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틀비] 불가사의2

트리비아 사이드. 이어지는 동인설정

1873년 : 아이트호벤 서커스, 박쥐 날개가 달린 어린아이를 등장시켜 큰 성공을 거둠

***

최초의 기억은 조롱과 폭력이었다. 서커스단의 천막은 어둡고 비좁아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였던가, 숨는 것이 쉬워졌다. 발치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열고 그 안에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살을 짓이기고 목을 누르고 낮은 목소리로 겁박하고 학대하고 낄낄거리는 사람들로부터 숨는 것도 쉬웠고, 곧 다시 나타나 그들의 머리를 낚아채 바닥에 끌어박고 구두굽으로 밟아버리는 것도 쉬움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이 소녀의 등에 달린 박쥐 날개를 툭툭 건드리며 낄낄거릴 때, 그리고 옷 너머 살을 쓰다듬을 때마다 소녀는 그것을 반복했고 곧 몇 명 남지 않았다. 시간도 세상도 멈춘 그림자의 공간에서 트리비아라고 불렸던 서커스의 소녀는 아주 오래도록 홀로 숨었다. 그녀가 다시 그림자 밖으로 완전히 나온 것은 모두가 자신을 잊었으리라고 확신했을 때였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달력의 앞글자가 바뀌었다. 사람들은 이제 파이프 대신 종이로 말아 만든 담배를 피고 전화를 통해 서로 소식을 전했다. 그 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세상 곳곳에 전구가 보급된 참이었다. 거리마다 색색의 불빛이 빛나고 사람들은 행복해보였다. 반짝거리는 거리에 홀로 선 까만 그림자의 소녀는 문득, 자신이 왜 숨어야 하는지 억울해졌다. 모두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어졌다.

트리비아는 무대에 서서 워킹을 했다. 사람을 만나고 화보를 찍었다. 사람들과 만남을 갖고 섹스를 했다. 연합의 건설에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세상 온갖 것을 마음대로 누리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 날은, 앳되고 눈에 신념이 굳으면서도 순수하게 웃는 안쓰러운 청년이 가지고 싶어졌다.

그에게 밀어를 속삭이고 키스를 하고 눈시울을 적시고 얼굴을 붉히고 목소리를 높이던 동안 아, 시간은 왜 그렇게도 빠르게 흘러가는지. 시간이 흘러도 그림자에 속한 여자는 늙지 않고 트리비아 카리나는 슬슬 다시 숨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정담을 나누고 몸을 맞대며 그녀는 몇 번씩 나이들어 주름진 루이스의 옆에서 영원토록 젊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생각은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된다. 숨는 것은 쉬울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세상은 그녀를 속박할 수 없다. 그림자 속에 모습을 숨겼다가 먼 시간이 흘러, 파란 머리의 루이스가 머리가 하얗게 새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때 즈음 먼 나라에서 새로운 이름 새로운 직업으로 지내면 그만이다.

생각의 끝에 그림자로 도망친 서커스의 소녀는 어둠을 세다가 결국 허황된 단꿈을 꾸고 만다. 나의 피난처에 그대가 있기를. 두 사람이 두 사람만의 공간에서 영원토록 행복하기를. 그래서 트리비아 카리나는 루이스에게 나타나 꿈결 같은 제안을 들려주고 밀어를 속삭이고 키스를 하고 눈시울을 적시고 얼굴을 붉히고 목소리를 높이고, 끝없이 연속하는 이 생에서 그녀는 이제 숨을 수가 없다. 왜 당신은 세상의 영웅이어서 나를 세상에 속박하는지.

[루이틀비] 불가사의1

왜 그녀가 다가왔는지 또각또각 소리가 나는 높은 힐을 신고 얼굴과 얼굴이 바로 마주치는 높이에서 눈꼬리를 살풋 접으며 웃음을 지었는지 이야기를 하다가 입술을 살짝 깨물어 핥았는지 숨이 닿을 듯 가까이서 이야기했는지 나는 아직 모른다. 그녀가 그 입을 열어 직접 말하기로는 사랑에 채인 내가 가여웠다고, 내가 이미 한 번 사랑의 허망함을 겪어 본 사람이기에 더 큰 부담 없이 다가올 수 있었다고. 나는 그렇다면 당신은 대체 몇 번의 허망함을 거친 것인지 묻지 못한다.

저녁 나직한 전등 아래서 당신은 피다 만 담배 불똥을 크리스탈 재떨이에 몇번 팅기며 눈끝을 내리깔다가 그대로 비벼 끄고는 한다.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부드러운 비단 스카프로 이물질을 닦아내 주고는 한다. 내가 가진 적도 바란 적도 없었던 삶의 파편들. 나는 그녀가 어떤 과거에서 비롯했는지 아직 모른다.

모델이었다는 것은 알지만 그 전에 무엇을 했는지 그 누구도 모른다. 그녀는 가족도 없고 친구도 적다. 당당히 사람을 대할 수 있는데도 사람을 피한다. 보통의 수줍은 처녀들이 낯을 가리는 것과는 다르다. 가끔 그녀는 나른한 오후의 창가에서 19세기의 이야기를 어제 일처럼 읊는다. 의아한 눈을 하면 당신은 눈꼬리를 내려 진득히 웃고 나는 차마 무엇을, 왜, 어째서, 같은 접두어를 입에 올리지 못한다. 당신은 대체 언제 무엇을, 그러면 당신은 왜 나를, 당신은 나를 정말로… 따위로 이어지는 질문들은 머릿속에서만 검게 맴돌고 당신은 불안해 보이는 나를 위로하듯 끌어안는다.

정사 후에도 그녀는 공허하다. 무엇 하나 걸쳐 가리지 않은 몸인데도 당신이 저 검은 창 너머를 바라보면서 무엇을 생각하는지 나는 모른다. 박쥐 같은 그림자가 당신의 곁에서 피어오르고 매끄러운 등허리가, 얇은 팔이, 당신의 실루엣이 사라지며 검은 그림자로 점점이 화한다. 나는 저 그림자가 두렵다. 두려워 몸이 싸늘히 식고 결정이 파르르 맺히는 소리가 난다. 그녀가 뒤를 돌아본다. 그녀는 밤처럼 까맣게 웃고 이내 그림자가 내 위로 드리워진다. 나는 눈을 감는다. 나는 이 그림자가 그녀를 삼켜버릴까봐, 아니, 나는 이 그림자를 사랑해서.

젊은 빌헬름 쿠르트의 슬픔

케스에 빌헬름 자살하는 단편 낼까 했는데 안ㄴ냈다 내가 그렇지 뭐

***

서른 살이 가까워졌다. 이럴 때 사람이 하는 생각은 보통 하나다. 나는 언제까지고 젊을 줄 알았는데. 빌헬름 쿠르트도 누구나와 같은 그 생각을 한다. 그리고 다시 생각한다.

정말로, 언제까지고 젊을 줄은 몰랐는데.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의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세월의 잣대는 인생이 아닌 전쟁이 된다. 이번 전장에서의 교착 상태는 칠 개월 째였다. 어서 이 전투가 끝나기를 바라며 그저 싸우고 전진하고 감내하다가 눈을 뜨고 보면 코 베인 듯이 해가 바뀌어 있었다.

빌헬름 쿠르트는 언젠가 야영을 하던 밤에 상관인 장군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스무 살이 채 되기 전에 입대했다고 한다. 장군의 희끗희끗한 머리와 굵게 주름진 이마를 바라보며 빌헬름 쿠르트는 스무 살의 그를 상상해 보려고 했지만 쉽게 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스무 살의 빌헬름 쿠르트를 생각해 본다. 이쪽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언제든 거울을 보면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자신이 있었다. 이제 마냥 어리다고 하기는 어려운 나이다. 그래도 빌헬름 쿠르트는 여전히 젊었다. 몸도, 마음도, 생각도.

스물여덟 번째 생일을 빌헬름 쿠르트는 귀환한 브론하이드 왕성에서 맞이했다. 전장에서는 생일이나 날짜마저도 잊고 지냈기에 새삼스러운 기분이었다. 그는 때맞추어 왕실에서 열린 연회에 불려나갔다. 빛나는 천과 휘장을 몸에 걸친 왕족들과 대신들은 대리석으로 바닥을 댄 연회장 안에서 그림처럼 웃었다.

그들은 긴 시간동안 사악한 제국의 마수에 맞선 빌헬름의 용맹함과 노고를 치하하며 향기로운 음료를 잔에 붓고 포도주에 재운 고기와 우유를 굳힌 디저트를 융숭히 대접했다. 녹색 주단으로 지은 드레스를 입은 부인이 소령은 군인답지 않게 얼굴도 잘생겼다며 환담을 한다. 어색했다. 빌헬름 쿠르트는 이 자리가 어색했다.

생이란 원래 이런 자잘한 화려함을 누리며 사는 것이었던가? 그는 사지에서 죽지 않는 자신의 몸을 던지는 대가로 남의 목숨을 구하며 살았다. 그러고도 구하지 못한 목숨들이 있었다. 새 소리를 좋아했던 카엘과, 이번 전투를 마지막으로 영영 귀향하려고 했던 세드릭. 그 외에 한 번에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수없이 많은 이름들.

이런 만찬을 부러워했을 그 많은 병사들의 이름을 떠올리려고 노력하며 빌헬름이 은제 나이프로 송아지 스테이크를 썰자 붉은 피가 접시 위에 배어나왔다. 마치 전장에 흩뿌린 빌헬름 자신의 피였다. 또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들의 피였다. 잘게 잘라 입안에 넣은 살점은 여지없이 달콤했고 빌헬름은 비참해졌다.

시간이 흘러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파티에서 빌헬름은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예전에 야영을 함께했던 그 장군이었다. 먼저 생일 축하한다는 인사와 감사하다는 인사가 한 차례 오갔다. 나름대로 오랫동안 사지를 함께했던 사이인지라 빌헬름의 안색이 피로한 것을 눈치챘는지 장군은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빌헬름 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장군님께서, 예전 야영 중 밤에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전쟁의 잔혹함도, 지금은 영문 모를 인생의 다른 일들도 나이를 충분히 먹으면 전부 익숙해질 거라고.”

“그래. 그랬네. 기억이 나.”

“그러면 제가 나이를 충분히 먹는 것은, 언제쯤입니까?”

그는 대답 대신에 내려놓았던 잔을 들어 포도주를 한 모금 홀짝였다. 다시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한숨을 한 번 내쉰 다음에야 장군은 빌헬름 쿠르트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글쎄, 쿠르트. 나도 귀경이 지금까지도 이렇게 젊을 줄은 몰랐다네. 실은 여태까지 살아남은 것도 나에게는 놀랍다네. 귀경은 지금도 이렇게 젊으니까 말이지.”

빌헬름 쿠르트는 장군이 비릿하게 웃으며 핏빛의 술을 들이키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는 정말로 죽어 볼 작정이었다.

그룬빌인가 뭔가 모르겠음

론즈브라우 외곽 해안가 출신의 젊은 빌헬름 쿠르트 청년이 브론하이드 성에서 환대받는 소령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저 참전하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군인치고는 드물게 마음씨가 여린 이 청년은 도륙과 학살에 앞장서는 데는 쉬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대신 아군의 방패막이가 되어야 하는 곳, 가장 위험한 곳에 몸을 던졌다. 실날같은 희망을 등에 이고 그는 오늘도 전선에 앞장서 뛰어든다. 이번에는, 죽을 수 있을까.

빌헬름 쿠르트가 쿠르트 소령이 되는 과정의 기억은 바닥에 흥건한 피와 꿈틀거리는 내장과 떨어져나간 살점으로 점철되어 있다. 빌헬름 쿠르트의 목을 쥐고 칼을 꽂아넣던 병사가 비명을 지른다. 찌른 것은 빌헬름 쿠르트의 복부인데 자신의 복부에서 살점이 떨어져나간다. 그 다음 병사가 내장을 주워담는 빌헬름 쿠르트를 보며 소리를 지른다. 더 많은 사람에게 이런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은 빌헬름 쿠르트는 소리지르는 병사의 입을 막고, 병사는 내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바닥에 무너져내린다. 전장에 흥건한 비명과 생명을 그러모아 그렇게 쿠르트 소령이 완성되었다.

“그러니까 저는, 전하께서도 목숨만 부지한다면 무사하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빌헬름 쿠르트는 왕국의 태자인 그룬왈드 론즈브라우의, 그룬왈드 론즈브라우였던, 몸뚱이의 팔이 잘린 절단면과 가면을 씌웠음에도 턱 부분이 비어 있는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신을 구해낸 것입니까? 아니면 당신에게 해서는 안될 짓을 한 것입니까?”

턱이 없는 생물은 말을 하지 못한다. 빛 없이 어두운 방에는 그르릉거리는 소리뿐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때 당신을 구해낸 것도,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죄송합니다. 그저 저는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만족이었다. 태자를 구해낸 것도, 지금 이렇게 와서 좋을 대로 말을 지껄이는 것도. 아마 답변은 들을 수 없으리라. 빌헬름 쿠르트는 무거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서 돌아섰다. 그때 등 뒤에서 탁탁, 하고 기이한 기계음이 났다. 어둠 속에 그룬왈드 론즈브라우에게 연결된 콘솔이 하얗게 빛을 냈다. 틱틱거리는 소리와 함께 몇 글자가 띄워졌다.

[그래서 그대는 죽지 못하는 것인가.]

빌헬름 쿠르트는 태자 본인의 상태를 물었다. 그런데 태자는 빌헬름 쿠르트에 대해 말했다. 순간 잘못 읽었나 싶었다.

[그대도 죽음을 갈망하는 게지. 걱정할 것 없다. 그대는 역시 틀림없는 나의 충신이다.]

왜인지도 모르고 눈물이 쏟아졌다.

[다음 궁정회의에, 나를 알현하라.]

그 다음 문장이 뜨는 시간은 찰나로 짧았으나 또한 영원처럼 길었다. 영원한 소망이 콘솔 위에 띄운 글자의 형태로 의태하여 나타났다.

[그대가 소망하는 죽음을 주지.]

빌헬름 쿠르트는 그룬왈드 론즈브라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그에게 충성을 바치고 사지에서 구해낸 데에는 틀림없이 그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말세레그

우리는 영겁을 노를 저었어. 황혼의 낮은 불빛, 아프도록 찬란했던 마지막 광선을 지나 암흑 속에 타닥대는 불씨까지 우리는 세계를 저어 건넜지. 당신이 꺼져가는 세상에서 잠에 들 때, 내가 태어나 노를 이어받고 끝 모를 항해를 지속했어.

항해를 하다가 나는 지쳤어, 이름 모를 선구자를 원망하다가 해져 땅이 되었지. 그 땅에 선구자인 당신도 잠들어있었어. 우리는 잠이 들어 땅에 썩고 다시 땅에서 피어나기를 거듭했어, 씨앗처럼, 곡물처럼.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깨어나 교차했을 때 우리의 노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노를 내버린 지 오래지만 당신의 앞에서 뱃사공의 시늉을 하고 당신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곧 알게 되겠지, 탄생에 우리는 평행히 서 있었으나 당신은 나의 심장에 날을 대겠지.

그러나 우리가 노를 당기고 세월을 거스르며 세기를 교차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수많은 자리를 지날 거야, 마치 모자가 되고 사제가 되고 친우가 되고 연인이 되고, 종내 적수가 되겠지. 조금은 즐거웁겠지. 우리가 자맥질하던 이 시대의 마지막 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