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마르] 폐기됨

엔지니어로서 직위를 부여받은 사람 중에 판데모니움을 사랑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말 안 듣고 칭얼대는 아이들에게 어미는 짓궂게 일렀다. 너 지상으로 보내버린다. 개중에는 지상을 동경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래로 아래로 고이는 구정물을 목도하고 돌아오면 대개는 정결하고 위생적인 고향의 정취에 젖어 말하고는 했다. 아, 지상은 정말 멋진 풍광이었지. 다시 있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엔지니어들 중에서도 금숟가락 물고 태어난 이른바 우월한 개체들이 테크노크라트였다. 남들이, 특히나 지상 인간들이 선민의식이라고 하는 것을 그들은 부러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하긴커녕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했다. 다르고말고. 말초적인 풍류를 좇는 이들과 과학기술의 발전이라는 유구한 사명에 온몸을 바친 우리는 다르고말고. 입에 문 금숟가락을 굳이 흙바닥에 떨구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 그렇게들 합리화를 했다.

당시 학술원에 재학중이던 이오시프라는 자는 그중에서도 그 사명의 순수함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자였다. 그 어리숙이는 매일 샛별이 채 사라지지 않은 새벽에 일어나 책을 폈다. 그리고 즉물적인 쾌락에 자꾸 한눈을 파는 동료들에게 엔지니어의 본분에 충실하라며 엄하게 야단을 쳤다. 멀리서 히죽히죽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동료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그의 말에 따랐다. 그자의 주변은 늘 그렇게 진지했다.

그러나 그 무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 여자가 나타나면 책에 몰두하던 떼거리의 공기가 일순 술렁였다. 햇볕 아래서 그녀가 머리를 대강 올려 묶으면 갸름한 상앗빛 목이 드러났다. 살짝 붉은 꽃 위에 시선을 둔 더 붉은 눈동자가 고왔다. 사내는 자신도 그녀에게 꽤나 시선을 둔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었다. 그녀가 부딪쳐 오기 전에는.

“미안, 실수예요.”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가볍게 말을 하며 여자는 눈모를 휘었다.

“이오시프. 맞죠? 나는 마르그리드. 우리 서로 많이 봤던 것 같은데 말 나누는 건 처음이네요.”

“서로 많이 봤었나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굳이 이야기를 나눌 일이 없었던 거죠.”

장난치듯이 한없이 가벼운 태도에 불쾌해진 사내는 굳게 고개를 돌렸고 여자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돌아갔다. 그리고 여자가 남긴 향기가 뒤늦게야 코에 훅 끼쳤다.

공부만 하는 샌님을 놀리기 위한 내기 같은 것이 분명하다 여겼다. 어쨌거나 그 말 한 마디, 그 찰나의 감촉이 꽤나 효과가 있었다. 이오시프는 마르그리드가 나타나면 절로 시선을 빼앗기다가 그녀가 눈을 마주치고 생긋 웃으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정말로 정신을 차리는 데에는 2주가 더 걸렸다.

마르그리드는 아주 빼어난 여자였다. 목소리가 크고 분위기를 주도하는 이오시프와 의견이 갈리는 일이 있으면 화제가 다 끝나고 나서야, 참 아까 무슨 일로 시끄러웠나 봐요? 난 못 들었어요. 내 의견은 이러하지만. 이런 식으로 모르는 체를 했다. 그렇게 새침하게 굴다가도 갑자기는 솔직하게 외로움을 털어놓으며 눈물지었다. 어리숙한 사내로서는 처음 보는 타입의 사람이었지만, 그런 그가 보기에도 퍽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남녀는 그리 계속 서로를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이윽고 시선이 마주쳐서 서로 웃어주고 말았다. 눈동자에 담긴 애정과 호기심을 더 이상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2주를 사귀었다. 그 중 어느 날인가 마르그리드가 말했었다.

“나는 지상에 가 보고 싶어. 알지? 요즘 유행인 거. 땅이 끝도 없이 탁 트여서 공기에서 나는 냄새부터가 판데모니움이랑은 다르다는데, 당신이랑 같이 마셔 봐도 좋을 텐데.”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마르그리드는 학술원에서 사라졌다. 자신의 전공인 지상의 소용돌이를 직접 눈으로 관측하기 위해 수색대에 지원한 것이다. 사내는 가슴이 휑하기보다도 그 짧은 2주간이 오히려 꿈같았다. 아주 아름다운, 이 세상에는 원래가 없었던 꿈. 꿈을 꾼 사람이 곧 제정신을 찾는 것처럼 이오시프도 무탈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학술원 졸업 후, 연구소에서였다.

백의에 슬리퍼를 끌고, 피곤에 찌들어 그늘이 어린 눈으로 마르그리드가 복도를 걸어왔다. 마르그리드가 걸어왔다. 마치 꿈의 단편이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현실이 되었다. 마르그리드는 아주 빼어난 연구원이었다. 아름답다고만 느꼈던 붉은 눈동자가 소용돌이의 변화를 관측할 때는 사뭇 진지했다. 관측해낸 지표로부터 예측 가능한 변화에 대하여 논하는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밤새 연구하느라 메마른 입술이 연구소의 정책에 숨을 끼쳤다. 그녀는 더 이상 꿈이 아니었지만 꿈보다 더 경이로웠다. 아직도 자신이 어리숙하다 느끼면서, 남자는 이 놀라운 여자를 사랑했다.

그리고 2주 후에 마르그리드가 말을 걸었다.

“왜 내가 지상에 가고 나서 연락하지 않았어?”

남자는 멍청하게도 꽤 시간이 지나서야 대꾸했다.

“당신이 다시 나랑 만날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자 마르그리드는 채근하듯이 눈을 올려다봤다. 못난 남자가 애정과 호기심을 채 감출 수 있었을 리가 없다. 계속 눈을 확인하던 여자가 마침내 고개를 내리고 한숨을 푸 쉬었다.

“이오시프, 내가 당신과 함께 지상에 가고 싶다고 했었지?”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이었어. 당신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어. 나 사실은 전부터 당신을 보고 있었거든요. 당신과 내 부모님이 전부터 잘 알던 사이라는 거, 알고 있었어요? 그분들이 나한테 당신 이야기를 자주 했었거든. 당신이 학술원의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진지한 사람이라는 것도 쭉 봐왔어요. 난 사실은, 지상 따위는 다시 내려가고 싶지 않아. 여기 청결한 판데모니움에 당신과 함께할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 안에서 누구보다도 안락하게, 아름답게 살고 싶어…”

이오시프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였다.

결혼 후에도 누구나의 이목을 끄는 화려한 여자였던 마르그리드는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고는 긴 머리를 잘랐다. 늘씬한 다리가 드러나는 치마 대신 길게 내려오는 바지를 입었다. 누구든 두려움 없이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대화를 주도하던 여자가 과분한 행복에 차 있다는 듯 고개를 내리고 수줍게 웃었다. 마르그리드는 아주 빼어난 어머니였다. 사람들과 얘기하기 좋아하고 짓궂게 농담하곤 하던 여자가 약속을 줄이고 집으로 빠르게 돌아가 아기 용품을 매만졌다. 그러면 그 놀라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짧게 자른 머리 아래 드러난 흰 목덜미 위로 입을 맞췄다. 그리고 마르그리드는 하얗게 웃으며 달처럼 둥글게 차올라 가는 배를 쓰다듬었다.

“고마워요, 이오시프. 나 여기서 아이와, 당신과, 나 셋이서 이렇게 계속 행복하게 살고 싶어. 나를 이렇게나 행복하게 해 줘서 고마워.”

그 사람이 시시각각 바뀌어 가는 모습은 언제나 경이로웠다. 마르그리드는 피고 지는 꽃이었다. 차고 기우는 달이었다. 가만히 있지 않고 흐르고 넘치는 물이었다. 여자는 변화했고 남자는 경애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랬다.

여자가 흘러서 연구원, 연구원이 고여서 어머니, 어머니가 넘쳐서 배신자가 되었지만

나는   마르그리드를   사랑했다

이 기록은 곧 폐기될 것이다.

브라우닝 오른쪽 합작 – 브라우x브라우닝

숨소리마저도 시끄럽게 느껴지는 적막한 밀실 안에서, 그는 화병 밑에 가려져 있던 굳은 자국을 발견했다. 이야말로 범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이 분명했다. 침을 꿀꺽 삼키고 그 위로 손을 올리는 찰나, 녹슨 경첩이 맞물려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문이 열렸다.

“발견해 버리셨군요.”

황급히 뒤를 돌아보는 그에게 비죽 웃고 있는 얼굴은 바로-

 

브라우닝은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의자에서 떨어졌다. 잘못 꺾인 듯 따끔따끔 아픈 허리를 짚자 절로 아이고 소리가 났다. 눈물이 핑 돌았다. 몸의 고통보다도, 정신적인 충격이 더 컸다. 그간의 전개를 떠올리자 다시 한 번 아득한 기분이 들어서 읽던 추리소설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그것을 흰 장갑을 낀 손이 주워들었다.

“괜찮으세요, 브라우닝 씨?”

입을 열었지만 차마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허리를 짚은 채 눈물을 글썽이는 브라우닝에게 청년은 재차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역시 가엾은 엘비스가 진범이라는 데 대한 충격이 크신 거죠? 당신은 좋으신 분이니까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았어요. 쫓기는 저를 걱정하고 도와주셨잖아요.”

갑작스런 찬사에 얼굴을 들자 브라우는 고개를 홱 돌려 아까까지 브라우닝이 앉아 있던 원목 의자를 만지작거렸다. 풀잎 빛의 짧은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보이는 귀 끝이 조금 붉은 것 같기도 하고. 오토마타에게도 그런 기능이 있나? 착각이겠지, 생각을 하는 브라우닝의 쪽을 브라우가 다시 돌아보았다. 부끄러운 생각을 하던 머릿속을 들킨 듯한 기분에 괜스레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행히도 브라우는 평이한 어투로 사무적인 내용만을 말할 뿐이었다.

“이런, 의자에 금이 갔네요. 제가 일단 수리해 볼 테지만 당분간 여기 앉을 때는 조심하시는 게 좋겠어요.”

의자 위로 몸을 굽히는 브라우의 모습 위로 그를 처음 봤던 때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눈앞에서 검은 피를 앞섶에 흠뻑 젖은 채로 웅크리고 있던 모습, 일단 병원부터 가자고 해도 한사코 거절하던 모습. 그리고 곧 총을 맞아 바닥에 맥없이 쓰러져 있던 가는 팔과 가는 허리.

“잠깐, 내가 옮기…”

“네?”

가슴까지 번쩍 올린 의자를 보고 브라우닝은 그만 머쓱하게 팔을 내렸다.

“아니네, 아무 것도.”

상대는 오토마타다. 사람이 편의를 위하여 만들어 낸, 무한의 기동력을 가진 기계. 그런데 왜 자꾸 여러모로 착각하게 되는지, 아무래도 눈앞에서 힘없이 바닥에 흩어져 있던 그 가는 사지가 각인이 된 것이 분명했다.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그 모습이 바로 브라우닝 자신이 지금의 여정을 시작한 계기이며, 어콜라이트라는 집단과 함께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도 그들이 자신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오토마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그날 밤 꿈에서 브라우닝은 밀실 안에 있었다. 낡은 경첩이 끼익- 하고 마찰하면서 문이 열리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브라우닝은 이미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의 가슴께까지밖에 오지 않는 여리고 작은 청년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그려낸 것처럼 상냥한 웃음을 말끔한 얼굴에 띠고서. 만들어질 때부터 내장된 기능임에 틀림이 없는 그 미소가 아름다우면서도 어쩐지 슬퍼, 브라우닝은 그것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깨어나서는 곧 꿈에 대해 잊어버렸다.

 

스스로를 ‘어콜라이트’라 지칭하는 의문의 남자들, 아니 오토마타 몇 구와 사립탐정 브라우닝이 기거하는 오두막은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깊은 숲 속에 있었다. 남향으로 높이 낸 창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한낮의 햇빛은 델 듯이 뜨거웠다. 사람의 살결을 바짝바짝 말려 가는 태양빛 속에 브라우닝이 건조한 책장을 팔랑팔랑 넘겨 가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한참을 지속되던 소리는 이내 멎고, 낮게 잠긴 목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지루하군.”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청아한 음성이 뒤를 이었다.

“마도 로젠부르그 시리즈는 아직 다 안 읽지 않으셨나요, 브라우닝 씨?”

그리고 푹푹 내쉬는 한숨 소리.

“읽고 안 읽고의 문제가 아니네. 아무리 소설을 읽는 것이 내 취미라지만, 며칠 내리 책만 읽고 있기는 적적하지 않겠나.”

여전히 그려낸 것처럼 상냥하게 웃고 있는 브라우의 얼굴이 지금은 갑갑하고 불편했다.

“이보게. 나는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 같은 일상에 지쳐서 자네들을 따라 나섰다네. 그런데 아무리 추적이 있다지만 이렇게 집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책만 읽고 있어서야 전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겠어.”

이렇게 말을 하면 과연 저 웃음이 가실까. 속이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을 죄어 오는 두려움에 시선이 떨렸다. 그러나 상대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러면 저와 함께 티타임이라도 가지시겠어요?”

 

오두막은 깊은 숲 안에 있었기에, 따스한 봄볕 아래 간혹 새 지저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 왔다. 입술에 닿는 수온은 딱 기분 좋을 만큼 따스했고, 엄선된 차향은 향기로웠으며, 청년은 상냥하고 아름다운 완벽한 시종이었다. ‘어콜라이트’라는 호칭을 온몸으로 증명하려는 것처럼.

홀로 읽는 추리소설은 금세 물리고 말았지만, 둘이 함께 소설의 전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새로운 기쁨으로 브라우닝을 즐겁게 했다. 그는 다시 책이 읽고 싶었다. 다시금 이 생활이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궁금증도 생겼다.

“브라우. 자네는 지금의 생활이 마음에 드나?”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년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따끔거렸다.

“나는 아까 불평을 했네만, 자네는 자신의 이야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지 않아. 이렇게 내내 집안에서 지내는 것, 자네는 견딜 만한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브라우는 바로 대답이 없었다. 역시 괜한 질문을 한 게야. 이 소년은 오토마타다. 완전하게 만들어진 시종이야.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리가 없지.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브라우닝 씨, 저는…”

소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저는 걱정이 됩니다. 바깥에 나가서 정보를 알아보고 있는 루드도, 자금을 모아 오는 메렌도, 추적을 교란시키는 비레아도 걱정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각별합니다. 완전한 해방을 위해서 지금 믿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서로밖에 없어요. 그리고 또-”

남자를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피어났다.

“당신이 있지요. 당신은 우리의 사정을 가엾게 여겨 분노하고 거리낌 없이 도와주겠다고 한 최초의 사람이에요. 아무리 우리가 서로에게 각별하다고 해도 브라우닝 씨, 당신만큼 특별한 사람은 또 없어요. 그러니 당신의 시중을 들고 늘 곁에서 지키는 것이야말로 제게 있어 가장 큰 기쁨입니다. 불만이 있을 턱이 없지요.”

이러한 표정을 단순히 제조된 웃음이라 치부했던 브라우닝 자신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그리고… 드디어 제 이름을 불러주셨네요. 기뻐요, 브라우닝.”

소년이 수줍은 것인지, 그 말을 듣는 브라우닝 자신이 수줍은 것인지 잘 분간이 가질 않았다.

 

그날 밤도 어김없이 꿈을 꾸었다. 이전과 같은 밀실 속, 청년의 웃음이 숨이 멎을 만큼 해사했다. 웃으며 다가오는 브라우의 뒤에서 무언가가 번뜩였다.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청년은 브라우닝을 밀쳐 쓰러뜨리고는 그 위에 올라타 가슴에 칼을 찔러 넣었다. 가슴이 쓰림을 느끼며 눈을 뜬 브라우닝은 이제야 그간의 꿈들을 기억해냈다. 어제 들었던 의문도 함께 기억해냈다.

어째서 브라우는 그 모든 추리소설의 내용을 알고 있었을까? 심지어 브라우닝이 어느 부분을 읽고 있었는지도.

온갖 행동에서 이유를 찾는 것은 직업병이야. 안 좋은 습관이다. 그리 되뇌어도 그는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동안 둘만의 티타임은 계속되었다. 브라우닝에게 청년은 정말로 온 정성을 다했다. 달달한 디저트를 만들고, 의견을 묻고, 책 위에 부스러기가 떨어지지 않을 법한 간식으로 메뉴를 바꾸고, 미리 따뜻하게 데워둔 찻잔에 갓 볶은 찻잎을 우려내어 차를 마시는 브라우닝의 만족스러운 얼굴을 확인하고, 기쁘게 웃었다. 시간은 온갖 은은하고 싱그러운 차향과 뒤죽박죽이 되어 꿈결처럼 달콤하게 지나갔다. 그러나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어콜라이트들이 가져오는 정보를 취합하여 추적자들의 계획을 예상하고, 그에 맞설 대책을 세우고, 종내에는 이 세계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 그것이 브라우닝의 역할이며, 그 목적을 위해서 브라우가 보통의 인간인 브라우닝이 습격으로부터 안전하도록 그를 옆에서 지키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차향이라는 것이 은은한 줄만 알았더니 달게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들이 태반인 것 같았다. 또렷하게 전략을 생각하는 것이 어째서 이리 힘든지, 무에 그리 탐정의 명민한 머리를 취하게 하는지. 멍하니 브라우가 따르는 잔을 받아들던 브라우닝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잔을 내려놓았다. 청년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전에 루드가 말했던 일 있잖은가. 갑자기 노파가 팔을 덥썩 잡았다던…”

하지만 브라우의 시선은 여전히 바닥에 놓인 찻잔에 꽂혀 있었고, 전에는 늘 비슷해보였던 얼굴이지만 그것이 풀죽은 얼굴임을 이제는 아는 터였다. 왜 여전히 그가 지켜주어야 할 여린 청년으로 느껴지는지 의문이 들었으나, 여하튼 브라우에게 사소한 심증으로 괜한 걱정을 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의심을 입 밖으론 내면 지금과 같은 평온한 티타임은 끝나게 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수명이 길고 노화가 드문 통기기구의 사람이 주름진 노파일 리가 없다. 합리적인 추리를 하는 것이 탐정 된 자의 도리다. 그리하여 브라우닝은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찻물과 함께 망상을 꿀꺽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억지로 삼킨 의심은 현실이 되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루드가 붉은 정장의 안쪽에 검은 피를 적시고 나타났을 때에도 브라우닝은 자신이 아직 꿈을 덜 깬 것인가 싶었다. 간혹 악몽처럼 한 청년의 피에 젖은 모습을 자꾸만 꿈에서 보고는 했기에. 그나마 추적을 따돌리는 데 성공해서 그들의 은신처인 이곳만은 들키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오랜만에 맛본 패배에 오두막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와중에도 브라우는 쟁반에 갓 구운 머핀과 윤이 나게 닦은 찻잔을 올려서 들고 온다. 하지만 브라우닝 스스로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미안하네, 브라우.”

브라우는 여전히 어서 받으라는 듯이 쟁반을 떠안고 있었지만, 브라우닝은 1인용 원목 의자에서 내려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자네는 내가 귀중하다고 말하면서 믿어주었지. 하지만 내가 주제에 탐정이라는 이름자를 달고서 이렇게나 어리석었어. 뻔히 보이는 단서를 당장의 평안에 눈이 멀어서 흘려보았지. 이렇게 자네의 호의를 받을 자격이 없다네.”

브라우는 쟁반을 탁 소리가 나게 세게 내려놓았다. 전에 없이 진지한 눈빛이었다. 그래, 마치 브라우닝에게 처음 케이스를 부탁했던, 브라우닝이 잊지 못해 케이스를 내버리지 못했던 그때와 같은 진지한 눈빛.

“그런 소리 말아요, 브라우닝. 우리에게는 지금 같은 생활을 누리는 것도 굉장한 기적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은인이에요. 처음 노움이 기적을 행해서 우리가 자아를 얻게 되었을 때, 우리가 기뻐했을 것 같나요? 아닙니다. 자신의 선택권도 존엄성도 없이 사람들의 발길질에 채이면서, 우리는 서커스의 웃음거리 주제에 자아를 얻게 된 운명을 매일같이 저주했어요. 특히 저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더. 그래서 우리는 그 괴로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고 당장 할 수 있는 것에 취미를 들인 거예요.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카드 마술을 하는 메렌은 도박을, 야수조련사인 루드는 야수 우리 옆에 피어난 꽃의 감상을, 단장과 사람들에게 원하든 원치 않든 차를 대접해야 하는 저는 홍차를. 그러니 스스로 원해서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지금이 얼마나 소중하고, 함께 해 주시는 당신이 어찌나 고마운지, 이걸 모르시겠나요?”

하지만 브라우닝에게 있어서 그 말은 위로와는 정반대의 소리로 닿았다. 그는 그만 맥이 풀려 의자에 앉은 자세가 비뚜름하게 무너져 내렸다. 허탈함에 웃음만 나왔다.

“하하하…”

“왜… 그러세요, 브라우닝 씨?”

“아니, 그러니까 자네 취미가 홍차였다는 거지. 그래서 같이 즐겨주는 내가 고마웠고.”

우물쭈물 어쩔 바를 모르는 브라우에게 브라우닝은 그저 웃어버렸다.

“아니, 자네는 잘못한 것 하나 없네. 그냥 내 자신이 한심해서 그래. 추리소설의 범인 하나 제대로 못 맞추고, 눈앞의 단서는 놓치면서 거기다 착각은 사서 하니 이거 탐정의 체면이 말이 아니구만.”

하지만 브라우는 여전히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러니까 자네는 잘못한 것 없대도-”

“착각이라고 생각하세요?”

아직 밀실의 꿈에서 덜 깬 것인가 싶었다.

“다시 말씀드려야 아시겠어요? 전 제가 원하는 사람에게 차를 따를 수 있어서 행복한 거예요.”

브라우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곧이 본다. 맑은 호박색의 눈동자 안에 바보같이 입을 헤 벌린 자신이 보이고, 오토마타든 그 무엇이든 상관없이 청년은 빼어나게 아름다웠고, 두근거리는 가슴에 말도 안 된다 생각하며 당황하여 몸을 뒤로 빼던 브라우닝은 그만-

우지끈 소리와 함께 의자가 부서졌다. 이번에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허리를 제대로 삐끗했는지 신음만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남자를 번쩍 안아 들고, 방으로 향하는 청년의 얼굴은 어쩐지 기뻐 보였다. 그리고 한 주 내내 뺨을 장밋빛으로 물들이며 청년은 침대에 누운 탐정의 시중을 들고, 그가 눈을 빛내며 쟁반에 한가득 담긴 차와 간식거리를 건넬 때마다 탐정은 두근거리는 가슴이 곤혹스러워 시선을 피하던 것은 꿈이 아님에도 꿈결같던 시간의 이야기.

카운실 조각글 키워드: 조화(造花)

판데모니움의 최상층에 위치한 의회장 레드그레이브의 집무실은 좋게 말하자면 정결하고, 보편적인 감상을 이르자면 살풍경했다. 어느 날인가는 그녀의 수하가 집무실에서 보고를 마치고 떠나기 전에 멈칫 뜸을 들이며 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더니만 다음 날 아기자기한 꽃 몇 송이를 손에 들고 나타났다. 의아해하는 기계소녀에게 사서는, 레드그레이브님을 꼭 닮은 꽃이라 가져와 보았다며 후드를 푹 눌러 쓴 얼굴을 숙였다. 고맙다는 세 글자가 귀에 닿고 나서야 사서는 얼굴을 겨우 들고, 미소짓는 소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상기된 뺨으로 방 이곳저곳에 꽃을 장식해놓았다.

그가 떠나고 홀로 남은 소녀는 쇠로 된 손가락을 뻗어 꽃잎을 쓸어보았다. 보드랍지가 않고 까끌했다. 그가 가져온 것은 향기가 없는 조화였다. 레드그레이브는 문득 자신의 손마디를 쓸어보았다. 그 역시 부드러운 대신 거칠었다. 살아서 그녀에게 얼굴을 붉히는 사서와는 달리. 그 얼굴을 떠올리는 순간 꽃잎을 세게 쥐었지만 부서지지 않았다. 인간조차도 아닌 꼴로 이렇게 아득바득 움직이는 자신과 꼭 같았다. 그는 자꾸만 그녀를 비참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을 몰라야 할 것이다.

[콘블린] 내상

누가 언제부터 소녀를 마녀라고 불렀는지 그것은 모른다. 다만 아는 사실은 소녀가 불가해한 존재라는 것이다.

제 부모와 함께 셋이 소용돌이로 휘말려 들어갔는데 나온 것은 여자아이 하나였단다. 첫 번째 불가해는 그것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온 지역을 침식하기 시작한 소용돌이에서는 자꾸만 새로운 괴물들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대처법을 미처 알지 못하고 속수무책 당하는 사람들을 먹이로 삼았다. 따라서 미지는 공포와 혐오의 동의어가 되었다. 그리고 소녀를 아는 사람은 남지 않았다. 이제 소녀는 불가해고 타자이고 소용돌이에서 나온 괴물이다. 마녀라는 손가락질에 한사코 고개를 저어도 그 호칭은 사라지기는 커녕 낙인이 되어 소녀를 따라다녔다. 콘라드 역시 우연이 아니었다면 모두가 꺼리는 마녀와 연이 닿을 일은 없었다.

지상에는 소용돌이가 만연하여, 질병도 고통도 기아도 고아도 주체할 수 없이 넘쳐난다. 부모를 잃고 홀로 남은 콘라드 역시 소용돌이가 남기고 간 수많은 참상의 결과물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의지할 대상을 찾는 대신 스스로를 돌보아야 하는 아이는 숲 속에서 아무 풀뿌리나 닥치는 대로 캐어 먹다가 문득 바닥에 고꾸라졌다. 몸에는 열이 오르고 세상은 꺼멓다. 이대로 끝이 나도 좋다 생각하다가도 분해서 눈물이 난다. 그것을 소녀가 발견하였다. 혼란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아이들은 스스로를 돌보아야 하기에 남을 연민하고 돕는 법에 대해 대개 잊어버렸다. 콘라드는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달랐다. 어린 콘라드를 어르고 달래어 안고서 노래를 불렀다. 그것이 두 번째 불가해였다.

소녀를 만나기 전에 세상은 위협의 구렁텅이였다. 도처에 위기가 가득해서 머릿속에 남는 것은 생존뿐이다. 그러나 소녀를 따르기 시작하면서 소년은 처음으로 남을 믿는 법을 배웠다. 그 옆에 있으면 세상에 선의라는 것이 문득 문득 별처럼 반짝인다. 숲 속에서 약초를 다듬는 소녀를 따라 곁에 있으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햇빛의 눈부심이 보이고, 꽃의 향기로움이 느껴진다. 콘라드는 그것을 소녀에게 말하고 싶었으나, 어려서 부모를 잃은 아이는 배움도 책도 없어 수사를 알지 못했다. 그저 이대로 둘이 함께 모든 것이 괜찮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것을 부르는 방법을 콘라드는 몰랐다.

소녀와 어린 아이가 늘 함께 지냈던 것은 아니다. 둘은 가족도 아니고 그러자는 약속도 아니하였다. 콘라드는 저 홀로 다니면서 자꾸만 잘못된 것을 먹었다. 그러고 나면 챙겨먹지 못하여 허약한 아이는 복통에 시달리면서 언제나처럼 이블린을 찾아갔다. 콘라드는 이블린이 노래를 부르면 내상이 낫는다는 것을 알았다. 울며 보채면 이블린은 망설이다가도 머뭇머뭇 아이를 제 무릎 위에 앉혀 놓고 눈을 감았다.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냇물 흐르는 소리는 숲먼지 속에 조용히 반주로 내려앉고 있는 줄도 몰랐던 온갖 동물이 다가와 귀를 기울였다. 실은 그 황홀한 모습이 보고 싶은 깜찍한 속내도 있었다. 이블린이 노래를 부르기 전마다 망설이자 불안함에 따져 우는 콘라드에게 이블린은 약속을 했다. 너의 내상은 꼭 내가 고쳐 줄게.

아마 그때였던가, 콘라드는 깨달았다. 이블린은 마녀가 맞다. 더 이상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손가락질이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가만 보면 이블린이 이상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노래로는 내상을 치유하고 남들이 먹고 탈이 나는 풀뿌리로는 외상을 치유하는 약을 지었다. 소녀는 이능을 되는 한 숨기려 했지만 유일하게 저를 따르는 어린 아이의 칭얼거림 앞에서는 굳은 결심도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연이어 이적을 보이는 이블린에게 콘라드는 어떻게 그리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소녀는 더듬더듬 설명을 해 보았지만 아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계속 보여 달라며 있는 힘껏 따라 해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세 번째로, 소녀는 불가해였다. 그것이 왜 그리 속상한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도 그러한 능력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소녀 앞에 당당하게 서고 싶다고.

그리고 소망은 소망으로 끝났다. 사람들이 소녀의 이적을 목격한 까닭이다. 제 정체를 숨겼던 마녀에게 사람들은 겁에 질려 윽박지르고 돌을 던졌다. 아픔에 떠는 소녀가 고개를 젓고 소리를 지르면서 한 차례 불꽃이 일자 두려움과 분노는 불이 올라 거세질 따름이었다. 소용돌이로 인한 혼란 속에 사람들은 탓할 대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의혹의 눈길은 아이에게도 꽂혔다. 이능을 보여 달라 졸랐던 자신이 잘못했던 것일까 생각하며 떨면서 마녀사냥을 지켜보던 아이는, 저를 발견한 사람들의 눈길이 대번에 꽂히자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았다. 뒷걸음질 치는 아이에게 마녀가 소름끼치는 소리로 웃으며 손을 거칠게 잡아 질질 끌었다. 사람들은 마녀에게서 아이를 구하고자 난리가 났다. 마녀에게 발길질과 흙이 끼얹어졌다. 고아가 된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에 품에 안긴 아이는 다시는 마녀를 보지 못했다. 겁이 났던 탓이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저 마녀가 너를 이용한 것이라 하자 그렇게 믿었다.

아니, 아마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이다. 소녀가 어디로 갔는지 영영 알지 못하게 된 후에야 소년은 뼈저리게 후회했다. 자신이 비겁하여 소녀가 저를 지키려는 것을 뻔히 알 수 있으면서도 무의식과 본능이 시키는 대로 모른 체를 했다. 언젠가 힘을 얻고 소녀를 다시 본다면 그때는 결코 모른 체 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다시는 소녀를 볼 수 없으리라는 것도 마음 한 구석에서 알고 있었다. 소녀가 사라지고 소년은 다시 굶주렸다. 그때 교단에서 손을 내밀었다. 생존도 생존이지만, 당시 소년은 무엇보다도 힘을 갖고 싶었다.

그리고 교단에 들어가니 삶은 확연히 달라진다. 배고플 때 언제든 밤참을 먹을 수 있고, 깃을 채운 따뜻한 침대 위에서 아무 걱정 없이 늦잠을 자도 좋다. 야윈 몸 위로 헐렁한 수도복을 입은 아이를 사람들이 따뜻한 눈으로 보아 준다. 그 모든 것을 주는 교단에서는 신을 믿으라, 모든 것이 신의 은총이라 한다. 이제 소년에게 신은 곧 세상이며 축복이다. 뒤늦게 충족되는 배움에 대한 목마름과 함께 소년은 교리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무언가 잊고 온 것이 있던 것도 같지만 평안한 삶 속에서는 더 이상 그 마음에 걸릴 것이 없음이라. 아멘.

그러니 이제 몰라보게 자라난 청년이 ‘마녀’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그리고 교단에 구금된 소녀를 보았을 때 죄책감과 당혹감이 엉망진창으로 가슴을 질척질척 밟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누가 언제부터 소녀를 마녀라고 불렀는지 그것은 모른다. 다만 아는 사실은 소녀가 불가해한 존재라는 것이다. 어찌 자신은 이렇게 자라났는데 소녀는 수년 전에 헤어졌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인지, 어찌하여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서 그때의 감정을 가슴 속에 그대로 불러일으키는지. 아니, 그때와는 다르다. 마냥 안기고 싶었던 소녀는 이제 자신에 비하면 너무나도 가냘프다. 아이를 보고 어쩔 바 없는 듯 웃어주던 그때에 비하면 표정 역시 파리하다. 자신을 감금하는 역할의 청년에게는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소녀가 자신을 알아보는지, 알아보지 않는지 그것은 모른다. 또한 감히 쉽게 물어볼 수도 없다.

콘라드가 한창 교리를 공부하면서 성서에서 읽은 신의 이적 중에는 물 위를 걷는 것도 있었다. 마음속으로 셈을 수백 번도 더 하고 두방망이 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겨우 말을 걸면 소녀는 시선을 사뿐히 내리깔고 고개를 돌렸다. 기다란 속눈썹이 나비 날개처럼 떨렸다. 작은 발을 들어 뒤를 돌았다. 그리고 저벅 저벅 심장 위를 걸었다. 따라서 이제 콘라드는 그러한 마음을 어떻게 부르는지 안다. 홀로 세상을 헤매던 어린 콘라드에게 나타난 소녀는 신이었고, 그 마음은 신앙이었다. 그러나 그 호칭은 허락되지 않는다. 소녀는 이단이다. 그래서 콘라드는 소녀를 마녀라고 불렀다. 마녀 역시 콘라드를 교부라고 불렀다. 그래서 콘라드는 교부가 되었다.

아이는 자라나 청년이 되었고 지식도 수사도 마음도 자라났다. 성서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 느껴지지 않는 것이 마녀에게서 보인다. 설렘도 떨림도 그리고 희망도,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았다. 마녀는 저를 기억할까, 기억하지 못할까, 그때 마녀를 두고 달아난 자신을 용서할까, 용서하지 않을까, 모른다면 일러주면 저를 미워하고 원망할까. 마녀는 아직도 불가해이다. 추론이 갈릴 때마다 천국이었다가 지옥이었다가 까마득하게 점멸하는 세상에서 혼자 고뇌로 보내는 밤은 이윽고 심장을 쥐고 내장을 흔든다. 교부는 복부를 움켜쥐고 어린 날의 약속을 기억해내며 마녀가 구금된 방 창문 너머에 선다. 풀벌레 소리 속에 숨을 감추고 한참을 기다리면 기어이 잡음은 반주로 내려앉고 마녀는 노래를 읊조리기 시작한다. 다시 세상에 별이 반짝이기를. 그러나 곡조는 하염없이 서글플 따름이고 한 맺힌 가락에 간혹 섞이어 들어오는 다른 감정은 분노뿐이라, 추론은 부정의 축으로 빠르게 무너지고 세상은 막 지옥이 되려고 한다. 교부는 겁화를 막으려고 어린 날 행복했던 노랫소리를 떠올리려 애를 써 본다. 그러나 잔상은 실재를 넘지 못하고, 그에게 남는 것은 내상뿐이다.

Pussycat

고등학생 때 동아리에서 썼던 소설 도입부

 

A cat has nine lives.

I’m not sure whether it is a human myth or a tale handed down from mother cats to kittens. I know the latter guess seems impossible to you, but, well, I was an ordinary cat ― Of course a cat never think like this; How can a life be ordinary? Maybe I am personified a lot ― before I died for the first time.

Anyway, it was what he said to me. Sometimes humans say an authentic thing. And I liked him even though he was human.

An animal usually chooses a mate who can feed and protect its offsprings. Could he raise my offsprings? Of course not. He was a human and I was a cat. It is love? No; I don’t know what love is. It’s too humane concept. In fact, I fear it.

No, I’ll correct what I just said. He could raise my offsprings if he wanted. He actually used to feed me. I liked the smell of food that spreaded when he came to drop the bowl in front of me. I liked his chapped fingers that tasted salty when I licked. I liked his worn and discolored cotton clothes, warm, smiling brown eyes, and tangled dark hair that often tickled my downy fur. I wanted to speak beside him rather than look up under his chin. Language seemed to be the only sufficient way to sincerely express myself to him since he was a human. I longed to be human.

Do not assume that I did nothing but wish. I certainly tried. I remember the day so vividly since it was the last day of my life.

My black fur was thick and sleek, but on the day biting winds rose gooseflesh all over my fair inner skin. I was on a vacant ground abundant with man-made debris, a bit away from my real lair. Nothing sheltered me from freezing winds that usually tender limbs got numbed and paralyzed with cold. Nothing blocked me from a lump of sky radiant with yellowish orange, a lump of burning fire. Having waited for him longtime, I was not aware of cold. Soaked in the illusionary sensation, I decided to follow him to his home.

I looked ahead. At the end of the ground was a gate made of barbed wire entanglements. I felt my passing the gate as a fatal step of that life, but I knew of no reason at that time.

A tremendous chain of blackened branches, contrasting oddly with the sky of glowing orange, impended over my head. Dim yet radiant. I stalked along the road. It was the first time I used human road to find out something. Soon I faced a byway concealed in dense woods. I licked up the bark of a tree, checked the smell of his hands, and took the way. I continually moved on that way, but the black chain over my head was endless as I was confined in eternity. And one moment – I don’t remember, there was an instance that I passed out the forest and faced the human town. He was there.

He was holding a shopping bag and talking with a female human. A roadway divided me from him. His back was turned on me. I wanted to talk to him as she did. I ran on across the roadway. A sudden wind told me that a car was closing in. Hindrance. This kind of everyday threat hadn’t been fatal for me. I tried to jump as usual ― instantly the sight went black.

Something that had been sunk in unconsciousness chilled up my blood. Yes, that chill ― my legs, numbed with cold, could not bounce my body. Instead a enormous shock bounced me up.

CRASH

After the following shock I was not cold any more. The veriest warmth embraced my body.

The sky flushed crimson.

Eventually blacken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