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비타크로

푸른 가희가 오르디스의 카이엔 저택에 오래도록 머무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오페라하우스에서 여자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던 사람들이 거리 골목에서 여자의 아름다움에 대해 킬킬거리며 입방아를 찧었다. 아무도 소문을 막을 생각이 없었기에 빈정 섞인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권력을 과시하고 싶은 카이엔에게는 손해될 것이 없는 소문이었고 비타 클로틸드는 실상 매음부가 아닌 귀빈이었기에 뭇 사람의 이야기 따위 상관하지 않았다. 가희가 저택에 머무르는 진짜 이유인 소년은 그나마 이 뜬소문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가희의 진짜 이름이 마녀임을 알았기에 감히 참견하려 들지는 않았다.

이제 겨우 열 여섯 먹은 소년은 소년이라기엔 지나치게 멀끔했다. 키가 위로 한참 웃자라서 겉보기에는 영락없는 성인 같았다. 몸 못지않게 마음도 웃자라 속알 없이 허탈하게 웃는 것이 마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절망과 공허와 분노와 집념에 홀딱 반해 마녀는 제 염원을 말했다. 너는 미래를 원하지 않지. 드디어 내 기사로 걸맞는 사람을 찾았어. 우리 둘 다 세계에서 잊혀지는 것에 분노하고 있거든. 힘을 줄 테니 나를 도와. 생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집념에 몸을 맡겨. 우린 썩 잘 어울릴 거야. 세계에 혼란을 가져다 줄 한 쌍으로서.

그러나 이렇게 분노로 시작한 관계일지라도 외롭지 않고 매몰차야만 하는 것도 아니어서 마녀는 금세 소년에게 정을 주었다. 밤마다 떠나온 고향의 꿈을 꾸며 잠 못 이루는 소년의 방에서 낮은 자장가를 읊조리고, 내일 하루만 더 머무르며 소년이 잠을 잘 자는지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하루는 이틀이 되고 이틀은 사흘이 되고 일주일이 지나 한 달이 되었다. 푸른 가희가 오르디스의 카이엔 저택에 오래도록 머무른다는 소문이 돌고 한 달째, 마침내 소년이 말했다. 언제까지 여기에 머무를 거야, 비타?

네가 잠을 푹 잘 수 있을 때까지.

영원히 있겠다는 소리야?

원한다면.

마녀가 웃었다. 진주처럼 속이 빈 소년에게 정을 준 마녀는 가희가 되어 다시 낮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매일 밤을 지새던 소년은 노래에 잠겨 거짓말처럼 깊은 잠에 들었다. 마녀는 소년이 좋은 꿈을 꾸길 바라며 계속 노래를 흥얼거린다.

이 노래는 당신을 위한 것. 환상은 나쁘지 않아요. 노래는 마약보다 달콤하고, 사랑도 마찬가지. 찰나의 환상이라도 좋아요. 우리는 이 순간 노래와 함께 달콤한 꿈에 잠겨, 찰나의 환상일지라도 상관없어요.

우닝r3읽고 황혼망상(그라레그)

여자는 작은 새처럼 목이 가늘었다. 눈이 서글하고 콧대가 곧고 어깻죽지가 하얬다. 이상(理想)의 형을 모아 놨더니 이상(異常)도 하여, 지나치게 고운 것이 사람 같지 않았다. 사람이 아니니 어쩌면 당연하건만 이 여인은 인형이라기보다도 오히려 신과 같지 않은가.

여자가 또렷한 눈으로 맑은 입술을 열어 의사를 밝히자 자리의 모두가 감탄했다. 과연 그라이바흐 님의 걸작이군요. 최후의 명작이에요. 이 작품은 보존할 가치가 있겠습니다, 레드그레이브님.

…레드그레이브님.

대답을 재촉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레드그레이브라 불린 여자는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본다. 문득 자신을 부르는 이름이 낯설었다. ‘레드그레이브’가 무엇이기에 대체 그들은 그러한 판단을 응당 ‘레드그레이브’에게 요구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의문에 잠긴 여자의 먼 눈동자.

레드그레이브를 레드그레이브로 만드는 것들. 시험관에서 배양되던 시절부터 주입된 세상의 지식들. 그녀에게 주어진 가장 고귀한 사명과 그 통치의 정당성에 대한 길고 긴 토론. 마침내 얻은 최고의 지위와 날카롭게 훈련된 직감.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공명정대한 판단.

그리고 가끔 만나는 연인에게 치곤 했던 말장난.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괜히 하는 투정. 조금만 더 통화를 하자는 느즈막한 주말 오후의 응석까지가 빠짐없이 레드그레이브라는 존재의 핵심이었다고. 그녀는 그것이야말로 ‘레드그레이브’라고 납득하고 다시 시선을 내렸다. 눈앞에 보이는 여자는 작은 새처럼 목이 가늘었다. ‘레드그레이브’는 새의 뒷목을 쥐고 어깻죽지를 찢어버리고자 한다.

나딘아인

조디악의 아이들 중 가장 귀한 분은 대모님, 그 아래에 귀천은 없지만 가장 긍지가 높은 이들이 무기를 다루어 숲에서 살과 가죽을 취하는 전사. 나딘은 활에 능하다. 어려서부터 시위를 당기고 숲을 뛰놀며 자랐다. 남들보다 뛰어난 것은 언제나 알고 있었다. 덕분에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도, 내세워 휘두를만한 힘을 가진 것도 알았다.

“그러니까 너도 활 정도는 좀 더 익혀 보는 게 어때. 영 재능이 없어서 나만큼은 안 되겠지만.”

“말씀은 고맙지만 나딘 씨, 저도 할 만큼은 연습하고 있어요. 스프라우트를 돌보는 것도 꽤 일이니까요, 이렇게 제가 도움이 되는 곳에 충실히 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흥, 그러고 있어서야 누가 알아준다고.”

보라색 머리의 여자아이는 줄곧 그런 모습이었다. 자기보다 더 작은 소녀를 돌보거나, 숲에서 채집한 줄기를 엮어 옷이나 자그마한 악세사리를 만들거나, 빨래를 하다 호숫가에 핀 풀꽃에 기뻐하고 전사들을 웃으며 맞이했다. 바보같은 녀석. 나딘은 숲에 예쁜 돌이나 꽃이 있으면 자주 소녀에게 가져다주었다. 저가 아니면 누가 저 맹탕하고 별 볼 일 없는 여자아이를 챙겨주려나 싶었던 것이다.

보잘것없는 여자아이와 보잘것없는 기억들. 마른 장작을 비벼 붙인 모닥불 앞의 담소와, 칼자국이 남은 사냥감 구이와, 재가 묻지 않도록 손끝에서 손끝으로 조심조심 건네주던 자그마한 악세사리 그리고 이런 걸 어디다 쓰냐는 핀잔에 대답 대신 돌아오는 하얀 웃음.

그런 하루가 언제까지고 계속될 줄 알았지.

어지럽다 못해 머리가 띵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왜 네가 선택받았지? 힘도 재능도 없는 네가? 아인은 언제나처럼 겸허히 웃고 있다.

“나딘 씨, 저는 제가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은 언제든 스스로 명확히 알았어요. 그리고 지금도 알고 있어요. 모자람이 많은 것은 알지만, 저는 분명 제게 주어진 사명이 감사하다고요.”

깨달은 때는 울다 지쳐 부연 새벽녘이었다. 너는 한결같이 그렇게 별 볼 일 없는 아이여야만 했는데. 겁많고 조금의 힘도 없는 한심한 아이. 그래서 내가 따라다니며 챙겨주어야만 하는 아이. 늘 내가 곁에서 바라보기 좋아해 마지않았던.

[벨져자넷] 호접의

원고를.. 안쓸것같아서… 부분부분 이은 거라 좀 두서없어요

 

* * *

 

벨져 홀든이 열여섯 살 늦은 여름에 머물렀던 그 집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장미가 만발한 화단이다.

여자아이는 온갖 달콤한 것에 둘러싸여 있었다. 열한 살짜리 소녀는 잘 가꾼 장미 화단 속 샛길을 통해 나타나서 훈련을 받던 세 형제에게 식사 시간을 알렸다. 손발이 조막만하고 뺨이 발그레한 인형 같은 아이였다. 정원에 온통 흐드러진 백장미와 허리까지 구불구불 말린 은발의 곱슬머리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하얀 목에 감긴 섬세한 레이스 리본이나 층층이 댄 치맛단 끝이 어떻게 한 번도 장미 가시에 걸려 찢어지지 않는지 소녀를 볼 때마다 벨져는 궁금해 했다.

열여섯 살의 벨져는 예민한 소년이었기에 어린 크리스티네가 나타날 때마다 멀지 않은 어딘가에 프리츠 가문의 무사가 소녀를 지키고 서있음을 어렵잖게 눈치챘다. 그 양을 볼 때마다 마음 구석에서부터 치미는 불편함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벨져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던 형 다이무스와 동생 이글은 크리스티네가 장미 화단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면 화색이 되어 그 모습을 반겼다. 워낙 인형처럼 어여쁜 아이이기도 했지만, 그 애를 가장 특별하게 만드는 건 엄격한 제레온 프리츠 경이 그 애만 나타나면 영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작은 딸아이를 끼고 도는 모습이었다. 남이 아끼는 보석이면 내 눈에도 귀해 보이는 법이라 다이무스는 짐작으로, 이글은 본능으로 이 소녀야말로 이 집에서 가장 꼭꼭 귀하게 감추어 둔 보물임을 알고 그리도 반색해 대접했을 것이다.

그리고 벨져는, 바로 그 이유로 크리스티네가 나타날 때마다 위화감을 견디기 힘들었다. 이 장미 화단 한가운데에 프리츠 가문 전체가 열과 성을 다해 향을 뿌리고 치장을 다한 거대한 조화 한 송이가 있는 것이다.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었다.

 

***

 

그 집에 가장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었던 날을 기억한다. 정문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이상하게도 무거웠다. 사람 소리가 많았던 정원은 이미 황폐했고, 담벼락을 손끝으로 쓸자 벽돌 조각이 바스러져 거미줄 위로 떨어졌다. 말하자면 이 집은 반역자의 집이며 미치광이의 집이었다. 가문의 위세는 땅에 떨어졌고 사용인들은 저택을 빠져나갔다. 하나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집에서, 앙상하게 가지와 가시만 남은 장미 덤불 사이로 전혀 변하지 않은 그 소녀가 나타났다. 열일곱의 크리스티네는 허리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긴 머리며 바닥에 끌리는 드레스 자락을 용케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고스란히 나타나 벨져에게 진실을 요구했다. 언쟁과 도발과 흐느낌과 가벼운 모욕이 있었다. 벨져는 손끝으로 늘 거슬려했던 드레스 자락이며 머리카락을 툭툭 쳤다. 명확한 상황은 기억나지 않는다. 늘 기억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건 바로 그 장면 자체이다.

“알려주지 않는 거야? 역시, 내가 여자라서? 그럼 이러면 되겠네.”

크리스티네가 허리춤에서 레이피어를 뽑았다. 왼손으로는 긴 머리채를 잡았다.

앙상한 덤불 위로 하얀 장미가 만발했다. 하얗게 빛나며 흩날렸다. 흐드러진 꽃잎 같기도 했고 나풀거리는 나비 떼 같기도 했다. 한층 가벼워진 목을 그녀가 똑바로 든다.

“이래도 안 돼?”

그는 처음으로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

 

벨져 홀든은 단 한순간도 완벽을 기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때도 모든 것이 벨져를 위하여 안배되어 있었다. 메트로폴리스에서 릭 톰슨을 만난 것도 수도원에서 때맞추어 이글과 사이퍼들이 나타난 것도 무엇 하나 요행은 없었다. 그가 기한 모든 신중도 그리하여 잘 짜 맞춘 완벽함도 그저 벨져라는 인물에게 당연할 뿐.

그러나 그라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기에 차질이 생겨버린다. 깎아지른 듯이 가파른 언덕 위, 석벽으로 된 수도원 앞에서 기어코 제 아가리를 벌리고 빠르게 돌아가는 커다란 문. 선도 악도 아름다움도 추함도 진실도 거짓도 뒤엉켜 돌아가는 문. 문이 그를 부르고 벨져는 꼭 지금처럼 문을 보았던 발람 수도원에서의 열아홉 살을 떠올린다. 어지러워 구토감이 일고 그는 그만 자리에 주저앉는다. 멀게 울리는 동료들의 부름 속에 문은 계속해 인식과 사고를 뒤흔들고 그는 문득 의문을 느낀다.

내가 찾는 진실은 무엇이었지? 나는 어째서 진실을 찾고 있었지?

온갖 생각이 소용돌이치다 벨져의 머릿속에 남은 것 하나는 열여섯 늦은 여름에 보았던 장미 화단이다. 하얀 장미가 만발한 화단. 나비 하나를 베기도 망설여졌던 그 어린 날의 늦은 여름.

환각의 꽃잎은 바람에 흩날려 화원 바닥에 내려앉더니만 하얀 머리카락으로 녹아난다. 문 안에서 현재도 과거도 진실도 거짓도 뒤엉켜 돌아간다. 동경과 질투와 연민과 애정이 동치가 된다. 아직 앳된 기가 남아있던 소녀의 목소리가 귀에 선하게 들린다.

‘알아. 당신은 나비 하나도 못 베는 그런 사람인걸.’

아니야. 그게 아니야. 고개를 젓자 다음 목소리가 귓가에 미끄러졌다.

‘역시, 내가 여자라서?’

 

***

 

완벽하지 않은 채로 돌아올 수는 없었으니 다시 만났을 때는 이미 두 해가 지난 후였다. 얼마나 긴 시간이라고 아껴 놓은 은구슬 같던 크리스티네 아가씨는 이미 흐려져 벨져를 맞이한 것은 회사의 능력자 자네트였다. 둥근 얼굴에 젖살이 쪽 빠지고 부드러운 살집이 잡히던 사지는 근육으로 단단해졌다. 곱슬거리는 잔머리는 깨끗하게 정리했으며 서글서글하던 파란 눈동자가 이제는 날카로웠다.

“오랜만이네, 벨져.”

“이거 몰라보겠군.”

머리를 짧게 자른 크리스티네, 아니 자네트는 그저 씩 웃어보였다.

“원래 내가 치렁치렁하게 치장한 걸 싫어했잖아? 지금 모습을 보면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별 소리를 다 하는군. 머리를 자를 때 내가 꽤 놀랐었는데 기억 안 나나?”

“그래, 그때… 지금이라면 말할 수도 있겠네.”

모든 몸짓이 단호하던 여자가 처음으로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 사실은… 뭐라고 할까. 싫었어.”

언뜻 장미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아버지도, 그리고 벨져도. 내가 여자라서… 편의를 봐 주는 게 아닐까 싶었으니까.”

벨져는 문득 눈앞의 여자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물론… 이제는 알아. 벨져는 수련 중이라도 나비 하나도 못 베는 그런 사람인걸. 굳이 내가 누구라거나, 어떻다든가, 그런 문제가 아닌 거야.”

“…….”

“벨져가 무얼 하고 있는지, 그동안 나도 회사에서 알아봤어. 이제는 이해해. 기사단의 일을 바깥에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것도… 나는 너무 어렸고, 벨져에게는 벨져의 길이, 나에게는 나의 길이 있는 거야. 설령 그게 같은 방향이더라도 말이지……. 몸 건강하고,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는 거지?”

“그래.”

“그럼 됐네.”

등 뒤에서 회의 시간이 되었다며 누군가 그녀의 코드명을 부른다. 누가 보기에도 썩 잘 어울리는 호칭이었다. 여자는 치장을 않았다고는 하나 화사한 얼굴과 몸에 밴 기품에 금욕적인 몸가짐이 도리어 도드라지게 화려했다. 장미라고 불린 여자는 응답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고 아직 채 말로 옮기지 못한 생각들은 벨져의 머릿속에만 맴돌았다.

네가 좋든 싫든 너는 결국 우리 모두의 장미였고, 우리는 네가 품은 가시까지 사랑했지.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야.

간단히 작별 인사를 나누고 회사의 문을 나서는 순간, 머리 위로 햇빛이 강렬하게 쏟아졌다. 눈이 부시고 부연 시야에 무언가가 아른거렸다.

벨져가 크리스티네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또 있었다. 루사노 수도원에서 다시 ‘문’을 접한 이후로 그는 환각을 보기 시작했다. 그는 아마 이 증세가 아홉 살배기 크리스티네 프리츠가 안타리우스에 납치된 이후 겪었었다는 환각과 비슷한 것이리라고 이해했다, 혹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우리는 너무도 닮았고 가는 방향마저 같으니 평행선처럼 교차하지 못하고 계속 각자의 길을 걸어갈 터이다. 그러나 그 끝에는 무한히 가까워질 것을 믿어.

쏟아지는 햇빛 사이로 하얀 나비가 나풀거렸다. 벨져는 허리춤에 맨 두 검으로 이 나비를 베어버리는 상상을 한다. 그러면 환각이 사라지지 않을까. 그는 하얗게 나풀거리며 쏟아지는 나비 떼를 바라본다. 입을 굳게 닫고 검을 뽑아들지만 번쩍이는 섬광의 궤적은 나비 사이만 스쳐지나간다. 나비는 꽃잎처럼 나풀거리며 바닥으로 쏟아지고, 다시 이어지는 환청에 벨져 홀든은 그만 웃어버렸다.

메리빌

꿈은 그만 꾸렴, 메리. 책도 적당히 읽고 공상도 정도껏 하고 엄마아빠의 일을 도우렴. 밭을 일구고 요리를 해. 착한 아이는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하는 거야. 그래야 신께서도 어여삐 보시지.

메리는, 어쩌면 그래서 자신이 신님께 벌을 받았을런지도 모른다 싶었다. 꿈에서 깨는 꿈을 꾸었다. 깨고 깨어도 일어날 수 없었다. 보아도 보아도 간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공기처럼 기포처럼 꿈을 부유하며 온갖 것을 보고만 다녔다. 하지만 꿈의 어떤 층에도 그가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된 이후로는.

엄마, 전 상을 받은 것만 같아요. 다시 만나다니 꿈만 같아!

그가 죽어야만 할 때마다 소녀의 손길이 스친다. 앙증맞은 금장 지팡이에서 몽환이 피어난다. 다친 곳을 지울 거야. 빌헬름이 죽게는 두지 않을 거야! 깃펜 끝에서 생명이 태어난다. 소녀는 꿈마다 부단히도 움직인다. 그리고 빌헬름은 내장을 안고 괴로워한다. 어째서 죽지 못하는 걸까. 도대체 왜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소녀가 닿지 않는 손을 뻗어 울면서 웃는다.

닿을 수 없는 당신은 그저 내 꿈일 뿐이거나, 아니면 내가 당신의 꿈이거나. 꿈속에서라도 당신이 죽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아. 신님, 부디 제가 계속 빌헬름을 볼 수 있게 해주세요. 계속계속 벌을 주세요.

그리하여 이 세계의 신은 영구히 자비롭고 소녀는 오늘도 단잠에 든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