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실] 영속의 고리

엘리베이터는 닫힌 공간이다. 살가드는 눈앞의 문을 노려보았다. 이 문이 열리면 새로운 공간이 이어진다. 살가드에게 있어서 그 새로운 공간의 가능성은 두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라이브러리언의 근무처가 있는 상층부, 혹은 유전적 혈통에 의해 ‘열성’으로 분류된 살가드 자신의 거주지가 있는 하층부. 모든 것이 청결하고 기능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판데모니움이기에 하층부라고 해도 지상에서와 같은 심각한 치안의 위협이나, 전염병으로 인한 집단사망 같은 것은 없다. 그렇지만.

문이 열린다. 살가드는 순간적으로 상층부의 정경을 기대한다. 그러나 문이 열림과 동시에 코를 찌르는 냄새는 텁텁하고 매캐하다. 두 공간은 공기부터가 달랐다. 상층부를 걷고 있노라면 달콤한 음악이 들리고 은은한 향기가 난다. 사람의 눈에는 만족과 희망이 서려 있고 간혹 꿈으로 반짝인다. 그리고- 오늘은 하층부에 비가 내린다. 적정 습도와 생물이 위한 환경을 유지시키기 위한 인공 강우였다. 비가 오는 날의 하층부는 특히나 끔찍하다.

살가드는 우산을 펼치고 비가 내리는 하층부의 거리를 걸었다. 이 구획 저 구획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빗소리와 함께 어지럽게 뒤섞여서 고막을 찌르고, 아무렇게나 내다버린 쓰레기가 흐느적흐느적 녹아 질척거리며 발에 채여서 바닥이라고는 쳐다보기도 싫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에 빛이 없는 사람들. 되는 대로 일생을 소비하면서 몸에는 강단이 없이 저 쓰레기처럼 흐느적흐느적 녹아가면서 즉각적인 쾌락을 찾는 도시. 그것이 살가드 자신이 속해 있는 구역이었다.

물론 살가드는 자신이 저 흔한 하층부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그리고 어쨌거나 그 꿈이 실현되는 게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만큼 이상에 매달리지만 그게 고통을 없는 것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바꿀 것이다. 판데모니움도, 나의 처지도. 비관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하지만, 어떻게, 언제야. 어느 날 문을 열었을 때 이어지는 제3의 공간은 없을까. 비가 오는 탓인지 유독 감상적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사고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생각에 골몰한 채로 길을 계속 걷는데, 노래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꼭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듯 먼 소리라 환청이라도 들었나 하고 발을 다시 떼는데, 재차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고개를 돌리자, 옆을 막 지나가던 건물 입구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긴 머리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살가드는 순간 침을 삼켰다.

뺨에서는 빛이 나고, 속눈썹은 까맣게 보일 만큼 짙었다. 이목구비가 누군가가 부러 그렇게 그려놓은 것처럼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지만 너무도 완벽하게 조화되어 이질감이 들지 않는다. 키가 크고 손발이 죽 곧게 뻗었고, 자세는 곧되 보는 이가 불편할 만큼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으며 미소 짓는 표정은 완벽에 달했다. 확실히 하층부의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상층부에서 왔다고 단정 짓기에도 무언가가 꺼림칙했다. 사실 상층부 사람들이 하층부 시민과 달리 삶의 티끌이 없는 것을 보면서 살가드가 느끼는 감정은 불쾌감과 열등감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이 여자는 무언가 달랐다.

이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잖아.

“실례합니다. 제가 우산이 없는데, 목적지까지 같이 데려다 주실 수 있을까요?”

게다가 이상하지 않은가. 상층부의 사람이 하층부의 사람에게 이렇게 스스럼없이 동행을 부탁한다는 것은.

“어디로 가십니까?”

“B-73이요.”

살가드의 거처가 있는 곳이다. 상황이 기묘하다고 생각하는 살가드에게 여자가 미소 지었다. 삶에 아무런 고뇌도 미련도 없는 듯 행복하고 무구한 미소였다. 천국에 속한 것 같은 그 얼굴이 다시 한 번 의사를 묻는 듯 살가드 쪽으로 고개를 살짝 까딱하자 살가드는 저도 모르게 우산을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본능이 이는 다시 겪지 못할 순간임을 알았다.

여자는 의외로 말을 퍽 잘했다. 비가 오는데도 살가드와 조금의 간격을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 걷는 것이 처음엔 역시 나름대로 귀한 몸이라 하층부 사람에게 닿기는 싫은 것인가 불쾌감이 일었으나, 높고 맑은 목소리로 계속해서 재잘거리며 살가드에 대해서 묻는 것이 적어도 그의 출신을 꺼리는 것은 아니고 무언가 이유가 있겠다 싶어 남에게 까다로운 살가드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었다.

“후후, 그래서 그 상사에게 나름의 복수를 했다는 거군요. 하지만 무식한 상사는 당신이 그랬다는 것도 몰랐고. 멋지네요. 복수를 해서가 아니라, 그 정도로 직업에 통달했다는 것이 멋있어요.”

여자는 옆에 선 살가드를 올려다보며 해맑게 웃었다. 시선이 느껴졌지만 얼굴이 확 붉어질 것 같아 마주 내려다보지는 않았다.

“물론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닌 줄 압니다.”

“그럴 리가요. 제가 인정한 사람의 가치가 극상에 달하지 못하는 일은 없어요. 그런데…, 오늘이 며칠인가요?”

“열의 달 5일입니다.”

“이런 날에 살가드 씨는 무엇을 하시나요?”

“이런 날이라… 7일에 지하의 재조사가 있습니다. 라킨은 전의 보고를 덧씌워 대충 넘어가도 되는 것을 굳이 사서 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 했지만, 아무런 경각심도 없는 노인의 말을 따를 수는 없죠. 그러니 그 전에 다시 한 번 해당 구역의 유물 현황을 점검해 봐야겠네요.”

“그게 전부인가요?”

캐묻는 듯한 어투에 살가드는 무언가 놓친 것이라도 있나 고개를 숙이고 곰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입에서 짧은 탄식이 나왔다.

“아.”

여자가 빙그레 웃었다.

“제 생일이군요.”

“후후후.”

아까부터 모든 것을 아는 듯 구는 여자에게 살가드의 의문스러운 눈빛이 꽂히는 것을,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넘겼다.

“여전하시네요.”

“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까?”

그럴 리가 없다. 이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를 보았다면 잊었을 리가 없고, 또 고대 판데모니움의 기록물과 유적 관련 자료만을 되풀이하여 읽는 살가드가 이런 여자를 따로 만날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얼굴은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있다. 스스로 왜 그렇게 얼빠지고 멍청한 기분이 드는지 한심스러워 이를 까드득 깨무는데, 여자는 걷던 발을 멈추고 빙글 옆으로 몸을 돌려 살가드를 올려다보았다.

“생일인 것도 스스로 모르고 계셨다니, 딱하기도 하시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혹시 따로 약속이 없나요? 달리 급하게 부를 사람이 없다면, 오늘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내시겠어요?”

심장이 발끝까지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여자는 아름답고, 친절하며,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마치 천사 같다. 마다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상하다.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눈 사람에게 이렇게 아무런 의심도 계산도 없이 호의를 표할 수 있는 걸까. 사실 그녀야 원래 그런 여자라고 쳐도, 사람을 재고 평가하는 평소와 달리 이 처음 보는 여자에게 아무런 거부감도 스스럼도 없는 자신이 무엇보다도 이상했다. 이 여자는 정말 어딘가 이상하다. 뺨이 붉어져 여자를 훑어보던 살가드의 시선이 그녀의 어깨에서 멈췄다.

확실히 이상했다. 이렇게 계속 함께 빗속을 걸어왔는데 옷이 전혀 젖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자신의 왼쪽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제복이 확실히 새까맣게 젖어 있었다. 여자의 머리칼을 보았다. 비에 젖거나 부푼 기색 한 점 없이 한 올 한 올이 천사처럼 찰랑이고 있었다. 살가드는 자신이 착각해버린 것이길 바라며 들고 있던 우산을 놓았다.

“이런.”

후두둑후두둑 빗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속에 여자의 짧은 한탄이 섞였다. 비가 방울방울 여자의 몸 위로 떨어지는 것이 천천히 보였다. 빗방울은 스미지도 적시지도 않았다. 그리고 길게 뻗은 사지 아래로 그대로 비가 통과해 떨어졌다. 수많은 총알처럼 몸을 관통하는 빗방울 속에 여자는 고개를 뒤로 넘기며 빙긋이 웃었다.

“역시 살가드로구나. 영특하고 판단이 빠르지.”

판데모니움의 사람이 유전적 형질에 따라 외형과 실제 나이의 관련성이 천차만별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여자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연륜은 흡사 사람을 아주 오래 다루어 온, 지배자의 목소리이다. 빗방울이 몸을 통과하는 광경도 소름끼치거니와 지금껏 판데모니움의 정세와 사람들을 관찰해온 살가드의 직관이 경계신호를 보냈다. 이 여자는, 보통내기가 아니다. 덜컥 겁이 났다. 소름이 팔을 타고 쫙 올라와 여자를 밀쳐냈다. 아니 밀쳐내려 했으나 손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여자는 자신의 배를 통과한 살가드의 팔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하지만 언제나 남에게 필요 이상으로 경계가 많아.”

그 미소를 보고 살가드는 흠칫 팔을 내렸다. 기묘하고 이상한 것은 저 여자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인데 어째서 자신이 죄를 지은 듯한 기분이 드는지 시시각각 혼란이 더해왔다. 어떻게든 시시비비를 가려야 한다는 판단으로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케이오시움인가? 허가받지 않은 연구? 나에게 접근해서 어쩔 셈이지? 지금까지 얘기를 들었으면 알겠지만, 내게는 힘도 없고 이용할만한 능력도 없어.”

“그럴 리가. 그대는 짐이 가장 잘 알아.”

협박인가, 아니면 조롱인가 싶었지만 그 얼굴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애정과, 믿을 수 없지만 자애뿐이다. 당황하고 혼란스러워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여자의 얼굴께로 손을 가져다대었다. 역시나 만져지지 않는다.

“당신은.. 누구지?”

“잔상.”

눈의 곡선 없이 입 양끝만을 올린 웃음기 없는 미소였다.

“잔상, 혹은 홀로그램. 어쩌면 유령이라는 표현도 쓸 수 있겠군.”

홀로그램의 여자는 허리를 굽혀 살가드가 바닥에 떨어뜨린 우산을 주우려 했으나 손이 우산을 통과하여 헛손질만을 했다.

“짐이야 그렇다 치고 그대는 우산을 써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감기에 걸린단다, 살가드야. 이런. 주워지지 않는군.”

슬슬 억울하고 화가 났다. 오만한 말투로 살가드를 아끼고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는 태도도, 거기에 동조하여 휘둘리는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붉은 눈에 열기를 담고 여자를 노려보았다.

“유적 발굴 중에 따라붙은 케이오시움의 유령이라도 된다는 건가. 유령이라면 무시할 수도 있고 원인이 뭐가 됐든 찾아서 제거할 수도 있어. 그게 싫다면 나를 납득시켜봐.”

“케이오시움에 대해서 얼마나 아느냐? 지금의 그대라면- 별로 모르겠구나. 그러니 들어도 이해할 수 있겠느냐.”

발끈하여 입을 열지만 바로 말이 나오지 않는 살가드를 보고 여자는 쿡쿡 웃었다.

“그래도 조금은 이야기해주마. 짐은 영원의 광명 안에 있다 여겼거늘, 이 세계에 영속이란 없더구나. 하지만 모를 일이지. 지금 그대의 모습은 꼭 무의식중에 짐을 아는-”

잠시 말이 멎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지. 이 세상에 영속이란 없느니.”

그 말만은 되는 힘껏 부인하고 싶었으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케이오시움의 폭발을 아느냐. 다량의 케이오시움을 순식간에 방출시키면, 세계의 질서가 무너지는 혼돈의 상태가 된단다. 무한한 가역의 영역에 들어서는 것이지. 짐은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뇌가 깎이고 몸이 불타올라서 닳아 없어지는 고통이었어. 그래도 가까스로 원하는 것을 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잔해가 남았다. 몸은 남지 않았지만 그 남은 에너지로 불가능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

여자의 시선이 살가드가 가늠도 할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하게 먼 곳을 향했다.

“긴 시간이었다. 5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세계를 지켜온 후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에 무엇을 남겨야 할지 생각했다. 뇌리에 수많은 것들이 스쳐갔어. 그 세월 동안 나는 내게 소중한 존재들을 위하여 시간을 내주고 사상을 내주고 몸을 내주었다. 하지만, 그대에게는.”

이제 그 선명한 보랏빛의 시선은 바로 살가드를 향하고 있었다.

“늘 옆에 있어준 그대에게는 너무나도 해준 것이 없어. 그래서인지 결국 마지막에 머릿속에 남는 것은 그대이더구나.”

그 시선에 못이 박혔다.

“그대가 말했던 것이 생각이 났어. 이전에는 실로 힘든 시간이었다고. 무시당했고, 소외당했고, 혼자여서 유일한 돌파구로 보이는 일에 빠져 생일마저도 챙기지 못하기 일쑤였고, 나침반도 없이 길을 헤매던 그 때에 무언가 붙잡을 것이 있다면 좋았을 거라고.”

여자는 쓰게 웃었다.

“고작 이런 것이, 그대에게 위안이 될까. 그 반대일지도 모르지. 자기만족인지도 몰라. 자가당착에 빠져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래도 짐은-”

여자의 손이 살가드의 손을 향했다. 그러나 곧 그녀는 흠칫 놀라 손을 허공에 들어보았다. 빗방울이 그 손을 통과하는 것이 훤히 비쳐보였다.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었건만.”

여자는 대신 그대로 살가드의 뺨에 손을 올렸다.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것을 알기에 손은 뺨으로부터 공중에 조금 떠서 닿지 않았고 그만큼 조심스러웠다.

“미안하구나. 그리고 고맙고 또 미안해. 지금의 그대는 곧-.”

고개를 숙인 여자를 보자 다급한 마음이 들어 살가드는 다그치듯 말을 걸었다.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군. 그렇지만 지금-”

살가드의 입술이 떨렸다.

“지금 당신…”

비에 젖을 리가 없건만 여자의 입술이 곧 죽을 사람처럼 파리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손발과 흉부, 얼굴 곳곳이 흐렸다. 의미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살가드는 급히 우산을 주워들어 여자의 몸을 관통하는 빗방울을 막았다. 여자가 높고 맑은 목소리로 웃었다. 그러나 눈에는 웃음기 대신 다른 것이 있었다. 이건 마치-

“역시나 어리석은 수하로구나. 아무리 가능성의 힘이라도 남은 잔량으로 이 이상 질서를 어그러지게 할 수는 없어.”

이건 마치- 하늘로 올라갈 것 같잖아.

“뭐라고 하는 건지 여전히 모르겠어. 제대로 설명을 해 봐. 일단 그 몸부터 어떻게 좀 하고…”

여자가 왜 저런 표정인지, 그리고 살가드 자신은 어째서 처음 보는 이 때문에 이런 것인지, 모르지만 그저 머리가 꽉 막혔다. 손을 잡으려 해 보았다. 여자는 손을 마주 뻗었지만 살가드의 손이 닿는 곳마다 입자가 되어 산산이 부서졌다. 여자의 눈동자가 커졌다. 빗방울이 눈에 고였다. 그러고도 짐짓 차분한 목소리로 살가드를 어르려 했다.

“그렇게 재촉하지 말거라.”

이제 완전히 비칠 만큼 희미해진 입술이 가까스로 달싹이며 살가드의 귓가에 속삭였다. 차가운 빗방울 속에 있을 리 없는 숨이 낙인처럼 뜨겁게 닿았다.

“우린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테니.”

그 말을 끝으로 여자는 비에 녹아버리는 것처럼 사라지고,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까만 물웅덩이만이 남았다.

살가드는 그날 밤 공중도시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비 오는 날 판데모니움 하층의 더러운 물웅덩이가 몇 백 개나 되는지 세었다. 마치 하늘로 올라간 것처럼 여자의 다른 흔적은 없었다. 까닭도 모른 채 뇌를 쥐어짜는 것 같은 격통이 엄습했다. 남은 것은 귓가에 맺힌 그녀의 마지막 서약뿐이었다. 그러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시 만날 날까지 그 가늘게 떨리던 목소리를 믿고 기다릴밖에. 언제가 될지 모를 그 때에 그녀가 이 손을 제대로 잡고 나를 하늘로 끌어올려 주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