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닝r3읽고 황혼망상(그라레그)

여자는 작은 새처럼 목이 가늘었다. 눈이 서글하고 콧대가 곧고 어깻죽지가 하얬다. 이상(理想)의 형을 모아 놨더니 이상(異常)도 하여, 지나치게 고운 것이 사람 같지 않았다. 사람이 아니니 어쩌면 당연하건만 이 여인은 인형이라기보다도 오히려 신과 같지 않은가.

여자가 또렷한 눈으로 맑은 입술을 열어 의사를 밝히자 자리의 모두가 감탄했다. 과연 그라이바흐 님의 걸작이군요. 최후의 명작이에요. 이 작품은 보존할 가치가 있겠습니다, 레드그레이브님.

…레드그레이브님.

대답을 재촉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레드그레이브라 불린 여자는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본다. 문득 자신을 부르는 이름이 낯설었다. ‘레드그레이브’가 무엇이기에 대체 그들은 그러한 판단을 응당 ‘레드그레이브’에게 요구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의문에 잠긴 여자의 먼 눈동자.

레드그레이브를 레드그레이브로 만드는 것들. 시험관에서 배양되던 시절부터 주입된 세상의 지식들. 그녀에게 주어진 가장 고귀한 사명과 그 통치의 정당성에 대한 길고 긴 토론. 마침내 얻은 최고의 지위와 날카롭게 훈련된 직감.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공명정대한 판단.

그리고 가끔 만나는 연인에게 치곤 했던 말장난.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괜히 하는 투정. 조금만 더 통화를 하자는 느즈막한 주말 오후의 응석까지가 빠짐없이 레드그레이브라는 존재의 핵심이었다고. 그녀는 그것이야말로 ‘레드그레이브’라고 납득하고 다시 시선을 내렸다. 눈앞에 보이는 여자는 작은 새처럼 목이 가늘었다. ‘레드그레이브’는 새의 뒷목을 쥐고 어깻죽지를 찢어버리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