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휀CC] 빛

때는 이른 새벽, 동이 트기 전이었다. 이제 곧 먼 여정을 떠날 테니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하는 것이 옳았다. 물론, 사실은 밤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지만.

세실리아는 전신거울 앞에 섰다. 잠시 그대로 서서 커다란 황록색의 눈동자로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목까지 레이스로 뒤덮는 아이보리색의 블라우스 바로 밑으로 하이웨이스트 스커트가 허리를 꽉 조여 풍만한 상체와 가냘픈 허리를 대비시키고, 허리까지 연한 금발이 물결쳐 내려온다. 이러한 외양 덕에 왕국 내에서 결코 좋지 못한 입지를 지닌 그녀였지만, 어디가서도 겉모습으로 무시당한 적은 없었다.

세실리아는 잠시 허리를 숙여 바닥에 놓은 가위를 들었다. 서걱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금빛의 머리칼로 뒤덮였다. 다시 고개를 똑바로 들자 아까의 아가씨는 사라지고 어딘가 장난꾸러기 소년같은 모습이 되어 있어서 그녀는 킥킥 웃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모습 같아서 유쾌했다. 방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벌써 일어났어요, 로휀?”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늙으니 새벽잠이 없어져서 말이지. 그래, 준비는 다 했… 아니 세실리아!”

세실리아는 키득키득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노인이 경악에 찬 눈으로, 제멋대로 흩어져 바닥을 뒤덮은 금발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정신이 나갔군! 나 참, 레지멘트로 떠나는 여정인줄만 알았지 실성 기념 여정인줄은 몰랐는데.”

“그런 식으로 제멋대로 말하니까 그렇게 홀딱 늙는 거라구요, 로휀. 당신한테 미쳤다는 소릴 듣다니 이건 정말 심한데?”

물론 그가 폭삭 늙어버린 진짜 이유는 왕가의 조력자로서 귀족들 사이에서 쉬임없이 압박받는 입지 탓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떠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나날이 조급해지는 상황에서 이제 그녀는 로휀에게 가능성 있는 인질이자 짐밖에 되지 않는다. 왕국을 벗어나는 것이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도, 로휀의 자유로운 행동을 위해서도 좋았다.

그리고 사실은 더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다.

“너를 데려온 지 벌써 십 년도 훌쩍 넘게 지났다. 안 늙는 게 이상하지. 안 그러냐? 세실리아.”

어려서 부모를 잃고, 이계의 문에서 튀어나온 괴물로 가득한 암흑 속 제정신이 아닌 세계에서, 모든 세상이 무너진 듯이 울고 있던 그녀를 빛으로 끌고 와서 일찍이 이성과 과학을 가르친 것이 그였다. 그 후로 그녀는 그와 항상 함께였다. 그는 그녀에게 이성을 가르쳤지만, 그녀가 배운 것은 그가 그녀에게 있어 새로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지난날을 떠올리며 세실리아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입끝을 살짝 올렸다. 단호한 미소였다.

“이제 그 이름은 사용하지 않아요, 로휀.”

“그래, 그랬지. 끌끌.”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둠 속에서 노인의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짐은 다 쌌어요. 밖에 기계마가 대기되어 있다고 했죠?”

“그래. 영광인 줄 알라고.”

“어머~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참 신나기도 해라.”

비뚤어진 농담과 의미없는 대화로 시간을 떼우며 함께 홀을 걸어간다. 이런 농담 따먹기도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녀는 결코 시간이 아깝다고 느끼지 않았다. 마침내 빗장을 열고, 문을 밀자 어둠 속에서 발굽 소리와 어렴풋한 기계마와 마차의 실루엣이 보인다. 그녀는 지체하지 않고 그 위에 올라탔다.

“잘 가라, C.C.”

“그럼 안녕, 로휀.”

무사히 있으라거나, 다시 보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을 책임질 수도, 확인할 수 있다는 확신도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기계마가 발걸음을 시작하고 마차가 흔들리고 십년 넘게 몸담은 저택이 서서히 멀어질 때까지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문득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하고 끓어올라, 그녀가 졸업해야만 하는 그의 모습을 돌아보려는 찰나,

“아…”

C.C.는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한 줄기의 빛이 눈을 찌르더니, 점점 더 광활해진다. 암흑이 끝나고, 서광이 비친다. 그녀는 잠시 넋을 잃었다. 새벽빛이 비추는 세상은 아름다웠다.

그것이 그녀가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 첫 세상이었다. 새벽빛에 감싸여 C.C.는 까닭도 모른 채 눈물을 흘렸다.

[워켄레그] 도취

그는 나에게 경어를 쓰지 않는다. 모두가 나를 레드그레이브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도 알고 있건만, 그는 나에게 경칭은 커녕 네 녀석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는 입을 다물고 있다.
“닥터, 제작 경과를 직접 레드그레이브님께 설명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했습니다만…”
“거기에 대해서는 이미 이전 정비 때 설명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반말을 하면 또 한참 시끄러워지겠지. 그러니 나에게 존대를 하느니 차라리 거짓말을 해서라도 상황을 모면하겠다는 것이다. 참으로 별난 종자다, 라고 생각하며 지긋이 쳐다보자 눈치채고는 시선을 돌린다. 정말 별난 자가 아닐 수 없다.

주기적으로 정비를 하러 와서 그는 내 몸 구석구석을 관찰한다. 그러면 나는 나를 관찰하는 그를 관찰한다. 손에는 얇은 장갑을 낀 채다. 손가락은 진주로 된 작은 구슬을 들어올리기라도 하는 양 늘 섬세해서, 그 손을 보고 있으면 나는 다른 이의 손에 몸을 맡기면서도 항상 안심할 수 있다. 나보다 좀 더 푸른빛이 도는 눈은 평소보다 더 진지한 빛을 띈다. 가끔 그 눈을 들면 그를 빤히 관찰하는 나와 눈이 마주친다. 그러면 필요없다는 듯 곧 다시 눈을 내린다. 그러면 늘상 그렇듯이 기묘한 정적 속에 정비를 마칠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닥터.”
“왜 부르지?”
그는 여전히 눈을 들지 않은 채다.
“내가 싫은 건 안다. 그렇지만 조금만 더 주변에 맞춰줄 수는 없는 건가? 언제까지고 그렇게 말을 회피할 수는 없지 않겠어.”
그제서야 나는 고개를 든 그의 표정을 볼 수 있었는데, 생각하고 있던 모습보다 좀 멍청하고 당황한 표정이다.
“레드그레이브.”
이렇게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은 적기에 더 귀를 쫑긋 세우게 된다.
“내가 정말 당신이 싫어서만 경어를 쓰지 않는다고 생각해?”
그는 나에게 질문을 했다. 그러므로 나는 대답해야만 한다.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면, 무슨 이유가 있지? 수많은 가능성이 마음속을 어지러이 떠다닌다. 하지만 제대로 사고를 할 수가 없다. 이미 마음이 하나의 대답에 강하게 붙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충 점검은 다 끝났으니 이만 가 보도록 하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생각에 잠겨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나는 그를 붙들려고 했다. 그리고 가운자락을 잡아버리는 탓에, 그는 그만 자리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아읏.. 무슨 일이야, 대체.”
“실수다.”
더 이상 수습하기 어려워지기 전에 빠르게 대답해야만 했다. 그러자 그는 나를 한 번 보고는 다시 뒤돌아 나간다.
그리고 이미 무언가 수습하기엔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기 직전에 본 그의 표정이 머리를 맴돈다. 그가, 그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그 후로 정비하는 동안, 나는 그에게 조금씩 더 말을 걸게 되었다. 그가 레드그레이브라고 부르면, 그리고 따스한 미소를 지으면, 그제야 나는 흡족해져 태연함을 가장한다.

[워켄레그] 미완

그곳은 야트막한 산 아래로 집들이 옹기종기 펼쳐진 마을이었다. 그 중 마을의 가장자리, 산기슭에는 언제부터인가 아무도 살지 않는 낡은 오두막이 하나 있었다. 벽은 닳아 빠지고 지붕은 헤어져 나간 그 오두막에 외지인 한 명이 흘러들어와 자리잡았다. 처음엔 출신을 알 수 없는 남자를 경계하던 마을 사람들은 다 무너져가던 오두막이 하루가 지날 때마다 깔끔하고 튼튼하게 고쳐져 가는 것을 보면서 그 집의 새로운 주인이 꽤나 정갈하고 성실한 성품임을 알았다. 그리고 달이 열 번 기울었을 때 그 집을 방문하지 않는 마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는 의사였다. 그것도 아주 유능한 의사여서, 마을 사람들은 그가 마술이라도 부리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해가 지나고 지나도 그는 전혀 지치는 기색이나 얼굴에 그늘이 지는 흔적이 없었기에 더 그랬다. 어쨌거나 조금의 보답으로도 촌구석에서 머무르며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사람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고맙다고 웃으며 종종 빵이나 새로 짠 우유 따위를 가져다 주면서도, 자신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지는 않는 그 남자의 과거에 대해 수군거리고는 했다. 오로지 아이들만이 아무런 티끌 없이 그 집을 찾아가 말을 걸고 재잘거렸고, 그래서 어른들은 듣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수백년 전의 이야기나 저 멀리 공중도시의 이야기라거나 사람이 되고 싶었던 인형이 활약하는 이야기라거나, 하나같이 아이들에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처럼 흥미로운 것들이었다. 저기 하늘에서 반짝거리는 빛덩이가 진짜 공중도시라고요? 말도 안 돼, 난 안 믿어요. 그렇게 말해놓고 남자가 그래, 그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겠구나. 라고 말하자 입술을 내밀고 샐쭉거리던 아이는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웃으면서 남자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그럼 그 얘기 해 줘요, 그 얘기! 시간을 넘어가려고 몸을 바꾼 여자 얘기요.”

그 말은 예상하지 못한 듯 순간 남자의 눈에 기이한 빛이 스쳤다. 그렇지만 곧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래. 아주 아름답고 총명하게 태어난 여자가 있었어. 몸에서 반짝반짝 빛이 새어나오는 사람이었기에 사람들은 그 여자의 발 밑에 세계를 바쳤단다. 그런데 어느 날…”

따로 오는 환자도 없어서 저녁이 되고도 계속 이야기를 듣겠다며 칭얼거리는 아이들을 겨우 돌려보내고 밤이 깊었다. 어둠 속에 램프를 켜고 홀로 오두막에 앉아 있자 산새 소리가 들려온다. 고즈넉하지만, 한편으로는 을씨년스럽기도 했다. 원체 깔끔한 성격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싫어서 더더욱 맹목적으로 귀신 나올 것 같은 오래된 집을 정비하고 또 정비했다. 홀로 있는 밤은 외롭고 두렵다. 애초에 그는 쉽게 잠들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예전에는 잊은 기억을 자꾸만 꿈꾸는 탓에 그랬고, 지금은 두고 온 것이 가슴에 밟히는 탓에 그러했다. 질릴만치 긴 세월을 얼키고설켜 온 여자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것을 상기하자 까만 밤공기가 무겁게 몸을 내리누르는 것만 같다. 목이 꽉 메어 오는 탓에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뜨려고 높이 달린 찬장을 여는데, 그만 컵이 떨어졌다. 그로서는 흔치 않은 실수였다. 컵은 장 밑으로 굴러들어가 바로 보이지 않았다. 허리를 굽혀 보지만 쉽게 보이질 않는다. 그런데 그 와중에 끼익- 하고,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이 늦은 밤중에 무슨 일입니까? 저는 당장은 조금 바쁩니다.”

대답은 없다. 여전히 컵을 꺼내는 데 정신이 팔려 있던 남자의 생각이 누군가 긴급한 환자를 데리고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데 미쳤다. 남자는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손이 멎었다. 틀림없이 응급상황이다. 심장이 미친듯이 고동을 친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외출복을 걸친 작은 소녀 한 명이였다. 소녀가 조용히 후드를 벗었다. 황갈색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작고 부서질 듯 가냘픈 몸에 눈빛만은 소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담담하고 깊고 먹먹하다. 몸짓 하나하나가 고요한 울림을 준다. 역시, 여전히 빛이 새어나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안녕. 변한 게 없군.”

남자는 가까스로 입술을 벌렸다.

“당연한 소릴 하네. 당신도, 변한 게 없군.”

소녀가 살짝 웃었다.

“그래. 꼭 네 품에서 이 몸으로 처음 눈을 떴을 때처럼 말이야.”

남자는 눈시울이 차오르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소녀가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런 너절한 과거 얘기를 하려고 온 건가? 당신도 생각보다 참
깨빵 위에 순쇠고기 패티 두 장 특별한 소스 양상추 치즈 피클 양파까지

[워켄레그] 느낌

청각은 오감 중 가장 발달이 늦는 감각. 오감 중에서도 시각과 청각은 쉽게 조화되지 못하고, 보통 시각이 경쟁에서 이겨서 감각을 지배한다. 따라서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소리 하나하나에 의존할 이유는 없었다. 시신경 회로가 무너지기 이전에는.

어디까지나 제한파인 레드그레이브는 살가드와 함께 직접 미지의 케이오시움 장치를 몰래 개발하고 있던 엔지니어들을 급습했고, 그 중 한 명이 장치를 작동시켜 그 빛을 쬐었을 뿐인데, 체내의 케이오시움이 반응하여 동작 기작이 꼬여버린 탓에 이렇게 되어버렸다. 짙은 어둠이 감각을 지배하고 아무 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죽 지상에 있는 닥터 워켄의 연구실에 갇힌 신세였다. 최대한 빨리 기능을 복구하기 위해서 닥터 역시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레드그레이브의 엉켜버린 회로를 분석하는 데 할애하고 있었지만, 케이오시움이 증폭되어 버렸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얼마 전에 회로를 건드려 본 이후로 무언가 보이기는 보이는데, 그것이 과거에 그녀가 본 이미지들이었다. 까만 어둠 속에 문득문득 저 먼 과거 황혼의 시대의 이미지들이 떠올라 마음을 어지럽히는 탓에 그녀는 울컥해서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워켄에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러자 워켄은 일단 과거의 이미지라도 볼 수 있도록 연결을 해 놓아야 시각의 오류를 찾는 데 용이하다고 대답했고,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지금 보는 과거의 이미지 중에는 너는 기억하지 못하는 네 모습이 있다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새까만 어둠 속에, 간혹 선명한 이미지로 떠오르는 과거들, 예민해지는 신경 속에, 청각은 극도로 예민해져만 간다. 그래서 전이라면 몰랐을 테지만,

“닥터.”

“그래. 여기 있어.”

“가까이 있네.”

“물론이지, 널 수리해야 하니까.”

“아니, 얼굴이 닿을 듯이 아주 가까이 있어. 이제는 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어.”

“…표정이, 자꾸만 울 것 같길래, 보다가-”

“그거, 네 탓인데.”

있지도 않은 심장에 무언가 울컥 얹혀서 말로 토했다. 손을 뻗었다.

생각대로, 자신의 얼굴 바로 가까이에 그의 얼굴이 있다. 더듬더듬 얼굴을 만지자, 표정이 굳은 것이 느껴진다. 꿀꺽 하고 목울대가 울리는 것도 느껴진다. 잠시 그대로 그렇게 멈추었다. 표정이 아마도 아주 엉망일 것이다.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라레그] 소생

“당신도 우리도, 다른 사람은 상상 못할 만큼 긴 시간을 살아왔지. 세상이 일흔여섯 번 뒤집히고 사람들이 개미처럼 스러져가는 모습을 봐 왔어. 지루할만큼 긴 시간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저 순간 스쳐지나가는 바람이지. 그렇지만 처음은 달라…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겠지. 만일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건가? 예전의 친구라거나. 연인이라거나…”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네 녀석도 생각보다 우습구나. 수백 년 전에 묻혀버린 일을 이제와 입에 담다니.”

대답하는 레드그레이브의 눈에는 평소와 같이 광채가 없었다. 혹자들은 그것을 살아있는 기계의 눈이라며 소름끼쳐했지만, 마르세우스는 그저 모든 것에 아주 지친 자의 눈 같다고 생각했다.

다음 순간, 레드그레이브의 시야가 흐려졌다. 공기가 굴절되어 소리가 왱왱거리고 남자가 뭐라고 말하는 입모양만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럼 한번 볼까.’

레드그레이브는 몸을 흠칫 떨었다. 세찬 바람에 부드러운 머리칼이 날리며 얼굴을 때렸다. 눈을 찡그렸다가 얼굴에 무언가 닿는 감촉에 놀라 눈을 다시 뜨자 눈앞에는 한 사람이 난처하게 웃으며 그녀의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레드그레이브. 갑자기 표정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레드그레이브는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장난이지? 얼굴에 열이 화악 오르고 목이 바짝바짝 말라서 입고 있는 정장 셔츠의 단추를 하나 풀었다. 장난 치고는 너무 심하다. 불쾌했다.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레드그레이브… 있지, 내가 뭔가 잘못한 거야? 당신 좀처럼 그런 표정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뭔지 모르겠지만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웃어주지 않을래? 잠깐, 당신 울어? 내가, 내가 잘못했…”

레드그레이브는 그라이바흐에게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