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합작 살가니타 – 라벨의 볼레로(Bolero)

공동(空洞)에는 공허뿐이었다.

두 사람, 아니 한 인형과 한 사람은 미확인 지역에 도착한 이후로 7천 알레가 넘는 거리를 걸었다. 그 말인즉슨,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은지 족히 한 시진은 되었다. 제 아무리 넓은 공터라 해도 보통 어딘가에는 장애물이 있기 마련이고, 대류의 흐름이 일어나고 소리 한 조각이 반사되어 센서에 닿아 청각 모듈을 활성화시키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없이 한없이 앞으로 걷기만 한 것이 벌써 몇 시간 경, 판데모니움 지하의 미확인 지역이 얼마나 방대한지 도니타는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바람 한낱 없는 허공 속에 그저 나아가는 것이 흡사 어둠 속으로 끝없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렇게 길을 잃는 감각에서 도니타를 구해주는 지표는 단 하나뿐이었다. 옆에 묵묵히 함께 걷고 있는 남자의 체온과 움직임. 마음 같아서는 매달리기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싫다. 왜냐하면 ― 도니타는 옆의 남자를 흘끗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짜증나는 남자다. 의회장 앞의 그는 한 마리 충견과 같이 바닥에 바짝 머리를 조아린 채다. 반면에 지금의 그는 걸음걸이부터가 날이 바싹 서 있어서- 살가드가 발을 멈춘 도니타를 홱 돌아보았다.

“뭘 뜸 들이고 서 있는 거지, 인형. 서두르는 게 좋을 텐데.”

날카로운 칼날처럼 잔뜩 예민하고, 지치고 질려 죽겠다는 눈빛이다. 어째서 자신을 항상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알 것도 같았다. 그가 어김없이 덧붙이는 호칭과 같이, 나는 처음부터 인형일 뿐이니까. 분했다. 도니타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누구 때문에 탐색이 이 속도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 혼자였으면 벌써 마쳤어! 나는 완전해. 신체적으로도 지식 면에서도 당신 같은 인간보다 훨씬 월등하다고. 왜 그 여자가- 굳이 당신을 동행시켰는지는 몰라도, 애초에 느려터진 당신 때문에 지체할 이유가 없단 말이야.”

말을 하다가 도니타는 잠시 멈칫했다. 레드그레이브를 그 여자라고 칭한 데 대해 살가드가 앙갚음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한번 내뱉기 시작한 말은 쉬이 멈추어지지 않았다. 살가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 발짝 다가왔다. 눈을 꽉 감았다. 최고성능의 인형인 도니타가 보통의 인간에게 당할 리가 없는데도 그는 어쩐지, 무서웠다. 그가 손을 댄다면 무언가 쉽사리 부서져 버릴 것 같다. 하지만 귓가에 들린 말은 예상과는 달랐다.

“어둠이 무서워서 멈춰 선 주제에 완전하다고?”

살며시 눈꺼풀을 올리자 내려다보는 붉은 눈을 마주쳤다. 눈빛에 서린 염증이 아까보다 한층 더 깊었다. 도니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쉽게도 말하는군. 나도 너와 이렇게 있고 싶어서 있는 게 아니다. 네가 닥터의 교섭 대역으로 판데모니움에 찾아왔고, 레드그레이브님이 너와 함께 코덱스를 탐색할 것을 지시하셨으니 따를 뿐이지.”

벽돌 빛의 눈이 타오를 듯이 바라본다. 역시 분했다. 남자가 멋대로 말하는 것도 분하지만, 어쩐지 그의 말 하나하나를 들을 때마다 연산회로가 통상의 활성 범주를 벗어나 어지러이 쿵쿵 울리는 것이 가장 분했다. 눈물이 찔끔 났다.

“나도… 여기 오고 싶지 않았어. 그렇지만 닥터도 여기 오기 싫어하니까…”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렸을 뿐인데 남자가 미간을 구기며 응답했다.

“그렇다면 오지 않으면 되잖나, 인형.”

대체 이 남자는 왜 이렇게까지 꼬박꼬박 따지고 드는 걸까. 가슴께에서 인공심장이 세게 한 번 박동하며 뜨거운 체액을 분출한다. 울컥했다.

“당신이야말로 쉽게 말하지 마. 나는-”

잠시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자 살가드가 계속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까딱했다.

“나는…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진 인형이니까.”

눈꼬리에 고였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하의 어둠이 상대의 시야를 가려주었기를 바랐다.

“이 정도는 해낼 수 있어. 나는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야. 그리고 내 이름은 인형이 아니야. 도니타라고.”

짐짓 어깨를 펴고 당당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도니타의 상상 이상으로 신랄했다.

“그래서, 쓸모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기 싫은 일을 시켜도 입 다물고 뭐든 해 내겠다? 순서가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자신 그 자체로 존재할 이유가 있음을 스스로 믿지 못하니 스스로를 학대시키겠다는 거지. 인형이라는 것들은 정말 언제나 상대하기 싫은 족속들이군.”

입술을 깨물며 말하는 남자를 더 이상은 차마 견딜 수 없어 도니타는 그만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이상하게 눈물이 자꾸 흘렀다.

“당신은 인간이잖아. 내가 어떤 입장인지 이해하지 못해.”

“이해하지 못한다고? 천만에. 그 모습 나한테는 무엇보다 익숙해.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노력을 다하기 전에 스스로의 처지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는 않는 거냐. 내가 그래서 너를-”

남자의 끓는 목소리는 가슴 속으로 삼키어 들어가는 듯 멎었다. 그만. 당신까지 나를 부정하지 마. 도니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마른 눈물과 함께 상념을 지웠다. 더 이상의 대화는 싫어 발걸음을 다시 옮기는데, 무언가 팔목을 꽉 쥐어 소녀를 멈추었다.

“도니타.”

괜스레 가슴이 철렁했다.

“계속 그렇게 겁먹어 있어서는 탐색에 방해가 된다. 그럴 바엔-”

서툴게 내민 상대의 손을 꼭 잡고 싶었지만, 이미 한 번 상처를 입은 자존심이 그것을 막았다. 도니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그대로 홀로 발을 떼었다.

빛 한 줄기 없는 지하 공터를 묵묵히 걸으면서 도니타의 연산회로는 쉼 없이 가동했다. 판데모니움에 오기 싫은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살가드 이 남자 때문이었다. 어째서인지 판데모니움에 가기 싫어하는 닥터를 대신하여 의회를 방문할 때마다 살가드가 도니타를 향하는 눈빛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염증으로 가득했다. 그런 그가 조금이나마 자신을 배려해 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조금은 말을 걸어 보아도 되지 않을까. 실은 끝없이 자신을 빨아들이는 이 공허한 어둠 속 침묵이 무서운 탓이기도 했다.

“저기… 그 여자…그러니까 레드그레이브도, 닥터도 다들 왜 그렇게 코덱스를 애타게 찾는 걸까? 과거의 기술은 판데모니움에도 충분히 많이 남아있던데…”

“오래된 예지.”

생소한 표현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살가드는 태연히 대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찾는 것은 오래된 예지다. 어떤 의문이든 해결해줄 수 있는 진리에 가까운 지혜이자 힘. 다른 이에게 알려지면 위험하기에 그저 과거의 기술이라고 뭉뚱그려 칭하고 있지만 말이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런 걸 쉽게 말해도 돼? 왜 나한테 말해주는 거야?”

남자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잠시 고민하는 듯 천장을 바라보다 짓씹듯 말을 뱉었다.

“너는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아까부터 오토마타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내가 당신 같은 인간보다 수백 배 이상 많은 정보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을걸? 닥터의 기술을 집약한 최고성능의 오토마타가 바로 나, 도니타라고.”

뽐내는 말을 무시하는 듯 대답이 없는 남자에게 도니타가 되물었다.

“당신도 그 코덱스를 찾고 있어?”

“그래.”

“어째서?”

살가드의 걸음이 잠시 느리게 멎는 듯 하다가 다시 이어졌다.

“살면서 꼭 해결하고 싶은 문제, 너에게는 없나? 반드시 고치고 싶은 비틀림. 풀리지 않는 의문.”

도니타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손뼉을 탁 쳤다.

“이상한 게 있기는 해. 자꾸 비슷한 꿈을 꾸거든. 이게… 사람들이 얘기하는 꿈과 같은 건지는 모르겠어. 그렇지만 밤에 자고 일어나면 이상한 기억의 잔상이 남아.”

“예를 들자면 어떤?”

“딱 뭐라 말하기는 힘들어. 항상 조금씩 다른 내용이라서. 하지만 확실한 건 자꾸 누군가와 함께 있는 기억이 남고, 그게 언제나 같은 사람이라는 걸 내가 안다는 거야. 닥터한테 물어봐도 어떤 현상인지 정확히 모르겠다고 하고.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내용을 완전히 잊어버리니까 실마리를 찾기도 힘들고…”

“쓸모없는 꿈이군.”

살가드는 콧방귀를 꼈다.

“그래도, 그 오래된 예지라는 것을 찾으면 이게 무슨 현상인지도 알아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좋겠지.”

조금 힘이 나는 것 같았다. 그 대화 이후로 한동안 도니타의 걸음걸이는 기운이 넘쳤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침묵과 무반응이 계속될수록 소녀의 어깨는 조금씩 쳐졌다. 기댈 것 하나 없는 어둠이 체액을 타고 올라와 스멀스멀 몸을 좀먹어 간다고 생각될 때 즈음, 무언가 연달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하 어딘가에서 붕괴라도 일어나는 건가 깜짝 놀랐지만 곧 관악기의 선율이 치는 리듬과 조화를 이루며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음악이었다. 그것도 꽤 흥겨운 음악이여서 도니타는 그에 맞추어 발을 가볍게 굴렀다.

“뭐지?”

“음악 소리가 들려.”

이때가 복수할 기회다 싶어 도니타는 재빨리 덧붙였다.

“당신처럼 평범한 인간은 지각하지 못하는 음량이겠지만.”

“무언가 있는 모양이군.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가 보지.”

너무나 태연한 반응에 도니타는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리면서도 신이 나 선두에 서서 살가드를 이끌었다.

 

 

“이건.”

긴장한 도니타에게 살가드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19세기경의 음악이군. 근처에 있는 물건들도 그 근방 시대의 것… 왜 여태껏 남아있는지 모르겠지만 황혼의 시대에 비하면 원시에 가까웠던 시대라, 아쉽게도 우리가 찾기를 기대한 것과는 달라.”

도니타는 바로 주변을 휘휘 돌아보았지만 그의 말대로 별로 쓸모 있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주변에 있는 골동품들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당신의 말은 믿을 수 없어.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시대를 알 수 있다고? 잘 모르면서 아무 말이나 둘러대는 거 아니야?”

말의 끝자락에 물기가 어렸다. 긴 시간을 탐색하고도 성과 없이 허탕을 친 것은 도니타에게 결코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아까의 대화 때문인지, 살가드와 함께 탐색하는 동안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에 희망이 사라지지 않고 빛나고 있었다. 그것이 방금 한 순간에 까만 재로 꺼진 것이다.

“라벨의 볼레로. 인상주의 고전 음악의 대표곡이다. 동일한 리듬이 악기 편성을 바꾸어 반복되면서 긴장감이 고조되지.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주제가 이어지지만 진부하지 않고, 약한 음으로 시작하여 마지막의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내고 끝나기로 유명한 곡이다.”

설명을 마친 그는 잠시 목을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음악이 그 시대부터 여태껏 틀어져 있었을 리는 없고, 아마 꺼져 있던 것이 우리가 이곳에 들어온 것이 트리거가 되어 재생된 모양이다. 정지되거나 사라졌던 것이 유적 탐사 중에 사소한 계기를 원인으로 되살아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니까.”

이때만큼은 도니타도 솔직하게 감탄했다.

“당신, 꽤 대단하네. 19세기의 정보는 나도 잘 모르고, 남아 있는 기록도 대부분 사멸했을 텐데 그렇게 상세히 알고 있다니… 왜 그 여자가 미확인 지역을 탐색하는 데에 당신을 동행시켰는지 알겠어.”

“오래된 유적을 관리하는 것이 내 일이었으니까.”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나도 유적을 탐색하는 몸이니까. 과거의 정보에 대해서는 최대한 자세히 알고 싶어.”

“어떤 정보를 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볼레로는 본래 춤의 이름이다. 지금 흐르는 음악과 같은 3박자의 느린 음악에 맞춰서 남녀가 추는 낭만적인 라틴 댄스지. 여성 댄서는 보통 긴 붉은 치마를 입고- 네가 지금 입고 있는 것과 비슷하군. 만약에 원한다면.”

살가드가 도니타의 앞에 바르게 서서 손을 내밀었다.

“배워보겠나?”

도니타의 눈이 흔들렸다. 눈앞에 가지런히 놓인 의수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지만 손을 마주 잡을 수는 없었다.

“역시 내가 이러는 것은 의심스러운가.”

“아니, 나는.”

도니타는 한쪽 팔을 꽉 쥐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인형이잖아.”

마치 그 대답을 들으리라 예상하고 있던 것처럼 살가드의 얼굴에도, 내민 손에도 흔들림은 없었다. 그 견고함을 믿고 다시 한 번 목소리를 쥐어짜내었다.

“인형에게도 그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건 나보다 네 자신이 더 잘 알겠지.”

순간 그 눈동자의 붉은 빛이 꼭 혐오나 조롱은 아닐 거라는 판단이 사고를 지배했다. 그는 계속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거부하면, 그리고 받아들이면 나는……. 연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도니타는 고개를 단호히 끄덕였다. 왼손을 마주 얹자, 살가드가 잡은 쪽의 손을 높이 들었다. 한순간 어지러웠다. 기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파쎄오(paseo). 기본 스텝이자, 춤의 도입부다. 일단 치맛자락을 들고 한 바퀴 돌아 봐.”

오른손으로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역시 남자인지 꽤 큰 상대의 왼손이 등을 살짝 떠미는 대로 한 바퀴를 돌았다. 붉은 치맛자락이 나풀나풀 꽃잎처럼 펼쳐졌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회전의 반동으로 살가드의 후드가 벗겨지는 찰나, 환각처럼 살가드의 얼굴 위로 조금 다른 모습이 겹쳐보였다. 눈에 화장도 없으며 머리도 넘기지 않고, 눈가에 세월의 흔적도 적고 무엇보다 눈동자에 혈기가 넘치는 한층 앳된 모습.

‘속으로만 불만을 쌓아두고 현실을 바꿀 생각은 감히 못하는 게 꼭 내 옛 모습 같아서 충고해줬더니만, 성이나 내? 정말 버릇없는 인형이군. 꼴불견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너 따위를 레드그레이브님께 데려오지 않았어.’

환청과 함께 웨엥 하고 바순 소리가 울렸다. 어지러워 발을 헛디뎌 넘어지려는 순간, 코르셋을 꽉 조인 인형답게 가는 허리를 남자의 팔이 감싸 안았다. 긴 금발이 소녀의 허리를 감싼 팔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스텝은 엄지발가락 아래 볼록한 부분으로 밟는다. 우아하게, 미끄러지듯이. 자, 따라해 봐.”

허리를 안고 몸을 이끄는 스텝을 따라, 몸을 밀착한 채로 부드럽게 미끄러질 때마다 두 갈래로 곱게 묶은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물결쳤다. 청각 모듈을 파고드는 음악 소리와 동시에 섬세한 촉각 센서는 고동치는 맥박을 감지했다. 처음이라고는 말도 안 되게 호흡이 너무도 잘 맞았다. 살아 있다는 건, 이런 거구나. 꼭 도니타 자신도 함께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맞잡은 손을 올려다보았다. 스텝을 밟으면서 환각은 다시 재생되었다. 마치 두 갈래의 시각과 청각이 동시에 느껴지는 것 같았다.

환각 속의 두 사람은 동시에 유물 위에 손을 올렸다. 손이 겹쳐지고 눈이 가까이 마주쳤다. 환각의 앳된 살가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찾은 거다, 인형!’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러! 당신 혹시 부끄러워?’

‘내가, 인형 따위 때문에? 웃기지도 않는군.’

‘전에는 인형이라고 해도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느껴지니까 더 당당해지라고 말했었잖아? 당신 말이 서로 안 맞잖아. 하나만 해.’

‘나는-‘

‘뜸 들이지 말고 어서. 그리고 이왕이면 인형 대신 도니타라고 불러줘. 이름과 같이 듣고 싶으니까.’

클라리넷의 음색과 함께 대화의 환청이 머릿속을 윙윙 울렸다. 멈추지 않는 환각 탓에 어지러웠다. 아니, 환각이 아니야. 아마 둘이 함께 유물을 찾는 게 처음이 아닌 거야. 하지만, 살가드를 만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 기억은 뭐지? 혼란 속에서도 음악과 춤은 멎지 않았다. 살가드가 도니타의 등을 끌어당기며 가볍게 빙글 돌았다.

“이제 트라베르싸(traversa). 스텝의 형태를 변화시키며, 두 사람의 위치를 바꾼다.”

‘안녕하세요, 살가드 씨. 도니타라고 합니다.’

환각 속의 살가드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재미없는 장난은 그만둬, 도니타.’

‘무슨… 말씀이신지, 살가드 씨…’

그제야 상황의 진실성을 깨닫고는 멍하니 도니타에게 다가오는 살가드를 워켄이 재빨리 방 밖으로 끌고 나갔다. 방에 덩그러니 서서 기억 속 도니타는 홀로 뒤에 남겨진 기분에 몸을 떨었다.

이 기억은 또 뭐야. 하지만 지금은 아냐, 혼자가 아니야. 멜로디가 다시 시작함과 동시에 도니타는 다급히 살가드의 등 위에 손을 올렸다. 살아 있는 심장 박동에 조금 안정이 되었다. 호른 소리 역시 심장소리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에 안도하며 상대의 어깨 위에 매달리다시피 얼굴을 묻었다.

“이 다음은 제자리에서 서로의 스텝을 교환하는 디페렌씨아스(diferencias).”

다리와 다리가 조심스레 얽혔다.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떨어졌다. 그리고 어김없이 환각이 스쳐갔다. 기억 속에서 도니타는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면서 빙긋이 웃으며 살가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살가드는 후드를 푹 눌러 쓰면서 시선을 피했다.

‘정말 내가 사람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그렇게 말해주는 게 눈물 날 만큼 고마웠는데 지금은 좀 답답해. 그럼 증명해 보지 그래요? 춤이라도 신청해 보든가.’

‘여전히 버릇없는 인형이군…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네 본질은 바뀌지 않은 것 같아서 안심이기도 해.’

‘난데없이 무슨 말이세요, 살가드 씨?’

기억 속의 살가드가 도니타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리고 도니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대고 한참이나 무언가를 속삭였다. 안 돼. 안 돼.

‘여기, 처음이 아니잖아. 기억해, 도니타? 네가 아무리 계속해서 기억을 잃는다고 해도, 나는 그걸 네게 비밀로 하는 건 기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제 그냥 살가드라고 불러도-‘

오보에 선율 위에 온갖 목관악기의 소리가 얹혀 멜로디가 장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기억 속의 도니타는 괴성에 가까운 소리를 우짖으며 뛰어올라 살가드를 덮쳤다. 손끝으로 목을 조르던 감각이 선연히 기억이 나서 부드럽게 춤을 추던 도니타는 그만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몸을 더욱 밀착해 현실의 살가드의 맥박을 느끼려 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기억 속의 도니타는 멈추지 않고 괴성을 질렀다.

‘아냐, 아냐, 아냐! 나는 죽지 않아!’

아무런 방비도 없이 도니타의 아래에 깔린 살가드의 얼굴색이 붉어졌다가 이윽고 보랏빛으로 질렸다. 그는 바들바들 떨리는 팔을 겨우 끌어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굴려 꺼냈다. 긴급 발신기를 누르면서 살가드는 가까스로 중얼거렸다.

‘…도…니타…’

그 말에 도니타의 팔 힘이 잠시 풀렸고 그 사이, 뒷목을 무언가가 세게 내리쳐 도니타는 힘을 잃고 쓰러졌다. 차가운 바닥에 머리를 흐트러뜨린 채로, 흐려져 가는 시야에 황망한 표정의 워켄이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다른 남자가 붉은 화장을 번져 가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울지 마요. 미안해요. 당신이 왜 우는 거야. 하지만 미처 나오지 않은 말은 기억과 함께 끊어졌다.

인공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을 친다. 시야가 붉었다. 살가드가 말했던 대로 음악에서 꼭 같은 멜로디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도니타는 눈치 챘다. 이제는 울렁거렸다. 선율을 연주하는 악기는 바뀌되 주제는, 결말은 절대 변하지 않고 되풀이된다. 살가드의 심장 박동도 더 이상 도니타에게 안정을 주지 못한다. 그 역시 반복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살가드는 도니타의 머리 위로 손을 넘겨 소녀를 부드럽게 한 바퀴 돌렸다. 어지러이 도는 시야 속에서 살가드가 아지랑이처럼 아른아른 발갛게 보였다.

“그리고 거리를 두고 걷다가 밀착하여 포즈를 취하기를 반복하는 피날레(finale).”

피콜로 소리는 가슴을 찌른다. 팀파니는 머리를 뒤흔들며 울린다. 살가드의 목소리는 너무나 달아서 회로를 태울 것 같다. 반면에 다시 시작하는 환각 속의 도니타는 평온하게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림책을 넘기고 있었다. 그때는 아무 것도 몰랐고 그래서 후드를 푹 눌러쓰고 방에 들어오는 살가드를 보고서도 말갛게 웃었다.

‘판데모니움에서 오신 살가드 씨죠? 기다리고 있었어요.’

도니타는 그림책이 구겨지지 않게 조심조심 닫고는 테이블 구석으로 치워놓았다. 하지만 살가드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이걸로 너를 처음으로 만나는 게 열세 번째다.’

도니타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왜 그만큼이나 되풀이해서 의미 없는 노력을 기울인 걸까.’

살가드는 허리를 깊이 숙이고 도니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마 이런 그림책이나 좋아하고, 항상 제멋대로고, 기억력도 형편없고, 끝의 끝을 보고서도 다시 일어나면 순진하게 웃고, 주제에 자존심은 세면서 자존감은 없어서 얘기를 하고 또 해줘도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그 때문에 자꾸 나를 신경 쓰게 만드는 구제불능의 인형인 너에게 조금은 마음이 끌렸던 모양이지. 인정하겠어.’

후드 밑에 가려져 있던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끝을 낼 수 있으니까.’

그때가 되어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었다. 그리고 어깨 위로 올라온 차가운 의수에 당황해서 주변을 돌아봤었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저, 인형 수급 일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오신 걸로 아는데-‘

‘전부터 궁금했다. 겉으로는 이렇게 귀여운 소녀인데, 그 내장은 어떨까. 이토록 말끔한 외관으로 기분이 까딱 잘못 어긋날 때마다 그 모든 기억과 감정을 없던 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그 내부는 대체 어떤 모양인 거지.’

‘무서워. 무서워요, 살가드 씨!’

‘그러면 네가 구제할 수 있는 인형이라는 걸 지금 보여 봐. 아예 나나 판데모니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정보를 얻으면 무사히 작동이 되는지, 이게 마지막 시도다.’

그러고 그는 도니타의 머리를 꽉 끌어안았다. 갑자기 찾아온 어둠 속에서 차가운 감촉이 느껴진다 싶더니, 정보가 머릿속에 흘러들어왔다. 그저 몇 뭉치의 이미지였다. 프로토타입과 함께 유적을 탐사하던 도니타, 살가드를 따라 부양선을 탔던 도니타, 처음 뇌 상태의 레드그레이브를 마주했던 도니타, 그림책을 읽는 도니타, 그리고 몇년 후 기억을 잃고 읽었던 책을 또 읽고 있는 도니타, 수리중인 도니타 등의 이미지 뭉치. 그러나 도니타는 얼마 못 가 고꾸라졌다. 가슴을 헐떡이며 테이블 위를 긁다가, 덜덜 떨리는 입술로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싫어, 어둠, 동작 정지, 싫어, 벌, 죽음… 산발적인 단어를 나열하다가 이윽고 바닥에 엎드려 쓰러졌다. 그리고 팔다리를 이상한 각도로 꺾으며 경련했다. 이제 떨리는 입술은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가드. 살가드. 괴로워. 아파. 힘들어. 괴로워.

하지만 살가드는 도니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아니, 그 무엇도 보고 있지 않았다. 희망이 갓 죽은 자의 빛이 없는 눈이었다. 살가드는 비척비척 쓰러지듯이 벽에 기댔다. 그리고 입술을 앙다물고 벽을 세게 쳤다. 주먹에서 피가 났다. 그 주먹으로 다시 가슴을 몇 번 치자 가슴 위에 핏자국이 낙인처럼 찍혔다. 가슴을 움켜쥐고 반대편 손으로 귓가에 꽂은 장치를 몇 번 눌러 통신을 연결했다.

‘레드그레이브님. 얼마 전에 리셋했던 닥터의 조수 오토마타가 다시 오작동했습니다. …알겠습니다. 동의를 받았다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도니타에게 다가오는 살가드의 손에는 하얗게 빛나는 와이어가 감긴 채였다. 팔을 휘두르자 흰 발목에, 그림책을 넘기던 손목에, 가는 허리에 와이어가 감기어 경련이 강제로 멈추었다. 한참을 그대로 서 있던 살가드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내 탓이 아니야. 네 탓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버릇없는 인형.’

살가드가 손을 높이 들었다.

허리가 휙 젖혀졌다. 음악과 춤은 고조되어 클라이막스에 달했다. 살가드는 젖힌 도니타의 허리를 쉽게 깨지는 유리 세공처럼 다시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이제 모든 것이 기억이 난다. 언젠가 우리는 나란히 서서 다시 만날 것을 손가락 걸고 약속했었다. 판데모니움의 지하에는 일곱 번을 같이 탐색을 했다. 당신은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나를 아홉 번 설득했다. 열네 번째부터는 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워져 모른 체하려 무진 애를 썼지만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기억나는 세월을 더듬어 보면 십 년에 달했다. 살가드 당신은 십 년이나 이걸 견뎌온 거구나. 머릿속이 녹아가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떠오르는 기억들 속에 분명히 이런 감각을 느낀 적이 있었다. 마지막 순간들.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지금 이건, 주마등이구나.

살가드가 맞잡은 손을 높이 올리고 도니타에게서 떨어져 섰다.

“마지막으로 비엔 파라도(bien parado). 동작을 갑자기 멈추고, 손을 잡고 조금 떨어져 자세를 유지한 채로 서로를 마주 본다. 그리고 서로에게 감사의 의미로 정중한 인사를… 도니타?”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나는 고장 난 인형이야.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미안해, 살가드. 이번엔 울지 마.”

고장 난 인형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환하게 웃었다. 회로가 과열되는 것이 느껴졌다. 십 년에 걸쳐 함께 나눈 순간순간이 기억의 심연 속에서 떠오르고 또 다른 순간을 회상시켜 거미줄처럼 하릴없이 뒤엉켜 갔다. 거대한 미쟝센의 수레바퀴가 머릿속을 밟아 구르며 무엇이 기억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뒤죽박죽이 된다. 머릿속에서 치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소녀는 마지막으로 남자의 손을 잡았다. 체온이 닿는 손끝에서부터 불꽃이 이는 것 같았다. 손가락에서부터 팔을 타고 올라와 종국에는 머리끝까지 화악 하얗게 타오르는 불길. 펑 하는 소리가 났다. 제어장치를 잃은 오토마타는 힘없는 인형이 되어 차가운 바닥 위로 쓰러졌다. 과열되었던 회로가 식으면서 소녀는 또다시 어둠 속으로 새까맣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남자는 또다시 소녀를 원망할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