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하드의 숲

나무는 으레 따갑다. 멋모르고 숲 속을 쏘다니다가는 거친 껍질과 이름 모를 벌레가 아직 어린 아이의 살갗을 벌겋게 부풀어 오르게 만든다. 그래도 베른하드는 숲이 좋았다. 밖에서 살을 태워버릴 듯 이글거리는 땡볕보다는 차라리 빽빽한 나무 밑이 낫다 싶었다. 숲은 어둡고 서늘하다. 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으면 사방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 머리를 맴, 맴 메우고 이윽고 머릿속에서 되풀이된다. 그리고 그렇게 서늘한 숲에 가만 잠겨 있는 베른하드의 손을 뜨스운 체온이 낚아챈다. 눈을 떠 보면 어김없이 보이는 것은 자신과 꼭 같은 얼굴이다. 형제는 지치지도 않는지 언제나 베른하드를 이끌어 애써 피하던 뜨거운 태양 아래로 나간다. 그것마저도 좋았다.

 

여섯 살 때 즈음 프리드리히는 크게 앓았다. 거울처럼 늘 자신과 꼭 같이 함께 웃고 떠들던 얼굴이 해쓱하게 질려서 밭은 숨을 쌕쌕 몰아쉬는 것을 침대 머리맡에서 보고 있자니 왈칵 눈물이 났다. 막 들썩이기 시작하는 베른하드의 어깨를 아버지가 질끈 움켜쥐었다. 겁먹은 베른하드를 방 밖으로 데리고 나온 부모님은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로 아이를 타일렀다. 지금 제일 아프고 힘든 건 프리츠란다. 그런데 네가 울면 프리츠는 얼마나 겁이 나겠니. 형인 네가 흔들리지 말고 프리츠를 꼭 지켜주어야 해.

방으로 돌아온 베른하드는 다시 프리드리히의 머리맡에 앉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자리에서 뒤척이는 프리드리히의 이마에 붙은 머리칼을 넘기고 손을 잡았다. 꺼질 듯이 싸늘한 손가락이 미약한 힘으로 손을 마주 쥐었다. 신기하게도 더는 무섭지 않았다. 다만 안타까웠다. 이 세상에, 어둠 속 창문 너머로 비치는 달빛 아래 자신이 지켜주어야 하는 형제가 있었다. 그 얼굴은 자신과 같았으나 더 이상 같지 않았다. 밤새 동생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그 손을 식지 마라 꼭 부여잡고 있었다. 그것이 여섯 살 베른하드에게 있어서 세상의 시작이었다.

프리드리히가 낫는 데는 꼬박 석 달이 넘게 걸렸다. 어린 아이에겐 길고 긴 시간을 베른하드는 종일 동생을 지켜보고 수발을 들면서 지냈다. 갸륵한 정성에 지켜보는 어른들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막 병이 나은 프리드리히를 부모는 혹여나 깨질세라 조심조심 다루었고, 잔소리도 극심했다. 그런데 베른하드가 제 부모보다 더했다. 다른 아이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자이페르트 부부는 프리드리히보다 베른하드를 먼저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베른하드가 낫는 데에는 일년도 더 넘게 걸렸다.

프리드리히에게 심부름을 시키면 꼭 따라갈 때까지는 그저 형 노릇을 하는 아이가 기특하다고만 여겼다. 하지만 한밤중에 물을 마시러 가는 동생을 불러 세우고, 프리드리히를 따로 불러내는 마을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그 부모들이 가세하자 어른들에게까지 맞서 울면서도 하얗게 질린 프리드리히의 손만은 놓지 않고 있었을 때. 그리고 마침내 소름이 돋은 자이페르트 부부가 살살 어르고 윽박질러도 이미 꺾이지 않는 아이임을 목도했을 때는 어찌하랴.

처음 키우는 아이의 행동이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면 부모는 당황하여 다그치고, 아이는 그 반작용만큼 소리를 맞받아치거나 아예 입을 다물어버린다. 그것이 그맘때 자이페르트가의 일상이었다. 귀를 쨀 것 마냥 시끄러웠던 강제와 무시와 몰이해의 연쇄 속에 정작 프리드리히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다. 아니면 어떤 날 이후로 베른하드에게 프리드리히가 너무나 뚜렷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보통 때는 늘 베른하드가 프리드리히의 손을 쥐었지만 그날만큼은 프리드리히가 베른하드의 손을 먼저 잡았다. 아마 어디를 가든 베른하드가 가로막고 따라붙으니 제 가고 싶은 곳을 가고자 아예 먼저 선수를 치는 것이겠지. 베른하드는 형제를 사랑하지만 믿지는 않았다. 동생을 지켜야 해. 부모님은 어린 베른하드에게 세상의 진리를 이르고는 이내 부정했다. 프리드리히도 모두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몇 번이고 프리드리히가 숨이 넘어가는 위기를 꼬박 밤 지새우며 숨죽여 바라본 베른하드에게 동생은 쉽게 꺼지는 등불이었다. 그나마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토록 온 신경을 기울여 보살피는 동생인데 대체 어디가 그렇게 가고 싶다고 이리 선수까지 치는지, 베른하드는 그마저도 못마땅했다. 동생의 손을 꼭 쥔 채 역시 이대로 되돌아설까 자꾸 생각하다가도 가슴 한편에서 계속 호기심이 일었다. 대체 어디이길래.

그렇게 한참이나 말없이 걷고 또 걷고, 주위를 둘러싼 풍경이 변하고 세계가 조금씩 변했다. 마침내 도시를 둘러싼 성벽 근방에까지 왔을 때 베른하드는 동생을 자신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도 잊고 있었다. 베른하드는 이 길을 알고 있었다. 도시를 드나드는 상단에 섞여 몰래 성벽을 빠져나와서 도착한 곳은 번사이드 외곽의 숲, 베른하드의 세상의 진리가 바뀌기 전에 왔던 곳이었다.

볕이 온난했던 초봄에 젊은 부부와 아이들은 이곳에 와서 묘목 하나를 심고 붉은 줄을 매어 자이페르트라고 쓰인 명찰을 걸었다. 프리드리히가 아프기 전, 모든 것이 지금보다 즐겁고 평안했던 나날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작은 묘목이지만 잘 돌보면 곧 아름드리 거목으로 자랄 것이며, 아이들 역시 나무가 크는 만큼 커질 거라고 부부는 반 협박을 섞어 농담을 했다. 그러니 잊지 말고 꼬박꼬박 찾아와서 벌레가 꾀지 않게 약을 치고 나무를 돌보자고. 그러나 프리드리히가 아프게 되면서 나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리고 나무를 다시 찾아온 지금의 계절은 가을이 막 찾아오는 때이다. 숲길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휑하니 불자 소름이 오소소 돋으면서 베른하드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너희도 나무가 커질 만큼 커질 거야. 하지만 우리 형제는 그때로부터 조금이라도 자랐나? 프리드리히가 아팠던 것도 찬바람 속에 방치된 나무가 시들어서는 아니었을까? 불길한 예감 속에 걸음을 재촉하던 베른하드의 발이 문득 멎었다.

빽빽한 침엽수립 가운데서 너른 이파리를 활짝 펴고 빨간 줄을 맨 나무는 단연 눈에 띄었다. 줄기는 높이 뻗고 가지는 넓게 퍼졌다. 두께도 굵어져 줄이 나무를 꽉 죄일 정도였다. 한참 넋을 놓고 나무를 바라보고 있자니 옷 밖으로 드러난 목과 팔이 따끔따끔했다. 가을볕이 생각 이상으로 뜨거워 베른하드는 나무 밑에 숨어들었다. 환하던 세상이 순식간에 어둑해졌다. 뒤를 돌자 그늘 아래서 보는 볕 빛이 아찔하게 눈이 부셨다. 그리고 그 안에 프리드리히가 서 있다.

다시 한차례 바람이 불었다. 빽빽한 가지가 흔들리며 검게 그늘을 드리우던 나뭇잎이 쓸려나갔다. 그렇게 드러난 사이사이로 빛줄기가 점점이 찌르고 들어와 베른하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들과 나비 떼가 알록달록 햇빛 속을 쇄도했다.

“걸음이 빠르던데, 걱정했어, 베른?”

색이 고운 나비 한 마리가 프리드리히의 팔위에 앉을 것 같더니만 팔랑팔랑 날아갔다.

“아마 우리가 계속 찾아와서 약을 쳤으면 여기 이렇게 많은 새도 나비도 없었을 거야. 나무가 얘네 때문에 조금쯤 아팠으니까 이렇게 같이 지낼 수 있었던 거고, 나비가 계속 왔으니까 이제 열매도 잔뜩 맺겠지.”

프리드리히는 붉은 줄에 달린 자이페르트, 라고 쓰인 명찰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나무만큼 크게 자랄 거야. 새들이랑 같이 하늘에 닿을 만큼 커질 거야. 나 혼자는 싫어. 나는 베른 덕분에 여기까지 나올 만큼 건강해졌으니까. 나는 베른이 나랑 같이 커졌으면 좋겠어…”

“프리드리히 너, 그동안 나 몰래 나와서 여길 보러 왔던 거야?”

프리드리히는 더 이상 말은 않았다. 숙인 얼굴에서 초조함을 완전히 숨기지 못하고 푸른 눈으로 베른하드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선택의 때이다. 가지가 흔들리고 햇빛이 이지러지고 지축이 흔들렸다. 아이의 시간은 흔들린다. 여섯 살에 속으로 삼킨 반신을 잃는다는 공포와 그것을 모른 채로 살아갔던 안온한 일상, 두 시간이 어지럽게 마음을 파도치는 가운데 하나의 생각이 수평선을 물들이는 태양처럼 마음을 물들였다. 동생이 이렇게나 착하고 속 깊은 아이라는 것이다.

그늘 밖으로 나오면서 한 손으로는 눈이 부셔 햇빛을 가리고, 한 손으로는 프리드리히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앞장서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드리히의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동생이, 아니 베른하드가 아팠던 이후로 처음 보는 눈부시게 밝은 미소였다. 그날 프리드리히가 이끄는 대로 숲을 떠나면서 베른하드는 나무를 흘끗 돌아보았다. 서늘한 날인데도 파란 새순이 돋고 있다. 다시 앞을 보면 프리드리히가 햇살처럼 환하게 웃고 있다. 베른하드의 마음에도 이름 모를 작은 싹이 텄다.

 

그 후로도 베른하드는 여전히 그늘을 좋아했다. 한동안 오로지 한 사람의 반경만을 바라보며 살던 베른하드가 낫는 데는 꼬박 일 년이 넘게 걸렸는데, 어린아이에게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수술이 흉터를 남기듯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병치레는 아이들에게 역할을 남겼다. 프리드리히는 내면에 침전해버린 형의 세상을 넓혀주느라 밝고 모험심이 강한 아이가 되었고, 베른하드는 그런 프리드리히가 지나치게 흥분해서 깜박 길을 잊으면 침착하게 동생을 지키는 아이가 되었다.

행복한 나날이었다. 건강을 되찾은 아이들을 끔찍이 아껴주시는 부모님 아래, 비옥한 번사이드의 토양 위에서 이끌고 끌려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며 아이들의 세계는 넓어졌다. 나무는 새에게 닿을 만큼 커졌고 아이들은 키가 훌쩍 자랐다.

 

그리고 열일곱 살에 프리드리히는 다시 베른하드에게 남은 세계의 전부가 되었다. 소용돌이에 휘말려 집이 무너지고 분명 안에 계셨음이 분명한 부모님을 찾을 수 없었을 때도 베른하드는 말이 없었다. 다만 프리드리히의 손을 꼭 쥐었다. 인생의 풍랑을 만나 표류한 두 아이는 그저 눈앞에 보이는 지푸라기를 잡을 뿐 다른 수가 없었다. 쌍둥이는 저들의 유난히 큰 키를 눈여겨본 레지멘트 대원들을 따라 터덜터덜 유년을 떠나는 길에 올랐다.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을 그 길에서 묵묵히 지시를 따르던 베른하드는 딱 한 번 연대를 귀찮게 했다. 어느 숲 앞에서 굳이 잠깐만 여기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떼를 쓴 것이다.

이제 너도 연대의 일원인 이상 너 하나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이 멈추는 일은 없다고 부대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 프리드리히가 손을 들었다.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말이었다. 마침내 부대장이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베른하드는 숲 속으로 달려갔다. 프리드리히가 뒤를 따랐다. 속도는 달랐으되 두 아이의 발걸음은 같은 곳을 향했다. 그러나 그 발걸음은 거의 동시에 멈추고 만다. 소용돌이와 함께 일어난 화재로 나무는 검게 그슬려 가지만이 남았다. 그 아래 들어가도 햇빛이 델 듯이 뜨거웠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좀처럼 나오지 않는 아이들을 찾아 숲으로 들어간 부대장이 데리고 나온 것은 한층 해쓱해진 청년이었다.

 

 

베른하드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레지멘트의 요새는 산기슭에 있고 그중에서도 서측으로 난 쌍둥이의 방은 아침까지도 반쯤 진 그늘로 살짝 서늘하다. 그늘과 잠기운과 꿈결이 베른하드를 거미줄처럼 덮어 눌렀다. 꿈속에서 어린 프리드리히의 손을 잡던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손가락은 굵고 마디져 그때보다 훌쩍 길게 자라 있었다.

시선을 올리자 보이는 옷걸이에는 제복이 한 벌만 걸려 있다. 프리드리히가 먼저 일어나서 나가다니, 드문 일이다. 아마도 베른하드 자신이 오랜만에 어린 시절의 꿈을 꾸느라 제때 일어나지 못한 것이겠지. 더 지체하지 않고 일어나 커피를 내렸다. 씁쓸한 향이 기도를 타고 내려가면서 정신이 확 깬다. 어서 밖으로 나가서 프리드리히가 이른 아침부터 무얼 하러 나갔는지 확인해 볼 요량이다.

셔츠를 걸치고 단추를 위에서 아래로 잠그고 넥타이를 맨다. 코트를 걸치고 그 위로 다시 혁대를 끼우고, 완장을 드는 순간 일련의 작업이 번거롭게 느껴져 내던져버릴까 팔을 들었다가 내렸다. 규율 위반은 소대장으로서 안 될 말이다. 방에 미미하게 남은 커피 향을 맡으며 완장까지 찬 후, 문 앞에서 잠깐 멈춰섰다가 방 안으로 돌아와 셉터를 들었다. 다시 숙소 밖으로 발을 옮기며 프리드리히가 일찍 일어나서 갈 만한 곳을 생각해보았다.

일단 아무리 제멋대로인 프리드리히라도 별 일이 없는 한 새벽부터 구내를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야 한다. 프리드리히가 우연히 새벽 일찍 잠에서 깨었다고 가정할 때 갈만한 곳은 역시 식당이다. 원래 정해진 시간에만 운영되는 식당이지만 프리드리히라면 새벽에 유유히 들어가서 비상식량 몇 그릇 들이키고 있고도 남는다 ― 까지 생각하고 정신을 차리고 나니 벌써 훈련장 앞까지 도착한 참이었다. 남들보다 발이 배로 빠른 베른하드다 보니 식당을 지나치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여름이 가까워지는 날씨에 빠르게 걸었더니 갖춰 입은 제복 밑으로 열이 올랐다. 검이 달구어져 땀이 찬 손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다시 힘주어 꽉 쥐었다. 어서 식당에, 그리고 교관실에도… 셈을 하면서 발걸음을 돌리는데 얼핏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훈련장 쪽을 들여다보자 한구석에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손에 힘이 풀렸다.

“프리-”

프리드리히가 살짝 돌아보더니 눈짓을 하면서 가만 있으라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가만 보니 프리드리히 혼자가 아니라 어린 훈련생 하나가 그 앞에 가려 있었다. 재작년 디 아이 소탕 작전의 실패 이후 레지멘트가 재편성되고 어린 훈련생들을 받게 되면서, 무던히 성격 좋은 프리드리히는 곧잘 훈련생들에게 질문이나 상담까지도 받고는 했다. 종종 동생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프리드리히는 필히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것이다. 기묘한 상실감과 동시에 충족감이 들었다. 아무튼 지금은 끼어들 때가 아닌 듯하여 훈련장을 둘러싼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검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다 뒤집어엎고 싶은데 제가 실력이 안 되니까… 부끄러워서 참기 힘들어요. 마음 같아선 차라리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진검으로 공격하고 싶어요.”

이 정도면 베른하드도 왜 프리드리히가 끼어들지 말라 눈짓을 줬는지 눈치 챌 수 있었다. 레지멘트에 어린 소년들이 들어오면서는 이러한 일이 새로운 골칫거리였다. 고맘때 애들은 남보다 자신이 나음을 대놓고 증명하지 못해 안달을 내기 마련이라, 약해 보이는 녀석을 괴롭히고 상대의 사기가 떨어지면 그것을 빌미로 또 괴롭히고는 한다. 그리고 당하는 놈은 스스로의 힘이 부족함을 부끄러워하니, 프리드리히 한 사람에게 털어놓는 것만 해도 크게 마음을 먹은 것이겠지.

“그래, 옛날 얘기 좀 들어볼래?”

소년의 심각한 얘기를 제대로 듣고 있나 싶을 정도로 태연자약한 목소리였다.

“여기서 2년 전에 큰 작전이 하나 있었던 거 알지? 응, 디 아이 소탕 말이야. 안 믿기겠지만 그때 나랑 베른하드는 아직 입대 초반이라 예비 병력이었거든. 고참들이 무사히 작전에 성공하고 돌아오기만 기다리면서 둘이 같이 콜벳을 지키고 있었어. 그런데 어쩐지 시간이 한참 지나도 선배들 연락은 없고, 들이닥치는 괴물들 수는 점점 많아지더라. 점점 피로는 쌓이고 눈은 감겨 와도 되는대로 칼을 계속 휘두르면서 겨우겨우 콜벳을 지키고 있는데, 한순간 눈이 번쩍 뜨이더라. 저 너머에 괴물 한 마리가 사람 옷을 입고 있는데, 내가 기다리던 선배가 입던 옷이더라고. 나는 완전히 눈이 뒤집혀서 그놈한테 뛰어들라고 했는데 베른하드가 붙잡았어. 배짝 말라가지고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내가 난동 부리는 주먹 발길질 맞아가면서 콜벳으로 질질 끌고 갔어. 안에 들어가서 보니까 그놈 뒤에 훨씬 더 많은 괴물들이 우글거리고 있더라. 그대로 달려갔으면 그놈들한테 끌려가서 나 지금 이 자리에 없었겠지.”

소년은 찬물 끼얹은 듯 조용했다.

“결국에 돌아와서는 선배 옷 같은 소리는 안 했어. 어쨌거나 남은 사람들이라도 살아야 되거든.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잖아? 이 시대에 큰다는 건, 자란다는 건 그런 거다. 감정을 솎아내고 다듬는 거지. 지금은 약하니까 분한 마음뿐일 거야. 상대를 영원히 이길 수 없다면 차라리 지금 목숨을 버리고 싶겠지. 그렇지만 안 그래. 너도 기본 체격이 좋으니 곧 근육이 붙고 그 애보다 강해지는 때가 올 거다. 그리고 정작 그때가 오면, 마음에도 한층 더 여유가 생겨서 지금 감정은 별거 아니게 느껴질 거야. 그러니 그때까지 스스로를 더 아끼도록 해.”

가볍게 등을 두드리자 소년은 목례를 하고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입가에 미소를 띠고 멀어지는 소년의 모습을 바라보던 프리드리히가 이내 베른하드의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눈살을 찌푸린다.

“거기서 나와, 베른하드.”

동이 막 튼 햇빛이 눈부셔 눈물이 고였다. 베른하드는 그늘 밖으로 나가는 대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머리 위로 그늘이, 수많은 나뭇잎이 쓸리는 소리가 와르르 쏟아졌다. 수십 년 묵은 나무 밑으로는 햇빛이 쉽사리 새어 들어오지 않았고 고목 아래 놓은 셉터는 서늘히 식은 채다. 형제가 레지멘트에서 둘 다 함께 살아있는 것은 기적이라고들 했지만, 베른하드에게는 의미 없는 말이었다. 한 명만이 살아있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특히 살아남는 쪽이 베른하드 자신이어서는 안 된다. 검은, 그런 의미다.

프리드리히는 틀렸다. 감정을 솎아낼 여유 따위 없었다. 베른하드는 감정이 제멋대로 자라도록 놔두었다. 방치된 감정은 우거져 숲이 되고 밀림이 되었다. 베른하드는 그 안에 숨는다. 길을 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