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본질이 다스리는 이라면 그의 본질은 빚어 만드는 이라서 유달리 손가락이 가늘고 길었다.
그녀와 그는 연애의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우리는 분명 좋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될 거야. 도시의 아이들과 섬의 아이들을 보면서, 노인과 통치기구 그리고 땅거미가 지는 지평선을 보면서 그네들은 그렇게 말했다. 세상 구석구석의 만물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웠다. 땅 아래 깊은 광맥부터 희귀한 풀까지 세상 모든 재료를 모아다 그가 만들고 그녀는 다스렸다.
온 세상을 대상으로 삼는 이는 천재라고도 불린다. 그의 손가락이 빚는 것에는 끝이 없었다. 장난스러운 조각가나 작곡가처럼 기계를 조립하고 유전자로 장난질을 쳤다. 하늘을 나는 고양이든, 털이 곱슬거리고 다리가 길게 뻗은 여우든, 그는 세포는 물론 기계로도 생명을 만들다 못해 전설과 신화까지 탐을 냈다.
한동안 그라이바흐의 작업실에 고래나 공룡의 뼈대가 걸렸다. 그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들어갈 수 있던 그녀도 감히 작업실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방을 가득 채운 화석은 비할 데 없이 거대했으나 금방 무너질 듯 위험해 보였다.
“이게 뭐야?”
“신화의 모델.”
여자 얼굴에 사자 다리를 가진 스핑크스 모양의 오토마타를 정비하며 그가 대답했다.
“생명윤리 건으로 경고를 받으니까 이제 기계로 신화를 쓰겠다는 거야?”
작업실에 들어가지 못한 여자가 문앞에 서서 팔짱을 끼고 알게 모르게 비꼬는 동안 남자는 가만히 웃기만 했다.
“한 때 자신의 세상을 정복했던 생명체들이야. 인간처럼.”
그는 손을 들어 고래의 심장이 있던 자리의 뼈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개발품이 반드시 인간의 형상을 해야 할 필요가 있나? 이 녀석들은 먼 옛날에는 우리처럼 세상의 지배자였어. 미래에는 또 다른 어떤 형태의 생명이 문화를 지배할지, 혹은 인간이 어떤 형태가 될지 어떻게 확신하겠어? 당장의 시야에 구애되어서는 안 되지, 특히 우리는 말이야.”
“그냥 내키는 대로 하고 싶다고 말해, 그라이바흐.”
“그래.”
발소리가 울렸다.
내키는 대로 하는 긴 손가락이 움직이고 심장이 가볍게 뛰었다. 얼굴 위 손길을 그대로 따라 눈길이 한 마디를, 두 마디를, 그리고 키스.
먼 세월이 흘러 세상과 문화가 바뀐 어느 날 레드그레이브는 낡은 책상 서랍에서 기계 손으로 사진 한 장을 꺼내다가 이것이 고래의 뼈대와 같다고 깨닫는다.
한때 세상을 완전히 지배했었던 생명체의 기억. 낡고 오래되어 드물게 전시된. 지금은 형태가 바뀌어 스러진 여자의 몸뚱어리와 미소와, 그리고 한때 그녀의 세계를 지배했었던 사랑과
나지막한 웃음소리 사소한 농담과 손가락 몇 마디에 부드럽게 잘 썩는 심장이 사라지고 남아 하얗게 바랜 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