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함께해온 두 사람은 서로 말을 나누는 데 거침이 없었다. 대화 주제는 그녀의 일부터 그의 일 혹은 세계의 또다른 문제들까지 다양했지만, 잊을만하면 꼭 한 번씩 다시 나오는 주제가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내가 타인에게 자애심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어.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어리석은 인민들에 대한 너의 그 조건없는 애정이 이해가 가지 않아.”
“유대야, 그라이바흐. 어쨌거나 그들의 합의가 사회를 발전시키고 우리를 이렇게 있게 한 거야. 서로 닮은 이들끼리 유대를 느끼고 더 큰 연대를 형성할 때 소수의 집단보다 훨씬 큰 기적을 낳는 거지. 그렇게 어리석은 인민들이 공감과 유대를 통해 이만큼의 성과를 구축해냈다는 것이 놀랍지 않아?”
“공감이라는 건가. 하지만 그들보다는 차라리 내가 만든 오토마타 쪽이 어느 면으로 보나 우리를 닮았다고 생각하는데. 단순히 생물학적 분류와 구성성분이 동일하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다른 존재를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다고 보는 거야?”
언제나처럼 다소 오만할 정도로 당당하게 얘기를 잇던 그는 곧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리듯 말을 뱉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에게도 너는 유대를 느낄까.”
그러자 레드그레이브는 테이블 위로 몸을 죽 기울여 그라이바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니지. 당신은 유대의 대상이 아니야. 나에게 당신은 그들과는 달라.”
그라이바흐는 조심스럽게 여자의 곧은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여자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남자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조금씩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