓가에 더없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특별히 네게도 알려줄게. 우리가 세상을 위해서 봉사할 필요는 없어. 세상이 우릴 위해 봉사하는 거야.]

목소리는 귀에 들리는 듯도 했고, 가슴에서부터 번져 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파장에 맞춰 고동치는 자신의 마음이 있었다. ‘목소리’가 그녀만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더할 나위 없는 레드그레이브 자신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분노는 그렇게 레드그레이브의 가슴에 똬리를 틀고 한참이나 그녀를 따라다녔다.

베른하드의 숲

나무는 으레 따갑다. 멋모르고 숲 속을 쏘다니다가는 거친 껍질과 이름 모를 벌레가 아직 어린 아이의 살갗을 벌겋게 부풀어 오르게 만든다. 그래도 베른하드는 숲이 좋았다. 밖에서 살을 태워버릴 듯 이글거리는 땡볕보다는 차라리 빽빽한 나무 밑이 낫다 싶었다. 숲은 어둡고 서늘하다. 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으면 사방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 머리를 맴, 맴 메우고 이윽고 머릿속에서 되풀이된다. 그리고 그렇게 서늘한 숲에 가만 잠겨 있는 베른하드의 손을 뜨스운 체온이 낚아챈다. 눈을 떠 보면 어김없이 보이는 것은 자신과 꼭 같은 얼굴이다. 형제는 지치지도 않는지 언제나 베른하드를 이끌어 애써 피하던 뜨거운 태양 아래로 나간다. 그것마저도 좋았다.

 

여섯 살 때 즈음 프리드리히는 크게 앓았다. 거울처럼 늘 자신과 꼭 같이 함께 웃고 떠들던 얼굴이 해쓱하게 질려서 밭은 숨을 쌕쌕 몰아쉬는 것을 침대 머리맡에서 보고 있자니 왈칵 눈물이 났다. 막 들썩이기 시작하는 베른하드의 어깨를 아버지가 질끈 움켜쥐었다. 겁먹은 베른하드를 방 밖으로 데리고 나온 부모님은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로 아이를 타일렀다. 지금 제일 아프고 힘든 건 프리츠란다. 그런데 네가 울면 프리츠는 얼마나 겁이 나겠니. 형인 네가 흔들리지 말고 프리츠를 꼭 지켜주어야 해.

방으로 돌아온 베른하드는 다시 프리드리히의 머리맡에 앉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자리에서 뒤척이는 프리드리히의 이마에 붙은 머리칼을 넘기고 손을 잡았다. 꺼질 듯이 싸늘한 손가락이 미약한 힘으로 손을 마주 쥐었다. 신기하게도 더는 무섭지 않았다. 다만 안타까웠다. 이 세상에, 어둠 속 창문 너머로 비치는 달빛 아래 자신이 지켜주어야 하는 형제가 있었다. 그 얼굴은 자신과 같았으나 더 이상 같지 않았다. 밤새 동생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그 손을 식지 마라 꼭 부여잡고 있었다. 그것이 여섯 살 베른하드에게 있어서 세상의 시작이었다.

프리드리히가 낫는 데는 꼬박 석 달이 넘게 걸렸다. 어린 아이에겐 길고 긴 시간을 베른하드는 종일 동생을 지켜보고 수발을 들면서 지냈다. 갸륵한 정성에 지켜보는 어른들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막 병이 나은 프리드리히를 부모는 혹여나 깨질세라 조심조심 다루었고, 잔소리도 극심했다. 그런데 베른하드가 제 부모보다 더했다. 다른 아이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자이페르트 부부는 프리드리히보다 베른하드를 먼저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베른하드가 낫는 데에는 일년도 더 넘게 걸렸다.

프리드리히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꼭 따라갈 때까지는 그저 형 노릇을 하는 아이가 기특하다고만 여겼다. 하지만 한밤중에 물을 마시러 가는 동생을 불러 세우고, 프리드리히를 따로 불러내는 마을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그 부모들이 가세하자 어른들에게까지 맞서 울면서도 하얗게 질린 프리드리히의 손만은 놓지 않고 있었을 때. 그리고 마침내 소름이 돋은 자이페르트 부부가 살살 어르고 윽박질러도 이미 꺾이지 않는 아이임을 목도했을 때는 어찌하랴.

처음 키우는 아이의 행동이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면 부모는 당황하여 다그치고, 아이는 그 반작용만큼 소리를 맞받아치거나 아예 입을 다물어버린다. 그것이 그맘때 자이페르트가의 일상이었다. 귀를 쨀 것 마냥 시끄러웠던 강제와 무시와 몰이해의 연쇄 속에 정작 프리드리히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다. 아니면 어떤 날 이후로 베른하드에게 프리드리히가 너무나 뚜렷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보통 때는 늘 베른하드가 프리드리히의 손을 쥐었지만 그날만큼은 프리드리히가 베른하드의 손을 먼저 잡았다. 아마 어디를 가든 베른하드가 가로막고 따라붙으니 제 가고 싶은 곳을 가고자 아예 먼저 선수를 치는 것이겠지. 베른하드는 형제를 사랑하지만 믿지는 않았다. 동생을 지켜야 해. 부모님은 어린 베른하드에게 세상의 진리를 이르고는 이내 부정했다. 프리드리히도 모두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몇 번이고 프리드리히가 숨이 넘어가는 위기를 꼬박 밤 지새우며 숨죽여 바라본 베른하드에게 동생은 쉽게 꺼지는 등불이었다. 그나마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토록 온 신경을 기울여 보살피는 동생인데 대체 어디가 그렇게 가고 싶다고 이리 선수까지 치는지, 베른하드는 그마저도 못마땅했다. 동생의 손을 꼭 쥔 채 역시 이대로 되돌아설까 자꾸 생각하다가도 가슴 한편에서 계속 호기심이 일었다. 대체 어디이길래.

그렇게 한참이나 말없이 걷고 또 걷고, 주위를 둘러싼 풍경이 변하고 세계가 조금씩 변했다. 마침내 도시를 둘러싼 성벽 근방에까지 왔을 때 베른하드는 동생을 자신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도 잊고 있었다. 베른하드는 이 길을 알고 있었다. 도시를 드나드는 상단에 섞여 몰래 성벽을 빠져나와서 도착한 곳은 번사이드 외곽의 숲, 베른하드의 세상의 진리가 바뀌기 전에 왔던 곳이었다.

볕이 온난했던 초봄에 젊은 부부와 아이들은 이곳에 와서 묘목 하나를 심고 붉은 줄을 매어 자이페르트라고 쓰인 명찰을 걸었다. 프리드리히가 아프기 전, 모든 것이 지금보다 즐겁고 평안했던 나날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작은 묘목이지만 잘 돌보면 곧 아름드리 거목으로 자랄 것이며, 아이들 역시 나무가 크는 만큼 커질 거라고 부부는 반 협박을 섞어 농담을 했다. 그러니 잊지 말고 꼬박꼬박 찾아와서 벌레가 꾀지 않게 약을 치고 나무를 돌보자고. 그러나 프리드리히가 아프게 되면서 나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리고 나무를 다시 찾아온 지금의 계절은 가을이 막 찾아오는 때이다. 숲길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휑하니 불자 소름이 오소소 돋으면서 베른하드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너희도 나무가 커질 만큼 커질 거야. 하지만 우리 형제는 그때로부터 조금이라도 자랐나? 프리드리히가 아팠던 것도 찬바람 속에 방치된 나무가 시들어서는 아니었을까? 불길한 예감 속에 걸음을 재촉하던 베른하드의 발이 문득 멎었다.

빽빽한 침엽수립 가운데서 너른 이파리를 활짝 펴고 빨간 줄을 맨 나무는 단연 눈에 띄었다. 줄기는 높이 뻗고 가지는 넓게 퍼졌다. 두께도 굵어져 줄이 나무를 꽉 죄일 정도였다. 한참 넋을 놓고 나무를 바라보고 있자니 옷 밖으로 드러난 목과 팔이 따끔따끔했다. 가을볕이 생각 이상으로 뜨거워 베른하드는 나무 밑에 숨어들었다. 환하던 세상이 순식간에 어둑해졌다. 뒤를 돌자 그늘 아래서 보는 볕 빛이 아찔하게 눈이 부셨다. 그리고 그 안에 프리드리히가 서 있다.

다시 한차례 바람이 불었다. 빽빽한 가지가 흔들리며 검게 그늘을 드리우던 나뭇잎이 쓸려나갔다. 그렇게 드러난 사이사이로 빛줄기가 점점이 찌르고 들어와 베른하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들과 나비 떼가 알록달록 햇빛 속을 쇄도했다.

“걸음이 빠르던데, 걱정했어, 베른?”

색이 고운 나비 한 마리가 프리드리히의 팔위에 앉을 것 같더니만 팔랑팔랑 날아갔다.

“아마 우리가 계속 찾아와서 약을 쳤으면 여기 이렇게 많은 새도 나비도 없었을 거야. 나무가 얘네 때문에 조금쯤 아팠으니까 이렇게 같이 지낼 수 있었던 거고, 나비가 계속 왔으니까 이제 열매도 잔뜩 맺겠지.”

프리드리히는 붉은 줄에 달린 자이페르트, 라고 쓰인 명찰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나무만큼 크게 자랄 거야. 새들이랑 같이 하늘에 닿을 만큼 커질 거야. 나 혼자는 싫어. 나는 베른 덕분에 여기까지 나올 만큼 건강해졌으니까. 나는 베른이 나랑 같이 커졌으면 좋겠어…”

“프리드리히 너, 그동안 나 몰래 나와서 여길 보러 왔던 거야?”

프리드리히는 더 이상 말은 않았다. 숙인 얼굴에서 초조함을 완전히 숨기지 못하고 푸른 눈으로 베른하드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선택의 때이다. 가지가 흔들리고 햇빛이 이지러지고 지축이 흔들렸다. 아이의 시간은 흔들린다. 여섯 살에 속으로 삼킨 반신을 잃는다는 공포와 그것을 모른 채로 살아갔던 안온한 일상, 두 시간이 어지럽게 마음을 파도치는 가운데 하나의 생각이 수평선을 물들이는 태양처럼 마음을 물들였다. 동생이 이렇게나 착하고 속 깊은 아이라는 것이다.

그늘 밖으로 나오면서 한 손으로는 눈이 부셔 햇빛을 가리고, 한 손으로는 프리드리히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앞장서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드리히의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동생이, 아니 베른하드가 아팠던 이후로 처음 보는 눈부시게 밝은 미소였다. 그날 프리드리히가 이끄는 대로 숲을 떠나면서 베른하드는 나무를 흘끗 돌아보았다. 서늘한 날인데도 파란 새순이 돋고 있다. 다시 앞을 보면 프리드리히가 햇살처럼 환하게 웃고 있다. 베른하드의 마음에도 이름 모를 작은 싹이 텄다.

 

그 후로도 베른하드는 여전히 그늘을 좋아했다. 한동안 오로지 한 사람의 반경만을 바라보며 살던 베른하드가 낫는 데는 꼬박 일 년이 넘게 걸렸는데, 어린아이에게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수술이 흉터를 남기듯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병치레는 아이들에게 역할을 남겼다. 프리드리히는 내면에 침전해버린 형의 세상을 넓혀주느라 밝고 모험심이 강한 아이가 되었고, 베른하드는 그런 프리드리히가 지나치게 흥분해서 깜박 길을 잊으면 침착하게 동생을 지키는 아이가 되었다.

행복한 나날이었다. 건강을 되찾은 아이들을 끔찍이 아껴주시는 부모님 아래, 비옥한 번사이드의 토양 위에서 이끌고 끌려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며 아이들의 세계는 넓어졌다. 나무는 새에게 닿을 만큼 커졌고 아이들은 키가 훌쩍 자랐다.

 

그리고 열일곱 살에 프리드리히는 다시 베른하드에게 남은 세계의 전부가 되었다. 소용돌이에 휘말려 집이 무너지고 분명 안에 계셨음이 분명한 부모님을 찾을 수 없었을 때도 베른하드는 말이 없었다. 다만 프리드리히의 손을 꼭 쥐었다. 인생의 풍랑을 만나 표류한 두 아이는 그저 눈앞에 보이는 지푸라기를 잡을 뿐 다른 수가 없었다. 쌍둥이는 저들의 유난히 큰 키를 눈여겨본 레지멘트 대원들을 따라 터덜터덜 유년을 떠나는 길에 올랐다.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을 그 길에서 묵묵히 지시를 따르던 베른하드는 딱 한 번 연대를 귀찮게 했다. 어느 숲 앞에서 굳이 잠깐만 여기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떼를 쓴 것이다.

이제 너도 연대의 일원인 이상 너 하나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이 멈추는 일은 없다고 부대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 프리드리히가 손을 들었다.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말이었다. 마침내 부대장이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베른하드는 숲 속으로 달려갔다. 프리드리히가 뒤를 따랐다. 속도는 달랐으되 두 아이의 발걸음은 같은 곳을 향했다. 그러나 그 발걸음은 거의 동시에 멈추고 만다. 소용돌이와 함께 일어난 화재로 나무는 검게 그슬려 가지만이 남았다. 그 아래 들어가도 햇빛이 델 듯이 뜨거웠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좀처럼 나오지 않는 아이들을 찾아 숲으로 들어간 부대장이 데리고 나온 것은 한층 해쓱해진 청년이었다.

 

 

베른하드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레지멘트의 요새는 산기슭에 있고 그중에서도 서측으로 난 쌍둥이의 방은 아침까지도 반쯤 진 그늘로 살짝 서늘하다. 그늘과 잠기운과 꿈결이 베른하드를 거미줄처럼 덮어 눌렀다. 꿈속에서 어린 프리드리히의 손을 잡던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손가락은 굵고 마디져 그때보다 훌쩍 길게 자라 있었다.

시선을 올리자 보이는 옷걸이에는 제복이 한 벌만 걸려 있다. 프리드리히가 먼저 일어나서 나가다니, 드문 일이다. 아마도 베른하드 자신이 오랜만에 어린 시절의 꿈을 꾸느라 제때 일어나지 못한 것이겠지. 더 지체하지 않고 일어나 커피를 내렸다. 씁쓸한 향이 기도를 타고 내려가면서 정신이 확 깬다. 어서 밖으로 나가서 프리드리히가 이른 아침부터 무얼 하러 나갔는지 확인해 볼 요량이다.

셔츠를 걸치고 단추를 위에서 아래로 잠그고 넥타이를 맨다. 코트를 걸치고 그 위로 다시 혁대를 끼우고, 완장을 드는 순간 일련의 작업이 번거롭게 느껴져 내던져버릴까 팔을 들었다가 내렸다. 규율 위반은 소대장으로서 안 될 말이다. 방에 미미하게 남은 커피 향을 맡으며 완장까지 찬 후, 문 앞에서 잠깐 멈춰섰다가 방 안으로 돌아와 셉터를 들었다. 다시 숙소 밖으로 발을 옮기며 프리드리히가 일찍 일어나서 갈 만한 곳을 생각해보았다.

일단 아무리 제멋대로인 프리드리히라도 별 일이 없는 한 새벽부터 구내를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야 한다. 프리드리히가 우연히 새벽 일찍 잠에서 깨었다고 가정할 때 갈만한 곳은 역시 식당이다. 원래 정해진 시간에만 운영되는 식당이지만 프리드리히라면 새벽에 유유히 들어가서 비상식량 몇 그릇 들이키고 있고도 남는다 ― 까지 생각하고 정신을 차리고 나니 벌써 훈련장 앞까지 도착한 참이었다. 남들보다 발이 배로 빠른 베른하드다 보니 식당을 지나치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여름이 가까워지는 날씨에 빠르게 걸었더니 갖춰 입은 제복 밑으로 열이 올랐다. 검이 달구어져 땀이 찬 손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다시 힘주어 꽉 쥐었다. 어서 식당에, 그리고 교관실에도… 셈을 하면서 발걸음을 돌리는데 얼핏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훈련장 쪽을 들여다보자 한구석에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손에 힘이 풀렸다.

“프리-”

프리드리히가 살짝 돌아보더니 눈짓을 하면서 가만 있으라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가만 보니 프리드리히 혼자가 아니라 어린 훈련생 하나가 그 앞에 가려 있었다. 재작년 디 아이 소탕 작전의 실패 이후 레지멘트가 재편성되고 어린 훈련생들을 받게 되면서, 무던히 성격 좋은 프리드리히는 곧잘 훈련생들에게 질문이나 상담까지도 받고는 했다. 종종 동생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프리드리히는 필히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것이다. 기묘한 상실감과 동시에 충족감이 들었다. 아무튼 지금은 끼어들 때가 아닌 듯하여 훈련장을 둘러싼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검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다 뒤집어엎고 싶은데 제가 실력이 안 되니까… 부끄러워서 참기 힘들어요. 마음 같아선 차라리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진검으로 공격하고 싶어요.”

이 정도면 베른하드도 왜 프리드리히가 끼어들지 말라 눈짓을 줬는지 눈치 챌 수 있었다. 레지멘트에 어린 소년들이 들어오면서는 이러한 일이 새로운 골칫거리였다. 고맘때 애들은 남보다 자신이 나음을 대놓고 증명하지 못해 안달을 내기 마련이라, 약해 보이는 녀석을 괴롭히고 상대의 사기가 떨어지면 그것을 빌미로 또 괴롭히고는 한다. 그리고 당하는 놈은 스스로의 힘이 부족함을 부끄러워하니, 프리드리히 한 사람에게 털어놓는 것만 해도 크게 마음을 먹은 것이겠지.

“그래, 옛날 얘기 좀 들어볼래?”

소년의 심각한 얘기를 제대로 듣고 있나 싶을 정도로 태연자약한 목소리였다.

“여기서 2년 전에 큰 작전이 하나 있었던 거 알지? 응, 디 아이 소탕 말이야. 안 믿기겠지만 그때 나랑 베른하드는 아직 입대 초반이라 예비 병력이었거든. 고참들이 무사히 작전에 성공하고 돌아오기만 기다리면서 둘이 같이 콜벳을 지키고 있었어. 그런데 어쩐지 시간이 한참 지나도 선배들 연락은 없고, 들이닥치는 괴물들 수는 점점 많아지더라. 점점 피로는 쌓이고 눈은 감겨 와도 되는대로 칼을 계속 휘두르면서 겨우겨우 콜벳을 지키고 있는데, 한순간 눈이 번쩍 뜨이더라. 저 너머에 괴물 한 마리가 사람 옷을 입고 있는데, 내가 기다리던 선배가 입던 옷이더라고. 나는 완전히 눈이 뒤집혀서 그놈한테 뛰어들라고 했는데 베른하드가 붙잡았어. 배짝 말라가지고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내가 난동 부리는 주먹 발길질 맞아가면서 콜벳으로 질질 끌고 갔어. 안에 들어가서 보니까 그놈 뒤에 훨씬 더 많은 괴물들이 우글거리고 있더라. 그대로 달려갔으면 그놈들한테 끌려가서 나 지금 이 자리에 없었겠지.”

소년은 찬물 끼얹은 듯 조용했다.

“결국에 돌아와서는 선배 옷 같은 소리는 안 했어. 어쨌거나 남은 사람들이라도 살아야 되거든.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잖아? 이 시대에 큰다는 건, 자란다는 건 그런 거다. 감정을 솎아내고 다듬는 거지. 지금은 약하니까 분한 마음뿐일 거야. 상대를 영원히 이길 수 없다면 차라리 지금 목숨을 버리고 싶겠지. 그렇지만 안 그래. 너도 기본 체격이 좋으니 곧 근육이 붙고 그 애보다 강해지는 때가 올 거다. 그리고 정작 그때가 오면, 마음에도 한층 더 여유가 생겨서 지금 감정은 별거 아니게 느껴질 거야. 그러니 그때까지 스스로를 더 아끼도록 해.”

가볍게 등을 두드리자 소년은 목례를 하고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입가에 미소를 띠고 멀어지는 소년의 모습을 바라보던 프리드리히가 이내 베른하드의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눈살을 찌푸린다.

“거기서 나와, 베른하드.”

동이 막 튼 햇빛이 눈부셔 눈물이 고였다. 베른하드는 그늘 밖으로 나가는 대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머리 위로 그늘이, 수많은 나뭇잎이 쓸리는 소리가 와르르 쏟아졌다. 수십 년 묵은 나무 밑으로는 햇빛이 쉽사리 새어 들어오지 않았고 고목 아래 놓은 셉터는 서늘히 식은 채다. 형제가 레지멘트에서 둘 다 함께 살아있는 것은 기적이라고들 했지만, 베른하드에게는 의미 없는 말이었다. 한 명만이 살아있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특히 살아남는 쪽이 베른하드 자신이어서는 안 된다. 검은, 그런 의미다.

프리드리히는 틀렸다. 감정을 솎아낼 여유 따위 없었다. 베른하드는 감정이 제멋대로 자라도록 놔두었다. 방치된 감정은 우거져 숲이 되고 밀림이 되었다. 베른하드는 그 안에 숨는다. 길을 잃는다.

[카운실] 네가 없는 세계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몇 번이고 줄을 긋고, 표현을 골라 다시 덧씌워도 마음에 차는 글이 나오지 않는다. 절로 한숨을 내뱉으며 옆에 있는 유리에 몸을 기댔다. 뺨에 서늘함이 스며들었다. 한참을 그대로 있는데 삐익 하는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살가드, 여기 있었나.”

송은 천천히 걸어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 추도사에… 늦을 수는 없으니까.”

그 말에는 어쩔 수 없었기에 건넨 손을 맞잡고 그가 이끄는 대로 몸을 일으켰다. 기대고 있던 유리 수조가 몸에 쓸리는 감촉이 서늘했다. 오래 전에는 그 안에 한 인간의 뇌가 500년간 잠겨 있었다. 마침내 수조에서 몸이 완전히 떨어졌을 때,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저는 역시 당신을 아직 보낼 수가 없습니다, 레드그레이브님. 저 같은 게… 레드그레이브님의 추도문을 외울 수 있을 리가 없어요. 처음 만났을 때도 저는 최악이었잖아요. 걸어 나가다 방문 앞에서 아쉬움에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은 황량하게 깨져나간 수조. 그렇지만 십수 년 전에는 빛나는 수조 안에 신이 잠들어 있었다.

긴 잠에서 깨어난 그분이 정말로 네 시간 만에 판데모니움을 지배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내 기분이 어땠더라? 희열, 기대, 경탄, 두려움, 그보다 훨씬 빠르게 불이 붙던 같잖은 계산과 욕망. 그때 그분이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래, 현재의 억압된 위치를 능가하는 힘을 원한다는 것인가. 좋다, 그렇다면 내 그대의 날개가 되어 주지.”

에둘러 몇 마디 꺼냈을 뿐인데 레드그레이브님은 이미 모든 걸 꿰뚫어 보신 듯 그렇게 말씀하셨고 나는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내색 않으려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분이 보시기에는 아주 가소로웠을 것이다. 그때 난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였다.

 

말없이 앞서가는 송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자꾸만 송의 앞에 자그마한 기계 소녀가 당당히 걷고 있을 것 같아서 그의 몸을 옆으로 치워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일전에 레드그레이브님이 몸을 얻기를 원하셨던 것은 세계의 급박한 문제들을 직접 해결할 수 있길 바라셨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그분은 복도를 거니면서도 늘 내게 이런저런 세계의 문제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러면 뒤따라가던 나는 그분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자긍심으로 가슴이 차올라 큰 목소리로 의견을 말하곤 했고, 그분은 웃으며 젊은 라이브러리안의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그리고 지금은- 복도는 판데모니움에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까맣게 길었고, 가라앉은 침묵 속에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길게 울리는 발소리가 심장을 짓밟았다.

마침내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 습관대로 열림 버튼을 누르고 먼저 들어갈 이를 기다렸다. 송은 아무 말도 않고 기다려 주었고, 몇 초가 지난 후에야 더 이상 문을 열어 드릴 분이 없다는 사실이 머리를 스쳤다. 손을 떼고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가자 송도 따라 들어왔다. 바보 취급하면서 먼저 들어가거나 뭐라고 할만도 하건만, 배려가 고마웠다. 아마 그도 그분의 빈자리를 누구보다도 크게 느끼고 있는 것일 테지.

엘리베이터 안, 허리보다 조금 낮은 위치에는 바가 하나 있었다. 늘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당당한 품새로 서 있는 레드그레이브님이셨지만 엘리베이터를 탈 때만큼은 이 바를 잡으셨고, 나는 그 흔치 않은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바의 한 쪽에 기계손에 의해 닳은 듯 칠이 벗겨진 흔적이 있었다. 그 위를 손가락으로 몇 번 쓸어보았다. 거칠었다.

무엇 하나 그분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 세계는 다시는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시는 전과 같을 수 없다.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최상부에 도착했다. 길은 기억하고 있다. 추도사는 최상부에 있는 거대한 광장에서 열리도록 되어 있었다. 일전에 레드그레이브님이 연설을 하신 적이 있는 곳이었다.

 

5백년 만에 깨어나신 레드그레이브님에 의한 통치는 완전하되 불완전했다. 그분이 너무나 완전했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세계의 모든 변수를 계산하는 생체 계산기였고, 모든 힘과 정책은 레드그레이브라는 단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분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이면 곧 그늘이 되어버린다. 때문에 그분은 도처에 눈과 귀를 두고 세계의 감시자로서의 업무에 충실하려 하셨다.

또한 다른 문제도 있었다. 늘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지는 의무 이상으로 권력을 휘두르려 하는 자들, 그들에게는 모든 힘이 한 사람에게 집권되는 것이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감히 레드그레이브님께 맞설 엄두는 내지 못하는 자들이었기에 대신 나에게 그들의 힐난하는 눈빛이 모두 따라붙었다. 누가 보아도 나는 레드그레이브님을 등에 업고 하루아침에 득세한 자였으니까. 물론 신경 쓰지 않고 비웃어 주면 그만이었으나, 한결같은 충성을 바쳐도 왕이 공신에게 내릴 만한 한 점 충의의 보답도 비치지 않는 기계소녀를 보면 속이 탔다. 그러나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내가 보아도 나는 그분 덕에 갑자기 득세한 이였으니까.

“레드그레이브님, 조사한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밤 늦은 시간이었다. 전쟁과 새로운 소용돌이의 발생으로 인한 혼란이 겹쳐 업무는 끝나지 않았고 나는 그분께 관련된 서류를 계속해서 가져다드리고 있었다.

“업무가 과중하여 모두 고생이 많구나. 그래도 짐이 예로부터 인복은 많더구나. 살가드 그대도 여기 있고 말이야.”

가장 고대했던 말을 그분은 무심한 어투로, 마치 오늘의 점심 메뉴가 무엇인지 얘기하듯 그렇게 하셨고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딱딱하게 말을 내뱉고 말았다.

“인선에 불만을 가진 이가 많은 걸로 압니다.”

“흐음. 불만이 많다라…”

그분은 나를 지긋이 쳐다보셨다.

“그대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것이겠지.”

무슨 괜한 말을 한 것인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그분의 말이 이어졌다.

“관리국에 가서 사흘 후 6-F에서 연설을 할 것이라 전하거라.”

 

레드그레이브가 몸을 얻었다더라. 마치 괴물 같은 모습이라더라, 사실은 레드그레이브를 누군가 은밀히 처리하고 대신 레드그레이브인 척 하고 있다더라,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는 실정이었다. 그 와중에 레드그레이브님이 처음으로 공식적인 자리에 몸을 보이시는 상황이었고, 사람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작고 어린 기계 몸이 단상 위에 서자 작게 웅성거리던 소리가 확성기라도 가져다 댄 듯 증폭되어 하늘까지 뒤흔들 듯 했다. 나는 긴장하여 마른침을 삼켰다.

연설이 시작되었다.

내가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누구라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가는 팔다리의 소녀가 70년 이상 세상을 다스리고 인간을 보살펴 온 자임을, 진정 세계의 통치자임을 말이다. 나는 하릴없이 부끄러워졌다. 나의 그분과의 넘어설 수 없는 격차에, 그리고 그런 분을 그동안의 나태했던 상사들과 동일하게 여기어 이용하려고 했던 내 오만함에. 그러면서 나는 보라색의 결연한 눈동자와 자줏빛의 리본이 조금씩 흔들리는 모습을 정신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퍼뜩 깨는 기분이 든 것은 연설 중 내 이름이 들렸을 때였다.

“…그러므로, 여기 짐의 뒤에 있는 살가드, 그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하는 것은 짐에게 그러는 것과 같다 여길 것이다.”

상상도 못한 말에 당황하여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후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새 연설이 끝나 나는 복도를 걸어가는 레드그레이브님을 종종걸음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레드그레이브님…”

중얼거리듯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셨는지 듣지 못하셨는지, 그분은 걸음을 멈추지 않으셨다. 여전히 당황해 있던 나는 레드그레이브님을 잡으려 했으나 치마 뒷자락의 리본만이 잡혀서 스르르 옷에서 풀려나왔다. 나는 다급하게 다시 큰 소리로 그분을 불렀다.

“레드그레이브님!”

선명한 보라색 눈이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는 것을 부끄러워 차마 계속 마주보질 못하고 손에 쥔 리본만을 대신 쳐다보면서 겨우 말을 이었다.

“어째서… 저 같은 걸 위해서 이렇게까지…”

그분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까치발을 들어 고개 숙인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셨다.

“불쾌했다면 미안하다. 그러나 지금의 그대는 평소와는 달리 그저 그 나잇대 어린 청년같은 것이 귀여운 모습이로구나.”

순간 속절없이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짐에게 섭섭한 것이 많았겠지.”

“아닙니다, 레드그레이브님… 저는 레드그레이브님께…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이가 아니란 것을 스스로 압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까지…”

“짐이 과했다고 생각하느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는 일전에 내게 아주 소중한 사람을 방치하였다가 허망하게 잃은 적이 있단다. 그러니 이제 내 사람을 지키기 위해선 최선을 다할 것이야. 나의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해서야 어찌 감히 세계를 지키는 사명을 스스로 입에 담을 수 있겠니? 살가드야,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귀한 사람이란다. 그때 만난 것이 누구보다도 해박한 라이브러리안인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으면, 짐이 어찌 수 시간의 짧은 대화만으로 500년의 공백을 넘어 현대 판데모니움의 정세를 이해하고 통치할 수 있었겠니? 그러니 다시는 그런 말은 말렴. 네가 더 큰 도약을 위해 짐을 선택하였듯이, 짐도 너를 그렇게 선택하였단다. 짐이 너의 날개가 되어 주겠다고 하지 않았니. 앞으로는 짐이 그대를 지켜줄 테니 신경 쓸 가치 없는 것들은 더 이상 신경 쓰지 말려무나.”

그때는 그저 상대를 이용하고자 했던 속마음을 처음부터 들키고 있었다는 데 대한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분하여 눈물까지 찔끔 났던 데는 나는 처음과는 달리 그저 그분을 이용하려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은 억울함, 아마도 그 울분이 더 컸던 것이다. 마치 지금과 같이.

아닙니다, 아니에요 레드그레이브님. 저는 그렇게 대단한 놈이 되지 못해요. 레드그레이브님이 없는 지금 저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신이 죽고 난 지금, 저는 발가벗겨진 채로 세상에 내던져진 기분이에요.

 

단상에 서서 눈을 들었다. 현기증 날 만큼 많은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판데모니움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으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전부 레드그레이브님이 작고하신 후 재편성될 권력 구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자들이었다. 제한파의 집권 후 힘을 잃고 실각했던 이들이 특히나 맨 앞자리에서 뚫어질 듯이 내가 선 단상을 응시한다. 우두머리를 잃은 이리들은 처음엔 혼란스러워하다가도 곧 서열을 재확인하려 손톱을 들고 제멋대로 날뛰며 피를 볼 것이다. 장내의 공기는 무거웠으나 동시에 기묘하게 붕 떠서 윙윙 울리고 있었고, 이빨을 숨긴 이리들은 눈빛만이 형형했다.

도망칠 수도 있었다. 몸을 숙이고 마음을 추스리고 좋은 때를 기다려 재기를 노릴 수도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들어있던 것을 살짝 꺼내보았다. 반짝이는 자줏빛의 공단 리본을 주체 못할 만큼 강하게 움켜쥐었다. 껍데기만 남은 채로, 그분의 마지막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이리떼 가운데에 서 있다.

입을 열었다.

놀랍게도 내 목소리가, 말투가, 자세가 꼭 그 때의 레드그레이브님을 닮아 있었다.

[카운실] 영속의 고리

엘리베이터는 닫힌 공간이다. 살가드는 눈앞의 문을 노려보았다. 이 문이 열리면 새로운 공간이 이어진다. 살가드에게 있어서 그 새로운 공간의 가능성은 두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라이브러리언의 근무처가 있는 상층부, 혹은 유전적 혈통에 의해 ‘열성’으로 분류된 살가드 자신의 거주지가 있는 하층부. 모든 것이 청결하고 기능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판데모니움이기에 하층부라고 해도 지상에서와 같은 심각한 치안의 위협이나, 전염병으로 인한 집단사망 같은 것은 없다. 그렇지만.

문이 열린다. 살가드는 순간적으로 상층부의 정경을 기대한다. 그러나 문이 열림과 동시에 코를 찌르는 냄새는 텁텁하고 매캐하다. 두 공간은 공기부터가 달랐다. 상층부를 걷고 있노라면 달콤한 음악이 들리고 은은한 향기가 난다. 사람의 눈에는 만족과 희망이 서려 있고 간혹 꿈으로 반짝인다. 그리고- 오늘은 하층부에 비가 내린다. 적정 습도와 생물이 위한 환경을 유지시키기 위한 인공 강우였다. 비가 오는 날의 하층부는 특히나 끔찍하다.

살가드는 우산을 펼치고 비가 내리는 하층부의 거리를 걸었다. 이 구획 저 구획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빗소리와 함께 어지럽게 뒤섞여서 고막을 찌르고, 아무렇게나 내다버린 쓰레기가 흐느적흐느적 녹아 질척거리며 발에 채여서 바닥이라고는 쳐다보기도 싫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에 빛이 없는 사람들. 되는 대로 일생을 소비하면서 몸에는 강단이 없이 저 쓰레기처럼 흐느적흐느적 녹아가면서 즉각적인 쾌락을 찾는 도시. 그것이 살가드 자신이 속해 있는 구역이었다.

물론 살가드는 자신이 저 흔한 하층부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그리고 어쨌거나 그 꿈이 실현되는 게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만큼 이상에 매달리지만 그게 고통을 없는 것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바꿀 것이다. 판데모니움도, 나의 처지도. 비관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하지만, 어떻게, 언제야. 어느 날 문을 열었을 때 이어지는 제3의 공간은 없을까. 비가 오는 탓인지 유독 감상적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사고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생각에 골몰한 채로 길을 계속 걷는데, 노래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꼭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듯 먼 소리라 환청이라도 들었나 하고 발을 다시 떼는데, 재차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고개를 돌리자, 옆을 막 지나가던 건물 입구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긴 머리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살가드는 순간 침을 삼켰다.

뺨에서는 빛이 나고, 속눈썹은 까맣게 보일 만큼 짙었다. 이목구비가 누군가가 부러 그렇게 그려놓은 것처럼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지만 너무도 완벽하게 조화되어 이질감이 들지 않는다. 키가 크고 손발이 죽 곧게 뻗었고, 자세는 곧되 보는 이가 불편할 만큼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으며 미소 짓는 표정은 완벽에 달했다. 확실히 하층부의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상층부에서 왔다고 단정 짓기에도 무언가가 꺼림칙했다. 사실 상층부 사람들이 하층부 시민과 달리 삶의 티끌이 없는 것을 보면서 살가드가 느끼는 감정은 불쾌감과 열등감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이 여자는 무언가 달랐다.

이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잖아.

“실례합니다. 제가 우산이 없는데, 목적지까지 같이 데려다 주실 수 있을까요?”

게다가 이상하지 않은가. 상층부의 사람이 하층부의 사람에게 이렇게 스스럼없이 동행을 부탁한다는 것은.

“어디로 가십니까?”

“B-73이요.”

살가드의 거처가 있는 곳이다. 상황이 기묘하다고 생각하는 살가드에게 여자가 미소 지었다. 삶에 아무런 고뇌도 미련도 없는 듯 행복하고 무구한 미소였다. 천국에 속한 것 같은 그 얼굴이 다시 한 번 의사를 묻는 듯 살가드 쪽으로 고개를 살짝 까딱하자 살가드는 저도 모르게 우산을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본능이 이는 다시 겪지 못할 순간임을 알았다.

여자는 의외로 말을 퍽 잘했다. 비가 오는데도 살가드와 조금의 간격을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 걷는 것이 처음엔 역시 나름대로 귀한 몸이라 하층부 사람에게 닿기는 싫은 것인가 불쾌감이 일었으나, 높고 맑은 목소리로 계속해서 재잘거리며 살가드에 대해서 묻는 것이 적어도 그의 출신을 꺼리는 것은 아니고 무언가 이유가 있겠다 싶어 남에게 까다로운 살가드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었다.

“후후, 그래서 그 상사에게 나름의 복수를 했다는 거군요. 하지만 무식한 상사는 당신이 그랬다는 것도 몰랐고. 멋지네요. 복수를 해서가 아니라, 그 정도로 직업에 통달했다는 것이 멋있어요.”

여자는 옆에 선 살가드를 올려다보며 해맑게 웃었다. 시선이 느껴졌지만 얼굴이 확 붉어질 것 같아 마주 내려다보지는 않았다.

“물론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닌 줄 압니다.”

“그럴 리가요. 제가 인정한 사람의 가치가 극상에 달하지 못하는 일은 없어요. 그런데…, 오늘이 며칠인가요?”

“열의 달 5일입니다.”

“이런 날에 살가드 씨는 무엇을 하시나요?”

“이런 날이라… 7일에 지하의 재조사가 있습니다. 라킨은 전의 보고를 덧씌워 대충 넘어가도 되는 것을 굳이 사서 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 했지만, 아무런 경각심도 없는 노인의 말을 따를 수는 없죠. 그러니 그 전에 다시 한 번 해당 구역의 유물 현황을 점검해 봐야겠네요.”

“그게 전부인가요?”

캐묻는 듯한 어투에 살가드는 무언가 놓친 것이라도 있나 고개를 숙이고 곰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입에서 짧은 탄식이 나왔다.

“아.”

여자가 빙그레 웃었다.

“제 생일이군요.”

“후후후.”

아까부터 모든 것을 아는 듯 구는 여자에게 살가드의 의문스러운 눈빛이 꽂히는 것을,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넘겼다.

“여전하시네요.”

“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까?”

그럴 리가 없다. 이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를 보았다면 잊었을 리가 없고, 또 고대 판데모니움의 기록물과 유적 관련 자료만을 되풀이하여 읽는 살가드가 이런 여자를 따로 만날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얼굴은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있다. 스스로 왜 그렇게 얼빠지고 멍청한 기분이 드는지 한심스러워 이를 까드득 깨무는데, 여자는 걷던 발을 멈추고 빙글 옆으로 몸을 돌려 살가드를 올려다보았다.

“생일인 것도 스스로 모르고 계셨다니, 딱하기도 하시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혹시 따로 약속이 없나요? 달리 급하게 부를 사람이 없다면, 오늘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내시겠어요?”

심장이 발끝까지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여자는 아름답고, 친절하며,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마치 천사 같다. 마다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상하다.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눈 사람에게 이렇게 아무런 의심도 계산도 없이 호의를 표할 수 있는 걸까. 사실 그녀야 원래 그런 여자라고 쳐도, 사람을 재고 평가하는 평소와 달리 이 처음 보는 여자에게 아무런 거부감도 스스럼도 없는 자신이 무엇보다도 이상했다. 이 여자는 정말 어딘가 이상하다. 뺨이 붉어져 여자를 훑어보던 살가드의 시선이 그녀의 어깨에서 멈췄다.

확실히 이상했다. 이렇게 계속 함께 빗속을 걸어왔는데 옷이 전혀 젖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자신의 왼쪽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제복이 확실히 새까맣게 젖어 있었다. 여자의 머리칼을 보았다. 비에 젖거나 부푼 기색 한 점 없이 한 올 한 올이 천사처럼 찰랑이고 있었다. 살가드는 자신이 착각해버린 것이길 바라며 들고 있던 우산을 놓았다.

“이런.”

후두둑후두둑 빗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속에 여자의 짧은 한탄이 섞였다. 비가 방울방울 여자의 몸 위로 떨어지는 것이 천천히 보였다. 빗방울은 스미지도 적시지도 않았다. 그리고 길게 뻗은 사지 아래로 그대로 비가 통과해 떨어졌다. 수많은 총알처럼 몸을 관통하는 빗방울 속에 여자는 고개를 뒤로 넘기며 빙긋이 웃었다.

“역시 살가드로구나. 영특하고 판단이 빠르지.”

판데모니움의 사람이 유전적 형질에 따라 외형과 실제 나이의 관련성이 천차만별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여자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연륜은 흡사 사람을 아주 오래 다루어 온, 지배자의 목소리이다. 빗방울이 몸을 통과하는 광경도 소름끼치거니와 지금껏 판데모니움의 정세와 사람들을 관찰해온 살가드의 직관이 경계신호를 보냈다. 이 여자는, 보통내기가 아니다. 덜컥 겁이 났다. 소름이 팔을 타고 쫙 올라와 여자를 밀쳐냈다. 아니 밀쳐내려 했으나 손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여자는 자신의 배를 통과한 살가드의 팔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하지만 언제나 남에게 필요 이상으로 경계가 많아.”

그 미소를 보고 살가드는 흠칫 팔을 내렸다. 기묘하고 이상한 것은 저 여자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인데 어째서 자신이 죄를 지은 듯한 기분이 드는지 시시각각 혼란이 더해왔다. 어떻게든 시시비비를 가려야 한다는 판단으로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케이오시움인가? 허가받지 않은 연구? 나에게 접근해서 어쩔 셈이지? 지금까지 얘기를 들었으면 알겠지만, 내게는 힘도 없고 이용할만한 능력도 없어.”

“그럴 리가. 그대는 짐이 가장 잘 알아.”

협박인가, 아니면 조롱인가 싶었지만 그 얼굴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애정과, 믿을 수 없지만 자애뿐이다. 당황하고 혼란스러워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여자의 얼굴께로 손을 가져다대었다. 역시나 만져지지 않는다.

“당신은.. 누구지?”

“잔상.”

눈의 곡선 없이 입 양끝만을 올린 웃음기 없는 미소였다.

“잔상, 혹은 홀로그램. 어쩌면 유령이라는 표현도 쓸 수 있겠군.”

홀로그램의 여자는 허리를 굽혀 살가드가 바닥에 떨어뜨린 우산을 주우려 했으나 손이 우산을 통과하여 헛손질만을 했다.

“짐이야 그렇다 치고 그대는 우산을 써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감기에 걸린단다, 살가드야. 이런. 주워지지 않는군.”

슬슬 억울하고 화가 났다. 오만한 말투로 살가드를 아끼고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는 태도도, 거기에 동조하여 휘둘리는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붉은 눈에 열기를 담고 여자를 노려보았다.

“유적 발굴 중에 따라붙은 케이오시움의 유령이라도 된다는 건가. 유령이라면 무시할 수도 있고 원인이 뭐가 됐든 찾아서 제거할 수도 있어. 그게 싫다면 나를 납득시켜봐.”

“케이오시움에 대해서 얼마나 아느냐? 지금의 그대라면- 별로 모르겠구나. 그러니 들어도 이해할 수 있겠느냐.”

발끈하여 입을 열지만 바로 말이 나오지 않는 살가드를 보고 여자는 쿡쿡 웃었다.

“그래도 조금은 이야기해주마. 짐은 영원의 광명 안에 있다 여겼거늘, 이 세계에 영속이란 없더구나. 하지만 모를 일이지. 지금 그대의 모습은 꼭 무의식중에 짐을 아는-”

잠시 말이 멎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지. 이 세상에 영속이란 없느니.”

그 말만은 되는 힘껏 부인하고 싶었으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케이오시움의 폭발을 아느냐. 다량의 케이오시움을 순식간에 방출시키면, 세계의 질서가 무너지는 혼돈의 상태가 된단다. 무한한 가역의 영역에 들어서는 것이지. 짐은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뇌가 깎이고 몸이 불타올라서 닳아 없어지는 고통이었어. 그래도 가까스로 원하는 것을 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잔해가 남았다. 몸은 남지 않았지만 그 남은 에너지로 불가능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

여자의 시선이 살가드가 가늠도 할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하게 먼 곳을 향했다.

“긴 시간이었다. 5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세계를 지켜온 후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에 무엇을 남겨야 할지 생각했다. 뇌리에 수많은 것들이 스쳐갔어. 그 세월 동안 나는 내게 소중한 존재들을 위하여 시간을 내주고 사상을 내주고 몸을 내주었다. 하지만, 그대에게는.”

이제 그 선명한 보랏빛의 시선은 바로 살가드를 향하고 있었다.

“늘 옆에 있어준 그대에게는 너무나도 해준 것이 없어. 그래서인지 결국 마지막에 머릿속에 남는 것은 그대이더구나.”

그 시선에 못이 박혔다.

“그대가 말했던 것이 생각이 났어. 이전에는 실로 힘든 시간이었다고. 무시당했고, 소외당했고, 혼자여서 유일한 돌파구로 보이는 일에 빠져 생일마저도 챙기지 못하기 일쑤였고, 나침반도 없이 길을 헤매던 그 때에 무언가 붙잡을 것이 있다면 좋았을 거라고.”

여자는 쓰게 웃었다.

“고작 이런 것이, 그대에게 위안이 될까. 그 반대일지도 모르지. 자기만족인지도 몰라. 자가당착에 빠져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래도 짐은-”

여자의 손이 살가드의 손을 향했다. 그러나 곧 그녀는 흠칫 놀라 손을 허공에 들어보았다. 빗방울이 그 손을 통과하는 것이 훤히 비쳐보였다.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었건만.”

여자는 대신 그대로 살가드의 뺨에 손을 올렸다.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것을 알기에 손은 뺨으로부터 공중에 조금 떠서 닿지 않았고 그만큼 조심스러웠다.

“미안하구나. 그리고 고맙고 또 미안해. 지금의 그대는 곧-.”

고개를 숙인 여자를 보자 다급한 마음이 들어 살가드는 다그치듯 말을 걸었다.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군. 그렇지만 지금-”

살가드의 입술이 떨렸다.

“지금 당신…”

비에 젖을 리가 없건만 여자의 입술이 곧 죽을 사람처럼 파리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손발과 흉부, 얼굴 곳곳이 흐렸다. 의미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살가드는 급히 우산을 주워들어 여자의 몸을 관통하는 빗방울을 막았다. 여자가 높고 맑은 목소리로 웃었다. 그러나 눈에는 웃음기 대신 다른 것이 있었다. 이건 마치-

“역시나 어리석은 수하로구나. 아무리 가능성의 힘이라도 남은 잔량으로 이 이상 질서를 어그러지게 할 수는 없어.”

이건 마치- 하늘로 올라갈 것 같잖아.

“뭐라고 하는 건지 여전히 모르겠어. 제대로 설명을 해 봐. 일단 그 몸부터 어떻게 좀 하고…”

여자가 왜 저런 표정인지, 그리고 살가드 자신은 어째서 처음 보는 이 때문에 이런 것인지, 모르지만 그저 머리가 꽉 막혔다. 손을 잡으려 해 보았다. 여자는 손을 마주 뻗었지만 살가드의 손이 닿는 곳마다 입자가 되어 산산이 부서졌다. 여자의 눈동자가 커졌다. 빗방울이 눈에 고였다. 그러고도 짐짓 차분한 목소리로 살가드를 어르려 했다.

“그렇게 재촉하지 말거라.”

이제 완전히 비칠 만큼 희미해진 입술이 가까스로 달싹이며 살가드의 귓가에 속삭였다. 차가운 빗방울 속에 있을 리 없는 숨이 낙인처럼 뜨겁게 닿았다.

“우린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테니.”

그 말을 끝으로 여자는 비에 녹아버리는 것처럼 사라지고,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까만 물웅덩이만이 남았다.

살가드는 그날 밤 공중도시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비 오는 날 판데모니움 하층의 더러운 물웅덩이가 몇 백 개나 되는지 세었다. 마치 하늘로 올라간 것처럼 여자의 다른 흔적은 없었다. 까닭도 모른 채 뇌를 쥐어짜는 것 같은 격통이 엄습했다. 남은 것은 귓가에 맺힌 그녀의 마지막 서약뿐이었다. 그러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시 만날 날까지 그 가늘게 떨리던 목소리를 믿고 기다릴밖에. 언제가 될지 모를 그 때에 그녀가 이 손을 제대로 잡고 나를 하늘로 끌어올려 주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