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에게 호불호가 갈리는 과목이 있는 법이다. 가령 에밀리는 실습 성적은 더없이 우수하지만 도력 단말기를 다루는 데는 젬병이었고, 페리스는 음악을 비롯한 예술 전반에 자신이 있지만 교련이 약점이었다.
그러나 사관학교 학생이라면 대부분 공통적으로 몸서리를 치는 과목이 있었으니, 바로 정치경제였다. 그나마 흥미를 가지고 수업을 듣던 학생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드넓은 제국 영토만큼이나 방대한 정치사의 범위에 넋을 놓고 정신이 허공을 헤매게 되는 것이다.
물론 수재가 많은 VII반은 이 악명 높은 수업시간에도 그나마 분위기가 괜찮은 편이었다. 제일 앞에 앉은 마키아스는 끊임없이 필기 정리를 하고, 엠마는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를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유시스와 알리사로 말할 것 같으면 각각 정치와 경제가 강점이라 이 난해한 수업을 따라가는 데도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다만 나머지 학생으로 가면 좀 문제가 생기는데, 라우라는 자꾸 필기를 하던 연습장에 밋시 그림을 그려놓은 다음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했다. 가이우스는 열심히 듣기는 하지만 간혹 이해를 하지 못해 시선이 멍하니 공중을 헤매었다. 엘리엇은 이 숨막히는 수업 시간에서 가장 즐거워 보이는 학생이었다. 들뜬 표정이 말하는 듯하다. 오늘 관악부에서는 무슨 곡을 연주할까? 포기한 자의 여유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리고 대놓고 졸고 있는 사람이 크로우 암브러스트였다. 그리고 린 슈바르처는 제 뒷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선배 아닌 선배를 무시할 만큼 굵은 신경줄이 되지 못했다.
툭툭.
수업을 듣던 린의 팔이 슬쩍 뒤로 향했다. 시선은 짐짓 하인리히 교감이 강의를 하는 연단에 고정한 채로 뒤에서 졸고 있는 크로우를 깨우려고 애를 썼다. 몇 번 툭툭 친 후 슬쩍 뒤를 돌아보니 크로우의 얼굴은 아직도 위아래로 꾸벅꾸벅 진자 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결국 린은 팔꿈치를 구부려 뒷쪽에 힘을 가했다. 이렇게 되면 그냥 퍽치는 거다. 뒷자리에서 깜짝 놀라 일어나는 듯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린은 모르는 척 눈을 깜박이며 앞을 보았다. 머리 뒤에서 소곤소곤 목소리 낮춰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야. 뭐하는 짓이야. 아프잖아.’
어쩔 수 없이 린도 고개를 살짝 뒤로 돌렸다.
‘너야말로 뭐하는 짓이야. 수업 좀 들어.’
‘헹. 들을 게 있어야 듣지. 교감 수업이 들으라고 있는 거였냐?’
‘기껏 깨워줬더니 정신을 못 차리고!’
‘야 봐라. 방금 맞은 데 아직도 빨간데 내가 퍽도 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겠다.’
‘웬간해선 안 일어나니까 그렇지.’
그렇게 서로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닥거리느라 정신이 팔려 있던 두 학생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하인리히 교감의 콧수염이 초마다 1mm씩 위로 올라가고 있는 것은 알지 못했다. 뒤늦게야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린이 퍼뜩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미 때를 놓친 후였다.
“린 슈바르처 생도, 크로우 암브러스트 생도. 복도에 나가 있으세요. 당장.”
“크로우 너 때문이야.”
수업에서 쫓겨나서 복도에 서있자니, 이게 무슨 꼴이람. 아직 수업시간이라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린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크로우가 휙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이거 잘됐네. 생쥐수염 수업 안들어도 되고.”
“불성실하네. 이래서야 졸업은 할 수 있겠어?”
졸업. 이 졸업이라는 단어는 린 슈바르처가 크로우 암브러스트를 저격할 때 신호탄으로 꺼내는 비장의 단어다. 하지만 크로우는 이 패턴에 적응한지 오래라 바로 반격에 들어갔다.
“물론 문제없수다~ 왜 교감이 내가 조는 것까진 냅두는지 알어? 내가 또 학교에 이름난 마법의 크로우씨 아니겠냐. 아무리 수업 시간에 자고 땡땡이를 쳐도 평균 이상은 사수한다! ”
“그거 퍽 자랑이시겠네요.”
대꾸하는 린의 얼굴이 진심으로 한심해하는 눈치였다. 그 표정을 보고서야 크로우는 기억을 해냈다. 앗차. 이 녀석 전교 7등이었지. 아무튼 VII반은 다들 쓸데없이 엘리트라서 문제다. 크로우는 새삼스러운 얼굴로 눈앞에 선 후배를 바라보았다. 마냥 순진할 듯 큰 눈을 하고서도 은근한 고집이 엿보이는 곧은 눈매며 눈썹을 보고 있자니, 한 번 정도는 이 모범생을 일탈시키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말하자면 새하얀 눈밭에 발자국을 찍고 싶은 그런 마음인 거다.
“우리 이렇게 된 이상 땡땡이나 칠래? 야~ 날씨도 좋겠다 피크닉 어때 피크닉?”
“안 돼. 택도 없는 소리 마.”
“린 후배는 중요할 때마다 어리광을 부리면서 선배의 어리광을 들어줄 생각은 없는 거지? 응?”
“그런 게 아니잖아, 크로우.”
“아니야 아니야. 이 형님은 속상해. 깨우겠다는 핑계로 때리기나 하고. 아야, 아직도 아프네. 역시 너는 내심 날 미워하는 거지.”
“그럴 리가 없잖아! 도대체 왜 진지하게 듣지를 않는 거야. 나는, 크로우 네가 걱정이 되어서.”
꼿꼿한 태도를 고수하던 린이 결국 원망하는 표정을 하자 묘한 만족감이 들었다.
“음~ 모르겠는데에.”
계속 딴전을 부리자 린의 표정이 제법 볼만했다. 린은 입술을 삐죽거리다, 모르는 척 딴청을 부리는 크로우의 눈을 짐짓 새침하게 노려보다가, 발뒷꿈치를 들었다.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얼굴에 피할 정신도 없었다. 새끼리 부리를 부딪히듯이 살짝, 부드러운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어.”
크로우는 순간 왼손을 들어 뺨을 가렸다. 얼굴이 머리끝까지 달아올랐다.
“저어기.”
말을 꺼낸 다시 입을 닫을 새도 없이, 벌린 입술 위에 다시 입술이 겹쳐 왔다. 린이 교복을 잡아 등부터 당기는 느낌이 났다. 혀가 혀를 얽고 치열과 잇몸을 훑다가 입천장과 입 안쪽까지 제멋대로 헤집었다. 숨을 쉬기 힘들었다. 크로우도 린의 교복 앞섶을 쥐었다. 생소한 경험도 아닌데 뺨이 달아오르고 다리에서 힘이 풀려서 가만 서있을 수 없었다. 얼굴이 뒤로 넘어가 머리 뒤가 벽에 닿았다. 그대로 한참을 이어지다가 결국 크로우가 참지 못하고 숨이 막힐 때가 되어서야 손을 놓고 입술을 닦았다. 어찌나 꽉 쥐고 있었는지 단정하게 다린 린의 교복 재킷에 한껏 구겨진 자국이 남았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보고 아래로 시선을 내리다, 그 구겨진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도리어 더 부끄러워져 버린다. 에라 모르겠다.
“린, 오늘 수업 재미 없지 않냐.”
태연한 척 말은 하는데 아직 서로 숨이 거칠었다. 크로우는 눈이 흐린 후배를 보며 뜸을 들였다. 한두 번 한 일이 아닌데도 새삼스럽게 부끄러웠다.
“더 재밌는 거 하러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