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레그] step

“춤을 춰요, 레드그레이브.”
오랜만에 만난 여자에게 남자는 손을 내밀었다. 선율에 맞춰 한참을 그림처럼 휘몰아치던 두 사람의 스텝은 남자가 고개를 살짝 저으면서 끝났다.
“언제나 완벽해. 훌륭해, 레드그레이브. 그렇지만 역시 난 이 쪽이 좋네.”
말을 하곤 그라이바흐는 장난스럽게 레드그레이브의 뺨을 잡았다. 레드그레이브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거?”
“그거.”
이어진 것은 춤이라고도 할 수 없는 제멋대로의 스텝이었다. 그것이라고 지칭은 했지만 그저 두 사람이 함께 공부하던 시절에 장난처럼 연습하곤 하던 자기들만의 몸동작일 뿐이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오래 지난 탓인지 곧 발이 엉키고 레드그레이브는 그라이바흐의 품 위로 쓰러졌다. 웃음소리가 흐드러졌다.

[베른리리] 외면

진단메이커 키워드 : 나비, 한번만 도와줘, 작별

 

머리통이 크기 전 쌍둥이는 많이도 같이 들판을 쏘다녔다. 다람쥐를 쫓고 잠자리를 잡고 개울에서 물장구를 쳤다. 한동안은 프리드리히가 나비 수집에 재미를 들였다. 검은 날개를 팔랑거리는 제비나비 하며, 붉은 점이 알알이 박힌 붉은점모시나비하며, 날개에서 유난히 인편이 묻어나는 부전나비, 색이 고운 노랑나비. 그 중에서 특히 희귀한 것이 율리시스 나비였다. 큰 날개가 어른 손바닥만하고 오묘한 푸른 빛을 띄는 그 나비는 베른하드가 보기에도 퍽 고왔다. 그러나 내색은 않았다. 프리드리히는 유독 그 나비를 베른하드 앞에서 뽐내곤 했다. 그깟 나비가 뭐가 그렇게도 중요하고 좋을까. 베른하드에게는 프리드리히가 그 나비 잡고 먹이 구해주겠다고 들판을 쏘다니다가 굴러서 다치지나 않는 게 더 다행인 일이었다. 베른하드가 그렇게 관심없어하면 프리드리히는 샐쭉해 가지고는 가버리곤 했다. 그럴수록 더 부러움을 내색할 마음은 없었다.

며칠 새 프리드리히는 유난히도 열심히 나비를 돌보고 있었다. 빛깔이 고와야 한다며 이것저것을 가져다 먹이려 하고 이상한 게 묻지 않았나 살피고. 참 유난이다 싶었다. 그렇게 프리드리히는 또 베른하드를 끌고 산으로 나갔다. 그런데 아차, 신이 나 있던 프리드리히는 그만 깎아지른 경사를 못 보고 넘어지고 말았다. 채집통이 열렸다. 나비가 곧 날아갈 듯 했다. 발이 푹 빠져 바로 잡지를 못하는 채로 프리드리히는 애처롭게 형을 불렀다. “도와줘, 베른… 한 번만 도와줘, 베른!”

베른하드는 멍하니 프리드리히를 보고 다시 나비를 보았다. 부아가 치밀었다. 따지고보면 자기가 이렇게 또 프리드리히의 뒤치닥꺼리를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냥 날아가 버려라. 멀리멀리 날아가 버려라. 파아란 날개가 채집통 문에 끼어 파들파들거리다가, 결국 파란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어디까지 하늘이고 어디까지 나비인지 알기 힘들게 되어 버렸다. 시원섭섭하면서, 죄책감이 몰려왔다. 프리드리히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녀석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작별해 버렸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얼마 후가 두 아이의 생일이었다. 아직도 프리드리히를 대하기가 멋쩍던 베른하드는 부러 가서 동생에게 선물은 없냐고 툭툭 쳤다. 프리드리히가 힘없이 대답했다. “날아가 버렸어. 다시 안 와.”

그 후로 한동안 프리드리히의 무기력함은 풀리지 않았다. 베른하드와도 쉽게 말을 섞지를 않았다. 화내는 것보다 더 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그렇게 프리드리히와 떨어져 본 적 없던 베른하드는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쁜 꿈이 도무지 끝나지가 않는 것 같아서, 앞으로 살면서 나쁜 일만 벌어질 것 같았다. 다행히 어느 순간 둘은 다시 사이좋은 쌍둥이 형제로 지내고 있었다. 그게 어떻게 된 건지 베른하드는 지금도 정확히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그리고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언제부터 이렇게 둘이 서로를 의지하게 되었는지, 언제부터 이렇게……

불의의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다음부터였는지,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전에도 그리 서로를 애지중지하던 둘은 부쩍 서로 의지하게 되었고 분신처럼 늘 같이 붙어 지냈다. 베른하드도 모르지는 않았다. 아니 잘 알고 있었다. 동생이 간혹 웃으며 자신을 보는 눈빛. 살과 살이 닿을 때 서로의 몸 동작이 느려지는 것. 사는 게 그런 걸 어쩔 수 없잖아, 하고 안타깝게 웃음짓는 동생을 보면서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하고 얹히듯이 끓어오르는 것. 그래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술에 취해서 몸을 제대로 못 가누던 동생이 방에서 나가려는 베른하드를 뒤에서 끌어안았을 때, 목에 더운 숨이 닿아오고 긴 손가락이 움푹 패인 뺨을 따라 그리다가 입술을 만질 때, 베른하드는 멈칫해서 뒤를 돌아보고, 눈이 마주쳐 버렸다. 불처럼 뜨겁고 분명했다. 놀랐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오히려 몇 번이고 바라고 상상했던 순간이리라. 그래서 늘 생각했듯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팔을 뿌리치고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동생의 앓는 목소리가 들렸다.

“도와줘, 베른. 한번만 도와줘, 베른…”

여기서 동생을 뿌리치면, 다시 나쁜 꿈을 꾸게 될까? 내가 나쁜 형인 걸까? 아니, 이렇게 된 내 생애 자체가 나쁜 꿈인 건 아닐까?

나쁜 꿈이라도 좋았다. 베른하드는 뒤돌아 입을 맞췄다.

[살가레그] piece puzzles

정말, 절 사랑하십니까? 라이브러리안은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추고는 정중하게 물었다. 레드그레이브는 미소지었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저절로 그런 질문을 한 것이 부끄러워질 법한 자상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미소. 살가드는 웃지 않았다.

레드그레이브는 무릎 꿇은 살가드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진심으로 그대를 사랑하고 있다.

사실 사람이라면 그녀는 누구라도 좋았다. 누구든 사람이 사랑을 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눈물이 차오르게 한다. 그녀는 그렇게 만들어져 있으니까. 그 말은 속으로 삼켰다. 그러니 눈앞의 사서가 웃지 않더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 말한 것만은 진심이었다. 살가드는 가만히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활짝 웃었다.

어딘가 어긋나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고, 그녀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그러니 어딘가 어긋나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과 다르다 해도, 그건 레드그레이브로서도 살가드로서도 어쩔 도리도 어쩔 필요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독백

크로우 암브러스트가 보기에 린 슈바르처는 이따금 어리석어 보였다. 아니, 어리다고 하면 좋을까? 고뇌 하나하나마다 흔들리고, 주변 사람의 고민마다 신경쓰고, 사소한 감정의 문제를 세계의 문제로 확대시켜버리는 그런 소년. 그리고 그는 그 어린 점을 사랑했었다. 독백 더보기

피크닉가는 리퀘받았는데 다른 데 가는 린크로

누구나에게 호불호가 갈리는 과목이 있는 법이다. 가령 에밀리는 실습 성적은 더없이 우수하지만 도력 단말기를 다루는 데는 젬병이었고, 페리스는 음악을 비롯한 예술 전반에 자신이 있지만 교련이 약점이었다.

그러나 사관학교 학생이라면 대부분 공통적으로 몸서리를 치는 과목이 있었으니, 바로 정치경제였다. 그나마 흥미를 가지고 수업을 듣던 학생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드넓은 제국 영토만큼이나 방대한 정치사의 범위에 넋을 놓고 정신이 허공을 헤매게 되는 것이다.

물론 수재가 많은 VII반은 이 악명 높은 수업시간에도 그나마 분위기가 괜찮은 편이었다. 피크닉가는 리퀘받았는데 다른 데 가는 린크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