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실] 네가 없는 세계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몇 번이고 줄을 긋고, 표현을 골라 다시 덧씌워도 마음에 차는 글이 나오지 않는다. 절로 한숨을 내뱉으며 옆에 있는 유리에 몸을 기댔다. 뺨에 서늘함이 스며들었다. 한참을 그대로 있는데 삐익 하는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살가드, 여기 있었나.”

송은 천천히 걸어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 추도사에… 늦을 수는 없으니까.”

그 말에는 어쩔 수 없었기에 건넨 손을 맞잡고 그가 이끄는 대로 몸을 일으켰다. 기대고 있던 유리 수조가 몸에 쓸리는 감촉이 서늘했다. 오래 전에는 그 안에 한 인간의 뇌가 500년간 잠겨 있었다. 마침내 수조에서 몸이 완전히 떨어졌을 때,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저는 역시 당신을 아직 보낼 수가 없습니다, 레드그레이브님. 저 같은 게… 레드그레이브님의 추도문을 외울 수 있을 리가 없어요. 처음 만났을 때도 저는 최악이었잖아요. 걸어 나가다 방문 앞에서 아쉬움에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은 황량하게 깨져나간 수조. 그렇지만 십수 년 전에는 빛나는 수조 안에 신이 잠들어 있었다.

긴 잠에서 깨어난 그분이 정말로 네 시간 만에 판데모니움을 지배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내 기분이 어땠더라? 희열, 기대, 경탄, 두려움, 그보다 훨씬 빠르게 불이 붙던 같잖은 계산과 욕망. 그때 그분이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래, 현재의 억압된 위치를 능가하는 힘을 원한다는 것인가. 좋다, 그렇다면 내 그대의 날개가 되어 주지.”

에둘러 몇 마디 꺼냈을 뿐인데 레드그레이브님은 이미 모든 걸 꿰뚫어 보신 듯 그렇게 말씀하셨고 나는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내색 않으려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분이 보시기에는 아주 가소로웠을 것이다. 그때 난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였다.

 

말없이 앞서가는 송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자꾸만 송의 앞에 자그마한 기계 소녀가 당당히 걷고 있을 것 같아서 그의 몸을 옆으로 치워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일전에 레드그레이브님이 몸을 얻기를 원하셨던 것은 세계의 급박한 문제들을 직접 해결할 수 있길 바라셨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그분은 복도를 거니면서도 늘 내게 이런저런 세계의 문제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러면 뒤따라가던 나는 그분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자긍심으로 가슴이 차올라 큰 목소리로 의견을 말하곤 했고, 그분은 웃으며 젊은 라이브러리안의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그리고 지금은- 복도는 판데모니움에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까맣게 길었고, 가라앉은 침묵 속에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길게 울리는 발소리가 심장을 짓밟았다.

마침내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 습관대로 열림 버튼을 누르고 먼저 들어갈 이를 기다렸다. 송은 아무 말도 않고 기다려 주었고, 몇 초가 지난 후에야 더 이상 문을 열어 드릴 분이 없다는 사실이 머리를 스쳤다. 손을 떼고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가자 송도 따라 들어왔다. 바보 취급하면서 먼저 들어가거나 뭐라고 할만도 하건만, 배려가 고마웠다. 아마 그도 그분의 빈자리를 누구보다도 크게 느끼고 있는 것일 테지.

엘리베이터 안, 허리보다 조금 낮은 위치에는 바가 하나 있었다. 늘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당당한 품새로 서 있는 레드그레이브님이셨지만 엘리베이터를 탈 때만큼은 이 바를 잡으셨고, 나는 그 흔치 않은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바의 한 쪽에 기계손에 의해 닳은 듯 칠이 벗겨진 흔적이 있었다. 그 위를 손가락으로 몇 번 쓸어보았다. 거칠었다.

무엇 하나 그분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 세계는 다시는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시는 전과 같을 수 없다.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최상부에 도착했다. 길은 기억하고 있다. 추도사는 최상부에 있는 거대한 광장에서 열리도록 되어 있었다. 일전에 레드그레이브님이 연설을 하신 적이 있는 곳이었다.

 

5백년 만에 깨어나신 레드그레이브님에 의한 통치는 완전하되 불완전했다. 그분이 너무나 완전했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세계의 모든 변수를 계산하는 생체 계산기였고, 모든 힘과 정책은 레드그레이브라는 단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분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이면 곧 그늘이 되어버린다. 때문에 그분은 도처에 눈과 귀를 두고 세계의 감시자로서의 업무에 충실하려 하셨다.

또한 다른 문제도 있었다. 늘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지는 의무 이상으로 권력을 휘두르려 하는 자들, 그들에게는 모든 힘이 한 사람에게 집권되는 것이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감히 레드그레이브님께 맞설 엄두는 내지 못하는 자들이었기에 대신 나에게 그들의 힐난하는 눈빛이 모두 따라붙었다. 누가 보아도 나는 레드그레이브님을 등에 업고 하루아침에 득세한 자였으니까. 물론 신경 쓰지 않고 비웃어 주면 그만이었으나, 한결같은 충성을 바쳐도 왕이 공신에게 내릴 만한 한 점 충의의 보답도 비치지 않는 기계소녀를 보면 속이 탔다. 그러나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내가 보아도 나는 그분 덕에 갑자기 득세한 이였으니까.

“레드그레이브님, 조사한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밤 늦은 시간이었다. 전쟁과 새로운 소용돌이의 발생으로 인한 혼란이 겹쳐 업무는 끝나지 않았고 나는 그분께 관련된 서류를 계속해서 가져다드리고 있었다.

“업무가 과중하여 모두 고생이 많구나. 그래도 짐이 예로부터 인복은 많더구나. 살가드 그대도 여기 있고 말이야.”

가장 고대했던 말을 그분은 무심한 어투로, 마치 오늘의 점심 메뉴가 무엇인지 얘기하듯 그렇게 하셨고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딱딱하게 말을 내뱉고 말았다.

“인선에 불만을 가진 이가 많은 걸로 압니다.”

“흐음. 불만이 많다라…”

그분은 나를 지긋이 쳐다보셨다.

“그대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것이겠지.”

무슨 괜한 말을 한 것인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그분의 말이 이어졌다.

“관리국에 가서 사흘 후 6-F에서 연설을 할 것이라 전하거라.”

 

레드그레이브가 몸을 얻었다더라. 마치 괴물 같은 모습이라더라, 사실은 레드그레이브를 누군가 은밀히 처리하고 대신 레드그레이브인 척 하고 있다더라,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는 실정이었다. 그 와중에 레드그레이브님이 처음으로 공식적인 자리에 몸을 보이시는 상황이었고, 사람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작고 어린 기계 몸이 단상 위에 서자 작게 웅성거리던 소리가 확성기라도 가져다 댄 듯 증폭되어 하늘까지 뒤흔들 듯 했다. 나는 긴장하여 마른침을 삼켰다.

연설이 시작되었다.

내가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누구라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가는 팔다리의 소녀가 70년 이상 세상을 다스리고 인간을 보살펴 온 자임을, 진정 세계의 통치자임을 말이다. 나는 하릴없이 부끄러워졌다. 나의 그분과의 넘어설 수 없는 격차에, 그리고 그런 분을 그동안의 나태했던 상사들과 동일하게 여기어 이용하려고 했던 내 오만함에. 그러면서 나는 보라색의 결연한 눈동자와 자줏빛의 리본이 조금씩 흔들리는 모습을 정신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퍼뜩 깨는 기분이 든 것은 연설 중 내 이름이 들렸을 때였다.

“…그러므로, 여기 짐의 뒤에 있는 살가드, 그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하는 것은 짐에게 그러는 것과 같다 여길 것이다.”

상상도 못한 말에 당황하여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후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새 연설이 끝나 나는 복도를 걸어가는 레드그레이브님을 종종걸음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레드그레이브님…”

중얼거리듯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셨는지 듣지 못하셨는지, 그분은 걸음을 멈추지 않으셨다. 여전히 당황해 있던 나는 레드그레이브님을 잡으려 했으나 치마 뒷자락의 리본만이 잡혀서 스르르 옷에서 풀려나왔다. 나는 다급하게 다시 큰 소리로 그분을 불렀다.

“레드그레이브님!”

선명한 보라색 눈이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는 것을 부끄러워 차마 계속 마주보질 못하고 손에 쥔 리본만을 대신 쳐다보면서 겨우 말을 이었다.

“어째서… 저 같은 걸 위해서 이렇게까지…”

그분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까치발을 들어 고개 숙인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셨다.

“불쾌했다면 미안하다. 그러나 지금의 그대는 평소와는 달리 그저 그 나잇대 어린 청년같은 것이 귀여운 모습이로구나.”

순간 속절없이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짐에게 섭섭한 것이 많았겠지.”

“아닙니다, 레드그레이브님… 저는 레드그레이브님께…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이가 아니란 것을 스스로 압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까지…”

“짐이 과했다고 생각하느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는 일전에 내게 아주 소중한 사람을 방치하였다가 허망하게 잃은 적이 있단다. 그러니 이제 내 사람을 지키기 위해선 최선을 다할 것이야. 나의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해서야 어찌 감히 세계를 지키는 사명을 스스로 입에 담을 수 있겠니? 살가드야,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귀한 사람이란다. 그때 만난 것이 누구보다도 해박한 라이브러리안인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으면, 짐이 어찌 수 시간의 짧은 대화만으로 500년의 공백을 넘어 현대 판데모니움의 정세를 이해하고 통치할 수 있었겠니? 그러니 다시는 그런 말은 말렴. 네가 더 큰 도약을 위해 짐을 선택하였듯이, 짐도 너를 그렇게 선택하였단다. 짐이 너의 날개가 되어 주겠다고 하지 않았니. 앞으로는 짐이 그대를 지켜줄 테니 신경 쓸 가치 없는 것들은 더 이상 신경 쓰지 말려무나.”

그때는 그저 상대를 이용하고자 했던 속마음을 처음부터 들키고 있었다는 데 대한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분하여 눈물까지 찔끔 났던 데는 나는 처음과는 달리 그저 그분을 이용하려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은 억울함, 아마도 그 울분이 더 컸던 것이다. 마치 지금과 같이.

아닙니다, 아니에요 레드그레이브님. 저는 그렇게 대단한 놈이 되지 못해요. 레드그레이브님이 없는 지금 저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신이 죽고 난 지금, 저는 발가벗겨진 채로 세상에 내던져진 기분이에요.

 

단상에 서서 눈을 들었다. 현기증 날 만큼 많은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판데모니움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으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전부 레드그레이브님이 작고하신 후 재편성될 권력 구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자들이었다. 제한파의 집권 후 힘을 잃고 실각했던 이들이 특히나 맨 앞자리에서 뚫어질 듯이 내가 선 단상을 응시한다. 우두머리를 잃은 이리들은 처음엔 혼란스러워하다가도 곧 서열을 재확인하려 손톱을 들고 제멋대로 날뛰며 피를 볼 것이다. 장내의 공기는 무거웠으나 동시에 기묘하게 붕 떠서 윙윙 울리고 있었고, 이빨을 숨긴 이리들은 눈빛만이 형형했다.

도망칠 수도 있었다. 몸을 숙이고 마음을 추스리고 좋은 때를 기다려 재기를 노릴 수도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들어있던 것을 살짝 꺼내보았다. 반짝이는 자줏빛의 공단 리본을 주체 못할 만큼 강하게 움켜쥐었다. 껍데기만 남은 채로, 그분의 마지막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이리떼 가운데에 서 있다.

입을 열었다.

놀랍게도 내 목소리가, 말투가, 자세가 꼭 그 때의 레드그레이브님을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