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이트 콘블린 배포지

1.

좋아해요, 선생님.

이 병원이요. 새하얀 병실 안에 점처럼 찍힌 꽃 몇 송이. 코끝을 알싸하게 찌르는 약품 냄새. 창문 너머로 보이는 지붕 파란 숲. 창문을 열고 손을 뻗어보게 하는 새 소리. 그러면 나타나서 잔소리를 하는 미쉘. 어깨를 움츠리며 뒤돌아 보면, 웃으며 지켜보고 있는 선생님을요. 좋아해요.

그런데 선생님, 저는 언제부터 이 모든 걸 좋아했지요?

“옛날부터. 처음부터 그랬잖니, 이블린.”

“옛날은 언제예요? 처음은 언제고요? 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이블린은 아주 야윈 소녀였다. 헐렁한 병원복에 안색이 파리해 조금만 흥분해 목소리를 높이면 픽 쓰러질 것처럼 불안해 보였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주치의인 콘라드가 아주 오랫동안 이블린을 맡아 왔기에 그녀를 다루는데 도가 텄다는 점이었다. 뒤에서 간호사인 미쉘이 차트에 기록을 적으며 중얼거렸다.

“암시가 잠시 약해진 것 같군요. 당신이 처리해야겠는데.”

“나도 알아, 미쉘. 이만 나가 봐.”

콘라드가 안경을 벗어 내려놓는 동안 미쉘이 키득거렸다.

“새삼스럽게 아직도 부끄럼을 타나요?”

쾅, 하고 문 닫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콘라드는 이블린에게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소녀의 두 뺨을 잡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앞머리가 흐트러지며 드러난 소녀의 오른쪽 눈에서 안광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숲은 느닷없이 휘몰아치는 돌풍에 온통 흔들리고 있었다. 콘라드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걸 생각할 필요가 있니, 이블린?”

“네? 선생님, 하지만.. 저는…”

“이블린. 그래서 옛날부터, 처음부터 너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 이 병원, 병실, 숲과 꽃, 미쉘, 그리고 나를, 너는 좋아하지 않니?”

“…좋아해요.”

부러질 것처럼 가냘픈 소녀를 콘라드는 꼭 끌어안았다.

“그럼 됐잖니. 나도 너를 많이 좋아한단다.”

그는 말을 속삭이고 얼른 고개를 돌려 이블린의 눈치를 살폈다. 소녀의 눈동자는 눈물 고여 흔들리고 푸른 안광도 깜박거렸다. 콘라드는 재빨리 앙상한 팔에 주삿바늘을 꽂았다. 소녀는 그대로 발작처럼 경련하기 시작했다. 맥없이 흔들리는 이블린을 그는 품에 꽉 끌어안았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자, 경련이 잦아들고 소녀의 눈에 보이던 푸른 빛도 완전히 사그라졌다. 콘라드는 그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작고 가냘픈 소녀는 기어코 주치의의 품 안에서 실신해 잠이 들었다.

콘라드는 이블린을 안은 그대로 그녀가 옛적부터 보기 좋아하던 창밖을 바라보았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벌써 수만 번째 날이 그는 청년이고 그녀는 작은 소녀인 채로 저물고 있었다. 그는 깨지기 쉬운 날카로운 것을 품에 안고 있다고 느꼈으나, 놓고 싶지는 않았다.

저물어 가는 어둠 속에 영원히 어린 소녀를 안은 늙은 청년은 아까의 대화를 곱씹어 본다. 아주 먼 옛날부터, 처음부터 좋아했다고.

 

 

2.

이 지역에는 마녀에 대한 소문이 있어, 노인부터 아이까지 누구 하나 모르는 이가 없다. 마녀는 소녀의 모습이다. 나잇살 든 술집 주인이 어려서 소년이었을 때부터, 그 소년이 자라 아기를 낳아서 아기가 소년으로 자라난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소녀의 모습이다.

소녀의 뺨은 창백하고 시든 풀 같은 머리카락을 가는 팔 위에 드리우고 있다. 절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가냘픈 모습이라 온정을 베풀다가는 놀라기 십상이니 그러지 않는 것이 좋다. 마녀는 발작적으로 비명을 지르고 사시나무처럼 몸을 떤다. 그러면 바람이 요동치고 한여름에 눈발이 날려 짚으로 가볍게 얹어 둔 지붕이 내려앉는다. 마녀는 사탕과 꿀과 같은 달콤한 것을 좋아하니 그런 것을 주고 달래어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좋다.

“왜 그래야만 하는 거죠?”

마녀의 소문에 대해서 듣던 외지인이 딴죽을 걸자, 술집 주인은 별 희한한 사람 다 봤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얘기 못 들었소? 그러니까 그때 그 마녀 때문에 우리 집 지붕이 다 날아갔다니까. 아기는 울고 마누라는 구박하고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몰라.”

“그게 그… 마녀가 일부러 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무런 연고도 없는 소녀를 이 쌀쌀한 가을에 바깥에서 떠돌게 한단 말입니까?”

“이 사람이 얘기를 귓구멍이 아니라 똥구녕으로 들었나. 마녀라니까 마녀 글쎄. 지붕이 날아가면 다행이지, 또 어떤 일이 일어날 줄 알고?”

“거 참 듣자하니 기분 상하는군요. 마녀, 마녀. 왜 굳이 그렇게 부르는 겁니까? 당신들이 그렇게 낙인을 찍고 아예 밖으로 쫓아내 버리니까 그 애가-”

“내가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으니까.”

가냘픈 소녀의 목소리가 두 남자의 대화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체격이 큰 외지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블린!”

“누가 내 뒤를 캐고 다닌다고 들었는데, 설마 선… 콘라드 당신일줄은 몰랐네.”

이미 남자와 소녀는 술집 주인은 안중에도 없었고 크게 머쓱해진 그는 험험 헛기침을 하며 바 안쪽으로 들어갔다. 남자가 소녀의 가는 팔을 덥석 잡았다.

“돌아가자, 이블린.”

소녀는 큰 눈을 도록 위로 올려 남자의 얼굴을 마주 보다, 곧 다시 내리깔았다.

“싫어.”

“…계속 찾아다녔어. 지난 일은 잊자. 우리는 아직 네 힘이 필요해.”

“싫다고 했잖아! 이거 놔 줘.”

“너를 위해서이기도 해. 정착도 못 하고 밖에서 떠돌아다니다니, 대체 얼마나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 거야. 밖에서 자는 것도 힘들지 않니?”

“안 힘들어. 숲에는 모든 게 있어. 꽃도, 사과도, 꿀도… 비가 내릴 때 빼고는 문제없어.”

“그러면 나를 위해서는 안 되겠니?”

이블린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셔 새처럼 작은 가슴이 위로 잔뜩 올랐다. 그리고 있는 힘껏 콘라드의 팔을 뿌리쳤다.

“…다시 볼 일 없을 거야.”

소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얇은 네글리제 위로 훤히 드러난 어깨가 신경이 쓰인 콘라드가 자신의 외투를 내밀었으나 그것도 밀쳐버리고 밖으로 나왔다. 이블린은 퍽 종종거리며 숲 입구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흙바닥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왜… 이제 와서… 너무해.”

이블린이 몽마에게 홀리고 병원이 무너졌던 날 소녀의 세상도 무너졌다. 모든 것이 기억나고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숲 깊은 곳까지 도망을 나와 이블린은 풀숲을 맨발로 헤맸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열에 들떠 몇 번이고 그를 불렀다. 선생님, 선생님… 하는 소리가 숲에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이것은 벌써 오래전에 지난 일이고, 오래전에 체념해 포기했던 일이다.

“선생님은… 당신은 진작에 왔어야 했어. 내가 필요할 때. 필요할 때…”

흙바닥에 앉아 무릎을 감싸 안고 중얼거리던 이블린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차가운 것이 어깨에 닿았다. 손바닥을 펼치자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만 소녀의 눈에서도 눈물이 내렸다. 이건 너무했다. 비가 내려도 하필 지금일 필요는 없었다. 제풀에 겨워 이블린은 어린아이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이게 다 선생님 때문이야.”

그때 뒤에서 누군가 뛰어오는 발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숲에 이블린 자신 외의 누군가가 올 일이 없었다. 소녀는 순간 저도 모르게 깜찍한 상상을 한다.

그리고 그 잠깐 사이 머리 위로 그늘이 지고 비가 막혔다. 이블린은 돌아보지 않고도 머리 위에 있는 것이 누군가의 외투임을 알 수 있었다.

소녀는 스태프에 손가락을 세게 감아쥐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젖은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추워서는 아니었다.

 

 

그라레그살가

쇠와 톱니바퀴는 단백질과 뉴런보다 안전하게 기억했다. 기계로 몸을 바꾼 레드그레이브는 어느 종류의 사람 앞에서도 기억력으로 흠집을 잡혀보거나 자신감을 잃는 따위의 일을 겪은 적이 없다. 그녀는 언제나 모든 질문과 의문에 조리있게 대답하고 상대에게 쉽게 신뢰를 얻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잊혀진 이름을 가진 어느 남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살가드는 이따금 그 남자에 대해 물었다. 그, 라이, 바흐, 라고 세 음절로 이루어진 이름을 발음할 때 살가드는 통증 비슷한 것을 느꼈으나 그럼에도 질문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한 번도 만족할만한 대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질문에도 명료한 정답으로 반응하던 레드그레이브가 그 질문을 들을 때면 그저 웃었다. 어린 소녀처럼 웃었다. 미소는 통증이나 갈망처럼 사내에게 다가오고 그는 보챈다. 레드그레이브님, 레드그레이브님께서는 제가 궁금해하는 질문에는 언제고 응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럴 때면 한 늙은 소녀와 한 젊은 남자는 짧은 시간 동안 작은 방에서 아주 긴 시간과 아주 넓은 세계를 헤매이게 된다. 6백 년을 거슬러 레드그레이브는 어느 지나간 옛적 시대에 생존했던 남자의 머리카락 색이라던가 논문에 저술한 내용이나 개발했던 기술 같은 것들을 서술하지만 이야기는 맥이 없고 자꾸 주변을 빙빙 돌게 된다. 그녀가 정작 중요한 것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 둘이 함께 어떤 빛깔의 꽃이 핀 들판을 거닐었는지, 아침에 일어나서 남자의 얼굴이 보일 때 어째서 세상의 어느 것도 겁나지가 않았었는지, 그가 어떤 향이 나는 홍차를 그녀의 코앞에 드밀면서 웃었었는지. 그리고 이렇게 질문하는 너는 어떤 이유로 그럭저럭 잊혀져 가는 감정들을 나에게서 끌어내려 하는지.

카젠님 리퀘 부활자크아인

가끔은 이 세상에 없는 세상의 기억이 떠오른다. 별의 이름을 가진 곳이었다.

추억도 지식도 없고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끼리 모여서 모두 하나만은 동의했었다. 이곳은 어디도 아니야. 사막을 걷다 보면 곧 눈보라가 치고 설원을 걷다 보면 곧 늪에 빠졌다. 이런 세상은 어느 곳일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기억이 없는 건, 원래 우리의 세상이 아닌 곳에 있어서가 아닐까. 아마 우리는 원래 있던 세상에 돌아가면 기억을 되찾게 되는 거야. 아니, 기억을 되찾으면 원래 있던 세계에 돌아가게 되는 거야.

그렇다면, 그 말대로 기억을 찾아 현세에 돌아온 지금은 그곳의 기억이 나지 않아야 맞는 게 아닌가.

 

이렇게 별이 밝은 밤이면 아이자크는 자신이 그 세상의 단 하나도 잊지 않았음을 알았다. 몸이 딱딱한 인형이 있었다. 가끔 안아달라고 떼를 써서, 한숨을 쉬고 팔을 향하면 품안에 쏙 들어오던 작은 인형이 있었다. 인형뿐만이 아니었다. 판데모니움에서 왔다는 엔지니어부터 수백 년 전에 죽었다는 사람, 어디서 왔을지 모를 동물 귀 달린 사람들도 있었다. 여자애 중에는 좀 더 귀염성이 없는 아이도 있었다. 고양이 귀를 단 여자아이였다.

아이자크는 제 별명이 군견이라는 걸 잘 알았다. 인형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둘은 개와 고양이라서 안 좋은 거지. 여자애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단 한 곳도 없었다. 어린애 주제에 사명을 다하겠다고 따박따박 나서는 모양새나, 재주도 능력도 없으면서 싸우겠다고 몸을 던지는 것, 도무지 세상 풍파에 맞서 싸우지는 못할 것 같은 가느란 팔다리, 짧은 치마에 하얗게 드러낸 맨다리, 를 하고서 속알 없이 웃는 것. 아이자크는 자주 잔소리를 하고 아인은 맞서서 투닥거렸다. 마음이 쓰이지 않는 구석이 단 한 곳도 없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언제까지고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곤 했다. 모두 지나간 이야기다. 현세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자마자 아이자크는 망설임 없이 이곳에 돌아왔으므로.

고양이 여자애 역시 하도 사명 사명거리는 녀석이었으니 아마 기억을 찾자마자 그 좋다는 사명을 지키러 있을 곳에 돌아갔겠지. 애초에 각자의 길로 되돌아가기 위해 잠시 머문 곳이었다. 더는 미련 둘 것 없는데, 그런데 왜 자꾸.

 

별의 이름을 가진 곳이었다. 별과 함께 기억을 헤아리다 용병단의 막사로 돌아왔을 때, 보초를 서던 동료가 아이자크를 보고는 반색하며 다가왔다. 방문자가 있어. 누군데? 말하지 말라던데, 일단 보면 안다고. 무슨 소리야,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들였다는 건가? 도대체가 보안 의식이 있는 거야?

“저예요.”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번쩍 뒤를 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상대는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머리 위로 세모난 귀가 쫑긋거렸다.

“저, 기억하세요…?”

소녀는 변한 구석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심지 굳은 파란 눈. 허리를 덮어 내려오는 긴 보라색 머리카락, 용병단 한가운데에 막무가내로 들어오는 배짱 하며, 도무지 세상 풍파에 맞서 싸우지 못할 것 같이 가느란 팔다리, 짧은 치마에 하얗게 드러난 맨다리, 를 하고서 속알 없이 웃는 것. 아마 아이자크 자신도 크게 변하지는 못한 듯하다. 단 한 곳도 눈을 뗄 수 있는 구석이 없었다.

어쩐지 그날은 별이 유난히도 밝았더란다.

멜키글. 텟샤알투재밌긔

어느 날 메르키오르는 문득 제 손가락이 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펜을 자주 쥔 검지가 눈에 띄게 바깥쪽으로 휘어 있었다. 자세히 보려고 고개를 들었더니 갑작스레 어지러웠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연구에만 열중하고 있던 탓이다. 숨이 막혀 그는 잔기침을 했다. 손에 쥐고 있던 펜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 구석까지 굴러간 펜을 줍고 몸을 일으킨 메르키오르는 벽면에서 문득, 거울을 보았다.

변한 것은 손가락뿐만이 아니었다. 목에는 주름이 지고, 허리도 앞으로 굽었고, 눈가도 움푹 꺼져 생기를 잃었다. 머리카락은 푸석거리고 뺨은 탄력을 잃었다. 이렇게 변한 게 언제부터였지, 얼마나 지난 거지. 노화가 더딘 몸으로 만들어졌으니 이리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아주 길었을 것이다. 그런데 메르키오르에게는 그동안의 모든 일들이 아주 짧게 느껴졌다. 마치, 그래, 어느 한 밤의 꿈처럼.

좇고 있던 꿈은 딱 하나인데 이렇게나 긴 것을 보니 그가 꾸고 있는 것은 아주 큰 꿈이었던 모양이다. 무슨 꿈이었지? 이제는 가물거린다. 처음으로 꿈을 꾸기 시작했던 감정과 논리와 확신이 생각이 날 듯, 나지 않을 듯도 하다. 그러나 꿈의 잔상만은 남아 있다. 아주 아름답고, 델 듯이 선득하고, 잊을 수 없는, 가슴께에서 팔딱거리던 그 무언가.

그는 다시 기침을 한다. 뚜렷이 느껴질 만큼 쇠약해진 몸을 일으키며 메르키오르는 생각한다. 습관적으로 아픈 데 이유가 따로 있지는 않으리라. 꿈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덕에 이 세상은 그에게 죄 병실이었다.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황혼이었다. 쇠락한 연구자는 창밖을 내다보며 하늘에서 보랏빛의 잔상을 찾는다. 꿈이, 다시 올 때도 되었는데.

수위백합

#멘션_주신_단어_넣어서_트윗_단문_연성 스타킹 / 의미 / 평화주의자 / 라면 / 레드그레이브님의 팬티 / 질척질척 / 노랑
적당히 필터링해서 썼습니다. 여러가지 의미로 수위주의.

 

동화속 삽화에 나올 것 같은 여자였다. 나는 처음 봤을 땐 그녀가 어느 돈 많은 집의 고명한 따님이 틀림없다 믿었다. 하지만 이렇게 나와 같은 방에 더부살이하게 된 것을 보면 결코 그런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겠지. 그런데도 그녀에게서는 빛이 났다. 입매 가장자리는 늘 조금치 뺨 쪽으로 들려 있었고 꼬박꼬박 닦은 치아는 노랑 기도 없이 하얗게 고르다. 나는 그 멍청하게 예쁜 얼굴이 치 떨리게 싫었다.

“나쁜 아이들은 아닌 것 같은데. 네가 좀 더 마음을 열고 다가가 보는 게 어때?”

“내가 왜? 나는 언니 같은 평화주의자는 못 돼서.”

“에이, 그렇게 말해도 말야. 너는 착하잖아. 그렇지?”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나랑 같이 살아주지도 않을 거구 말이야. 우리 착한 동생. 나는 살갑게 웃으며 내게 뺨을 부비는 그 여자의 멍청함이 치 떨리게 싫었다. 내가 그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면, 착하다고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살이 닿는 그 감촉에 온갖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면.

그 날 그 여자는 내가 라면을 먹는 동안 스타킹을 허물처럼 벗고 있었다. 나는 구멍난 스타킹을 버리는 대신 매니큐어를 발라 때우는 그녀에게 건성건성 물었다. 새 스타킹 살 돈도 없으면서 답잖게 치마는 왜 입느냐고. 그리고 그녀는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아무 것도 몰라야 할 멍청한 여자가 감히 얼굴을 붉히고 주제에 꿈과 사랑을 논했다. 그래서였다.

죽던 순간에, 그 생각 없는 여자는 비로소 내 질척거리는 감정을 이해했을까? 드디어 나를 마음 깊이 증오하고 원망했을까? 내가 얼마나 그녀를 증오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얼마나,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그 감정의 깊이를.

갈 데 없는 눈물 몇 방울이 떨어졌다. 흐느끼다 보니 허기가 졌다. 아까 먹던 라면에 젓가락을 꽂고 몇 가닥을 입에 물었다. 차갑게 식어서 맛대가리가 없었다. 나는 젓가락을 내던지고 걸신들린 듯 그녀의 팬티를 벗겼지만 그녀 역시 차갑게 식어서 맛대가리가 없다. 이제는 모두 의미 없게 된 일들이다. 미소가 따뜻했던 방은 구석까지 싸늘하게 식었다.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