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나딘

이따금 그는 집 문을 열기 전 걸음을 멈춰 내용물의 상태에 대한 상상을 한다.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찾아 부르던 것처럼 숲이 그리워 영 먼 곳으로 떠나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은 빈 방일지도 모른다.

혹은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또 보초병 시절의 습관이라며 소파에 앉은 채로 선잠을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요리를 하고 있거나 마당에서 동물을 쫓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눈에 띄이면 곤란하겠지만 그러더라도 별 상관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런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리니어스는 현관문으로 향했다. 한쪽 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린다. 나딘은 문을 연 리니어스가 다리를 절며 소파까지 오는 양을 빤히 바라보았다.

“옷 더 사올까아.”

나딘이 자신에게는 영 맞지 않는 셔츠 한 뼘을 쥐어보았다.

“입고 있는 거 싫어?”

“아니.”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작은 것 같아서어.”

“그런가?”

물론 흉부 외에는 작은 부분이 없다. 나딘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리니어스는 이 가장자리를 뱅뱅 도는 가벼운 긴장감에 문득 신물이 났다.

“나딘은, 계속 여기 있을 거야? 나한테 바라는 거 뭐 따로 있어?”

적나라하다. 그간의 기나긴 긴장에 대해 무례할 정도로 직구였다. 그러나 여우같은 여자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었다.

“글쎄… 그렇게 묻는다면,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확인?”

“당신은 강한가?”

머리 위에 비죽이 솟은 귀가 쫑긋거렸다.

“나는 강한 자 아니면 흥미 없거든.”

“아니, 나는 나딘같은 전사는 못 된다고오. 이렇게 다리도 불편한걸.”

“그런 의미를 말하는 게 아냐. 이 세계에서의 힘이 내가 있던 곳과 다르다는 것 정도는 나도 이해해.”

나딘이 천천히 걸어왔다. 리니어스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우고, 손에 지팡이를 쥐여주었다. 구부정하던 사내의 등이 곧게 펴졌다.

“리니어스. 당신은 강한가?”

“나는 약하려고 한 적은 없어. 단 한 순간도.”

“그렇구나.”

나딘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곧 소파 위로 풀썩 주저앉았다.

“나도, 그랬었는데. 항상 강했었는데. 하지만 여기서 나는 강한 걸까?”

아까와는 다른 침묵이 찾아왔다. 리니어스는 머뭇거렸다. 위로를 해야 할까? 해도 될까? 손을 내밀어도 될까? 만져도 될까? 그러나 망설이는 사이 여자가 얼굴을 들었고 그는 흠칫 손을 거두었다.

“이제는 내가 물어야겠네. 당신은 뭘 원하고 나를 보호해 주고 있는 거야? 내가 찾아달라는 숲이 뭔 줄 알고?”

“그냥…”

생각보다 먼저 대답이 튀어나왔다.

“당신이 당신의 숲에서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나딘은 어이없다는 듯, 그러나 또한 일말의 애정을 품은 웃음을 지었고 리니어스는 이 순간 그녀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쫑긋거리는 귀를 슥슥 쓰다듬든, 대충 걸친 남자 셔츠 대신 예쁜 새 옷을 사 주든, 아예 숲을 만들어주든 이런 표정에든 뭐든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정확히는 가늠할 수가 없다. 익숙해진 다리가 오늘따라 유독 불편하게 느껴졌다. 마치 이 모두 다리 때문인 것처럼.

 

그 날 숲에서 여우와 나비가 함께 뛰노는 꿈을 꾸었다.

타이씨씨 조금

도무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비행정의 선체는 일정한 주기에 맞추어 끊임없이 부드럽게 진동했다. 떠밀리는 것처럼 타이렐은 창문 쪽으로 몸을 기울여 이마를 기댔다. 까마득한 고도에서 내려다보는 도시는 흡사 바람에 물결치는 먼지나 안개 덩어리 같았다. 타이렐은 검붉은 빛을 띤 이 파도의 정체를 알고 있다.

비행정이 속력을 줄이며 서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아득히 먼 아래에서 일렁이던 광경이 점점 뚜렷해진다. 물결의 정체는 피를 뒤집어쓴 사람의 군집이었다. 아니 사람이었던 존재들이었다. 이 도시는 이제 살아 움직이는 시체의 도시가 되었다. 바로 타이렐 자신이 구동시킨 프로그램이었다.

그가 해석한 코덱스. 그가 진전시킨 연구. 그가 구축한 프로그램. 그가 봉합한 단말. 그가 도전한 목표.

광장에 상륙한 타이렐은 결과의 재검토를 위해 침착하게 주위를 살피며 천천히 갈레온이 있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도중에 시체 몇 구를 베었다. 조각나거나 타다 남은 시체의 잔해가 죽지 않고 꿈틀거렸다. 살아 움직이는 시체의 수렁을 헤쳐 타이렐은 기어이 그가 정복한 죽음의 앞에 도착했다. 희열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그에게서 비롯해 이 도시를 뒤덮어버린 감정의 원류를 이제 타이렐은 안다. 질투.

인형에서 떠오르는 빛을 향해 타이렐이 중얼거렸다.

“결국 내가 이겼어.”

“당신이 나를요?”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빛은 여자였다. 안경을 끼고 온화한 미소를 짓는, 수 년 전에 사라져 보지 못한 여자였다. 밝은 밀짚색 머리칼이 태양 같다. 눈이 부셔 넋을 놓은 사이 그녀가 키득거렸다.

“그녀도 죽음의 권속이니까. 나는 당신의 인형으로 만들어져 죽음이 되었지. 그러니 당신은 이제 나를 이길 수 없어요.”

여자가 웃으며 밝은 청색 머리카락으로 변한다. 그리고 저를 향해 내민 타이렐의 손에 해골 모양의 지팡이를 휘두른다. 뱃가죽이 갈라지고 복부와 목구멍에 뜨거운 것이 들어차 세상을 꽉 막는다. 따신 피와 함께 생각과 상념이 요동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난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

기필코 이기려 했던 여자가 죽었을 때, 어떻게든 승리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가슴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시꺼먼 것을 뿌리뽑기 위해서 그는 달리고 달리고 달렸다. 미끄러지고 구르고 실패하고 좌절하다가 다시 기어서 정상에 올랐다. 마침내 죽음을 정복했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높은 희열로부터 고꾸라진 장소는 가장 낮은 밑바닥이었다. 그 자신의 죽음.

그런데, 왜 이런 곳에 있는지 그는 알 수가 없다. 부옇고 꿈결같다. 선명하고 몸에 스민다. 세계가 이상하다. 바람이 불었다. 언젠가 보았었으나 이제 다시는 보이지 않아야 할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죽 훑어 거쳐, 타이렐은 마주한다. 눈을 깜박인다. 그는 아직 숨을 들이쉴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번에도 꿈인가? 기만인가? 바람인가? 타이렐은 다시 한 번 손을 뻗는다. 이 감촉은 목소리는 꿈도 환상도 아니다. 당신은 분명

나의 시
나의 이름
내가 잊고 살았던 세상의 모든 언어

[그라레그] 봄날은 간다

그는 더는 거만하지도 질투하지도 않았다. 늘 걷어올렸던 소매 끝이 주름없이 단정히 여며진 것과 조용히 웃는 얼굴을 보며 그녀는 우리는 나이가 들었구나 느끼고 어린 날을 떠올리고 그때처럼 또 새롭게 사랑에 빠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이를 믿을 수 없이 젊기만 하건만 그녀는 미세한 차이를 어렵잖게 눈에 담았다; 가령 야무졌던 입매가 수십년의 웃음을 거쳐 허물어졌다. 그녀는 남자의 입가의 보조개 주름을 매만지는 습관이 생겼다. 정열은 쇠하고 잦아들었으나 흔들림은 줄었다. 그녀는 그를 만날 때마다 다음 계절을 상상했다.
그리고 다음 계절에 그를 만난 곳은 묘지였다.
여자는 이제 다음 계절보다 지난 계절을 생각한다. 그녀는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을 택한다. 생각속의 그는 계속 나이를 먹고 늙어가고 그녀는 머리끝까지 사랑에 잠긴다. 첨예하게 아름다운 세월이었다.

[그라레그] 고래

그녀의 본질이 다스리는 이라면 그의 본질은 빚어 만드는 이라서 유달리 손가락이 가늘고 길었다.
그녀와 그는 연애의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우리는 분명 좋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될 거야. 도시의 아이들과 섬의 아이들을 보면서, 노인과 통치기구 그리고 땅거미가 지는 지평선을 보면서 그네들은 그렇게 말했다. 세상 구석구석의 만물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웠다. 땅 아래 깊은 광맥부터 희귀한 풀까지 세상 모든 재료를 모아다 그가 만들고 그녀는 다스렸다.
온 세상을 대상으로 삼는 이는 천재라고도 불린다. 그의 손가락이 빚는 것에는 끝이 없었다. 장난스러운 조각가나 작곡가처럼 기계를 조립하고 유전자로 장난질을 쳤다. 하늘을 나는 고양이든, 털이 곱슬거리고 다리가 길게 뻗은 여우든, 그는 세포는 물론 기계로도 생명을 만들다 못해 전설과 신화까지 탐을 냈다.
한동안 그라이바흐의 작업실에 고래나 공룡의 뼈대가 걸렸다. 그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들어갈 수 있던 그녀도 감히 작업실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방을 가득 채운 화석은 비할 데 없이 거대했으나 금방 무너질 듯 위험해 보였다.
“이게 뭐야?”
“신화의 모델.”
여자 얼굴에 사자 다리를 가진 스핑크스 모양의 오토마타를 정비하며 그가 대답했다.
“생명윤리 건으로 경고를 받으니까 이제 기계로 신화를 쓰겠다는 거야?”
작업실에 들어가지 못한 여자가 문앞에 서서 팔짱을 끼고 알게 모르게 비꼬는 동안 남자는 가만히 웃기만 했다.
“한 때 자신의 세상을 정복했던 생명체들이야. 인간처럼.”
그는 손을 들어 고래의 심장이 있던 자리의 뼈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개발품이 반드시 인간의 형상을 해야 할 필요가 있나? 이 녀석들은 먼 옛날에는 우리처럼 세상의 지배자였어. 미래에는 또 다른 어떤 형태의 생명이 문화를 지배할지, 혹은 인간이 어떤 형태가 될지 어떻게 확신하겠어? 당장의 시야에 구애되어서는 안 되지, 특히 우리는 말이야.”
“그냥 내키는 대로 하고 싶다고 말해, 그라이바흐.”
“그래.”
발소리가 울렸다.
내키는 대로 하는 긴 손가락이 움직이고 심장이 가볍게 뛰었다. 얼굴 위 손길을 그대로 따라 눈길이 한 마디를, 두 마디를, 그리고 키스.

 

먼 세월이 흘러 세상과 문화가 바뀐 어느 날 레드그레이브는 낡은 책상 서랍에서 기계 손으로 사진 한 장을 꺼내다가 이것이 고래의 뼈대와 같다고 깨닫는다.
한때 세상을 완전히 지배했었던 생명체의 기억. 낡고 오래되어 드물게 전시된. 지금은 형태가 바뀌어 스러진 여자의 몸뚱어리와 미소와, 그리고 한때 그녀의 세계를 지배했었던 사랑과
나지막한 웃음소리 사소한 농담과 손가락 몇 마디에 부드럽게 잘 썩는 심장이 사라지고 남아 하얗게 바랜 뼈대.

이블린 합작 – 콘라드 x 이블린

1. 너는 그 수많은 아이들 중에 하나였지.

교단의 아이들은 모두 어딘가 비슷하다. 아이라고 믿을 수 없이 마냥 처진 눈매나 그 가운데서도 비현실적으로 반짝거리는 눈동자나 누구에게도 웃어보일 준비가 된 입매, 식사에 비해 과다한 활동량으로 나뭇가지처럼 가느다란 팔다리. 이블린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아이는 제 얼굴에 때가 앉은 것도 모르고 ‘신벌’을 돕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렇게 다른 아이들과 무엇 하나 다를 거 없는데도 이블린은 시선을 끌었다. 그 아이는 예뻤으니까.

불 속의 나무 장작 같은 눈동자나 올망졸망한 콧망울, 아이답잖게 깔끔하게 올라간 턱선과 도톰한 입술이나, 굳이 어느 한 구석만 따져 보지 않더라도 소녀는 그냥, 어쩐지 한 번씩 더 눈길을 가게 만드는 아이였다.

시간이 흐르고 아이가 좀 더 자라서 소녀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몸이 여물었을 때 이블린은 자연스럽게 교단에서 ‘내세우는’ 아이가 되었다. 사람을 모으고 여론을 호도해야 할 때 가장 앞장서서 들리는 아이의 고운 목소리. 이블린은 다른 아이들보다 더 자주 씻고 몸에 씨앗 기름을 바랐다. 그리고 때마다 확인을 받았다.

“이 정도면 괜찮나요, 교부님?”

“그래.”

그렇게 눈에 띄게 고운 채로 소녀는 노래를 부르고 연설을 배웠다. 곱게 치장한 이블린은 작전의 선두에 투입되었고 더 많이 노출되었고 더 자주 미끼가 되었다. 스스로 제안했던 계획이 잘 되어 가는데 어딘가 불안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콘라드는 고개를 천천히 젓는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그때부터 알았던 것처럼.

내 눈에 보물이 남의 눈에도 보물일까봐 불안했던 것처럼.

재앙 같은 소년이 교단에 나타나 머리가 길고 얼굴이 하얗고 목소리가 고운 여자아이를 찾은 일이나, 그게 이블린임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던 일이나, 그리고 그 많은 아이들 중에 하필 네가 신내림을 받고 까무룩 발작해버리는 이유라거나. 상황과 정황이 콘라드에게 외친다. 너는 이 아이를 감당할 수 없어. 그게 부모에게서 아이를 빼앗고 아이에게서 부모를 빼앗고 아이를 이용한 원죄의 대가야.

콘라드는 악몽에 시달리는지 끙끙거리는 이블린의 둥근 이마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왜 그 많은 아이들 중 네가 신내림을 받고 수많은 재앙과 악귀가 너를 노릴까? 너는 내 보물인데. 내가 빼앗고 내가 기르고 내가 알아봐 내가 윤을 냈어. 누구에게도 다시 빼앗기지 않아. 어떤 방법이라도 불사해서. 식은땀으로 이마에 달라붙은 아이의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팔에 약을 놓았다.

그 후로 이블린은 온전히 콘라드의 것이었다. 수십 년간 그랬다. 일상도 생각도 기억도 능력도 고민도 이야기도 자기 전에 작은 목소리로 하는 인사도 맥없는 웃음도 이제는 아무도 앗아갈 수 없어. 팔을 끌어안고서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불안을 털어놓는 소녀에게 자상하게 상담을 해준 후에 콘라드 선생님은 사람 좋게 미소지으며 밤 인사를 한다. 만 번째의 오늘도 좋은 꿈을 꾸렴.

 

 

2. 이블린은 자신의 몸이 아주 낡은 물건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내용물을 너무 많이 담아 한계가 넘은 것을 칭칭 동여매어 억지로 무너지지 않게 감싼 것. 조금만 무리하면 숨이 가쁘고 벅차 사지가 찢어질 것 같았다. 이블린은 매일 차가운 창문에 뺨을 가까이 대고 입김을 그렸다. 이런 모래성 같은 몸으로 밖에 나갈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꿈에서는 달랐다. 이블린은 맨발로 숲을 내달렸다. 신선한 새벽 공기를 들이마시다가 넘어지고, 그래도 아무 걱정 없이 웃고, 손을 내미는 콘라드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서로 웃다가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들었다. 꿈은 지나칠 정도로 생생했다. 마치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것처럼.

“이상하죠, 선생님. 자꾸 그런 꿈을 생생하게 꿔요. 저는 이 병실을 나간 적도 없는데.”

“그렇네. 정말 이상하구나.”

불안하고 이상해도 아무 걱정 없다는 듯 웃는 콘라드 선생님의 얼굴을 보면 안심이 되어서, 더 자꾸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었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아요. 꿈에서라도 나갈 수 있잖아. 그래도 이왕 이렇게 생생한 꿈을 꾼다면…….”

“꿈을 꾼다면?”

“다른 곳에도 가고 싶어요. 예를 들자면… 바다처럼, 평소에 보지 못하는 그런 곳이요.”

“그러면 그렇게 할까.”

“네?”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어 콘라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지만 약병을 내려다보는 콘라드의 얼굴에서 의중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면 그 꿈을 꾸면 되는 게 아니겠니. 자, 오늘은 함께 꿈을 꿀 거야.”

콘라드가 입을 닫는 것과 동시에 어깨를 주사바늘이 찌르는 느낌이 났다. 세상이 아찔했다. 까무룩하고 소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이상한 꿈이었다. 이블린은 얇은 원피스 하나를 입고 모래밭을 밟았다. 챙 넓은 모자를 쓴 콘라드가 옆에 함께였다. 소녀와 남자는 손을 잡고 해변을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다가 지쳐서 바닥에 엎드려서 모래성을 쌓았다. 다 쌓고는 함께 체중을 실어 성을 밟았다. 놔두면 어차피 곧 파도에 무너질 성이라고 그렇게 밟았건만 모래성의 잔해를 보자 이상하게도 눈물이 났다. 그러자 콘라드가 팔을 잡고 속닥거렸다.

하나도 속상해할 거 없어. 이건 꿈이야. 모두 꿈이란다. 알겠지, 이블린.

알았어요, 콘라드.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병실이었다. 또 별안간 정신을 잃고 꿈을 꾼 모양이다.

정말로 콘라드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꿈을 꾸게 되었잖아. 역시 선생님은 정말 유능한 분이야. 그런데, 정말 꿈이었을까? 그래. 이건 꿈이라고 했었지. 꿈이 현실이던가, 아니면 이 현실이 꿈이던가? 아무래도 좋다고 이블린은 생각한다. 내일은 또 무슨 꿈을 꿀까.

오래도록 공들인 모래성 안에서, 모래 소녀는 그럭저럭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