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대조] Furious Anger / Call Me My Dear

이 세계는 신이 만든다. 그리고 교부 콘라드는 그 손에 신의 권능을 쥐고 있었다. 그의 의지가 곧 신의 의지이며, 압도적인 힘으로 세계의 질서를 제 마음대로 주무르는 교부에게는 세상에 거칠 것이 없었다. 마녀에 대해서도 그랬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가냘픈 마녀가 지닌 능력은 콘라드도 인정하고 탐을 낼만한 힘인 동시에 저주받은 것이었다. 지옥의 겁화를 부르고 나면 마녀는 몸의 모든 구멍으로 검은 피를 흘렸고, 한 번 더 기적을 행하고 나면 마녀는 목소리를 잃은 채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눈에 갈구를 담고서 파리한 입술을 교부에게 달싹였다. 그러면 콘라드는 들썩이는 마녀의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신의 의지로 어그러진 것을 바로잡았다. 어느새 말끔한 모습이 되어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는 마녀를 보면서 콘라드는 잘 단련된 손을 세게 한번 쥐어보았다. 그리고 되뇌었다.

내 손에는 신의 권능이 있어.

이 손으로 그는 그 무엇이든지 능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신의 힘에 달하는 마녀를 손에 넣은 것도, 그녀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그에게는 좋은 일인 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건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홀로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 가까이 다가가면 마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따금 어깨에 아슬아슬 끈으로 매달린 보랏빛의 네글리제 한 장만을 걸치고 분홍, 하늘 색색의 꽃잎을 말리는 뒷모습이 외롭고 추워 보여 담요를 갖다 주고 나중에 보면 담요는 마녀의 몸에 덮이기는커녕 멀리 내팽개쳐져 있었다. 가져다주는 간식은 성당 이곳저곳의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다.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었다. 처음에는 마음 한편을 간지럽히는 의문이었으나 호기심은 곧 깊게 얼룩이 번져 견딜 수 없이 안달이 났다. 때마침 흔치 않은 꽃이 성당에 공물로 들어와 그것을 들고 마녀의 방에 들어가 보았다.

하얀 마녀의 곁으로 색색의 꽃잎이 장식처럼 흩어져 있다. 아이처럼 희고 가는 팔을 뻗어 압화에 열중한 모습에 역시나 싶어 웃음이 났다. 웃음소리에 마녀가 말간 얼굴을 들었다. 그렇게 교부는 계속 자신을 피하던 마녀의 눈을 처음으로 곧이 마주하게 되었다. 찡그린 눈 안에서 자신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은, 경멸이었다.

“요즘 왜… 이러는 거야?”

마녀는 고개를 홱 돌리고 들고 있던 책을 던지듯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말린 미색의 꽃잎 꽃잎이 마녀로부터 바스스 부서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하얀 살결이 흩어져 내리며 콘라드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아 가슴이 철렁했다. 자신의 옆을 지나쳐 방 밖으로 나가려는 마녀의 손목을 황급히 잡아챘다. 그러자 마녀가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가는 손목 위로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흠칫 손을 놓았다.

“몸의 이상은 내가 전부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잠시 말이 없던 마녀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 비죽 웃었다.

“내가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했어…?”

이제 더 이상 명백할 수 없을 만큼 완연하게 비웃는 얼굴이었다.

“고친다고 이미 겪은 고통이 사라져…? 몸이 고꾸라지고 땅이 머리 위에 서는 기분을 알아? 한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처가 생기고 뜨거운 피와 함께 정신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을 알아? 내장이 뒤집히고 내 사지가 내 몸이 아닌 순간을 알아?”

콘라드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그리고 당황한 표정이 마녀에게 비쳐졌을까 다시 한 번 당황했다. 이래서는 안 된다. 그에게는 신의 권능이 있다. 세계의 질서는 물론, 여리기 그지없는 마녀는 당연히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래야 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속으로 뇌까려도 담갈색 눈에서 바로 닿아오는 경멸이 그를 여전히 뒤죽박죽 혼란스럽게 뒤흔들고 있었다. 부디 짙은 화장이 표정을 감춰주었기를 신께 빌면서 가까스로 마녀를 똑바로 보았다. 그러자 마녀가 달게 웃었다.

“정말로 내 고통을 덜어주고 싶어, 콘라드…?”

그 긴 시간 동안 마녀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처음이었다. 이런 식으로 웃는 것도 처음이었다.

 

콘라드는 눈을 떴다. 머리가 어지럽고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몸을 마음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주먹을 쥐어 보려 했으나 그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을 겨우 눈동자만을 움직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손에는 신의 권능 대신 볼품없는 붕대가 감겨 있다. 입술을 깨물고 벽에 기대어 몸을 일으켜서 붕대를 풀었다. 양 손목에 붉은 구멍이 성흔처럼 상처로 새겨져 있었다. 피가 잔뜩 빠져나가 몸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생각도 마찬가지인지 아까 마녀의 모습만을 머릿속에 되풀이했다.

“내가 귀중하다고 생각해…? 그럼 그에 달하는 희생을 보여 봐.”

마녀가 머리에 감고 있던 붕대를 끌렀다. 그리고 드러난 푸른 눈을 휘며 콘라드에게 다가왔다. 안광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거친 입술 위로 부드러운 입술이 겹치고, 다음 순간 세계가 번쩍 붉었다. 손목에, 몸 안에서 피가 솟구치고 내장의 혈류가 제멋대로 소용돌이를 쳤다. 콘라드는 볼품없이 바닥에 무너졌다. 생경한 고통에 몸이 스스로를 보호하려 흐려져 가는 의식을 밀어내는 동안, 소녀의 차분한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마녀와 계약한 걸 축하해.”

그리고 일어나니 이 모양이었다. 콘라드는 신의 권능을 가지고 있다. 세계는 물론이고 가냘프기 그지없는 마녀는 당연히 자신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어야 했다. 마녀의 자신에 대한 감정도, 자신의 마녀에 대한 감정도 그래야만 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겨우 들어 입술께로 옮기다 대신 가슴을 움켜쥐었다. 늘 마녀를 가엾은 이를 보듯 내려다보던 콘라드가 그녀를 향해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의 뿌리가 있었다. 쇠한 기력을 대신하여 분노가 몸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이제 신의 분노가 진정으로 세계를 바로잡았다.

 

 

***

 

 

이블린, 그것이 소녀의 이름이었다.

이블린의 꽃밭은 빛으로 충만했다. 야트막한 개울은 바람이 불 때마다 수면을 찰랑거리며 보석처럼 반짝였고, 그 안에 하얀 발을 살짝 담그면 깜짝 놀란 송사리 떼가 와르르 은빛으로 몰려와 발목을 간지럽혔다. 따스운 볕 아래 꽃을 엮어 머리에 이고 산들바람에 풀잎 같은 머리칼이 날리면 꽃잎은 오색 빛깔로, 소녀의 미소는 하얗게 빛났다.

그 안에서 이블린은 행복해지는 꿈을 꾸었다. 아니, 그 때는 꿈이 아니었다. 이블린은 자신의 삶이 앞으로도 죽 행복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꽃밭이 어둠에 젖어들었다. 만발한 꽃 대궁이 짓밟혀 꺾이는 것을 보면서 이블린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곧 도래한 악몽을 겪은 후 이블린은 어린 꿈이 꺾이는 것 정도에는 무덤덤해지게 되었다.

이블린의 힘은 폭주하면 세계를 뒤흔들 만큼 강하였으나, 그 가공할만한 위력을 보이고 나면 소녀는 곧바로 쇠약해졌다. 가장 탐스러운 사냥감이 아닐 수 없었다. 수많은 이들이 그를 목격하고 나서 소녀는 이름을 잃고 마녀가 되었다. 마녀가 고통으로 허덕이면 먹잇감을 노리며 번뜩이던 수백 쌍의 눈이 가늘어지며 곧 이빨과 이빨이 몸에 박혀들었다. 그 모든 송곳니와 손톱과 욕망 아래를 거치며 마녀는 헐고 너덜거리고 더러워졌다. 이름을 잃은 마녀는 무언가 간청하고 싶었으나 들어줄 이가 없어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기를 되풀이했다.

그리고 권능이 나타났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압도적인 힘이었고, 마녀처럼 순간순간 약해지는 일도 없었다. 그녀는 힘의 논리에 시달려 온 자의 본능으로 알아차렸다. 그에게 협조하고 그 말을 따르면 적어도 더 이상 그녀를 노리는 수많은 이들의 쟁탈전에 연루될 일은 없다. 그 힘을 탐내면서도 정작 손에 넣고 나니 두려워하는 자들의 의심과, 뒤따르는 목줄과 수갑, 길들임을 위한 채찍질을 다시 견딜 일도 없다. 살기 위해 그녀는 그에게 순종해야만 한다.

처음 교단의 아래로 넘어간 날, 성당 뒤편의 화단에서 그리 결심하면서 마녀는 울었다. 이건 마치-.

아니야, 내가 원한 게 아니야. 고통을 즐기는 이 그 누가 있을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여기서 더 이상 괴로운 건 싫은 것뿐이야. 나도 이게 싫어.

교부는 마치 자신이 마녀를 구원하였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마녀는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러나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내가 원한 게 아니야.

힘을 가졌으나 그로 인해 남에게 이용당해 본 일도 없는 교부는 혈기가 넘치고 자신만만하고 아직 앳되었다. 검고 진한 화장 아래로 보이는 그 앳된 눈으로 자비와 호감을 가지고 마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개를 돌렸다.

내가 원해서 당신과 있는 게 아니야.

어린 날을 떠올리며 얇은 네글리제만을 걸친 채로 꽃잎을 말리고 있으면 교부가 걸칠 것을 가져다주었다. 무릎 위로 살짝 덮으니 따뜻했다. 그것을 내던졌다.

내가 원한 게 아니야.

그래도 교부는 꽃을 가져다주었다. 아니야, 내가 원해서 당신의 곁에 있는 게 아니야. 고통을 즐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시야가 울렁거렸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교부와 자신을 비웃었다. 그 눈에 담긴 당황이 빤히 보여 다시 한 번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쥐어짜내어 아직 눈에 얇게 남아 일렁이는 호의를 깨부수었다.

그 후로 다시 교부가 마녀에게 상냥하게 손을 내미는 일은 없었다. 마녀의 저주를 지우는 권능만은 더없이 확실해졌으나 그 대신 곤봉에 의한 큰 고통이 뒤따랐다. 감정의 영향을 받을 그 능력이 어째서 강해졌을까 살짝 운을 띄우니, 교부는 잠시 시선을 돌리더니 제 주제를 모르는 간악한 마녀에게 내리는 신벌이라고 한다. 비웃지 않을 수 없었다.

지옥의 겁화를 불러낸 마녀의 몸 위에 언제나처럼 교부가 손을 올렸다. 저주처럼 귓가를 맴도는 웃음소리가 지워지고 흐린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과 동시에 둔탁한 고통이 몸을 엄습한다. 그리고 교부는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묻는다.

“이제 괜찮겠지, 마녀.”

“괜찮아…”

하지만 그는 여전히 무언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괜찮아…, 콘라드.”

그제야 진한 눈 화장 안에 안도와 만족의 빛이 서린다. 그것을 보자 참을 수 없는 갈증이 일었다.

피가 필요해.

붕대를 내던지고 입을 벌려 어깨에 손을 올려 매달리듯이 몸을 겹친다. 교부의 피를 빼앗는 감각은 황홀하다. 그의 피가 따뜻하고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가 그런 사람임을 느낄 수 있다. 뜨거운 기운이 몸을 가득 메우면 마녀는 까맣고 하얀 열락에 젖어 몸을 떨었다.

이건- 아니야, 내가 원한 게 아니야. 고통을 즐기는 이 그 누가 있으리. 하지만 이건 마치-.

머릿속에 생각이 스치었으나, 다음 순간 마녀는 모든 것을 잊고 그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려는 듯이 교부에게 매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마녀는 성당 뒤의 정원을 맨발로 걸었다. 호흡과 함께 발은 점점 빨라져 뛰듯이 깊고 검은 숲 속에까지 도달했다. 분명 저주는 교부가 그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지워주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자꾸만 열이 오르고 아찔했다. 누군가 도와줄 이 없을까. 매일 보는 남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마녀는 그 자리에 멈추었다. 얇은 네글리제가 흙투성이로 더러워지는 데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재차 말하자 눈에 띄게 안도하던 남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마음이 우스웠다. 그리고 가여웠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가여워? 그가?

가슴이 저렸다. 마녀는 그 마음을 알고 있었다. 이 순간 그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도 당신에게는 말하지 않아. 달빛 아래서 마녀는 숨이 넘어갈 듯이 웃었다. 갈증이 나는지 그대로 별을 향해 기도하는 것처럼 입을 벌렸다. 흰 뺨이 젖어들었다.

나의 이름을 찾아줘, 콘라드.

이블린이 중얼거렸다.

[그라레그워켄] mobile

빛이 쏟아져 들어와 눈을 가늘게 떴다. 눈부신 조명 아래, 뿌옇게 흐린 초점 속에서 빨간 구슬과 푸른 보석이 뱅글뱅글 돌아가며 반짝거렸다. 눈을 찌푸린 채로 옆에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이게 뭐야, 그라이바흐?”

“만화경을 응용한 모빌이야. 어때, 마음에 들어, 레드그레이브?”

“물론… 아름답지.”

뭐라고 말을 이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반짝거리며 흔들리는 색색의 조각은 순간 마음이 송두리째 붙들릴 만큼 아름다웠다. 정교하게 계산된 빛의 각도에 따라 루비와 사파이어와 크리스탈이 행성의 궤적을 그리며 서로 눈부시게 빛을 반사하여 반짝임으로 가득한 작은 우주를 온전히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걸, 갑자기 어째서. 형언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본래 모빌이라 함은 아기들이 천장에 매달아놓고 보면서 꺄르륵거릴만한 구조물이 아닌가. 뭣하러 이 정도의 재료와 정성을 들여 이런 것을 만들고 내게 보여주는가, 그런 의문이 마음에 연기가 낀 것 마냥 가슴속을 메웠다. 왜냐하면 그녀의 삶은 온전히 인류의 발전을 위해 바쳐진 것이니까, 함께 세계를 발전시킬 파트너인 그가 의미없는 데 시간을 허비한다면 그녀 자신은 무엇이 되는가, 그런 본능적인 불편함이 생각하기도 전에 마음에 뿌옇게 피어올라 편할 수가 없는 것이다.

“레드그레이브.”

키 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아. 아름다운 것을 보는 순간만큼은 그런 표정 하지 않고 그냥 순수하게 감상해도 돼. 아니면 눈에 차지 않아?”

그제서야 레드그레이브는 솔직하게 감탄이 섞인 어조로 말했다.

“아름다워. 마음이 동요할 만큼, 아름다워.”

그러자 그라이바흐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다행이네. 표현이 되어서.”

다음 말은 약간의 간격을 두고 이어졌다.

“내가 당신을 볼 때 느끼는 지복을 당신도 느꼈으면 했어.”

순간 바로 옆에 있는 남자가 아득하게도 느껴졌다.

 

그 때의 여자는 그가 죽을 때 함께 죽었다. 5백년 전 황혼의 시대가 그 여자의 무덤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레드그레이브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그 망령일 뿐,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자꾸만 눈썹을 찌푸리는 레드그레이브에게 워켄이 물었다.

“이봐, 왜 자꾸 눈을 찡그리는 거지. 어디가 안 좋은가?”

레드그레이브는 눈을 힘껏 감았다 떴다. 보랏빛 눈이 평소와는 달리 빛 속에 있는 양 반짝거렸다.

“눈이 부셔서.”

[그라레그] 단문

오랫동안 함께해온 두 사람은 서로 말을 나누는 데 거침이 없었다. 대화 주제는 그녀의 일부터 그의 일 혹은 세계의 또다른 문제들까지 다양했지만, 잊을만하면 꼭 한 번씩 다시 나오는 주제가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내가 타인에게 자애심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어.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어리석은 인민들에 대한 너의 그 조건없는 애정이 이해가 가지 않아.”

“유대야, 그라이바흐. 어쨌거나 그들의 합의가 사회를 발전시키고 우리를 이렇게 있게 한 거야. 서로 닮은 이들끼리 유대를 느끼고 더 큰 연대를 형성할 때 소수의 집단보다 훨씬 큰 기적을 낳는 거지. 그렇게 어리석은 인민들이 공감과 유대를 통해 이만큼의 성과를 구축해냈다는 것이 놀랍지 않아?”

“공감이라는 건가. 하지만 그들보다는 차라리 내가 만든 오토마타 쪽이 어느 면으로 보나 우리를 닮았다고 생각하는데. 단순히 생물학적 분류와 구성성분이 동일하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다른 존재를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다고 보는 거야?”

언제나처럼 다소 오만할 정도로 당당하게 얘기를 잇던 그는 곧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리듯 말을 뱉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에게도 너는 유대를 느낄까.”

그러자 레드그레이브는 테이블 위로 몸을 죽 기울여 그라이바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니지. 당신은 유대의 대상이 아니야. 나에게 당신은 그들과는 달라.”

그라이바흐는 조심스럽게 여자의 곧은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여자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남자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조금씩 눈을 감았다.

[이블콘] 기도

마녀는 하늘하늘한 것이 마치 들꽃 같았다. 바람 같고, 구름 같고, 가본 적 없는 바다를 실제로 본다면 저와 같은 느낌이 아닐까. 먹먹하도록 새파란 가운데 파도가 심장고동처럼 솨아- 솨아- 하는 소리를 내며 몰려오면 끝이 없는 고요함에 사람은 모든 것을 잊게 된다고 한다. 이 가련한 소녀가 어째서 마녀일까. 악마에게 붙잡힌 비참한 마녀를 구해내어 바른 길로 이끄는 것도 성직자의 일이겠지. 상부의 명에 따라 마녀를 구금한 사제 콘라드는 그리 여기고 있었다.

살짝 문을 열자마자 그 틈으로 알콜향이 쌔하게 퍼져나왔다. 냄새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지독했다. 샴페인에 취한 마녀는 비틀거리며 사제에게 다가왔다. 그 가련한 얼굴에서 보리라고는 미처 생각치 못한 기묘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양 팔을 벌리고 마녀는 사제의 이름을 불렀다. 술에 취한 마녀의 발음은 오히려 평소와 같은 머뭇거림이 없이 또렷했다.

“콘라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성기게 두른 망토는 어깨 밑으로 흘러내렸고 얼굴에 맨 붕대 역시 흐트러졌다. 답답한 듯 마녀는 안대를 뜯어내었다. 엉성하게 감긴 붕대 밑으로 번뜩이는 푸른빛의 안광이 비쳤다. 콘라드는 다시 한 번 자문했다. 이 소녀가 어째서 마녀일까? 이는 사람을 홀리는 마녀의 눈이다. 똑바로 마주쳐 오는 시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다만 악에서 구원하소서.

마녀는 다시 한 번 얼굴을 가까이 대고 이름을 불렀다. 쓰디쓴 알콜향이 담긴 숨이 이제는 달큰하게 느껴졌다. 처음으로 닿은 마녀의 체온은 바다처럼 차갑기는 커녕 꽤 뜨뜻했다.

아멘.

레지멘트에서 온 전보

안녕, 로휀. 당신에게 편지를 보내는 사람도 따로 없을텐데 이렇게 굳이 밝혀야 하나 모르겠지만, C.C.입니다. 치즈 크러스트가 아니라 C.C.예요. 자꾸 이상한 철자 붙여서 부르지 마세요.

저는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다만 그렇게 안 생겨서는 자꾸 비꼬는 말투를 쓴다고 사람들이 놀라곤 하네요. 이상한 성격을 가진 노인네랑 같이 지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말해놓았지요. 정말 어떻게 책임질 건가요, 이거.

아무튼, 이렇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제가 겪은 한 가지 신기한 일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아시겠지만, 이곳에는 여성이 적고 남성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아주 아름다운 여성을 봤을 때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웃지 마세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아주 묘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면서, 여기에 여자가 오다니 드문 일이네, 라고 말하더군요. 그리고는 저를 아주 반겨주면서, 레지멘트에서 알아두면 좋을 점들, 주의해야 할 점들에 대해 알려주었어요. 가령 목요일에는 훈련이 있어서 점심 때 얼른 가지 않으면 음식이 금방 동난다거나 하는 소소하지만 유용한 정보들이요. 세세한 마음씀씀이에 너무나 고마워서 이름이라도 물어보려고 고개를 드니, 그녀는 마치 그 자리에 있던 것이 거짓말인 듯 사라져 있었습니다. 저는 순간 멍해졌지만 곧 수속 절차를 마저 밟느라 그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프리드리히 씨 – 무뚝뚝하거나 지나치게 혈기왕성한 군인들 사이에서 성격이 시원하고 밝고 좋은 분이셔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요 – 가 무언가 도와줄 일이 없냐고 묻기에, 그 때 일이 생각나서 푸른 단발머리에 붉은 눈을 가진 여자의 이름을 아냐고 했더니 레지멘트에 그런 여자는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럴 리가 없다고 다시 물으려는데, 그러고보니 혹시 배를 내놓고 있지 않았냐고, 그런 유령이 나타났다가 그림자처럼 사라지는 것을 본 사람이 많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아, 정말 부끄럽지만…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깨어나 보니 의무실이었고, 유령의 소문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니, 하필 ‘유령’으로 알려진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더군요. 그녀의 인상착의가 판데모니움에서 협정심문관에게 살해당했던 어느 테크노크라트와 꼭 같다구요. 그 사진을 전송받아 본 순간… 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 기억이 잘못되지 않은 이상, 표정과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 외에는 정말로 저를 도와준 그녀와 꼭 닮은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 당신에게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라면 알고 있겠지요? 시체에서 기억을 수거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죽은 자를 움직이고, 되살리고, 인격을 부여하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입체영상일까요? 그렇다면 누가, 무슨 까닭으로 그런 것을 레지멘트에 보냈을까요? 물론 저에게 해를 끼치기는 커녕 도와준 존재이니 당신이 바쁘다면 신경쓰지 않아도 좋아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흥미를 가지겠지요? 사소한 정보이지만, 당신의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나요.

여담이지만, 그 여자에 대해 캐묻고 있는데 판데모니움에서 온 붉은 머리의 괴짜 엔지니어 – 이름은 로쏘라고 합니다 – 가 제대로 일은 안 하고 공연히 쓸데없는 것을 묻는다며 꾸중을 하더군요. 원래 그렇게 남에게 신경쓰는 사람이 아니건만… 이상하네요. 아무튼 그 후로 이상하게 .. 그로부터 자주 꾸중을 듣고 있(번짐)습니다.

그래도 이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더 많은 지식과 경험을 쌓으며, 저는 새로운 삶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단 한 가지 걱정은… 아. 편지지를 다 채워가네요.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안녕.

P.S. 당신이 내킬 때나 답장을 쓰는 성격인 건 알지만, 일단 편지를 받으면 일단 받았다는 전보부터 보내주세요. 받았는지 확인이 되지 않으면 답답하니까요.

당신의 친구, C.C.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